고인곁에 앉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감정을 소모하기 때문에 감정의 물꼬가 어떤 방향으로든 트여 끊임없이 흘러갈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통은 나름의 취미생활로, 또는 타인과의 소통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그 흐름을 차단당한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외부로 폭발할 수도 있고 돌연 미쳐버리거나 견딜수 없어 아무한테나 쏟아낼 수도 있다. 미망인이 된 에밀리에게 카톨릭단체 소속의 자매가 방문한다. 고인이 2층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위로하러 들른 두 자매에게 미망인은 의외의 TMI를 쏟아낸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토로하는 고통에 어떤 사람은 가식과 일반적인 잦대를 들이대고 또 어떤이는 애틋한 공감과 슬픔을 느낀다.
지금껏 이렇게 이상하게 변한 방문은, 자매의 예상과 이렇게 달랐던 방문은 없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캐슬린이 최종 의견을 내놓았다. 위층에 고인이 있어서 자신들이 들은 내용이 더욱더 듣기 끔찍했다고. 어두운 차 안에서 어꺠를 움츠리고 있던 노라는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입을 열진 않았지만,1.5킬로미터쯤 더 달린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가 고인 옆에 앉아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P.28
전통
이 작품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가 떠올랐다. 물론 그 영화처럼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있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이, 초반에는 스릴러로 그려지다가 후반에 정확한 자리를 잡는다. 윌리엄 트레버는 공포와 설렘이 닮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범인은 갑작스럽게 조명이 꺼지게 한 자가 아닐까? 어쨋든 전통은 그렇게 이어진다.
새들은 목이 부러졌고 그중 한 마리는 머리가 뜯겨 있었다. 흙 위에 누워 있는 새들의 깃털은 이미 축 늘어졌고 구슬 같던 눈은 흐릿해졌다. "잔인한 놈들"뉴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항의나 감정의 기미는 없었다. 올리비에는 그 소녀의 짓임을 알았다. P.29
그라일리스의 유산
한 남자가 거액의 유산 상속을 거절한다. 왜그랬을까? 멀쩡히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도서관에서 일할만큼 책을 사랑하는 그에게는 한 때, 책이 필요없던 아내와, 책이 필요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는 그 후에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일에 있어서는 자신이 바라는대로 선택했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놓친게 아닐까. 기만과 위선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녀에게 어떤 소설가를 추천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프루스트와 맬컴 라우리를, 포스터와 매덕스 포드를,개스켈 부인과 윌키 콜린스를 소개해 주었다.그는 그녀를 위해 '더블린 사람들'을 한 권 더 들여놓았는데, 기존에 있던 책은 비를 맞아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브라이턴 록'과 '밤은 부드러워'로 그녀의 관심을 이끌었다. P.116
'밀회'에는 12개의 단편이 담겨있다. 전반적인 묘사가 입체적이다. 때로 트레버의 단편은 여러 시.공간을 아우르며 복잡하게 연주된다. 대충 읽을수가 없었다. 온통 집중해야만 미세의 파동을 느낄 수 있는것과 같다. 뭐든 그렇긴 하지만 때에 따라,사람에 따라 와닿는 지점이 다를 것이다. 덧없는 것에 대한 우수를, 그럼에도 온건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무용 선생이 연주한 음악은 그때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연주한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 음악은 쏜살같이 달려나가다 부드러워졌고, 잔잔했고, 느렸다. 진홍색 벽지와 초상화 속 인물들의 시선 위에서 음악이 춤을 추었다. 음악은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 위에, 꽃병과 장식 품 위에 머물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과 , 브리지드가 스케나킬라 언덕을 넘을 때 옆에서 세차게 밀려들다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음악이 멈췄을 때 침묵은 전과 같지 않았다. 마치 음악이 침묵을 바꿔놓은 듯했다.P.262 '무용선생의 음악' 중에서
사실 올 여름쯤 도서관에서 <비온뒤>를 빌려 조금 읽다가 어떤 지점에서 지루했었는지 더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반납했었다.그 책도 단편모음이니까 좀 더 읽어봤으면 달랐을지 모르는데 당시엔 단편을 읽는 마음가짐이 덜 되었었나보다. 선수도 늘 홈런만 칠수는 없는 노릇이고 뭔가 그날따라 코드가 안맞은 걸수도 있는데 성급했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나서야 든다. 이 책에서도 두어편은 정말 지루해서 졸음이 쏟아졌었다. 그 외에는 다 훌륭했다. 다시 읽고 싶을 만큼! 제임스 설터에 이어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을 읽으니 점차 단편소설의 맛을 알아가는 기분이다.
아일랜드 소설가이자 소설가들의 소설가라는 윌리엄 트레버. 해설에 따르면 '2016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트레버의 아들은 아버지가 오전에는 집필을, 오후에는 정원 일을 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고, 웬만한 일로는 오래 화를 내지 않았으며, 말년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행한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P.288 그의 작품을 계속 읽어봐야겠다.
*Modus Vivendi 모두스 비벤디(라틴어):생활방식
*Chacun a son goût 샤캥 아 송 구 (불어):모두에게 저마다의 취향이 있다.
난티나무님 감사해요~^^*♡
앞으로 읽어볼 윌리엄 트레버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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