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방정식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6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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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자원개발 설명회 때문에 바닷가 마을 하리가우라로 가던 유가와 마나부는 방학을 맞아 고모가 운영하는 여관 로쿠간소로 가던 초등학생 교헤이와 소소한 인연을 맺습니다. 그 인연 덕분에 유가와는 로쿠간소에 묵게 됐지만, 다음날 아침 그곳에 투숙했던 쓰카하라라는 남자가 제방에서 추락한 사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경찰 수사에 휘말리고 맙니다. 애초 사고사로 보였지만 감식 결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추락한 게 밝혀졌고, 그가 전직 경시청 형사였다는 점 때문에 결국 하리 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됩니다. 한편 쓰카하라의 옛 부하이자 현직 경시청 관리관의 내밀한 지시를 받고 쓰카하라의 행적을 조사하던 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 있음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한여름의 방정식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를 선보입니다. 하나는 매번 마지못해 수사를 돕곤 했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보다 먼저 사건에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뒤틀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유가와와 구사나기가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각자 조사를 벌이며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비교적 소소한 규모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서사 자체를 굉장히 커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설정인데,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서 트릭과 진범을 찾아내는 반면, 구사나기는 도쿄에서 피살자의 행적을 추적하며 유가와와 정보를 주고받는 입체적인 구도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초반부만 해도 환경보호와 과학의 역할이라는 다분히 계몽적인 이과 미스터리처럼 보였지만,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고 본의 아니게 유가와가 사건에 휘말리면서 갈릴레오 시리즈특유의 정통 미스터리 서사가 발동됩니다. 피살된 전직 형사가 아무 연고도 없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온 이유도, 일산화탄소 중독과 사체 유기라는 복잡한 행위를 저지른 범인의 의도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본부가 난항을 거듭하는 사이 유가와와 구사나기는 원거리 협력수사를 통해 하나둘씩 단서를 모아갑니다. 그리고 단지 우연처럼 보였던 몇 가지 사실이 실은 과거 속 한 사건이 잉태시킨 필연임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단편집인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 ‘갈릴레오의 고뇌가 짧은 분량 안에 기발한 이과 미스터리를 담았다면, 장편인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 ‘한여름의 방정식은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어있는 안타깝고 애틋한 비극, 즉 독자로 하여금 절대 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간절함을 유발시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룹니다. 재미있는 건 진실 찾기의 주인공인 유가와 역시 똑같은 인간적 딜레마를 겪는다는 점입니다. 사건 당사자 혹은 경찰에게 자신이 찾아낸 진실과 진범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뒤에 벌어질 후폭풍과 더 큰 비극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여름의 방정식은 유가와의 딜레마가 가장 극명하게 묘사된 작품인데, 비록 겉으론 냉정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는 듯 보여도 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뜻밖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합니다. 유가와의 이런 모습에 관한 한 한여름의 방정식은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미스터리 명품으로 손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에 버금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워낙 복잡하게 설계돼서 내용에 관해선 별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초반부터 변곡점들이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그중 하나만 공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나름 조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꽤 중요한 변곡점이 노출돼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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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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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작가 우케쓰가 주택 평면도를 통해 그 집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은 이상한 집을 출간한 지 2. 그 사이 우케쓰는 전국에 산재하는 이상한 집에 관한 수많은 제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왠지 접점이 있어 보이는 11개의 집과 평면도를 추려냈고, 인터뷰를 통해 그곳에 얽힌 사연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자료를 갖고 찾아간 사람은 미스터리 마니아이자 건축설계사인 구리하라. ‘이상한 집때와 마찬가지로 구리하라는 11개의 자료를 검토한 뒤 충격적인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자료들이 서로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한 가지 접점이 떠오를 것이다. 꼭 추리하면서 읽어 보기 바란다.” (p7)

 

평면도를 통해 이상한 공간을 찾아내고,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리하여 끝내 끔찍한 진실을 파악해내는 기묘한 미스터리 이상한 집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번에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 앞에 던져진 평면도는 모두 11장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1938년부터 2023년에 걸쳐 있고, 장소 역시 여러 곳으로 분산돼있지만 작가의 오프닝 멘트대로 11개의 평면도는 한 가지 접점을 품고 있습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거나 관련 있더라도 느슨한 수준일 뿐인 11개의 평면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공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비극적으로 얽혀든 하나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작가는 주의 깊게 읽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실은 일부 자료들 사이의 접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만 11개의 자료를 하나로 엮는 결정적인 접점은 후반부에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부쯤 이 접점을 눈치 챌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감춰놓은 큰 그림의 전체 모습까지 파악하긴 쉽지 않습니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다른 복도, 상식적이지 않은 설계로 지어진 수많은 복제 주택, 움직이는 벽, 살인을 위해 설계된 집, 기이한 구조로 지어진 컬트 교단의 성지, 딱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진 방 등 이상한 집 2’에는 전편보다 더욱 난해하고 기괴한 공간들이 등장합니다. 그 공간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데, 단순 변사에서부터 살인, 방화, 자살 등 여러 형태의 죽음과 함께 가족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비극이 하나둘씩 공개됩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각각의 공간과 사연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다른 자료 속 공간과 사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번득이는 추리를 담아 설명합니다.

 

우케쓰가 오컬트 작가 특유의 감으로 조사를 벌여 사연들을 정리하고, 건축설계사 구리하라가 그 자료들과 평면도를 바탕으로 복잡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구도인데, 재미있는 건 이들의 진실 찾기가 초반에는 막연한 추측과 망상으로 시작되지만 이상한 집과 이상한 평면도에 연루된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는 형태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전편의 경우 초반의 추측과 망상이 다소 과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인데, ‘이상한 집 2’는 추측과 망상 모두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그럴 듯하게 읽혀서 이야기 시작과 함께 단번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구리하라가 홀로 폭주하듯 미스터리를 밝혀냈던 전편과 달리 이번엔 구리하라의 결론에 위화감을 느낀 우케쓰가 반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아서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1개의 평면도가 단서로 던져지고 거기에 얽힌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서 막판에 접점이 밝혀지는 대목을 읽을 땐 다소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좀 번거롭긴 해도 각 평면도의 특징과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두통도 예방할 수 있고 진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짜릿함도 훨씬 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자아낸 작가의 두뇌와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는데, 그래선지 과연 이상한 집 3’가 나올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면서도,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한번쯤 더 이 독특한 평면도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다는 욕심도 품게 됐습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이상한 그림도 무척 궁금해졌는데, 일단은 이 작품의 여운을 좀더 즐겨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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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게임
박소해 외 지음 / 북오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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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시소게임은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여성작가 네 명의 미스터리 앤솔로지 작품입니다. 검색해보니 이 네 명의 작가는 2022년 산후우울증에 대한 앤솔러지 소설집 네메시스 - 복수하는 여자들’(북오션)을 함께 펴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품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관심 작가도 있고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도 있는데, “신뢰가 무너졌을 때 결혼은 최고의 스릴러가 된다는 홍보카피처럼 부부를 주제로 한 장르물이라는 서사 자체가 눈길을 끌어서 나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박소해의 사마귀, 여자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를 둔 형사 차민우는 가정폭력사건 현장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자 송채윤에게 빠져든 뒤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차민우 주위에서 자살과 살인 등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김재희의 부부, 그 아름다운 세계

성형외과 의사 이수중과 아내 서현경은 이미 부부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된 사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상대에게 귀책사유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이리저리 궁리를 합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귀책사유는 바로 불륜의 덫이었습니다.

 

한수옥의 설계된 죽음

저수지에 빠진 차에서 아내가 사망하고, 신고자인 남편이 범인으로 의심받습니다. 조사결과 남편에겐 불륜 상대가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아내를 죽일 동기가 충분해보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형사의 촉은 남편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쪽으로 향합니다.

 

한새마의 시소게임

아내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낼 계획으로 국제결혼을 시도하는 남자. 한국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감행하는 베트남 여자. 이 둘의 시소게임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됩니다.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세 편이 중요한 소재로 삼을 정도로 불륜은 부부결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흉기입니다. 순간적인 격정 때문이든 배우자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의도적인 행위든 불륜은 증오와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살의까지 품게 만드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에서 불륜만큼 매력적인 모티브를 찾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 편씩이나 주요 소재로 삼은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론 영화 장미의 전쟁같은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풍자 비극이 한 편쯤 들어갔더라면 더 알찬 구성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한새마의 잔혹한 부부 스릴러 시소게임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초반 설정과 뜻밖의 반전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불륜이 등장하지 않은 작품이라 더 돋보였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그 기묘하고도 잔혹한 세계라는 띠지 카피는 보는 사람에 따라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민낯 그대로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미스터리 설정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또는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연출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역시 부부와 결혼은 연인과 사랑이 등장하는 달달한 로맨스와 달리 미스터리나 스릴러 등 장르물에 더 잘 어울리는, 말하자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관계라서 주제 자체만으로도 흡인력이 강했고 매 수록작마다 긴장감을 즐기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막연한 바람이지만 혹시 시소게임 2’가 기획된다면 남성작가들이 쓴 부부와 결혼에 관한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이기를 기대해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미묘할 수도, 확연할 수도 있는 차이를 만끽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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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데이즈
루스 웨어 지음, 서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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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타 크로스(이하 잭)와 남편 게이브는 기업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의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펜 테스터(Penetration-tester)입니다. 잭의 완벽한 현장침투 능력과 게이브의 고도의 사이버공격 능력 덕분에 두 사람이 이끄는 보안회사는 순항 중입니다. 그런데 한 기업의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게이브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되고 현장침투를 마치고 돌아온 잭이 그 참상을 목격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잭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경찰이 자신을 용의자로 여긴다는 점. 더구나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생명보험 계약이 체결됐다는 메일이 때마침 도착하자 잭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런던경찰청의 지명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잭은 목숨을 건 필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지만 설정이나 분위기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남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도망자가 된 아내의 8이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려 제로 데이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잭과 게이브에게 부여된 펜 테스터라는 독특한 직업 덕분에 독자는 두 가지 중요한 서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지털, 컴퓨터, 스마트폰, 보안, 해킹 등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가 펼쳐질 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현장침투 능력을 가진 잭이 결정적인 순간 액션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게이브가 살해당하고 잭이 도망자라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선택한 덕분에 독자는 초반부터 빠르고 긴박한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흥미진진한 테크노 액션 스릴러까지 예감이 되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잖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망자 스릴러의 고전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8일에 걸친 잭의 도망자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입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진범 찾기는 그야말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식의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잭에게 정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건 게이브의 평생 절친인 콜과 언니 헬레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 잭은 자신의 현장침투 능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진상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장까지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좀더 남은 작품입니다. 우선 큰 틀 자체가 너무 익숙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도망자+테크노+액션 스릴러의 조합은 거의 예상한대로 전개됐고, 반전과 진범의 정체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테크노 스릴러의 소재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했고, 그것이 게이브의 죽음을 초래하는 과정은 거의 공식에 가깝게 설정돼있습니다.

루스 웨어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고 여긴 더 큰 이유는 잭의 심리묘사에 할애된 지나친 분량 때문입니다. 특히 게이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길게 묘사하다 보니 중반쯤부턴 그런 대목이 나오면 눈대중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는데, 물론 그 애정이 위험천만한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잭의 가장 큰 동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요약하면... 새로움과 신선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망자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읽다가 잭의 심리묘사 대목에서 느슨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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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고뇌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5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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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이끄는 이과 미스터리 갈릴레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갈릴레오의 고뇌는 전작인 용의자 X의 헌신성녀의 구제와 달리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집입니다. 시리즈 1~2편인 탐정 갈릴레오예지몽의 형식으로 다시 돌아간 건데, 단편 특유의 맛과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장편을 기대했던 터라 처음 이 작품을 읽었던 무렵에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여자의 추락사가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놓고 벌이는 미스터리(떨어지다), 저택 별채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과 화재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조준하다),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은 유가와가 한 남자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밀실 트릭 미스터리(잠그다), 다우징(dowsing, 도구를 사용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는 일종의 점복占卜)을 할 줄 아는 소녀가 노파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는 이야기(가리키다),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유가와에게 복수하기 위해 희대의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이야기(교란하다) 등이 실려 있는데, 절반쯤이 유가와 특유의 이과 미스터리라면, 절반쯤은 천재 물리학자가 아니라 셜록 홈즈처럼 활약하는 정통 미스터리라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용의자 X의 헌신의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만든 조준하다인데, 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범행수법이 정교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의 진짜 동기는 유가와는 물론 독자의 눈가까지 뜨끈하게 만들어서 용의자 X의 헌신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울컥함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가와를 노린 한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교란하다는 미스터리 자체는 고만고만했지만 연쇄살인범의 타깃이 유가와라는 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갈릴레오의 고뇌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형사 우쓰미 가오루의 맹활약입니다. ‘성녀의 구제에서도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우쓰미는 이번 작품에선 선배이자 서열 2인 구사나기 슌페이를 따돌리고 유가와와 콤비에 가까운 비중과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라면 대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여자란 그런 동물이거든요.”, “그런 반지를 제 손으로 사는 여자는 없어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투척하면서도 정작 여자라고 해서 특별 취급받는 건 누구보다 싫어하는 우쓰미는 뛰어난 직감과 관찰력을 지녔으면서도 과도한 상상과 고집 때문에 늘 구사나기에게 꾸중을 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에선 수시로 구사나기를 코너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유가와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은 우쓰미가 이후 작품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침없이 폭주하는 그녀의 매력 때문에 이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에 대해 더 큰 기대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시리즈 3편인 용의자 X의 헌신이 최고의 평가를 받으며 정점을 찍은 탓에 그 앞뒤로 나온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건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갈릴레오의 고뇌역시 이과 미스터리의 미덕과 단편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긴 하지만,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기대에 살짝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럭비공처럼 통통 튀며 종횡무진 수사를 펼치는 우쓰미 가오루가 없었다면 아쉬움이 훨씬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후속작인 시리즈 6한여름의 방정식은 꽤 흥미롭게 읽은 장편인 듯한데, 부디 저의 그 희미한 기억에 오류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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