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게임
박소해 외 지음 / 북오션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시소게임은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여성작가 네 명의 미스터리 앤솔로지 작품입니다. 검색해보니 이 네 명의 작가는 2022년 산후우울증에 대한 앤솔러지 소설집 네메시스 - 복수하는 여자들’(북오션)을 함께 펴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품을 통해 만난 적이 있는 관심 작가도 있고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도 있는데, “신뢰가 무너졌을 때 결혼은 최고의 스릴러가 된다는 홍보카피처럼 부부를 주제로 한 장르물이라는 서사 자체가 눈길을 끌어서 나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박소해의 사마귀, 여자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를 둔 형사 차민우는 가정폭력사건 현장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자 송채윤에게 빠져든 뒤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차민우 주위에서 자살과 살인 등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김재희의 부부, 그 아름다운 세계

성형외과 의사 이수중과 아내 서현경은 이미 부부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된 사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상대에게 귀책사유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이리저리 궁리를 합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귀책사유는 바로 불륜의 덫이었습니다.

 

한수옥의 설계된 죽음

저수지에 빠진 차에서 아내가 사망하고, 신고자인 남편이 범인으로 의심받습니다. 조사결과 남편에겐 불륜 상대가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아내를 죽일 동기가 충분해보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형사의 촉은 남편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쪽으로 향합니다.

 

한새마의 시소게임

아내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낼 계획으로 국제결혼을 시도하는 남자. 한국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국제결혼을 감행하는 베트남 여자. 이 둘의 시소게임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됩니다.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세 편이 중요한 소재로 삼을 정도로 불륜은 부부결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흉기입니다. 순간적인 격정 때문이든 배우자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의도적인 행위든 불륜은 증오와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살의까지 품게 만드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부와 결혼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에서 불륜만큼 매력적인 모티브를 찾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세 편씩이나 주요 소재로 삼은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론 영화 장미의 전쟁같은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풍자 비극이 한 편쯤 들어갔더라면 더 알찬 구성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한새마의 잔혹한 부부 스릴러 시소게임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초반 설정과 뜻밖의 반전 때문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불륜이 등장하지 않은 작품이라 더 돋보였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그 기묘하고도 잔혹한 세계라는 띠지 카피는 보는 사람에 따라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민낯 그대로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미스터리 설정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또는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연출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역시 부부와 결혼은 연인과 사랑이 등장하는 달달한 로맨스와 달리 미스터리나 스릴러 등 장르물에 더 잘 어울리는, 말하자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관계라서 주제 자체만으로도 흡인력이 강했고 매 수록작마다 긴장감을 즐기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막연한 바람이지만 혹시 시소게임 2’가 기획된다면 남성작가들이 쓴 부부와 결혼에 관한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이기를 기대해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미묘할 수도, 확연할 수도 있는 차이를 만끽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해변의 폐건물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남자가 피 웅덩이에 잠긴 채 살해됐고, 어린 소년이 납치됐던 흔적까지 발견됐는데, 문제는 흉기와 바닥을 물들인 피가 피살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 또 남자의 몸에서 갑자기 발병한 듯한 말기 피부암 증상이 발견된 점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조카 채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지방경찰서로 내려온 이창은 살해된 남자를 조사하던 중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합니다.

 


시프트2017년에 출간된 조예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최근 꽤 많은 작품이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작년(2024)적산가옥의 유령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인데, 기대 이상의 재미와 만족을 느낀 덕분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 개정판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고통과 질병을) 옮기기만 할 뿐 없앨 수는 없어요. 누군가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죽어야만 해요. 그래서 저는 제 능력이 저주스러워요.” (p95)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판타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란에게 고통을 옮기는 기이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란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환자와 그것을 옮겨 받을 그릇이 될 사람의 손을 양손에 쥐고 있으면 그를 매개로 하여 환자의 고통과 병이 그릇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병을 제거해준다는 점에서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누군가 그 고통과 병을 받아내야 한다는 점, 즉 대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형 찬과 함께 인신매매범이자 사이비교주에게 납치됐던 란은 찬이 그 기이한 능력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어가던 찬이 그 능력을 자신에게 물려준 걸 깨달았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이지만 란은 찬의 복수를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는데,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본 자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위험천만한 위기가 닥칩니다.

사고로 숨진 누나 부부가 남긴 조카 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이창은 어린 시절 직접 목격했던 기적을 떠올리곤 그 능력자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선술집 직원인 란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란에게서 알아낸 기적의 진상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이창으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만듭니다.

 

지금껏 읽은 그 어떤 판타지나 호러에서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작동원리가 너무나도 단순명쾌해서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능력을 품은 채 복수에 나선 란과 그 능력이 너무나도 간절하지만 조카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그릇이 돼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창의 이야기는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판타지와 미스터리와 복수 스릴러 서사 속에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된 건 아쉬웠지만, 그 점만 빼면 란과 이창의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찬과 란의 능력을 악용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잘 설정돼서 끝까지 두 주인공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롤러코스터 같은 흥미진진함을 유발합니다. 징악(懲惡)의 짜릿함을 만끽하려면 그만큼 악당이 탄탄하게 설정돼야 하는데, ‘시프트에 등장하는 여러 악당은 뚜렷한 동기와 무자비한 잔혹함에다 개연성 있는 캐릭터까지 품고 있어서 주인공들의 분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적산가옥의 유령이후 두 번째로 만난 시프트역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선사했습니다. 이제 그동안 관심만 갖고 있던 조예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독자들의 서평을 훑어보며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장바구니에 담을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의 주장법
허진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민지 천재 시인 백오교와 경성 제일 미남 미카엘이 잇달아 자살로 보이는 죽음을 맞이하자 각 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하는 등 경성 전체가 들썩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오교의 탐미적이고도 염세적인 시에 몰입했던 청춘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사태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릅니다. 한편 미카엘의 죽음에 희귀 독초가 이용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독초 박사 구희비는 한 일본 유력 가문의 의뢰를 받고 미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빈민촌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희비의 비서로 채용된 17세 소녀 차돌은 그녀를 보좌하면서 나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지만 연이어 사건 관련자들이 살해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출간한 작품 대부분이 청소년물인 허진희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 건 악의 주장법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국권이 피탈된 후 한반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이름 모를 독초들과 그것을 이용한 살인, 그리고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은 29세의 독초 박사와 17세의 팔척장신소녀 콤비 등 매력적인 설정들이 단번에 눈길을 끌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사건 이면에 자리 한 시대적 비극성 때문에 서사의 두께가 자연스레 두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사건과 시대적 비극성이 매끄럽게 배합되지 않으면 자칫 겉멋을 위한 설정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악의 주장법은 시대적 비극성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미스터리 서사를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이야기라 마지막까지 조금의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뿜어내듯 이름 모를 독초들이 곳곳에서 피어났다는 설정, 또 그 독초가 살인에 이용된 점, 그리고 세상을 뜬 부모의 뒤를 이어 독초 박사가 된 29세의 구비희가 진실 찾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도 흥미로운데, 미스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엄청난 반전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독초라는 소재의 매력을 다양한 레시피를 통해 잘 활용한 작가의 필력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초를 연구하던 부모는 정체불명의 독초에 중독돼 사망했고 자신은 태아 시절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섭취한 독초로 인해 평생 이름 모를 통증에 시달려왔으면서도 결국 독초 박사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독초를 이용한 살인사건 조사까지 맡게 된 구희비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연인과 친척들이 일제의 폭압과 만행으로 인해 지독한 불행 혹은 큰 위기에 빠진 것으로 설정돼있기도 해서,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안긴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희비의 비극성을 다소 순화시켜주는 건 팔척장신소녀 차돌입니다. 웬만한 사내 두세 명에 견줄만한 완력에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성실함을 지닌 차돌이 구희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하는 과정은 무겁고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주는 장면들입니다. 구희비가 빈민촌의 소녀 차돌을 비서로 들인 사연은 후반부에야 공개되는데, 아마 앞부분에서 설명됐더라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그 사연이 마지막에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소소한 감동과 함께 울컥함을 맛보게 됩니다. 동시에 언젠가 차돌에게 해사한 시대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품게 됩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탄압으로 잉태된 악의 연쇄를 파헤치는...”, “악의 본질을 추격해가는...”이라는 대목이 있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 정도까지의 서사를 담은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시대적 비극성이 살인사건 미스터리에 잘 녹아든 건 사실이지만 작가가 그만큼 거창하고 심오한 주제를 목표로 삼았다고 보이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목이 악의 주장법이고, 이 작품 속의 은 그 본질을 탐구해볼 만한 지독한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자체보다는 인물과 시대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를 일부러 찾아갔다는 작가가 “(그들의) 넋에 가닿는 울림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밝힌 걸 보곤, 언젠가는 악의 주장법보다 좀더 묵직하고 진하면서도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습니다. 관심목록에 올려놓은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분: 죽음의 시간
최들판 지음 / 엘릭시르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천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쇠락한 항구도시 녹둥시에서 전문 시비꾼으로 많은 사람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41똥미친개한칠규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성해명 계장을 비롯한 녹둥시 동부경찰서가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나선 가운데, 한칠규 주변 인물들의 불온한 동태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한칠규의 자식이자 공인된 문제아인 혜성-혜리 남매, 은밀하게 지하사업을 벌이는 노회한 전직 조폭 윤중정, 한칠규에게 거듭 폭행을 당한 학교 교사들, 그리고 그 외에도 한칠규를 죽이고 싶어 한 사람들은 녹둥시에 지천으로 널려있었습니다.


 

이미 상업성을 잃은 지 오래인 고기잡이 항구 하나를 낀 시골다운 느긋함과 퇴락의 흔적이 물씬한 가운데 때로는 막장까지 치닫는 난폭성이 공존하는 곳.” (p63)

 

이 작품의 무대인 녹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성수기엔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녹둥의 기본 정서는 비린내와 천박함과 난폭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녹둥에서 단순 폭행치사인지, 지병의 악화로 인한 비명횡사인지, 불법사업에 얽힌 계획된 살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변사가 발생합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였던 한칠규의 죽음은 말 그대로 변사로 묻힐 수도 있었지만 사망 직전 그가 걸었던 마지막 전화 한 통 때문에 경찰의 수사대상으로 전환됩니다. 변사에 얽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1사건의 배경에 이어 2범죄수사에선 성해명 경감을 위시한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의 수사 과정이 그려집니다.

 

미스터리 느와르 군상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7: 죽음의 시간은 다채로운 장르가 믹스된 작품입니다. 한칠규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스터리가 기본 뼈대지만,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치열한 전쟁을 그린 뜨거운 피’(김언수)를 연상시키는 느와르의 미덕도 한껏 만끽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한칠규와 엮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털어놓는 기구한 사연들을 읽다 보면 오쿠다 히데오의 군상극에서 맛볼 수 있는 씁쓸한 아이러니 혹은 웃지 못 할 희비극의 향기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2부부터는 수사의 주체인 성해명 경감과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느와르 군상극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동네 치기배 사망 사건인데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네.”라는 한 경찰의 푸념에 100%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0.5개를 뺀 건 미스터리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사건 자체가 소소한 건 이 작품의 서사에 걸맞은 설정이라 시비 걸 일이 없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라든가 그 진범을 특정하는 과정이 지나친 비약 또는 불친절한 생략으로 이뤄져있어서 다 읽고도 찜찜함이 남고 말았습니다. 사실 누가 범인인지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소 허술하고 급한 마무리였다고 할까요? 꼰대 같기도 하고 진짜 재능을 숨긴 노회한 명탐정 같기도 한 성해명 경감이라든가 숨은 주인공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반영아 팀장 등 동부경찰서 경찰 캐릭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미스터리의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게 사실입니다.

 

5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붙었지만 최들판은 이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작가입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떻게 이만한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제야 데뷔를 한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조직뿐 아니라 쇠락한 항구도시의 범죄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생한 묘사에 감탄했다.”는 장강명의 추천사처럼 대단한 정보력과 자료조사도 놀라웠지만 단어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필력에 여러 번 눈길이 끌리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녹둥시 동부경찰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는데, 이야기 곳곳에 흥미로운 떡밥이 깔려있기도 하고 나름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작가후기참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작가가 이 한 작품만으로 은퇴시킬 것 같진 않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머잖아 녹둥시의 두 번째 이야기를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