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 소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3 링컨 라임 시리즈 3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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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범죄학자인 링컨 라임은 채 1%도 안 되는 가능성에 기댄 채 노스캐롤라이나 메디컬 센터에서의 신경세포 수술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파케노크 카운티의 보안관인 짐 벨로부터 강력사건 수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곤충 소년이란 별명을 지닌 16살 개릿 핸런이 살인을 저지른 뒤 두 여성을 납치했는데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에서 마침 라임의 소식을 들은 짐 벨은 그의 능력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라임은 거절하려 했지만 색스의 주장에 밀려 사건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소도시 보안관국의 초기 현장조사는 너무나 허술했고, 결국 라임과 색스는 거의 재조사에 가까운 수고를 들여 개릿의 행방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색스의 폭주 때문에 라임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지? 혼란스러운 게 아니야. 죽는다고. 수사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주변 환경에 대한 무지야.” (p47)

 

링컨 라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곤충 소년의 주 무대는 라임과 색스의 홈그라운드인 뉴욕이 아닌, 강과 늪지대로 둘러싸인 불온한 분위기의 남부 소도시 파케노크 카운티입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장에서 발견한 미량 증거물뿐이지만 토양과 식물 등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탓에 라임과 색스는 수사 초반부터 난항을 거듭합니다. 뉴욕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던 두 사람이 물을 벗어난 물고기신세가 된 채 고전하는 초반부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라임과 색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건 카운티 보안관국의 노골적인 반발과 법과학에 대한 무지입니다. 자기 영역을 침입한, 그것도 전신마비의 범죄학자와 빨간 머리의 뉴욕경찰로 이뤄진 북부 양키 콤비가 남부 보안관들에게 냉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너무나 허술하게 이뤄진 초기 현장조사입니다. 법과학에 대한 무지 탓에 현장은 심하게 훼손됐고 미량 증거물 수집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늪지대의 지형지물은 물론 곤충의 생태지식에도 해박한 16살 소년 개릿을 추적하는 일은 그야말로 난감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 못잖게 관심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부작용과 역효과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전신마비 상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기 위해 라임이 선택한 신경세포 수술입니다. 라임과 색스는 이 수술에 대해 서로 다른 속내를 품고 있으면서도 결코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라임은 어떻게든 수술을 강행할 생각이고, 색스는 어떻게든 이 수술을 말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두 사람의 속내는 실은 상대방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똑같은 모양새라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안쓰러움을 맛보게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릴 사건에 가담하고 만 두 사람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과연 라임의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될까요?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법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물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 극명하게 벌어진 점입니다. 라임은 결코 증인과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물리적인 미량 증거물만이 그의 유일무이한 잣대입니다. 반면 색스는 사람을 다루는 경찰입니다. 모두가 잔혹한 살인마로 지목한 16살 소년 개릿의 말과 행동에서 뭔가를 감지한 색스는 라임의 절대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인간의 가슴 속에서 발견한 증거물이야말로 최고의 증거라고 확신하곤 누구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행동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합니다. (이 급선회 지점은 중반부쯤 전개되는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그 내용이 공개돼있지만 제가 볼 땐 꽤 큰 스포일러라서 이 서평에선 생략했습니다)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 스릴러 서사의 긴장감과 속도감 등 여러 면에서 전작인 코핀 댄서에 비해 다소 느슨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제프리 디버 특유의 막판 반전이 폭죽처럼 터져준 덕분에 중반부까지의 아쉬움을 단번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색스가 벌인 대형사고와 그 후폭풍을 언급하지 못해서 반쪽짜리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막판 반전 쇼의 쾌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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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데이즈
루스 웨어 지음, 서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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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타 크로스(이하 잭)와 남편 게이브는 기업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의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펜 테스터(Penetration-tester)입니다. 잭의 완벽한 현장침투 능력과 게이브의 고도의 사이버공격 능력 덕분에 두 사람이 이끄는 보안회사는 순항 중입니다. 그런데 한 기업의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게이브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되고 현장침투를 마치고 돌아온 잭이 그 참상을 목격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잭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경찰이 자신을 용의자로 여긴다는 점. 더구나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생명보험 계약이 체결됐다는 메일이 때마침 도착하자 잭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런던경찰청의 지명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잭은 목숨을 건 필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지만 설정이나 분위기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남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도망자가 된 아내의 8이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려 제로 데이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잭과 게이브에게 부여된 펜 테스터라는 독특한 직업 덕분에 독자는 두 가지 중요한 서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지털, 컴퓨터, 스마트폰, 보안, 해킹 등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가 펼쳐질 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현장침투 능력을 가진 잭이 결정적인 순간 액션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게이브가 살해당하고 잭이 도망자라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선택한 덕분에 독자는 초반부터 빠르고 긴박한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흥미진진한 테크노 액션 스릴러까지 예감이 되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잖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망자 스릴러의 고전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8일에 걸친 잭의 도망자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입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진범 찾기는 그야말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식의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잭에게 정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건 게이브의 평생 절친인 콜과 언니 헬레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 잭은 자신의 현장침투 능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진상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장까지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좀더 남은 작품입니다. 우선 큰 틀 자체가 너무 익숙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도망자+테크노+액션 스릴러의 조합은 거의 예상한대로 전개됐고, 반전과 진범의 정체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테크노 스릴러의 소재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했고, 그것이 게이브의 죽음을 초래하는 과정은 거의 공식에 가깝게 설정돼있습니다.

루스 웨어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고 여긴 더 큰 이유는 잭의 심리묘사에 할애된 지나친 분량 때문입니다. 특히 게이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길게 묘사하다 보니 중반쯤부턴 그런 대목이 나오면 눈대중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는데, 물론 그 애정이 위험천만한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잭의 가장 큰 동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요약하면... 새로움과 신선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망자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읽다가 잭의 심리묘사 대목에서 느슨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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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메이슨 코일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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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로봇 윌리엄을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로봇공학자 헨리는 아내 릴리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감지합니다. 스스로가 지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너드(nerd)이자 신경증과 광장공포증을 앓는 환자라는 걸 잘 아는 헨리는 릴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도 완벽한 AI 로봇 윌리엄을 완성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그러던 중 릴리의 옛 직장동료인 데이비스와 페이지가 식사 초대를 받아 찾아오고, 헨리는 아내와 데이비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질투와 불안을 느낀 헨리는 갑자기 그들에게 윌리엄을 보여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헨리의 기대와 달리 명백한 적의와 폭력을 휘두르며 완벽한 스마트 홈인 헨리의 집을 일순간에 지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1980~90년대 SF 영상물의 고전인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는 볼거리 가득한 화려한 액션물이면서도 동시에 재앙과 공포로 뒤덮일지 모르는 머나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경고를 담은 작품들입니다. 반면 윌리엄2025년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곧 도래할 AI 시대의 암울하고도 끔찍한 가능성 한 조각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래서 100% SF라고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공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AI 로봇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통제 불가능한 악당이 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헨리가 자신의 집 다락방 연구실에서 재활용 부품들로 만들어낸 윌리엄은 이 두 가지 위험 요소를 모두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결코 등장해선 안 될, 실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AI 로봇입니다.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한 한 야심가가 악마와의 계약에 응한 이야기를 그린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으며, 의식과 발상과 욕망까지 보유한 윌리엄은 말 그대로 인간이 창조한, 인간이 아닌 생명입니다. 탄생 이후 스스로 지적 성능을 개발한 윌리엄은 기계적 오류나 프로그래밍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파괴와 살인과 통제를 즐깁니다. ‘윌리엄이 단순히 AI를 소재로 한 SF소설을 넘어 지독하게 현실적인 공포소설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헨리는 창조자인 자신을 대체하려는 AI 로봇 윌리엄뿐 아니라 아내 릴리를 빼앗아가려는 데이비스의 공격에도 대처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립니다. 동시에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정도의 광장공포증과 신경증 역시 헨리의 이성과 감성을 갉아먹으며 사태를 더욱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막판에 이르러 작가는 단 한 줄의 엄청난 반전으로 애초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를 명료하게 밝힙니다. 단순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넘어 “AI가 안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와 딜레마를 실감하게 만드는 이 반전과 엔딩이야말로 윌리엄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칼 군무를 추는 로봇과 전쟁에 투입되는 로봇개는 더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영원히 SF의 허구 속에 머무를 것 같던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의 공포 역시 더는 남의 얘기도, 먼 얘기도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이 세상이라면 누구라도 헨리가 될 수 있고, 언제라도 윌리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 또 헛된 희망이나 낙관론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윌리엄은 단 27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AI 로봇에 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지만, 간혹 진짜 판타지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헨리의 캐릭터가 반영된 경우도 있지만, “윌리엄이 아무리 고성능 AI 로봇이라 해도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낼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호함마저도 윌리엄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 읽은 뒤에 다소 찜찜함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찜찜함 때문에라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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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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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매물로 나온 교외 저택을 방문한 이선과 트리샤 부부는 폭설과 통신 두절로 인해 부득이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이 3년 전 실종된 유명한 정신과 의사 헤일의 저택이란 걸 알게 된 트리샤는 음울한 분위기에 압도된 것은 물론 누군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듯한 흔적을 발견한 탓에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이선은 자신이 찾던 저택이라며 만족감을 표합니다. 새벽녘 잠에서 깬 트리샤는 책장 뒤편의 비밀공간에서 헤일이 환자와의 면담을 녹음한 대량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곤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이선 몰래 테이프를 듣던 트리샤는 3년 전 헤일의 실종 전후 상황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연쇄살인마의 자식인 유능한 외과의사가 주인공인 핸디맨과 저택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가석방 전과자가 주인공인 하우스메이드에 이은 프리다 맥파든의 세 번째 한국 출간작입니다. 각각 연쇄살인 스릴러, 도메스틱 스릴러인 두 작품에게 모두 별 4개의 평점을 줬지만,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은데다 반전의 매력도 뛰어나서 뇌손상 전문의이자 스릴러 작가인 그녀의 신작 소식을 기다려왔습니다.

 

이선과 트리샤 부부가 3년 전 실종된 헤일의 저택에 갇힌 채 불안한 이틀 밤을 보내는 현재의 이야기와, 실종되기 전 헤일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을 그린 과거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됩니다. 안 그래도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저택에 두려움을 느끼던 트리샤가 헤일의 녹음테이프를 통해 3년 전의 진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이야기와 그 당시 헤일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배턴 터치하듯 이어지는 구조라서 독자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는 물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며 접점을 이룰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특히 폭설로 고립된 저택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에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초반부터 호러의 향기를 진하게 피우는데, 재미있는 건 샤이닝이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소품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p340)

 

본문 중간에도 두어 번 등장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줄을 장식한 이 문장은 네버 라이의 매력과 미덕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밀과 거짓말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가운데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손에 넣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들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 속에서 뜻밖의 접점을 이뤄내는데, 작가는 그 지점까지 숱하게 독자의 헛발질을 유도하곤 합니다.

 

저택의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헤일의 녹음테이프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트리샤, 아내가 겁에 질린 걸 알면서도 당장에라도 저택을 사들일 듯 만족감을 느끼는 이선, 유명한 정신과 의사지만 정작 본인의 정신세계가 일그러지고 비틀렸던 헤일, 그런 헤일에게 오랜만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 루크,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과 협박을 일삼던 헤일의 몇몇 환자 등 네버 라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게 설정됐거나 노골적으로 악의를 내뿜는 위험인물로 그려집니다. ‘다른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비밀을 지키려는 건 과연 누구인지, 그렇게 지킨 비밀이 과연 끝까지 봉인될 수 있을지, 그 봉인이 해제된다면 어떤 사태가 초래될지 등 작가는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한국에 소개된 두 편의 전작들에 비해 속도감이나 스릴러의 묘미나 반전의 짜릿함 모두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핸디맨하우스메이드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도 네버 라이에선 전혀 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다만,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 꽤 상세한 줄거리를 공개하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헤드라인 정도만 참고한 상태에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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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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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 스토커 피해를 호소했던 카렌이 알몸으로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를 본 사립탐정 켄지는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당시 스토커는 확실히 제압했었고, 자신이 기억하는 카렌은 이런 식으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의뢰인도 없는 조사를 시작한 켄지는 그녀의 가족과 정신과 의사 등 주변 인물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9개월 전 파트너였던 제나로와 헤어진 뒤 탐정으로선 밑바닥을 전전하던 켄지는 혼자 힘으론 이 사건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 제나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폭력의 화신인 부바까지 가세하여 범인의 뒤를 쫓던 켄지 일행은 결정적 단서를 포착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그 어느 스릴러 시리즈보다 폭력성과 선정성이 강렬한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아껴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실은 한없이 게으름을 부린 탓에 전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이후 7년 만에 읽게 됐는데, 그래선지 이 시리즈의 폭력성과 선정성에 새삼 여러 차례 놀라며 페이지를 넘기곤 했습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야박한 평점을 매긴 서평 대부분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시리즈 첫 편부터 설정됐던 주인공 패트릭 켄지의 캐릭터(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폭력에 잠식돼버린 인물)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서 별 저항감 없이, 오히려 재미있게 읽어온 게 사실입니다.

 

9개월 전, 그러니까 전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결별했던 켄지와 제나로가 재결합하여 로맨스는 물론 추리와 액션에서도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데다 두 사람의 동료이자 뼛속까지 폭력의 DNA로 가득 찬 전직 군인 부바가 그 어느 때보다 광폭 행보를 보여서 읽는 내내 넘치는 아드레날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작인 작은 자비들에서 인종차별을 소재 삼아 묵직한 사회파 스릴러를 선보였던 데니스 루헤인의 필력도 너무 좋았지만, 제겐 피와 살이 난무하는 거친 액션 스릴러 속에 풍자와 비아냥과 진한 블랙 유머를 자유자재로 섞어 넣는 그의 재능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비교적 사이즈도 크고 조직이 등장하는 큰 사건들을 다뤘던 전작들에 비해 비를 바라는 기도는 의뢰인도 없고 보수도 없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한 여자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켄지의 범죄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역대급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여 연이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켄지 일행에게 닥치는 위기 역시 결코 소소하다고 할 순 없지만, 사립탐정 본연의 역할과 임무에 어울리는 사건이라 더 현실감 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의 비극적인 사고로 풍비박산이 난 가족, 그 가족의 비밀을 파고들어 살인과 갈취를 일삼는 것은 물론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범인, 그리고 추리와 상상력과 폭력을 적절히 버무려가며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켄지와 제나로 등 선악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생생하면서도 극단적인 인물들이 펼치는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에 도달할 때까지 잠시도 쉬어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켄지와 제나로의 애틋한 재회 로맨스가 끼어들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바의 웃지 못 할 코미디까지 가세해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한나절이면 금세 마지막에 이를 수 있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이 다음 작품인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매번 왜 데니스 루헤인이 이 시리즈를 여섯 편밖에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서평에 담곤 했는데, ‘문라이트 마일이 미국에서 2010년에 출간됐으니 신작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그래도 언젠가 프리퀄이든 스핀오프든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켄지와 제나로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더 읽어보고 싶은 욕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과도한 폭력성과 선정성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긴 해도 제겐 애정하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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