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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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큰어머니의 단독주택 2층에 얹혀살며 번역 일을 하는 요시오는 오래전부터 관음증에 중독된 남자입니다. 하지만 자주 엿보곤 했던 맞은편 연립주택 201호의 여자가 살해당한 걸 목격한 뒤로 큰 충격에 빠져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맙니다. 3개월의 치료를 마치고 귀가한 요시오는 201호에 새로운 여자가 입주한 걸 보곤 놀랍니다. 알코올중독 재발이 두려워 엿보기를 자제하려 했지만 201호의 여자는 마치 도발하듯 부주의하게 사생활을 노출합니다. 한편 알코올중독 병원에서 요시오에게 원한을 품었던 절도범 소네는 복수를 위해 그를 미행하던 중 201호의 여자를 알게 됩니다. 201호에 침입한 소네는 여자가 쓴 일기에 묘사된 요시오의 비열한 관음증을 파악하곤 그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합니다.

 


도착의 론도에 이은 도착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도착 3부작은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서술트릭의 대표적 작품으로 언급되곤 하는 시리즈인데, 그래선지 이번에도 작가에 대한 도전심이 충만한 상태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도착의 론도를 읽은지도 너무 오래됐고, 당시 남겨놓은 서평에도 줄거리를 적어놓지 않아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도착의 론도가 다소 어려우면서도 신선한 서술트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면 도착의 사각은 쉽고 선명한 이야기 전개 덕분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서술트릭의 쾌감은 전작에 비해 평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음증 중독자이자 201호를 엿보곤 하는 번역가 요시오, 201호에 입주한 새내기 회사원으로 요시오의 불결한 시선에 치를 떨곤 하는 마유미, 요시오에게 복수하고자 마유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소네 등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마유미의 어머니인 미사코의 편지가 막간극처럼 등장하곤 합니다.

요시오와 마유미가 1인칭 시점의 일기를 통해 자신들이 겪는 불안과 초조와 분노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면, 소네는 요시오에 대한 복수심과 마유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야릇한 흥분을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면서 이야기 전체를 중계하는 듯한 설명역을 맡습니다.

세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마유미의 불륜남입니다. 요시오는 마유미와 불륜남의 행위를 엿보며 격한 흥분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소네는 요시오뿐 아니라 불륜남에 대한 증오심까지 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불온한 감정들은 어느 날 밤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대충돌을 벌이며 예상치 못한 진상을 드러냅니다.

 

사실 도착의 사각은 서술트릭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입니다. 관음증, 살인, 시신유기, 불륜, 절도, 알코올중독 등 서스펜스 스릴러에 잘 어울리는 소재들이 가득한데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벌이는 상식 밖의 행위들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져서 오히려 서술트릭이 없었다면 독자의 눈길을 더 사로잡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이 독자를 완전히 배신한 건 아닙니다. 막판에 밝혀진 진상과 서술트릭의 실체는 비록 전작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고, 크든 작든 위화감을 느꼈던 대목들이 실은 전부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임을 깨닫게 되는 짜릿한 쾌감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에 충격과 쾌감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아쉽게 느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도착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도착의 귀결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살짝 예습해보니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분량도 방대한데다 두 개의 소설이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시리즈 첫 편인 도착의 론도이후 10여년 만에 2편을 읽은 탓에 감흥이 많이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공백 없이 곧바로 도착의 귀결을 읽을 생각입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만큼 서술트릭의 짜릿함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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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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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마모토현의 무인도 아다시마로 여행을 떠나는 일곱 명의 젊은 남녀. 그중 한 명인 히토 기요쓰구는 몰래 숨겨온 비소로 나머지 여섯 명을 독살할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동기는 룸메이트였던 선배 기다의 인생을 박살낸 것에 대한 복수. 그런데 섬에 도착한 직후 누군가에 의해 일행들이 한 명씩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혀가 잘린 채 발견됩니다.

<2> 아다시마 참극 이후 3년이 지난 2023. 오사카부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혀가 잘린 사체로 발견됩니다. 관할서 형사 이쿠코는 다음 피해자로 예상되는 마리아를 경호하며 진상 파악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일련의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구 종말을 앞두고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룬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세상 끝의 살인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던 아라키 아카네의 신작입니다. ‘세상 끝의 살인2023년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두 여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세 번째 작품으로 소개됐는데,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역시 남성중심사회의 온갖 폐해를 겪은 여자형사와 환경미화원이 미스터리 해결사로 나선, 시스터후드 서사가 빛나는 작품이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실험하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레이디 가가 시리즈로 출간됐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은 무인도를 찾은 젊은 남녀들이 한 명씩 기괴하게 살해당하는 가운데, 애초 전원을 독살하려던 히토 기요쓰구가 진범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립니다. 무인도에 들어오기 전 범행성명까지 준비해놓았던 히토는 독살을 완수하는대로 자살할 계획이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연쇄살인이 벌어지자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독살을 포기하고 진범 찾기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작인 ‘ABC 살인 사건을 오마주한 2막은 오사카 도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다룹니다. 쓰레기 수거 중 혀가 잘린 토막사체를 발견한 마리아는 난데없는 경찰 경호에 깜짝 놀랍니다. “직전 사건의 피해자를 발견한 사람이 범인의 다음 목표물이라는 설명은 황당하게만 들렸지만, 마리아는 경호를 담당한 형사 이쿠코의 진심에 설득되고 맙니다. 문제는 수사가 전개될수록 이번 연쇄살인이 3년 전 아다시마 참극과 연관이 있다는 점, 또한 마리아와 가까운 인물들의 이름이 수사 과정에 오르내리게 됐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3년 전 사건을 그린 1막이 이야기의 토대 역할을 맡고 있고, 현재 시점의 연쇄살인을 다룬 2막이 본편이자 과거의 사건까지 아우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1막은 프롤로그 정도의 분량만 차지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1막과 2막은 거의 엇비슷한 분량과 비중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두 편의 미스터리를 동시에 읽는 듯한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과 3년 차이를 두고 벌어진 사건들이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주한 1막 속 사건이 고전미 넘치는 올디스 벗 구디스의 매력을 품고 있다면, 2막 속 사건은 긴박감과 속도감을 지닌 현대 미스터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설정이라 마치 30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일어난 사건처럼 읽힌 점도 나름 독특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진범과 트릭은 밝혀졌지만 명쾌한 엔딩 없이 1막이 마무리된 가운데 전혀 낯선 인물들이 2막의 문을 열면서 독자의 관심은 언제쯤 어떤 식으로 두 개의 막이 접점을 드러날 것인가에 집중됩니다. 동시에 미스터리 해결사 역할을 맡은 두 여성, 형사 이코쿠와 환경미화원 마리아의 케미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대 이상의 재미와 호기심을 선사해서 1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데, 특히 과거와 현재의 사건에 마리아의 주변인물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자 두 주인공의 관계는 갈등과 연대를 오가며 긴장의 수위를 높이곤 합니다.

 

내용 대비 1막의 분량이 조금 과했던 점, 형사 이쿠코의 천재적인 추리가 지나칠 정도로 비약에 가까웠던 점,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가 설득력이 살짝 부족했던 점이 아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난함 이상의 평점을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시스터후드 미스터리 시리즈 주인공으로 활약해도 될 듯한 이쿠코+마리아 콤비의 매력도 대단했고, 무엇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BC 살인 사건의 오마주를 담은 미스터리를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도 아직 아라키 아카네의 새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데, 미스터리 스타일이 제 취향과 아주 잘 맞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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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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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인 허상의 어릿광대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편은 각각 염력, 투시, 환청, 텔레파시 등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시리즈 1~2편인 탐정 갈릴레오예지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 반면, 나머지 세 편은 살인사건을 둘러싼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워서 여러 장르가 혼재된 느낌을 줍니다. 다 읽은 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원래 허상의 어릿광대엔 네 편만 수록됐다가 문고판이 나오면서 세 편이 추가됐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에 장르가 혼재된 작품집의 인상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한 줄 요약으로 각 수록작을 소개하면... 염력으로 사람을 추락사시킨 신흥 종교집단의 교주(‘현혹하다’), 유가와마저 깜짝 놀라게 만든 한 호스티스의 의문의 투시력(‘투시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환청의 실체(’들리다‘), 퇴물 프로야구 선수 아내가 살해당한 뒤 밝혀지는 뜻밖의 진실(‘휘다’), 언니의 위험을 텔레파시로 감지한 쌍둥이 동생의 비밀과 거짓말(’보내다‘), 폭우가 쏟아지는 별장지에서 발견된 노부부의 죽음의 진실(‘위장하다’), 살인사건 현장을 조작하고 정교한 트릭을 꾸민 한 여자의 진짜 의도(‘연기하다’)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스터리가 수록돼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대부분 유가와의 빛나는 추리를 통해 실은 지극히 현실적인 물리 현상으로 밝혀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미 비슷한 서사를 탐정 갈릴레오예지몽에서 여러 차례 맛봐서 그런지 신선한 맛은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가와가 밝혀낸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 점, 또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그 실체를 독자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살인사건을 등장시킨 정통 미스터리는 나름 반전의 쾌감 또는 뭉클한 감동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깔끔함이 조금은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조잡하다는 인상을 받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갈릴레오 시리즈는 대부분 장편이었는데, 그래선지 후속작이자 장편인 금단의 마술이 이 작품의 아쉬움을 달래주기를 기대해봅니다. (‘갈릴레오 다시 읽기를 진행하던 도중 출간된 신작 침묵의 퍼레이드역시 장편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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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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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전의 혼란에 빠진 195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진공청소기 판매상인 영국인 제임스 워몰드는 팔리지 않는 신제품과 제멋대로인 17살 딸 밀리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영국인으로부터 비밀정보부의 우리 사람’(Our Man), 즉 요원으로 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워몰드는 처음엔 정색하며 거절했지만, 적잖은 활동비에 혹한 나머지 대승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문제는 아무런 자질도 없는 그가 전문가 요원들을 섭외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비밀정보부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점. 결국 그는 가짜 요원들을 만들고 신문기사로 짜깁기 한 그럴듯한 보고서로 비밀정보부를 속이기로 작심합니다.

 


1958년에 출간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혁명 전야의 쿠바를 배경으로 영국 비밀정보부의 첩보활동을 그린 스파이물이지만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 겁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신랄한 풍자와 비아냥으로 채워진 이색적인 스파이물입니다. 작가 자신이 비밀정보부에서 활동할 당시 겪은 충격적인 경험, 즉 해외 요원들이 보너스를 더 받기 위해 유령 요원을 만들어내고 가짜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였다고 하는데, 작가는 거기에 덧붙여 자기 망상과 무능함에 사로잡힌 영국 비밀정보부에 대한 조롱까지 담아냄으로써 웃지 못할 코미디를 창조한 것입니다.

 

영국 비밀정보부는 애국심 충만한 영국인이니까.”라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힘든 난센스 같은 이유로 워몰드를 우리 사람으로 발탁합니다. 이어 그가 컨트리클럽 명부에서 골라낸 그럴싸한 이름의 가짜 전문가들에 대해선 표면적인 확인 절차만 진행했고, 그가 제출한 각종 보고서는 아무런 의심이나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딸의 풍족한 미래를 위해 우리 사람을 수락한 워몰드는 결코 야비하거나 사악한 인물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론 국가에 대한 배신이고 배임과 횡령을 일삼는 범죄행위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라도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모호한 캐릭터 때문에 독자는 그를 응원해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동시에 영국 비밀정보부를 조롱하기 위해 작가가 주인공을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는 느낌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게 워몰드의 애매모호한 캐릭터였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은 비밀정보부에서 비서를 파견하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더구나 절반쯤 장난삼아 그린 스케치 한 장과 거짓 보고서 한 부를 비밀정보부가 엄청난 뭔가로 평가하고 진실로 받아들인 탓에 워몰드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야기 속 당사자들은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실소와 한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황당한 코미디가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이 발각되긴 할지, 발각된다면 비밀정보부는 어떤 대응을 할지, 만약 발각되지 않는다고 해도 워몰드에게 해피엔딩이 찾아오게 될지 등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마지막까지 완만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스파이물에 녹아든 영국식 블랙코미디와 풍자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낼 만큼 흥미로웠지만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던 뻣뻣하거나 다소 불친절한 영국식 문장때문에 완전히 몰입해서 읽어내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다소 어렵게 읽었던 존 르 카레의 스파이물 몇 편과 비슷한 인상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작가가 직접 각본가로 참여했다는 동명의 영화로 이 작품의 묘미를 제대로 맛보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는데, 워낙 오래 전에 제작된 영화라 OTT든 다른 경로에서든 찾아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고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설정이나 인물 모두 독특해서 스파이물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이 이색적인 스파이물에 관심을 가져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호기심이 동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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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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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시리즈 4가라, 아이야 가라12년 후 이야기를 다룹니다. 내용 소개 중에 가라, 아이야 가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년 전, 켄지와 제나로는 납치된 4살 소녀 아만다를 찾아내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최종 해결책(아만다를 좋은 양부모나쁜 친모중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을 놓고 큰 갈등을 벌인 탓에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은 4살 딸 개비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지독한 생활고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만다의 숙모 베아트리체가 나타나 16살이 된 아만다가 또다시 사라졌다며 도움을 청합니다. 여전히 개망나니인 친모 헬렌은 경찰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라진 아만다에 대해 아무 조치도 안 취한다는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그동안 아만다 사건을 금기시하며 살아온 켄지와 제나로는 격론 끝에 일단 아만다 찾기에 나서기로 합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최종편인 문라이트 마일이 출간된 건 (미국 기준으로) 전작인 비를 바라는 기도이후 11년만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팬들이 후속작에 대한 미련을 접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뜻밖의 선물처럼 출간된 셈인데, 그래선지 새로운 이야기 대신 12년 전 사건, 즉 시리즈 4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다뤘던 아만다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만다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켄지와 제나로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제나로는 아기를 갖고 싶다는 뜻을 켄지에게 밝혔지만 우회적으로 거부당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아만다 사건을 맡게 됐고, 아만다를 찾은 뒤엔 개차반인 친모 헬렌에게 보낼 건지, 아만다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좋은 양부모에게 맡길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갈등을 벌인 바 있습니다. 결국 켄지의 뜻대로 친모 헬렌에게 보내진 아만다는 또다시 불행의 늪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제나로는 켄지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또다시 아만다가 사라지자 켄지와 제나로는 갈등에 휩싸입니다. 켄지가 아만다 찾기를 주저하는 반면, 제나로는 속죄의 기회라며 의뢰를 받아들일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아만다와 같은 나이인 4살 딸 개비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두 사람의 심정은 좀더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시작과 동시에 독자를 서글프게 만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린 개비를 키우는 부부의 곤란한 상황과, 40대라는 신체 나이에 굴복한 채 근근이 일감을 따내는 프리랜서 탐정 켄지의 안쓰러운 처지가 그것입니다. 아무래도 11년 만에 출간되는 시리즈 최종편을 위한 극적인 설정으로 보였는데, 그래선지 전작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탐정이자 부모의 심정으로 아만다를 찾는 켄지와 제나로의 여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만다의 실종 배후에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극악스러운 악당들이 패륜에 가까운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혹한 액션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틈만 나면 사건과 사건 사이마다 탐정이자 부모인 켄지와 제나로의 복잡한 심경을 그려 넣었고, 그래서 독자는 사건 자체보다 두 사람의 절박함과 두려움에 더 눈길이 끌리게 됩니다. 특히 12년 전 아만다를 개차반인 친모에게 돌려보낸 일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책을 품어온 켄지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폭주하는 모습은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만다를 찾는 일 자체가 엄청난 액션과 위기일발의 상황을 필요로 하지 않다 보니 켄지와 제나로의 주된 일은 지루한 탐문 위주로 전개됩니다. 탐문의 대상이나 내용 역시 다분히 의도적으로 가족혹은 부모와 자식에 초점이 맞춰져서 살짝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만다를 찾아내고 배후의 악당을 제거하는 과정은 좀 맥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단순했고, 켄지와 제나로의 노력과 분투 덕분이라기보다는 뜻밖의 행운과 우군에 의지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아쉬움은 전적으로 데니스 루헤인의 계산된 노림수라는 생각입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더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탐정이 아니라 중년에 접어든 채 어린 딸을 키우는 연약한 부모가 되어 그동안 자신들이 활약해온 무대를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읽는 동안 느꼈던 이런저런 아쉬움이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느닷없는 울컥함으로 돌변했는데,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문라이트 마일2010년에 출간됐으니 이제 켄지와 제나로는 50대 후반에 이르렀을 나이입니다. 어쩌면 부모를 능가하는 탐정이 된 딸 개비를 앞세운 스핀오프가 출간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보다는 단 여섯 편의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켄지와 제나로를 회상하며 롤러코스터보다 더 아슬아슬했던 그들의 전성기를 곱씹어보는 게 팬으로서 더 흐뭇하고 보람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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