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변호인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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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형사 스즈카가 남편 몰래 만나던 호스트 카노 레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살인사건 변호는 처음인 30살의 모치즈키 린코가 스즈카의 변호인이 됩니다. 같은 법률사무소의 니시가 공동변호인으로 가세했지만 린코는 의뢰인을 함부로 대하곤 하는 니시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안 맞는 진술을 거듭하는 스즈카입니다. 결국 린코와 니시는 가해자 스즈카와 피해자 카노의 관계는 물론 그들의 과거에 관해 직접 알아봐야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검찰이 계획된 살인을 주장하는 가운데 린코와 니시는 스즈카의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뿐입니다.

 

2009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천사의 나이프를 읽은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팬이 되어 그동안 꽤 많은 작품들을 읽어왔습니다. ‘형사 변호인은 한국에 소개된 그의 18번째 작품으로,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작품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많은 준비를 거쳐 내놓은 첫 법정미스터리라고 밝혔지만 형사 변호인은 성격도 가치관도 판이한 두 변호사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적을 조사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와 엔딩은 법정에서 이뤄지긴 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비슷한 상처를 지닌 린코와 니시가 성실하고 집요하게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 그리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변호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인 가문에서 성장한 린코는 형사 전문 인권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니시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나 진술이라도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라는, 변호사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두 사람 모두 범죄자를 옹호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간의 욕을 먹는 형사 변호사지만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구치소에 갇힌 스즈카를 대하는 태도 역시 180도 다른데, 특히 니시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취조하는 경찰처럼 스즈카를 몰아붙입니다. 어르고 달래며 진술을 얻어내려는 린코와 달리 니시는 진실을 감추는 듯한 스즈카에게 조금의 동정도 없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팀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린코와 니시의 차이점은 미스터리만큼이나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반면 범죄로 인해 가까운 사람을 잃은 적이 있으며 형사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거를 지녔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상대방의 가치관과 입장을 존중하기도 합니다. 또한 가까운 사람을 해친 범죄자도 변호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응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매력들 때문에 린코와 니시를 주인공으로 한 법정미스터리 시리즈가 이어지기를 바라게 됐는데, 야쿠마루 가쿠가 후속작을 내줄 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400페이지 안팎인데 반해 형사 변호인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작품입니다. 법정미스터리지만 막판 법정 장면은 20%에 불과하고 앞의 80%는 린코와 니시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및 과거를 파헤치는데 할애됩니다. 외양은 변호사지만 실은 형사나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탐문하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 린코와 니시의 주된 업무입니다. 법정미스터리가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형사 변호인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회파 미스터리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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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킴 스톤 시리즈 3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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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인 9세 소녀 두 명이 문화센터에서 납치당합니다. 13개월 전 벌어졌던 사건과 판박이라 경찰은 당황합니다. 당시 한 명의 소녀만 살아 돌아왔고 다른 소녀는 생사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미제사건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건을 조사 중이던 킴 스톤은 피해 가족 중 한 명이 자신을 담당수사관으로 지명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더구나 요청한 사람이 어릴 적 위탁가정에서 함께 지냈으며 극도로 혐오했던 캐런이란 사실에 킴은 당황합니다. 결국 팀원들과 함께 수사에 나선 킴은 이 사건이 모방범죄가 아니라 13개월 전 사건의 범인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합니다. 더 높은 몸값을 제시하는 가족의 아이만 살려주겠다는 범인의 문자 때문입니다. 가족 간에도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두 소녀의 가족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른바 걸 크러쉬 형사인 킴 스톤의 캐릭터는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앞서 두 작품의 서평에도 썼지만 제로에 가까운 사교술, 휘발된 감정과 공감능력,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거친 태도, 조직의 논리나 정치적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오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걷는 타고난 반골인 킴의 거침없는 행보는 사이다 이상의 짜릿한 쾌감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띠 동갑 연상인 남성을 부하로 둘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게 만든 그녀만의 뛰어난 수사능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에 그런 폭주가 가능했던 것이고, 비록 시기와 질투가 뒤섞이긴 했어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킴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유능한 경찰이 됐습니다.

 

그런 킴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는데, 어린 시절 비극적으로 가족이 해체된 이후 위탁가정을 몇 군데나 전전하며 얻은 끔찍한 상처들이 그것입니다. 어떻게든 과거를 망각의 상자 속에 가두며 살아왔던 킴이기에 두 소녀의 납치사건은 여러 면에서 킴에게 큰 충격을 가합니다. 하나는 납치된 한 소녀의 어머니이자 킴을 담당수사관으로 요청한 캐런이 과거 같은 위탁가정에서 트러블을 겪었던 인물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납치된 두 소녀가 어릴 적 끔찍한 비극을 겪었던 자신과 남동생 마이키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과거에 한쪽 발을 담근 채 수사를 진행하게 된 킴은 어떻게든 두 소녀를 안전하게 데려올 것을 다짐합니다. 만일 누구 하나라도 범인의 의도대로 죽는다면 그건 과거 못잖은 큰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중납치극이라는 단선적인 사건 설정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엄청 빠른 속도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더 높은 몸값을 제시한 가족의 소녀만 살려주겠다는 범인의 잔인한 경매에 맞선 킴과 팀원들의 분투가 가장 눈길을 끌지만,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절친했던 가족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두 가족의 갈등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고, 경찰과 피해 가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것은 물론 납치된 소녀들을 위협하는 범인들의 잔혹한 행태 역시 손에 땀을 쥐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악마의 게임’(구판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이 킴과 소시오패스 정신과 의사의 1:1 대결에 치중하느라 다른 팀원들의 활약을 덜 보여줘서 무척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말 그대로 팀플레이를 통해 범인과 맞서고 있는데다 킴의 감정적 폭주도 최고조에 달해서 주저하지 않고 별 5개를 매겼습니다. “킴 스톤의 인간적인 모습과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에도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리즈 세 편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다 보니 작가의 개성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점 - 막판의 불친절함과 다소 비약에 가까운 킴의 추리 은 개인적으론 무척 아쉬웠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생각이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한국에는 이제 세 편의 작품만 소개됐을 뿐이지만, 작가의 홈페이지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20편까지 출간(예정)된 상태입니다. 작가의 왕성한 필력도 놀랍지만 이 많은 작품들이 언제쯤 한국에 모두 소개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라진 소녀들2년 만에 나온 신작이긴 하지만 다음 작품은 좀더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서평을 쓴 게 지난주인데, 그 사이에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죽음의 연극이 출간됐네요.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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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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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디션에 합격한 7명의 남녀가 연출가의 지시를 받고 외딴 펜션에 모입니다. 하지만 연출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편지를 통해 “34일 동안 연극의 모든 것을 배우들 스스로 구성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특이한 건 펜션을 폭설로 고립된 산장으로 여기라는 것,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킨 점입니다. 또한 뜻밖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연극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라는 애매한 부언까지 남깁니다. 어리둥절한 채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충격적인 아침을 맞이합니다. 배우 한 명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살인을 암시하는 쪽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연극의 일부라고 결론 내렸지만 다음 날 또 한 명이 사라지고 명백한 실제 살인의 단서가 발견되자 일행은 현실인지 연극인지 구분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편의상 붙인 이름이겠지만 이 작품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1986, 구판 제목은 백마산장 살인사건’)가면산장 살인사건’(1990)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의 한 편입니다. 일본에서 199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서 다분히 고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고립된 산장’,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 ‘범인은 일행 중 한 명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 작품은 펜션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실제 벌어진 살인사건인지 연극 연습의 일환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7명의 배우는 물론 독자마저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사건이 벌어진 직후만 해도 모두들 연극 연습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두 번째 사건과 함께 명백한 살인 도구가 발견되면서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사건이라는 주장과 연극 연습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펜션에 모인 배우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실제 사건임을 전제로 범행 동기를 캐려는 갑론을박도 벌어지지만 그 어떤 추리도 금세 모순이 드러나고 막다른 벽에 부딪힙니다. 독자 역시 배우들의 혼란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되는데 동시에 현실이든 연극이든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왠지 김이 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독특한 해법과 엔딩을 제시합니다. ‘현실이냐 연극이냐라는 이분법적 추리를 뛰어넘는 엔딩은 독자에 따라 다소 억지스럽게 받아들일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론 고전적이면서도 꽤 참신한 해법으로 보였습니다. ‘누가 범인?’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의외의 진실 덕분에 기분 좋은 정도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요?

요약하자면, 요즘의 독자 눈높이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나듯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고전을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집어 들면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새삼 오래 전에 읽은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아직 읽지 못한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고 싶어졌는데, 연이어 읽기보다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를 기다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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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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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유능한 투자자문가 사이먼 그린은 직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큰딸 페이지가 대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마약중독자가 되어 가출한 뒤로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어느 날 공원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던 페이지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에런이라는 남자의 방해 때문에 오히려 폭행범 신세가 됩니다. 가까스로 피소를 면했지만 사이먼은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을 방해했던 에런이 실은 페이지의 남자친구이자 그녀를 마약중독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으며 페이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먼은 아내 잉그리드와 함께 직접 페이지를 찾기로 결심하고 위험천만한 마약소굴로 향합니다.

 

네가 사라진 날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이 18편이고, 그중 8편을 읽었으니 아직 제대로 된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명성과 필력에 비해 저에게 무척 야박한 평점을 받아온 작가가 할런 코벤입니다. 최근 읽은 작품들은 비교적 호평과 함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줬지만, 초기에 만났던 작품들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혹평이나 다름없는 서평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를 읽은 뒤에도 절감했던 바지만, ‘네가 사라진 날을 읽고 나니 혹평을 남겼던 그 작품들을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런 코벤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네가 사라진 날은 할런 코벤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실종이 또 한 번 매력을 발산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마약에 중독된 채 끔찍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종적을 감춘 큰딸 페이지를 찾으려는 사이먼의 분투이고, 또 하나는 사이비종교단체와 연관 있어 보이는 살인청부사 커플이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사이먼이 사립탐정 엘레나 라미레스를 만나면서 접점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 사이먼의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는데, 동시에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페이지의 비밀과 비극까지 드러나면서 사이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시간들이 밀려듭니다.

 

나는 누군가 죽는 이야기보다 사라지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편이다. 살인은 사건 해결에 초점을 두지만 실종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다.” (할런 코벤, 출간 인터뷰에서)

 

독자 입장에서 사이먼에게 이입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희망때문입니다. 만약 페이지가 살해당한 상태에서 사이먼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면 이 이입의 쾌감은 결코 만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이먼은 페이지를 찾는 내내 자책과 절망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희망하나로 위험천만한 고비들을 넘곤 합니다. 반면 우리를 산산이 깨부술 만한 거대한 것이라는 표현대로 희망은 순식간에 그 얼굴을 뒤집으며 사이먼을 심연 속으로 집어던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사이먼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희망에게 배신을 당하곤 합니다. 영영 페이지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이먼의 희망에는 셀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납니다.

 

이야기는 긴박하면서도 무자비한 액션 장면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지만, 독자는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희망이 사이먼에게 가한 가장 큰 배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이먼으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책을 덮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복잡하게 얽힌 심리와 감정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애틋한 여운을 품게 하는 반전 어린 엔딩에 이르기까지 할런 코벤이 직조한 정교한 설계도에 감탄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작품의 절반도 못 읽은 상태지만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해외언론의 호평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네가 사라진 날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조만간 보이 프럼 더 우즈를 읽을 예정인데, 점점 더 그 진가를 맛보게 되는 할런 코벤의 필력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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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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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탄 노인의 돈봉투를 노리던 한 남자를 제압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다. 노인이 살고 있는 도시는 우크라이나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구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는데, 이들이 사채업을 비롯해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리처는 노인을 대신해 사채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의도치 않게 두 갱단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조직 간에 난투극이 벌어지게 만든다. 이 틈을 타 갱단들을 박살내려던 리처는 갱단을 움직이는 더 큰 세력이 존재함을 알게 되고 코어 집단을 파괴하기 위해 출입통제구역으로 향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출입통제구역잭 리처 시리즈24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제게는 무척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중고로 구매한 7편을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은 적이 없고, 유일하게 읽은 건 우연히(?)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나이트 스쿨한 편 뿐입니다. 구매한 작품들을 읽지 않은 건 언젠가 순서대로 시리즈를 읽고 싶은 욕심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벌어진 사태이고, ‘나이트 스쿨은 어쩌다 보니 대출한 책에 끼어 있어서 우발적으로 읽게 됐을 뿐입니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잭 리처 시리즈초기작이 뭉텅이로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것도 읽고 싶은 마음이 덜 들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3~8, 12편 등 모두 일곱 작품이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원톱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시리즈인데 그의 성장과정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읽을 수 없다 보니 좀 맥이 빠진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뜬금없이 읽게 된 출입통제구역은 이야기는 술술 읽히지만 잭 리처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는 여러 가지로 무리인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퇴역 후 미국 전역을 떠도는 잭 리처는 칫솔 하나만 달랑 들고 마음 내키는 곳에 머물며 법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는 시놉시스에서 알 수 있듯 고정 조연들이 없다 보니 더더욱 잭 리처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맛볼 수 없었습니다. 역시 빠진 작품들이 많더라도 시리즈 첫 편인 추적자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

 

줄거리대로 잭 리처는 위기에 처한 노인을 돕는 아주 작은 선행 하나 때문에 거대한 갱단의 살육전에 말려드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큰 세력과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군 헌병대 출신인 잭 리처를 돕는 건 해병대 출신의 드럼연주자와 냉전시대를 겪은 기갑부대 출신의 노인입니다. 갱단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웨이트리스와 재즈 밴드의 리더 역시 잭 리처의 지원군으로 활약합니다.

잭 리처가 갱단의 살육전을 촉발시키는 초반부는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전개됩니다. 잭 리처의 소행을 상대 갱단의 도발로 여긴 오해들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무자비한 보복전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갱단들이 잭 리처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잭 리처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갱단들과의 전쟁을 냉정하면서도 한 치의 자비심도 없이 벌여나갑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웨이트리스와 짧지만 강렬한 로맨스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캐릭터지만 나름 할 일은 다 하는 매력적인 잭 리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유일하게 읽은 나이트 스쿨과 달리 별 5개를 주지 못한 건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잭 리처에게 도무지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어쩌면 이건 이 시리즈의 가장 고유한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좀 혼란스러웠던 점입니다. 위기의 노인을 구하고 그를 돕는 과정이나 웨이트리스와 로맨스를 벌이는 대목에서도 잭 리처에게서 온기라곤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비즈니스의 일환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나이트 스쿨의 서평을 다시 찾아보니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품에 따라 인간미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장식한 거대 세력과의 일전입니다. 갱단들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었는데 그보다 더 거대한 세력을 등장시켜 잭 리처를 폭주하게 만든 건 왠지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우연히 얻은 지원군들이 없었다면 100% 불가능한 작전이었기에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갱단들과의 전쟁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훨씬 더 깔끔한 마무리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자체보다 엉뚱한 소리가 더 많았던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쓰다 보니 조만간 잭 리처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매력 넘치는 캐릭터인데 그의 초기 모습부터 제대로 맛보지 않으면 잭 리처는 물론 이 시리즈 자체를 만끽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뭉텅이로 빠진 초창기 작품들이 뒤늦게 한국에 출간될 것 같진 않지만 아쉬운대로 첫 편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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