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메이드
프리다 맥파든 지음, 김은영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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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된 밀리는 전과 사실을 숨긴 채 윈체스터 집안의 저택에 가사도우미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채용했던 안주인 니나가 갑자기 냉랭한 태도와 함께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하자 밀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니나의 정신병원 입원 내력은 물론 어린 딸을 해치려 했다는 말까지 들은 뒤론 겁에 질리기까지 합니다. 그런 밀리에게 유일한 위안은 니나의 남편 앤드류의 친절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앤드류가 왜 니나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밀리는 어느 새 자신이 점점 앤드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곤 크게 놀랍니다.

 

한때 범람했던 도메스틱 스릴러에 질려 잠시 멀리하고 있던 터라 신간소식에서 하우스메이드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보류목록에 넣어뒀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프리다 맥파든의 핸디맨을 읽곤 마음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고 접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의외로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도메스틱 스릴러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긴 하지만 하우스메이드는 군살 없이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때문에 큰 거슬림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가석방 후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전과를 숨긴 채 저택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밀리, 하루에도 몇 번씩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보이며 밀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안주인 니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펙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앤드류 등 비밀과 거짓말로 포장된 듯한 불온한 분위기를 내뿜는 세 주인공의 행보는 시종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거기에다 밀리가 저택에 온 첫날, 속삭이듯 위험이라는 말을 건넨 이탈리아인 정원사 엔조, 니나의 정신병력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며 거침없이 그녀를 비난하는 이웃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밖에서만 문을 잠글 수 있는 3층의 좁은 다락방의 냉기 등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설정들도 눈길을 끄는 부분들입니다.

 

모두 3부로 구성돼있는데, 2부 시작과 함께 이 작품의 큰 반전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내용들은 서평에서 공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도메스틱 스릴러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설정이라 그리 놀랍진 않지만, 그래도 꽤 묵직한 힘을 가진 반전인데다 세 주인공 모두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나름 쾌감을 맛볼 수 있는 클라이맥스도 좋았고, 소소한 짜릿함이 느껴지는 에필로그도 매력적입니다. 심리묘사에 치중하거나 느리고 지루한 전개로 맥 빠지게 만드는 평범한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달리 간단명료한 서사가 장점인 작품이라고 할까요?

 

올해 출간된 프리다 맥파든의 두 작품 - ‘핸디맨’, ‘하우스메이드’ - 은 각각 연쇄살인 스릴러와 도메스틱 스릴러로 장르가 확연히 구분되지만, 읽기 쉽고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뇌손상 전문의이자 소설가인 그녀의 작품이 얼마나 더 한국에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관심작가 목록에 올려놔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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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의 파수꾼 이판사판
신카와 호타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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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꿈을 접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들어간 29살의 시로쿠마 가에데는 5년차 심사관이자 가라테 유단자라는 탄탄한 스펙을 갖고 있지만 실은 무모하고 운도 없고 한없이 인정만 많은 여린 인물입니다. 담합 사건의 참고인이 자신에게 조사받은 뒤 자살한 일로 자괴감에 빠져있던 시로쿠마에게 새로운 미션과 새로운 파트너가 주어집니다. 도치키현 S시에서 웨딩홀을 운영하는 호텔 세 곳의 담합 행위를 조사하게 된 시로쿠마는 심사관으로서의 다짐을 새롭게 하지만, 자신의 새 파트너가 된 천재고쇼부 쓰토무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도쿄대 법학부 수석은 물론 하버드 유학까지 다녀와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고쇼부는 예의는 물론 상대방의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무뢰파이기 때문입니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은 조사 현장에서도 시종 충돌을 거듭합니다.

 

북스피어 대표 삼송 김사장 님의 야심작 이판사판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기도 하지만, ‘공정의 파수꾼은 데뷔작 전남친의 유언장으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2021) 대상을 수상한 신카와 호타테의 두 번째 작품이라 더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전남친의 유언장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유언으로 시작된 돈에 미친 여자 변호사의 유산 상속 미스터리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경쾌하고 롤러코스터 같은 B급 코미디 느낌까지 배어있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런 신카와 호타테가 일반인에겐 낯설기만 한 공정위 심사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고 선언한 터라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기대됐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정위는 뉴스에서만 간혹 접할 수 있을 뿐 일반인에게는 낯선 조직입니다. 하지만 담합, 카르텔, 하청 갑질, 독점 등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경쟁을 조사한다는 면에서 보면 경찰이나 검찰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강제적인 수사권도 없고 기소권도 없다 보니 힘도 없고 목소리도 약한 조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념은 한 무리의 우수한 사람, 강한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안 되는 것이다. (중략) 도전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경쟁이고, 우리 공정위는 경쟁을 수호하는 지킴이.”(p290)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그들의 신념을 수시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안 그래도 인간적이고 여리기만 한 시로쿠마는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는 5년차 중참 심사관이긴 하지만 그런 무기력 때문에 딱히 대단한 사명감 같은 걸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시로쿠마가 재수 없는 사이코패스 천재고쇼부와 함께 S시의 호텔들이 자행하는 웨딩 카르텔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된 심사관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공정의 파수꾼의 핵심 서사입니다.

 

공정위라는 조직도 낯설지만 다루는 사건마저 지방도시의 웨딩 카르텔이라는, 다소 심심하고 소소해 보이는 설정이라 전남친의 유언장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도 잠시 주저할 것 같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로쿠마와 고쇼부는 물론 공정위의 여러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그들만의 정의 구현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연쇄살인범을 잡아낸 뛰어난 형사가 구현한 정의와는 또 다른 매력을 맛보게 해줍니다. 또 뉴스 외에는 그 존재감조차 알 수 없는 공정위라는 곳이 실은 세상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도 덤으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요즘 통 일드를 안 봐서 잘 몰랐지만 전남친의 유언장공정의 파수꾼모두 후지TV에서 방송됐다는데, 같은 원작자의 작품이 2분기 연속으로 방송된 건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라 조만간 찾아보려고 합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이미 일본에서는 후속작인 공정의 파수꾼-내정의 왕자가 출간됐다고 합니다. 첫 편이 공정위를 소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면 후속작은 스토리와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악당도 무척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는데, 이 작품 말미에 규슈 사무소로 전근 가게 된 시로쿠마가 꽤 큰 사건에 휘말릴 것으로 보입니다. 제 취향인 잔혹한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시로쿠마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사족이지만, 인터넷 서점에서는 논스톱 엔터테인먼트 법률 미스터리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냥 공정위 미스터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엔터테이먼트라는 표현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잔혹한 사건이나 명탐정이 등장하진 않지만 마냥 오락성만 추구하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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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올빼미
누쿠이 도쿠로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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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도쿠로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 희생된 자 모두의 심리를 아우르며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 (‘미소 짓는 사람후반부에 실린 해설)

 

통곡’, ‘난반사’, ‘어리석은 자의 기록’ (구판 제목은 우행록’) 등에 이어 열 번째로 만난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입니다. 3개에서 5개에 이르기까지 다소 굴곡 있는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 어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와도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늘 신작 소식을 기다리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독자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작가라는 평처럼 그의 작품들은 매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만들곤 합니다. 사건은 해결되지만 통쾌하거나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애초 끔찍한 비극의 출발점이 됐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새삼 자각하며 묵직한 여운과 함께 책장을 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종이올빼미는 네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세계의 이야기이다.”라는 본문 첫 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수록작 모두 사형 대국이 된 일본이라는 공통된 가상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범죄를 억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사형을 선택했고, 현재는 사형을 반대하면 이상한 종교에 빠졌거나 범죄자를 두둔하는 자로 취급받거나 정의를 반대하는 으로 비난받는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목숨만 빼고 피해자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망가뜨린 범인(‘보지도 말고, 쓰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지어다’), 살의의 유무와 관계없이 무조건 사형이 선고되는 실태(‘새장 속의 새들’), 자살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 국가에 의한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풀이되는 어이없는 비극(‘레밍의 무리’) 등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사형제도에 관한 묵직한 고찰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표제작이자 가장 긴 분량의 중편 종이올빼미는 사형제도에 관한 찬반론을 가장 정공법에 가까운 스타일로 다룬 작품으로 살해당한 연인의 감춰진 과거를 훑어가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구한 사연이라든가 복수와 응징, 용서와 속죄 등 사형제도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와 감정을 누쿠이 도쿠로 특유의 서사를 통해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사형제도에 관한 논란을 그린 미스터리를 여러 편 읽었지만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세계라는, 당연한 일 아닌가 싶으면서도 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가상일뿐인 설정 때문에 종이올빼미는 무척 독특한 여운을 남긴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종이올빼미는 사형제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찬반을 막론하고 사형제도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많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누쿠이 도쿠로를 아직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면 어리석은 자의 기록’ (구판 제목은 우행록’), ‘통곡’, ‘난반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지만 재미를 겸비한 그만의 독특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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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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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은 자신이 소유한 땅과 맞붙어있는 미혼모 쉽터 사랑의 집의 부지를 탐내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를 섭외하여 사랑의 집운영자인 오유라의 비리를 파헤치도록 하고, 젊고 강직해 보이는 변호사 하나연을 자신이 급조한 시민단체의 대표로 영입한 것입니다. 시민운동가로서 명망을 얻고 있었지만 실은 오유라는 비리덩어리 그 자체였고, 이진수와 하나연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낸 한병진은 무난한 성공을 기대했지만, 시장을 비롯하여 권력자들과 단단하게 이어진 오유라의 저항은 만만치 않습니다. ‘땅 빼앗기로 시작된 작은 싸움은 어느 새 폭로전은 물론 피와 살이 튀는 무자비한 전쟁으로 확대됩니다.

 

2018년에 출간된 신원섭의 짐승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선택과 행동은 하나같이 짐승의 그것과 닮아있는 여섯 명의 인물을 등장시킨 흥미로운 군상극이자 매력적인 스릴러였습니다. 이후 몇 편의 앤솔로지에서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신원섭이 5년 만에 새로운 장편을 펴내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제목부터 눈길을 끄는 요란한 아침의 나라40년간 위성도시 베드타운이었지만 지금은 쇠락의 기운이 더 강하게 감도는 가양시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주인공이 없는 속도감 넘치는 군상극이자 누아르의 기운이 짙게 밴 스릴러입니다. 이야기의 연속성은 전혀 없지만 전작에 등장했던 두 인물 - 경찰 출신 용역깡패 이진수, 재력가이자 시장의 최측근인 도미애 5년 만에 악연을 거듭하는 대목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땅의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바로 옆 미혼모 쉼터의 부지가 필요했던 부동산 개발업자 한병진의 탐욕에서 시작된 땅 빼앗기 싸움은 그 상대가 시장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유대 관계가 깊은 사악한 시민운동가 오유라인 탓에 쉽사리 마무리되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커져갑니다. 오유라 죽이기로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그녀의 동지들인 시장과 권력자들을 아군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싸움의 주체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비열한 인물들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깡패 이진수와 변호사 하나연 역시 악당은 아니더라도 정의나 선()과는 거리가 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이라 독자 입장에서 딱히 이입하며 쫓아갈 인물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군상극은 오히려 독자에게 상황 전체를 골고루 조망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탐욕, 오만, 증오, 시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맞이하는 파멸의 전 과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라고 할까요?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면 여성 누아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패와 비리를 일삼는 사랑의 집대표 오유라,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않는 시장 김주미, 시장의 귀찮은 일들을 은밀히 처리해주는 실력자 도미애, 인권변호사를 표방하지만 실은 부와 명예를 탐내는 현실주의자 하나연,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나약한 미혼모에서 끝내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마는 고영희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의 주요 서사는 대부분 여성이 끌고 갑니다. 누아르의 별미인 폭력은 남성들의 몫이지만 그저 말 그대로 별미일 뿐 실제로 가양시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이끄는 것은 모두 여성입니다. 정작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던 점인데, 이 작품의 특별한 미덕이기도 하니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사랑의 집이슈가 너무 쉽게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된다는 점(요즘 흉악한 뉴스가 워낙 많다 보니 가양시 정도에서 벌어진 흔하디흔한 비리에 전국적인 관심이 몰린다는 게 영 어색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 막판에 너무 서둘러 마무리한 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후속작 한 편 정도는 더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갑작스레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서 을 보게 된 건 무척 아쉬웠습니다.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되는 한국의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이 신원섭입니다. 앤솔로지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해왔지만 아무래도 장편이 더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새로운 군상극도 괜찮고, 확실한 주인공이 끌고 가는 누아르도 괜찮으니 머잖아 그의 새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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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맨을 찾아서
리처드 치즈마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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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 메릴랜드주의 소도시 에지우드에서 참혹한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는 모두 긴 머리의 10대 소녀들이었고, 참혹한 폭행을 당한 후 교살된 채 발견됩니다. 엽기적인 범행 때문에 언론에서는 범인에게 부기맨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대대적인 수사가 소도시 에지우드를 휩쓸지만 범인은 작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은 채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범행을 이어갑니다. 범죄미스터리와 공포물 소설가의 길을 꿈꾸는 22살의 청년 리처드 치즈마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잠시 돌아온 고향에서 마주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 또래 기자인 칼리 올브라이트와 함께 부기맨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실화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파격 범죄 스릴러라는 띠지의 문구대로 부기맨을 찾아서는 범죄 실화를 추적하는 르포와 허구의 세계를 그리는 소설이 절묘하게 믹스된 작품입니다. 1988년 당시 22살이던 작가 리처드 치즈마가 자신의 고향 에지우드에서 직접 겪은 연쇄살인사건을 1인칭 시점의 서술과 함께 수십 장의 사진(피해자, 사건현장, 담당수사관 등)까지 동원하여 디테일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교과서적인 르포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소설로서의 미덕도 제대로 갖춘 특이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이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십분 즐기고 싶다면 부디 첫 페이지부터 순차적으로 따라가 보라.”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일단은 화자인 22살 리처드 치즈마의 부기맨 추적기를 한 페이지씩 음미하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DNA 분석이 정교하지도, 신속하지도 않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범인의 행적 때문에 경찰은 미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라일 하퍼라는 훌륭한 수사관이 있긴 하지만 부기맨을 추적하는 역할은 주인공 치즈마와 기자 칼 리가 맡습니다. 치즈마가 장르물 소설가의 촉을 동원해 연쇄살인의 진상을 밝히려 한다면, 칼리는 정보원과 취재를 통해 경찰이 놓친 부분을 포착하려는 맹렬 기자로서 활약합니다. 또한 두 사람은 부기맨으로 보이는 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위협을 당하기도 하는데, 안 그래도 범인은 에지우드 사람이 분명하다.”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로 드러난 터라 그 위협은 두 사람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챕터 사이사이에 배치된 다양한 종류의 사진들입니다. 살해된 10대 소녀들의 생전 사진, 사건이 벌어진 현장, 수사 중인 경찰, 취재 중인 칼리 등 다양한 사진들이 게재돼있는데, 조금 전까지 활자로 접한 인물과 풍경이 생생한 사진으로 눈앞에 나타나자 부기맨의 공포는 더 이상 소설 속 허구가 아닌 피부에 와 닿는 실체로 전화됩니다. 동시에 다시 한 번 과연 어디까지가 실화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르포와 소설의 미덕이 절묘하게 믹스된 부기맨을 찾아서의 진면목은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죄미스터리로서도 매력적이지만 형식이 어떻게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 무척 색다른 간식 같은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한 얼얼함도 즐길 수 있으니 작가의 말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족이자 쓴 소리를 한마디만 보태자면, 어쩌다 한 번씩 눈에 거슬렸던 의아한 번역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곤 했는데, 오역은 아니지만 매끄럽지 않거나 능동태와 수동태가 뒤바뀐 문장들은 편집과정 상의 옥의 티로 보였습니다. ‘부기맨을 찾아서가 좋은 성과를 거둬 증쇄를 하게 된다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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