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유괴 붉은 박물관 시리즈 2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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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경시청 수사1과에서 한직 중의 한직인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일명 붉은 박물관으로 추락한 데라다 사토시와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은 물론 천재적인 추리능력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수년째 붉은 박물관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히이로 사에코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붉은 박물관의 원래 목적은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간혹 이 사건의 재수사를 실시한다!”라는 사에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곤 합니다. 사에코는 과거의 자료들 속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것이 미제사건이든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든 관계없이 기어이 재수사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라는 멋진 사명감을 갖고 있긴 해도 의사소통능력 자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탓에 탐문은 아예 불가능한 4차원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 초짜 티를 벗진 못한데다 비록 좌천되긴 했어도 수사1과 출신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사토시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현장 조사와 탐문을 도맡습니다.

 

사에코의 추리는 대범하다 못해 기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추리력을 발휘할 때마다 사토시가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고 탄식을 내뱉곤 하는데, 그것은 곧 독자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사건의 대전제들을 180도 뒤집는가 하면, 애초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추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다가 곧바로 진상에 도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에코의 기행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을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소스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인 붉은 박물관에서 사에코에게 하도 여러 차례 놀란 덕분인지,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섯 편의 수록작 중 한 편은 (비록 과정까지는 제대로 맞히지 못했지만) 중반쯤 범인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전작의 교훈을 제대로 숙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수록작에서 사에코의 파격적인 추리는 여전히 빛났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는 독자와 사토시의 탄식 역시 매작품마다 반복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붉은 박물관서평에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기억 속의 유괴역시 비슷한 느낌입니다. 물론 붉은 박물관보다는 훨씬 더 현실감 있고 안정적으로 읽혔지만 아무래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비약하는 사에코의 모습에서 살짝 이물감이 느껴진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비약 없는 사에코였다면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혔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붉은 박물관수록작 중 일부가 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억 속의 유괴에도 영상화가 기대되는 수록작들이 몇 편 있습니다. 의문의 연쇄방화범을 그린 연화와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표제작 기억 속의 유괴가 가장 기대됐고, 영상화가 쉽진 않겠지만 본격의 맛이 잘 살아있는 황혼의 옥상에서역시 드라마로 보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에 4차원 천재와 어리바리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21월에 출간됐으니 어쩌면 1~2년 안에 그들의 세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이지만 설계와 구성에 적잖은 공이 필요한 작품들이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새 작품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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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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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서세현은 소도시 용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피해자를 부검하던 중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죽은 피해자를 해부한 뒤 실로 꿰맨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서세현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범행수법이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바로 오래 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연쇄살인마이자 친아빠인 윤조균입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만일 그가 경찰의 손에 잡히고 자신의 친아빠임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미래는 완전히 파멸될 것이라고 여긴 서세현은 경찰보다 먼저 윤조균을 찾아내 죽이기로 합니다. 일부러 용천경찰서 인근에 거처를 삼은 서세현은 담당 형사인 정정현에게 접근하여 수사 정보를 빼내려 합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서세현은 윤조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머물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독특한 인물들을 앞세운 연쇄살인 스릴러입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의관 서세현, 소년이던 21년 전 연쇄살인마 윤조균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적 있으며 경찰이 돼서도 미제살인사건에 집착하는 신참 강력팀장 정정현, 그리고 20여 년에 걸쳐 연쇄살인을 저질러 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윤조균이 그들입니다.

 

법의관 서세현이 아버지이자 연쇄살인마인 윤조균을 쫓는 이유는 정의감도 사명감도 아닙니다. 그가 체포되어 과거 연쇄살인행각이 폭로될 경우 미성년자 시절 자신의 공범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법의관 딸과 연쇄살인마 아버지의 대결이라는 구도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일으키는 설정인데, 거기에 가세한 형사 정정현은 베테랑도 아니고 마초 기질도 전혀 없는, 오히려 숙맥 같은 인물이라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어차피 광역수사대가 사건을 접수할 거라는 생각에 용천경찰서 내 누구도 사건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긴 하지만 그는 경험도, 추리력도 딸리는 초짜 팀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에겐 미제사건에 대한 특별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연쇄살인사건이 과거의 미제사건들과 접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수사 자료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정현의 미제사건에 대한 집착은 그와 공조수사를 벌이던 서세현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큰 그림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법의관과 형사로 시작되지만 곧바로 형사가 쫓는 연쇄살인마와 그 공범이라는 구도가 동시에 전개되면서 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핸디맨이나 깜빡이는 소녀들같은 영미권 스릴러에서도 종종 차용하는 연쇄살인마의 자식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흡입력이 있는데 메스를 든 사냥꾼의 경우 연쇄살인마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이라는 설정까지 더해져서 그 구도가 더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큰 그림에 비해 디테일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쉴 틈도 없이 바쁜 법의관이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의 경찰서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형사보다 더 형사처럼 활약한다.’는 설정은 읽는 내내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또 특별할 것도 없는 법의관의 현장 진술을 마치 대단한 추리력의 산물인 양 감탄하며 추종하는 형사팀장 정정현의 캐릭터도 작위적이었고, 방송국 차량이 진을 칠 정도로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됐는데도 불구하고 (정정현 홀로 고군분투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사를 기피하는 듯한 용천경찰서 수사진들의 태도도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초반부터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설정들이 뇌리에 박힌 탓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았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도 당초 기대했던 스릴감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디테일이 좀더 자연스러웠더라면 잘 짜인 큰 그림이 더 빛을 발했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한국의 스릴러 작가를 만난 일은 무척 반가웠지만 그만큼의 아쉬움도 남긴 작품입니다. 다음에는 그 아쉬움들을 모두 잊게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만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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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걷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1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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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가스의 노다지로 알려진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FBI는 에이머스 데커와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을 파견합니다. FBI가 개입할 만한 사건으로 보이지 않은데다 정작 데커와 재미슨조차도 자신들이 파견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문제는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살인과 실종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점입니다. 데커와 재미슨은 살인사건 외에도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런던의 분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사방에서 석유 시추가 이뤄지고 가스의 불기둥이 치솟는가 하면, 오래된 공군기지는 철저한 경비 속에 음모가 도사리는 듯 보였고, 인접한 종교단체 역시 전혀 순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석유와 가스가 창출한 부를 놓고 갈등을 빚는 지역유지들 역시 수상해 보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여섯 번째 이야기로, 전작인 진실에 갇힌 남자이후 (한국 기준으로) 3년 만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미식축구선수 시절 엄청난 부상과 함께 과잉기억증후군공감각이라는 증상을 얻은 데커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FBI에서 일하게 됐고,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해왔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데커는 그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기보다 발군의 추리력과 순발력으로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재미있는 건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이 데커에게 내민 숙제가 꽤나 복잡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모두 연관된 것 같지만 동시에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데커는 재미슨과 함께 런던에 파견된 첫 번째 이유, 즉 한 여성의 죽음에 몰입하려 하지만, 세기말적 풍경을 자아내는 석유 시추시설, 지금은 그 용도가 불분명한 오랜 공군기지, 비밀을 감추는 듯한 종교단체, 그리고 호황과 불황을 거듭해 온 런던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여온 지역유지 등 혼란스러운 상황들 때문에 좀처럼 수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합니다. 특히 정체불명의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을 노린 일도, 또 위기의 순간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인물의 등장도 데커의 수사 방향에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한 여성의 죽음의 배경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사선을 걷는 남자는 복잡한 설계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꽤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는데, 이 많은 사건들이 전부 제각각의 단서를 남기는 바람에 하필데커가 와있는 중에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난 건지, 아니면 그 많은 사건들이 실은 한 뿌리에서 시작된, 모조리 연관된 사건들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메모장에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적어놓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을 쪼개 나눠 읽기보다는 주말에 완주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선을 걷는 남자에는 데커와 재미슨 콤비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윌 로비와 제시카 릴 콤비입니다. 해외 관련 첩보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 가공할 살상력과 무력을 선보이며 데커와 재미슨의 수호천사같은 역할을 맡습니다. 후속작에서도 이들이 데커의 도우미가 돼줄 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모로 합이 잘 맞는 네 사람의 협업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워낙 서사의 판이 크고 복잡하게 짜여서 그런지 다른 어느 작품보다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다소 아쉬웠던 건 결정적인 순간마다 데커의 추리가 다소 지나치게 비약을 반복한 점입니다.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이 떠올랐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데커의 추리는 동료들은 물론 독자마저 멀찌감치 떼어놓고 홀로 폭주하곤 합니다. 나중에 그에 대해 딱히 설명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선지 ... 그런 거였나?”라고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흥분지수가 고조된 지점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인 ‘Long Shadows’2022년에 이미 출간됐습니다. 올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데이비드 발다치의 새 시리즈 ‘620분의 남자의 두 번째 작품도 기대되지만 에이머스 데커의 새 이야기도 빠른 시간 안에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흐르기 때문인데 이왕이면 2024년 상반기에 두 작품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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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대관람차 버티고 시리즈
유우야 토시오 지음, 김진환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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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정오, 전통 깊은 놀이공원 드림랜드에 설치된 대관람차 드림아이가 갑자기 멈춰섭니다. 그리고 그 직후 꼭대기에 있던 관람차 한 대가 지상으로 추락하며 폭발합니다. 스스로를 난쟁이라고 칭한 범인은 어린 딸과 함께 곤돌라에 갇힌 전직 형사 나카야마 히데오를 교섭자로 지목하곤 자신의 요구사항을 경찰에 전달할 것을 지시합니다. 얼마 후 나카야마는 이 희대의 인질극이 5년 전 미해결 사건으로 마무리된 한 소녀의 처참한 죽음과 관련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지상에서 수사를 지휘하게 된 경시청 수사1과 카이자키는 오랜 악연으로 얽힌 경찰학교 동기 나카야마와 뜻밖의 상황에서 재회하게 되자 미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어쩌면 그를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음울하면서도 한없이 애틋해보여서 단번에 눈길을 잡아끈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건 그동안 로버트 크레이스, 리 차일드, 이언 랜킨 등 영미권 작가의 스릴러만 출간해온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일본 미스터리인데다 그것도 신인작가의 데뷔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에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만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사건 자체도 흥미로운데다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이리저리 엉킨 복잡한 감정들이 사건 이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가?” 이상의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또한 5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참혹한 소녀 살해사건이 이번 인질극의 배후에 있는 게 분명하지만 곤돌라에 갇힌 나카야마도, 현장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카이자키도 그 관련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탓에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하더라도 탈출할 방법이 없는 곳을 범행 현장으로 삼은데다 마치 쾌락범에 의한 극장형 범죄를 추구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거액의 돈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혼선을 거듭하는 난쟁이의 범행동기와 최종 목표가 미스터리의 핵심이지만, 독자의 눈길을 더 끄는 건 수사의 두 주체인 나카야마와 카이자키의 과거와 현재에 걸친 악연입니다. 경찰학교 시절 정의를 논하며 함께 미래를 그렸지만, 나카야마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지역파출소 근무에 만족하며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시 한 반면 카이자키는 출세욕을 감추지 않으며 경시청 수사1과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렇게 갈라섰던 두 사람은 5년 전 소녀 살해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등을 돌렸고, 당시 미결로 처리된 사건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관람차 인질극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했습니다. 서로를 난쟁이의 공범으로 의심하면서도 함께 난쟁이를 추적해야 하는 기묘한 처지로 말입니다. 이들의 팽팽한 심리전은 미스터리 못잖게 이 작품의 핵심 서사입니다.

 

만점을 주지 못하고 별 1개를 뺀 이유는 세 가지인데, 하나는 일부 인물들의 행동에 현실감이 결여됐거나 설명이 부족하거나 다소 비약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줄거리를 정리하다 보니 이런 부자연스러운 점들이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물론 제가 놓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카야마와 카이자키 입으로 설파되곤 하는 주제의식 혹은 가치관입니다. 필요하긴 했지만 좀 과해 보였다고 할까요? 마지막으로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가 범행수법과 조금은 따로 노는 듯 보인 점입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을까?”라는 의문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몇몇 아쉬움은 있었지만 신인답지 않은 정교한 설계와 풍성한 서사는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버티고 시리즈가 첫 일본 미스터리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데뷔작을 뛰어넘는 유우야 토시오의 두 번째 작품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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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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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데라다 사토시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좌천되고 맙니다. 그의 새 근무지는 이른바 붉은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미결 또는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그곳은 관장 한 명과 관원 한 명이 전부인 한직 중의 한직입니다. 전임자들 대부분이 얼마 못 버티고 경찰 옷을 벗었다는 그곳에서 사토시는 언젠가 수사1과로 복귀할 각오를 다지지만, 4차원을 뛰어넘는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 덕분에 예상치도 못한 특별한 수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과거의 수사 자료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느끼면 재수사!”를 선언하는 사에코가 처음엔 망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 천재적인 추리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을 무대 삼아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통해 오랜 시간 묻혀있던 진실을 알아내거나 잘못 알려졌던 진상을 바로잡는다는 설정 자체도 흥미롭지만, ‘붉은 박물관의 진짜 미덕은 본격 미스터리와 다양한 트릭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특히 모든 단서를 독자와 공유한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결말을 이끌어내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작가에게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오랜만에 맛본 본격과 트릭의 향연은 고전의 풍미까지 품고 있어서 더욱 진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미덕을 몇 배는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묘한 콤비 플레이를 선보이는 두 주인공입니다. 모든 수사관이 꿈꾸는 경시청 수사1과의 멤버가 됐지만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좌천의 쓴맛을 본 데라다 사토시는 사실 뛰어난 수사관으로 보기는 어려운 인물입니다. 오히려 아직 성장이 많이 필요한 초보의 티가 폴폴 풍기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사를 이끄는 박물관장히이로 사에코와 잘 어울리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창백한 피부와 그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 웃는다라는 기능이 결여된 듯한 인형처럼 차가운 얼굴. 심지어 의사소통 능력마저 심각하게 부족.”이라는, 이세계 인물에 가까운 사에코의 캐릭터는 그녀의 비범한 추리능력만큼이나 독특한 개성을 자랑합니다.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과 계급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8년째 박물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도 사토시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사에코에게는 붉은 박물관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습니다.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p51)

 

실제로 사에코는 새로 도착한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대할 때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재수사!”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독자도 사토시도 사에코가 위화감을 느낀 이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에코가 지시하는 수사 방향도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든 증거와 서류가 눈앞에 있는데도 뭐가 이상한 건지, 왜 이상한 건지 좀처럼 사에코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사에코가 진상을 밝히는 대목에 이르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위화감의 정체와 이해 불가능했던 맥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토시뿐 아니라 독자 역시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하지?”라는 의문과 감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수록된 다섯 편 모두 독특한 설정과 의외의 엔딩을 품고 있어서 마치 본격과 트릭의 뷔페를 맛보는 듯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수록작 중 몇 편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책에서 느낀 매력이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괴짜 천재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무리한 비약만큼은 아니지만, 사에코의 비범함이 살짝 현실감을 넘어서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붉은 박물관이후 두 달 만에 후속작인 기억 속의 유괴도 한국에 소개됐습니다. 다시 한 번 본격과 트릭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돼서 반갑기도 하지만, ‘붉은 박물관막판에 떡밥처럼 뿌려진 사에코의 과거 아버지와 관련 있는 듯한 - 가 공개될지도 몰라 더 기대가 됩니다. 조만간 기억 속의 유괴가 제 손에 들어올 텐데 밀린 숙제들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도착과 함께 첫 장을 펼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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