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면 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 4
헬렌 라일리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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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의 나탈리 플라벨은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다.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그녀의 부에 기생하는 반면 이복언니 이브는 나탈리의 재산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독립함으로써 가족과 의절한다. 이브가 오랜 의절 끝에 나탈리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과 불안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브는 자신을 미워하고 나탈리를 편애하던 이모 샬럿의 눈길이 무섭다. 그런데 플라벨 가족의 사유지 공원에서 샬럿이 총에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이브를 비롯한 플라벨 가족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문이 열리면클래식 추리소설의 잃어버린 보석, 잊혀진 미스터리 작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리슐리외 호텔 살인’(아니타 블랙몬)을 재미있게 읽어서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 작품을 쓴 헬렌 라일리 역시 대단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작가라서 읽기 전부터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맨해튼 살인 수사반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고 해서 놀랐는데, ‘문이 열리면은 그 중 열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시리즈가 제대로 무르익었을 무렵에 나온 작품으로 보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1940년대 초반, 겨울 안개에 뒤덮인 을씨년스러운 뉴욕의 부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당일 오후에서 저녁까지 저택에 모였던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이 틀림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를 파악할 수 없어 애를 먹던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연이은 탐문과 철저한 조사로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 이면에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동기가 숨어있는 것 같아서 진범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비공식적인 연장 수사에 돌입합니다.

 

경찰 미스터리라고 하면 간결하고 쉬운 문장과 빠른 전개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이 열리면은 심리 스릴러로 분류해도 괜찮을 만큼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두 장르가 미묘하게 혼합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전시체제 하의 뉴욕, 사방을 둘러싼 지독한 겨울 안개,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저택 등 풍경 묘사에 있어서도 작가는 다소 과도해 보일 정도로 공을 들이는데, 그 때문인지 초반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라는 한 독자의 서평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키 경감은 딱히 특징적인 캐릭터는 없지만 성실하고 모범적인 경찰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인성, 교과서 같은 수사 기법, 진실을 가리기 위해 끝까지 매진하는 열정 등 장점밖에 없어 보이는 경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조금은 무색무취해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30여 편이나 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뭔가 하나쯤은 모난 데도 있고 괴짜 같은 구석도 있을 만한데 너무 얌전한 범생이처럼 그려졌다고 할까요?

 

플라벨 집안을 잠식하고 있는 불안과 불온, 그리고 살인사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비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살인사건 외에도 연이어 플라벨 집안의 인물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고, 막판에 밝혀진 뜻밖의 범인과 범행 동기는 기대 이상의 반전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고전미를 발산하는 갖가지 설정도 오감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요소들입니다.

 

다만, 인물 심리와 풍경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가 개인적인 취향과 잘 맞지 않았고, 유능하지만 특징이나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 역시 다소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인데, 저와 반대로 헬렌 라일리의 스타일이 잘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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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시간의 법정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천감재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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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연상되듯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법정 미스터리에 타임 슬립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5년 전 의붓딸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버지의 무고함을 연이은 타임 슬립을 통해 밝히는 것이 법원서기관인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의 미션인데, 문제는 그가 미션에 성공하여 과거를 바꿔버린 탓에 현재가 심각하게 뒤틀어지는 것은 물론 아버지마저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두면 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되고, 과거를 바꾸면 아버지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딜레마 속에서 우구이 스구루는 제대로 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거듭 타임 슬립을 감행합니다.

 

원래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는 규칙이었습니다. 현재가 뒤틀어지기도 하거니와 평행세계 같은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나 독자 모두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금기를 깬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뒤틀린 시간의 법정의 경우 아예 돌직구처럼 정면으로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은 나름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과거를 바꿀 수도, 안 바꿀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별 3개의 평점에 그친 이유는 중반 이후 새로운 설정이 추가되는 대목에서부터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따라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하고 난해한 작가의 설계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나쁜 머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속도감도, 긴장감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우구이 스구루가 딱히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도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시점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전히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 보니 솔직히 후반부는 거의 스킵하듯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법정유희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그보다 한국에 9개월 정도 앞서 출간된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별 4.5개를 준 법정유희는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저처럼 뒤틀린 시간의 법정에 적응하지 못한 독자라도 법정유희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뜻입니다.

천재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독자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겐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너무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서평을 쓰기 전에 일부러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지 않았는데,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고 나면 다른 독자들의 생각을 꼭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혹시나 제가 성급하게 오판을 저지른 게 확실하다면 (고통스런 책읽기가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도 조금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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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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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충격과 여운이 다시 생각나네요. ‘십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유키 하루오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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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리스트
재키 캐블러 지음, 정미정 옮김 / 그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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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전문 프리랜서 기자인 메리 엘리스는 자기 이름이 포함된 살인 예고장을 받습니다. 범인이 보낸 예고장에는 매월 1일 한 명씩, 넉 달에 걸쳐 네 명이 살해될 거라고 적혀있는데, 문제는 버밍엄의 제인이나 카디프의 데이비드처럼 대도시에 사는 흔한 이름이라 피해자를 특정할 수도, 미리 대처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살인 예고장엔 마지막 타깃으로 첼트넘의 메리를 지목했는데, 메리는 부디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범죄전문 기자 특유의 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사건 조사에 나서기로 합니다. 한편 예고장에 적힌 대로 석 달에 걸쳐 세 명이 살해당하지만 경찰은 희생자들 간의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해 궁지에 몰립니다.

 

독특한 예고살인을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입니다. 넉 달에 걸쳐 매월 1일마다 한 명씩 살해하겠다고 선언한 범인은 예고장에 희생자의 이름과 주거지를 공개했지만, 말하자면 서울에 사는 김씨식이라 경찰 입장에선 무용지물이나 없는 단서일 뿐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앞선 세 명의 희생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해된 것과 달리 마지막 타깃인 첼트넘의 메리는 살인 예고장을 직접 전달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메리와 경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 입장에선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셈인데,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경찰도, 메리도 대혼란에 빠집니다.

 

희생자들 간에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없고, 합동수사를 한다고 해도 관할서가 전부 달라 화상회의 이상의 수사를 할 수도 없으며, 한 달 단위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사건 자체가 주목받기는 어려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메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스런 과거사나 그녀가 겪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그녀 주변 사람들의 수상쩍은 언행 등입니다. 살인 예고장을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스릴러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8살 때 메리의 아버지와 절친을 앗아간 대형 화재의 비밀, 애인 있는 남사친피터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벌이는 위험한 사랑, 공유오피스의 동료지만 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두 남자에 대한 의심 등이 살인 예고장의 공포와 함께 메리의 일상을 잠식합니다.

 

중반부와 막판에 터지는 연이은 반전도 흥미롭고, 페이지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지만 후한 평점을 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살인 리스트가 제가 심리스릴러를 기피하는 이유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거듭된 심리묘사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고, 뭔가 있을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상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게 확실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서 4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과도하게 보였습니다.

초반에는 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출발하지만, 사건 자체가 임팩트가 없는 상태에서 심리스릴러 서사마저 느슨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중반부쯤부터 동력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터진 첫 번째 반전이 새 연료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출판사 자체 스포일러때문에 미리 짐작하고 있던 바라 잠시 맥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개글과 띠지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은 나름 출판사의 홍보 포인트였겠지만, 눈썰미 있는 스릴러 독자라면 아마 저처럼 스포일러로 받아들였을 거란 생각입니다.)

 

살인 리스트퍼펙트 커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재키 캐블러의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심리스릴러는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퍼펙트 커플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리스트의 경우 살인사건과 범인 찾기라는 미스터리 서사가 병행돼서 딱 한 번만 더!”라며 읽어보기로 했던 건데, 실은 미스터리 요소들 대부분이 허술한 편이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마저 너무 실망스러워서 혹시 재키 캐블러가 정통 미스터리 스릴러를 내놓는다고 해도 더는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심리스릴러 마니아라면 재미있게 읽을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소재나 설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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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 두 남매 이야기 케이스릴러
전혜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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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살해죄로 5년 형을 복역한 서준현이 출소합니다. 이복동생 나현을 성폭행하던 아버지는 물론 의붓어머니까지 살해한 중범죄였지만, 정황 상 동정의 여지가 많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서 정상이 참작됐던 것입니다. 나현은 자신을 지키려다 살인까지 저지른 준현을 감싸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경기도 장제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서윤병원 원장인 서필환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손주인 준현과 나현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엄청난 반발과 후폭풍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준현과 나현을 큰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런 와중에 5년 전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려는 기자까지 나타나자 준현과 나현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그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섭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에 접속한 후에야 이 작품이 이미 10년 전 만화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당시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로 이야기의 파괴력과 무게감이 대단해서 그 여운을 한참이나 만끽했는데, 아마 10년 전 만화로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 역시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씨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비극을 다루고 있어서 이야기의 얼개는 무척이나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지만 그 관계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얽혀있는데다 그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악의와 탐욕이 워낙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탓에 이야기의 복잡함은 더욱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망종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인자였다. 살인도, 강간도, 기만도, 배신도, 혈연 간의 욕망도,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독을 마시는 것까지도, 이 집안에서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서로서로 돌아가며 저질러온 일이었다.” (p329)

 

비극의 연원은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들을 오늘날 수면위로 떠올려 무수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든 것은 첩의 자식으로 서씨 일가에 들어온 준현이 일으킨 5년 전 살인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성폭행하고, 또 다른 자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그 사건은 경기도 장제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서씨 일가를 휘청거리게 만든 것은 물론 상속 구도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준현이 출소하자 서씨 일가의 갈등은 격화되고 상속 재산을 놓고 끔찍한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현과 나현을 향한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면서 조금씩 오랜 과거의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혼란 속에서 살인미수, 자살, 살인 등 일가족의 절멸을 예고하는 듯한 잔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서씨 일가는 물론 그 주위에서 증오와 악의를 키워온 인물들은 길게는 반세기, 짧게는 5년 안팎에 걸쳐 그야말로 막장극 속의 악귀들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으려 추잡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빈번히 목격되는 건 근친상간이라는 터부(taboo)입니다. 작가는 이 금지된 사랑이 가진 음습한 폭발력을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여러 번 터뜨리는데, 그 대목들은 대부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흥미로운 반전을 품고 있어서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늪의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공포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인물도 많고 그만큼 이야기의 갈래도 사방으로 뻗쳐있는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마지막 장까지 연이어 배치돼있다 보니 스포일러가 될 정보가 워낙 많아서 더 상세한 줄거리를 소개하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족쇄는 올해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불쾌할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 등장인물들의 악의와 그것이 빚어낸 피비린내 진동하는 잔혹한 사건들,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나누는 남매의 금단의 사랑,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빈틈없이 그려냄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든 작가의 필력 등 족쇄는 추천할 이유가 수두룩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족쇄이전에 유일하게 읽은 전혜진의 작품은 전래동화와 고전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장르물 앤솔로지 모던 테일의 수록작 수경-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입니다. 당시 서평엔 괜찮았다.” 정도의 짧은 평만 남겼는데, ‘족쇄를 통해 관심목록에 올려놓을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고,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전혜진의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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