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달린 어둠 - 메르카토르 아유 최후의 사건
마야 유타카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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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카가미 가문의 본거지인 창아성의 이토로부터 사건 의뢰와 협박장을 동시에 받은 탐정 기사라즈와 그의 조수이자 추리소설가인 는 창아성 도착과 동시에 목이 잘린 두 구의 시신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창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당합니다. 하나같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지만, 매번 서로 다른 상징들이 사체 곁에서 발견됩니다. 얼마 후 진범을 밝히겠다며 관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가 엉뚱한 사태를 맞이한 기사라즈는 그 직후 모습을 감추고, 그와 동시에 기이한 외모의 탐정 메르카토르 아유가 창아성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살인은 쉴 새 없이 계속 일어나고, 이제 창아성의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마야 유타카의 애꾸눈 소녀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의 데뷔작이라는 날개 달린 어둠을 나름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본격 미스터리라 그런지 창아성이라는 서양식 저택이 등장하는 순간 반갑기도 하고, 반대로 약간 맥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서양식 저택이 주 무대인 미스터리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91년이라는 점 때문에 왠지 올드한 전개나 결말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가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읽는 내내 불편함과 불만을 떨쳐내기 힘들었고, 1991년에 출간된 데뷔작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평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정리하느라 한 발 떨어져서 이라는 작품 전체를 바라보자 읽는 동안 느낀 불편과 불만이 대체로 나무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얼개 자체는 본격 미스터리로서 적절히 짜였지만 디테일에서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만 해도 별 두 개를 염두에 뒀지만 나중에 한 개를 추가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만 얘기하면, 우선 지나치게 작위적인 캐릭터와 억지스러운 전개입니다. 창아성의 이마카가미 가문 사람들은 캐릭터 자체도 작위적이지만, 이야기에 걸맞게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목적 혹은 정해진 엔딩을 위해 억지스럽게 죽어나갑니다. 전개 면에서도 막판 반전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전을 위한 반전일 뿐입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앞서 습득한 정보들을 모조리 무용지물로 전락시킬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작가의 지적 유희의 과잉또는 허세에 가까운 현학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기독교와 러시아정교를 거쳐 서유럽의 음악과 미술까지 망라하는 천재적인 기사라즈의 말장난은 심하게 말하면 무식한독자를 희롱하는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서랍장 겉면에는 칼레발라의 한 장면을 묘사한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큐폴라스의 동신(童神)을 연상케 하는 순진무구한 몸짓이다.”

그 모습은 딸을 하데스에게 빼앗긴 데메테르 같았다.”

 

이외에도 수없는 인용과 비유, 부속설명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짜증을 넘어 이 무절제한 현학적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굳이 지적 허영 없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내용들을 과대 포장한 셈인데, 결과적으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한 훼방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해 행위나 다름없는 작가의 자충수라고 할까요?

 

얼마든지 훌륭한 본격 미스터리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얼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날개 달린 어둠은 위에서 언급한 점들 때문에 나중에라도 다시 읽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호평을 들었다는 애꾸눈 소녀를 통해 마야 유타카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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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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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해주고 싶은 팜므 파탈이 떴다

 

책의 띠지에 적힌 카피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후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뒤늦게 띠지의 카피를 보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리 카피를 봤더라면 좀더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만큼 소문의 여자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잘 만들어진 카피입니다.

 

10장의 챕터로 구성된 소문의 여자는 주인공 이토이 미유키의 기이한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챕터에서 미유키는 말 그대로 소문의 여자로만 등장할 뿐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8장까지만 보면 매 챕터마다 4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그들만의 화제를 늘어놓는데 항상 그 중심에는 미유키가 있습니다.

중고차 판매점, 마작장, 요리교실, 파친코 가게, 건설업자들의 모임 등 챕터마다 제각각의 무대가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미유키는 달라지거나 진화된 모습으로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중고차 판매점의 초라한 사무원이었다가, 마작장에서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분위기의 여인으로 변신하고, 요리교실에서는 예비 신부로서 부조리에 항거하는 리더가 됐다가, 어느 순간 유흥가 최고의 클럽의 마담으로 급성장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미유키에 관한 소문을 통해 독자들은 그녀가 어떻게 팜므 파탈로 성장해 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미유키의 성장은 마지막 두 챕터에서 경찰이 개입하면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보통의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한 - 엔딩으로 달려갑니다. 결국 마지막 한 장밖에 남지 않았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끝내려고 이러는 걸까?”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을 덮은 후 뒤늦게 띠지의 홍보문구를 보곤 그제야 오쿠다 히데오의 의도를 깨닫게 됐습니다.

 

저의 경우엔 비교적 관대한(?) 평가 쪽으로 기울었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뭐야 이게?” 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띠지의 홍보문구대로 응원하고 싶게 만들 거면 제대로 된 미유키의 엔딩을 보여주든가 아니면 보통의 미스터리처럼 미유키의 행적들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리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뒤통수를 칠 만한 반전이라도 내놓든가!!! 이런 불만들이 쏟아져 나올 여지가 많다는 뜻입니다.

 

오쿠다 히데오만의 무겁지 않은 문체와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함께 잘 버무려져서 소소한 명품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딘가 허전함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해학성의 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좀더 역설적인 웃음을 곳곳에 포진시켰더라면, 또 미유키의 행위들 하나하나에 그녀만의 유쾌한 동기라도 설정되어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것이 불법이나 범법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느낄 수 있었더라면 좀더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엔딩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도 조금은 줄어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학, 풍자, 반전이야말로 오쿠다 히데오의 최고의 무기이기에 허전함과 아쉬움이 조금은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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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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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냉장고로 달려가 언제 산 것인지도 모르는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습니다. 간혹 몸의 피로가 감당하기 힘들어졌을 때 초콜릿을 찾은 적은 있지만, 이렇듯 머릿속을 제멋대로 짓누르는 피로감에도 당분이란 해독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7년의 밤에서 얻은 고도의 스트레스는 정유정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전해줬습니다. ‘빨리 읽고 싶다절대 보지 말자’. 하지만 ‘28’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부감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긴장감 가득한 기대감만 남아있었습니다.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화양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간 눈 괴질이 퍼지기 시작하고, 속수무책으로 희생자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화양시는 봉쇄되고, 최초 희생자가 개에게 물린 흔적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내의 모든 개들이 살육 당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은 물론 의료진과 군인들마저 빨갛게 변한 눈과 함께 여기저기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19 구조대원 한기준, 동물보호소 운영자 서재형, 기자 김윤주, 간호사 노수진 등 인연 혹은 악연으로 얽힌 주요 인물들은 지옥으로 돌변한 화양시에서 때로는 단단한 증오심을, 때로는 연민과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기적 같은 생환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이들은 영웅이 될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시체들 속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계점을 넘어선 군중의 분노와 공포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치환되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화양시의 최대의 두려움은 빨간 눈 괴질이 아니라 인간이 돼버리고 맙니다.

 

화양시가 겪은 악몽 같은 28일의 기록은 할리우드의 재난 스토리가 지어낸 거짓말 같은 희망과 구원의 이야기를 한낱 치기어린 픽션으로 강등시킵니다. 살인, 방화, 약탈, 강간만 난무할 뿐 어디에도 희망이나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 질병보다 내 주변의 인간이 더 두려워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옥의 문이 제대로 열린다는 설정은 그 이후에 벌어질 참상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유정은 공포와 죽음의 압박으로 막장까지 내몰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일말의 자비도 없이 써내려갑니다. 영상물이라면 몰라도 책을 읽다가 욕지기를 느낀 건 ‘28’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7년의 밤에서 이미 경험한 적 있기에 ‘28’ 역시 클라이맥스부터 엔딩에 이르는 지점에서 꽤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될 거란 건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지점이 다가오자 ‘7년의 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을 잠식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본문 가운데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배신을 잘 하는 것은 희망이다.”

 

상처는 컸어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건네줬던 ‘7년의 밤과 달리, ‘28’은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아놓은 채 종말에 이른 세상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몇 번이고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희망과 구원의 기대감은 차례차례 무너지고, 스트레스는 무한대로 증폭됩니다. 결국 후반부의 몇 페이지는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속독하듯 스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잔혹한 리얼리티는 작가에 대한 증오심까지 촉발시키곤 했는데, 이 증오심이 오히려 페이지 터너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년의 밤이후 가졌던 정유정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과 거부감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감정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아마 ‘28’을 대할 때처럼 여지없이 그녀의 작품을 허겁지겁 읽게 되겠지만, 한동안은 화양시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로 인해 쉽게 털어내기 힘든 무거운 후유증을 앓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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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김현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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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을 읽진 못했지만 일본 추리소설의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우치다 야스오와의 첫 만남이라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도조 겐야 시리즈등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전설 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흥미로워보였습니다.

 

도야마, 노리요시, 모에코는 모두 성공을 위해 고향을 등졌습니다.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척박한 고향을 버리고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늘 가혹했고 출구는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건 보험사기.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듯 했지만, 수많은 불행의 원천인 탐욕으로 인해 점차 그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끝내는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연히 사건에 개입하게 된 탐정 아사미 미쓰히코는 집요한 탐문과 빛나는 추리를 통해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파헤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2세기 헤이안 시대의 내란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는 숨겨진 마을오추도의 실상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9년의 태풍의 피해가 어떤 식으로든 현재 벌어진 범죄와 연관돼있다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보험사기 미스터리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치다 야스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역사적 배경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한 범인 찾기를 넘어 이야기의 스케일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도시화의 폐단과 일확천금 신드롬 등 사회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접목시킨 부분에서는 작가의 연륜이 괜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의 명성 때문에 기대를 가졌던 독자에겐 조금은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세련되고 복잡하게 직조된 요즘의 미스터리에 비하면 아날로그의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사건은 소박하고 탐정 아사미의 활약은 고전 속의 올드한 탐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동원된 트릭들도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느끼게 되는 무게감은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묵직했습니다. 보험사기에 얽힌 세 인물의 탐욕은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잘 포장됐고, 탐정 아사미의 쉼 없는 발품은 인터넷과 첨단 장비에 의존하는 현대의 수사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었으며, 오래된 과거가 남겨놓은 현재의 상처들도 사실감 있게 잘 활용됐기 때문입니다.

 

국민탐정이라는 호칭을 함께 얻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에 비해 매력은 좀 덜한 편이지만, 탐정 아사미의 캐릭터가 드라마나 영화, 게임에서도 활약했다는 사실 덕분에 그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에게도 나름 기대를 갖게 됩니다. 우선 전작인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부터 찾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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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나를 죽였다
박하와 우주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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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와 우주라는 특이한 필명, 검찰청 근무 경력이 있는 부부의 공동 집필,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조디악 바이러스라는 소재,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등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 찬 한국 장르물입니다. 늘 일본 미스터리와 영미권 스릴러에 파묻혀 지내다가 이렇게 완성도 높은 한국 장르물을 만나면 그 반가움은 몇 배가 됩니다. 이번엔 우연히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됐지만, 앞으로는 특이한 이력의 부부 작가 박하와 우주의 행보에 주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장준호 박사가 운영하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 10명의 범죄피해자 또는 유족이 참여합니다. 30일 간의 프로그램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일상에 적응하는 훈련을 할 계획이던 그들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린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맙니다.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지만 더 큰 문제는 감염 여부를 파악하는데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결국 검사 결과가 나올 때가지 지원센터는 폐쇄되고 참가자는 물론 센터 직원들까지 출입이 통제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피살자가 나타나고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면서 지원센터는 패닉에 빠집니다. 남기호 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지만 희생자는 하나둘씩 늘어가고, 범인은 계속 오리무중인 상태로 결말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펼쳐지는 두 번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인 엔딩을 보여줍니다.

 


검찰청에서 근무했던 작가들의 풍부한 경험 덕분이겠지만 작품 속의 캐릭터나 사건들은 뛰어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쇄살인범에게 아내를 빼앗긴 전직 기자 유도아를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라든가 유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특별한 연대감은 독자 스스로 그 일원이 된 듯 느낄 정도로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한없이 무겁고 암울한 설정들이지만 굳이 어려운 어휘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박하와 우주는 감정과 팩트 두 가지를 잘 버무려 내놓았습니다.

 

마지막 두 번의 반전은 최근 읽은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전개됩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눈썰미는 너무나도 허약한(?) 편이라 소소한 반전조차 예측 못하는 편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의 마지막 반전까지 눈치 챈 독자가 있다면 아마 이 독자가 대단하다라는 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반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반전만 놓고 보면 별 다섯 개도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일부 작위적인 설정과 중반부쯤 느낄 수 있는 약간의 지루함 탓에 전체적인 평에서는 별 네 개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안겨준 작품이었고, ‘박하와 우주라는 뛰어난 신인들의 묵직한 저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궁극의 아이를 읽었고, 조만간 정유정의 신작 ‘28’을 읽을 예정인데, 이렇듯 뛰어난 한국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말 반갑고 또 반가운 일입니다. ‘박하와 우주역시 머지않은 시간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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