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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은퇴한 식물학자인 할아버지 슈지가 살해되자 리노는 생전의 그가 “공개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라던 정체불명의 노란 꽃을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모 요스케라는 경찰청 사람이 찾아와 블로그를 폐쇄하고 노란 꽃의 사진을 없애버릴 것을 강요합니다.
아내와 별거 중인 형사 하야세는 슈지의 죽음을 수사하던 중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생활안전국의 가모 요스케가 은밀히 사건 관계자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그가 의문의 노란 꽃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단독 조사에 나섭니다.
아버지의 3주기를 맞아 집에 돌아온 가모 소타는 형 요스케를 찾아온 리노와 만납니다. 리노를 돕다가 중학생 시절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찾은 소타는 본의 아니게 노란 꽃의 비밀과 슈지의 죽음의 진상을 캐는데 동참하게 되어 웬만한 형사나 탐정을 뛰어넘는 수완을 발휘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 - 전혀 몰랐던 충격적인 가족의 비밀은 물론 에도 시절부터 시작된 노란 꽃으로 인한 비극의 전말과 마주치게 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가운데 이야기의 사이즈나 서사의 구조만 놓고 보면 꽤 크고 방대한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노란 꽃 몽환화의 비밀을 비롯하여 살인사건의 수사는 물론 붕괴된 가족의 화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담은 성장기 등 각각 장편 한 편의 소재로도 충분한 다양한 담론들을 한꺼번에 버무려놓았습니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캐릭터와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채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가서 모든 비밀과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라 소개할 수 있는 줄거리는 대략적인 설정을 요약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단순한 잡초나 야생초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환각작용을 가진 식물을 통칭하는 몽환화는 에도 시대부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고, 이후 메이지 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특히 4대(작품 속에는 3대라고 나오지만 엄연히 따지면 4대가 됩니다)에 걸쳐 몽환화와 악연을 맺어온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는 후반부에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충격적인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그저 돌연변이처럼 독특한 색깔을 지녔을 뿐, 평범한 식물에 불과한 꽃 하나에게 이만한 역사성과 사건을 일으키는 파괴력을 부여함으로써 히가시노 게이고는 생소한 소재가 주는 신선함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미스터리의 기본 서사인 ‘진범 찾기’가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와 병행되는데, 리노가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란 꽃의 진실에 집착한다면, 소타는 형 요스케가 왜 신분까지 숨긴 채 노란 꽃의 뒤를 캐는 건지와 함께 어린 시절 헤어졌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쫓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여건도 능력도 턱없이 부족한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두 콤비는 짚어내야 할 사실들을 적시에 짚어내면서 정체에 빠진 경찰의 수사를 압도합니다.
복잡한 사건과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스피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이 한 번도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도록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또한 소타, 리노, 하야세 등 세 사람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통해 다양한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해주고, 적절한 생략과 비약을 효과적으로 구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뛰어난 활약 덕분에 ‘몽환화’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다섯 개도 부족할 만큼 탁월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무척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무엇’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하나 정도는 빼야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우선, 캐릭터 설정에 관한 아쉬움이 남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건만 보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각각의 인물에게 기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사연들을 입혀놓았지만, 쉽게 이입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인물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원자력을 전공했으나 후쿠시마 지진으로 인해 진로에 회의를 품은 소타, 올림픽까지 바라봤으나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리노, 불륜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속에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야세 등 나름대로 힘든 현실과 잿빛 장래를 작가로부터 골고루 분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연은 사건과는 동떨어진 채 겉돌고 있어서 굳이 그런 포지션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노란 꽃과 사건은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정작 딱히 기억에 남거나 감동이든 증오든 어떤 종류의 감정을 남긴 인물은 없었습니다.
이야기 전체적인 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몽환화’는 굳이 비유하자면, 정교하게 설계된 밑그림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입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복잡한 사건과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다 보니 작가가 사전에 이야기 전체를 잘 짜놓지 않으면 스스로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느 작품보다도 훨씬 더 공을 들여 정교한 밑그림을 만들었고, 그 정교함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완벽한 정교함이 감흥을 떨어뜨린 가장 큰 원인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정교함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설정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4대에 걸친 가모 가문과 노란 꽃의 악연 스토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눈으로는 활자들을 쫓아가고 있지만, 왠지 머릿속에서는 자꾸 거부감이 드는 느낌이랄까요? 작가는 여러 문장을 통해 거듭 그 개연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지만,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몽환화’는 최고의 기술이 만들어낸 흠 잡을 데 없는 고가의 상품이긴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투박하면서도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진짜 명품’의 향기는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최근 2~3년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계속 비슷한 인상을 받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끽했던 투박함과 진정성이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그의 스타일이 변했을 수도 있고, 저의 감각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제 기대감이 충족된다면 – 최근 기억으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는데 -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는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