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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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으로 전학 온 사카키바라 코이치는 3반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사카키바라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신비한 여학생 미사키 메이를 통해 3반에 전해 내려오는 재앙의 이력을 알게 됩니다. 26년 전, 사고로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해 벌였던 선의의 퍼포먼스 이래로 3반은 거의 매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학생, 교사 또는 그들의 가까운 인척들이 자살, 병사, 원인불명의 사고로 인해 매년 많게는 10여 명씩 목숨을 잃어온 것입니다. 새 학년의 첫날, 학생 수에 비해 책걸상 1개가 모자라는 해마다 여지없이 재앙이 벌어진다는 패턴이 발견되자 존재해서는 안 될 누군가가 재앙을 일으킨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결국 10년 전부터 희생양을 만들어 참극을 막아보겠다는 나름의 대책을 실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사카키바라가 전학 온 1998년의 3학년 3반에는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한 새로운 패턴이 나타났고, 그동안 몇 차례 성공했던 대책도 무용지물이 돼버리면서 곳곳에서 희생자가 속출합니다.

 

호러물 마니아는 아니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작품입니다.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읽은 적 있지만, 제대로 된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언젠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운 좋게도 속편 격으로 출간된 어나더 에피소드 S’ 서평단에 뽑혔고, 당장에라도 미사키 메이의 치명적인 클로즈업을 표지로 삼은 속편을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왕이면 두 작품을 순서대로 읽는 것도 괜찮은 일 같아 책장에 꽂혀있던 어나더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분량만큼이나 이야기 역시 방대하게 짜여있어서 줄거리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또한 호러, 미스터리, 청춘 성장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가 믹스되어 있어서 이 작품은 OO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 역시 난감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금세 다 읽힐 정도로 몰입감과 속도감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요미키타 중학교 3학년 3반에 재앙을 몰고 온 존재해서는 안 될 누군가의 존재, ‘()’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의 상존, 졸업과 동시에 ()’에 관한 모든 기록과 기억이 재조정된다는 초자연적인 집단최면,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죽음의 빛깔을 볼 수 있는 미사키 메이의 의안(義眼) 등 명백히 비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그와 병행하여 사카키바라 일행이 재앙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이 긴장감 있게 묘사돼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100% 호러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호러 설정들과 미스터리 요소들이 잘 버무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선지 읽는 동안 괴담과 미스터리를 맛깔나게 접목시킨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떠오르곤 했는데, ‘어나더의 경우 현대물이면서 괴담의 단골 공간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보니 공포심의 순도는 훨씬 더 높고 강렬했습니다.

 

서술트릭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나 일부러 문맥을 난해하게 만든 문장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후반부에 가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해놓은 경우가 꽤 많습니다. 독자에 따라 답답하거나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데, 일종의 서술트릭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속편 어나더 에피소드 S’의 초반 몇 페이지를 살짝 읽어봤는데, 역시나 이런 미완성 문장이 꽤 자주 눈에 뜁니다.)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쉽게 느껴졌던 점은 미사키 메이의 정체성 묘사를 위해 초중반에 과도하게 분량을 할애한 점입니다. 조금은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인 상황들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미사키의 실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사키에 대한 강조는, 역설적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사카키바라의 역할을 수동적이거나 의존적으로 보이게 만든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싹한 호러물을 기대했거나 본격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장르의 경계선에 위치한 어나더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딱히 기억에 남을 만큼 무섭거나 소름끼치는 대목도 없고, 그렇다고 명쾌하고 해피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나더의 가장 큰 매력을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양파껍질처럼 벗겨낼 때마다 드러나는 새로운 국면과 예측불허의 전개’, 그리고 독특함과 기이함을 겸비한 다채로운 캐릭터입니다. 두툼한 분량 때문에 읽기 전부터 부담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 매력 덕분에 마지막 장에 이르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습니다. 장르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 몰라도, 이야기 자체만 보면 대부분의 독자가 만족할만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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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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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평론가이자 여대생들의 롤모델 1위로 꼽히는 현수빈은 유년기행이라는 칼럼을 통해 7살 무렵에 겪은 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연재합니다. 칼럼이 연재되던 중 수빈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립니다. 우선 다가구 주택에 함께 살던 이웃 중 몇 사람의 연락을 받게 됐고, 이어 지금은 퇴직한 한 경찰의 방문을 통해 다가구 주택에서 일어났던 연탄가스 중독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소개에 소개를 거쳐 다가구 주택에 살던 대부분의 이웃들과 만난 수빈은 자신이 기억하는 예쁘고 소중한 7살의 기억 속에 실은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상처들이 숨어있었으며, 그것은 29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혀 아물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과일행상을 하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던 우돌네 식구들, 자신을 예뻐해 주던 건넌방 세 언니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던 신혼부부와 문간방 대학생 등 7살의 수빈과 함께 했던 모든 이웃들이 지금껏 감추거나 숨겨왔던 진실들이 수빈의 탐문과정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능력 있는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잔인한 연쇄살인마나 참혹하게 난도질당한 시신이 튀어나오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은 1984년 은평구 D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 살던 평범한 서민들일 뿐이며,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시에는 다반사였던 연탄가스 중독사가 전부입니다. 이런 평이한 배경 탓에 가족 같았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이라는 홍보 카피가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됐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뛰어난 한국 미스터리 작품을 만났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일상 미스터리겠지만, 그러기엔 왠지 작품과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밝혀지는 진실의 규모나 충격은 도저히 일상이라고 볼 수 없는 참혹함과 비극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관계와 사건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독자들도 쉽게 공감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실감을 잘 부여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벌어진 사건은 무척 단순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는 대부분 탐욕, 시기와 질투, 사랑과 증오 등 가장 원초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1984년이었기에 그 단순함과 원초성은 좀더 거칠고 날것 같은 모양새를 지닐 수밖에 없었고, 사건에 대처하는 다가구 주택 이웃들의 자세 역시 본능에 가깝긴 하지만 섬뜩함이 좀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는 동안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그린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등장인물들이 다가구 주택의 이웃들이긴 하지만 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들 속에서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 그래서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이 놀라움 뿐 아니라 서늘함까지 전해줬다는 점,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 등 어딘가 닮은꼴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괜히 스케일만 크고 눈에 힘만 잔뜩 들어간 채 정작 중요한 서사를 놓친 대작들에 비하면 훨씬 더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입니다. 간혹 눈에 띄었던 작위적인 전개 주로 수빈의 탐문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지점에서 목격되곤 했던 가 옥의 티처럼 느껴져 별 다섯 개까지는 어려웠지만, 네 개 반은 충분히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소한 배경 속에서 이처럼 큰 서사를 뽑아낸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는데, 띠지를 보니 대형 신인의 첫 장편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과 한국추리작가협회 황금펜상을 수상한 단편들도 소개됐는데 가능하면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송시우의 두 번째 장편이 기다려집니다. 더불어 이 작품이 대형 신인의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평을 듣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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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제국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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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치료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충격적인 과거와 만나게 된 안나 에메스, 그리고 프랑스 내 터키 타운에서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쫓는 경찰청 팀장 폴 네르토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폴 네르토는 안나 에메스라는 여자가 연쇄살인사건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 사건 배후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와 군, 과학자, 경찰 등의 추악한 비밀까지 알아냅니다. 이후 연쇄살인에 터키의 급진세력 회색늑대가 개입한 사실까지 파악하면서 폴 네르토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안나의 행적을 거의 따라잡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 폴 네르토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꽤 오래 전 검은 선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긴장감, 재미, 적절한 잔혹함 덕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여러 작품이 출간된 상태였지만, 두 번째로 그랑제와 만난 것은 미세레레였습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방대한 서사를 다루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장점은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에야 늑대의 제국을 읽게 됐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분명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수많은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자유자재로 지휘할 뿐 아니라 대중성은 물론 작품성까지 곁들여 능숙하게 포장하는 솜씨는 그를 최고의 프랑스 스릴러 작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번엔, 잘 나가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도록 너무 잘 나가다가, 그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스릴러의 결말, 즉 범인 체포와 해피엔딩을 넘어선 새로운 결말에의 도전은 좋았지만, 문제는 후반부의 결정적인 지점부터 이야기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버렸고, 그로 인해 애초에 쌓아온 서사들을 모조리 불필요하게, 또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들이 엉뚱한 엔딩을 장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나름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으로 귀결시킨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은 당혹스러운 실망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폴 네르토의 유년의 트라우마, 형사로서의 이력,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위험천만한 노력들은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딩에 이르러 돌아보면 결국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불필요한 서설이었고, 폴 네르토를 돕는 결정적인 조연인 퇴직 형사 시페르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캐릭터 역시 비슷한 봉변(?)을 당했습니다.

 

잘못 읽었나 싶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비슷한 의견이 많았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돌의 집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경고한 독자도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도 검은 선이나 미세레레에서는 이런 식의 전개를 본 것 같지는 않고, 왜 그랑제가 늑대의 제국에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지는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들, 끔찍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쇄살인 등 이야기꾼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설정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만간 돌의 집회도 읽을 계획인데, ‘검은 선이래로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팬임을 자처해 왔으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두 번씩 할까봐 괜한 걱정부터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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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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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는 삶을 살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다카미 료이치는 누명 사건의 히어로가 돼보지 않겠냐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받습니다. , 존재하지도 않는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적절한 시기에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누명을 벗고 경찰과 언론을 망신 주는 것은 물론 체포부터 취조까지 전 과정을 논픽션으로 출간하면 히트를 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변호사 모리에는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더 우연한 인연으로 그 사건의 범인을 변호하게 됩니다. 자신이 서야 될 무대는 논란 속에 부활된 배심재판입니다. DNA를 비롯한 모든 과학적 증거들이 다카미 료이치가 진범이라고 가리키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 모든 것이 계획된 누명 사건이라고만 주장할 뿐입니다. 한편 가까스로 부활한 배심법을 폐지시키려는 정치권과 보수언론들의 공작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모리에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논란의 배심재판에 나섭니다.

 

화려한 말의 성찬과 롤러코스터처럼 반전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법정공방은 범죄 미스터리와는 색다른 매력과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오래 전 존 그리샴의 법정물에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일단 법정물이라고 하면 아직도 무턱대고 덤비는 편입니다.

한때 중지됐던 배심원 제도가 정치적 공방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부활하게 됐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배심원 제도가 국민 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형사 재판에 국한되어 있고, 그것도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가능한데다 배심원의 결정이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서양식대로 잘 따라 하면서 법에 관한 한 여전히 일본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배심원 제도의 당위성만 주장하는 단선적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재판의 대상이 된 사건이 워낙 특이하게 설정돼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소재입니다. 또한 재판 과정의 재미는 물론 배심원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까지 등장시켜서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변호사 모리에의 캐릭터는 비범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작품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가끔 도를 넘는 정확한 추리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똑똑한 변호사 캐릭터의 미덕까지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미스터리 마니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통해 새삼 느낀 점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사건해결의 키를 쥔 DNA가 과학수사의 증거로서 갖고 있는 약점이었고, 또 하나는 이 작품의 핵심인 배심원제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DNA는 곧 게임오버를 뜻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 또한 조작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곳곳에서 작가의 성실하고 꼼꼼한 자료조사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DNA에 관한 부분은 압권이었습니다.

기득권층이 배심원제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미개한 일반인들이 신성한 재판관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열세 번째 배심원은 왜 배심원제가 필요하며, 지금까지 당연히 여겨온 똑똑한 소수의 재판관에 의한 판결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적절한 사례까지 들어가며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두 가지 이야기를 꾸려나가다 보니 배심원 재판이 시작되는 중반부까지는 사건 묘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지점까지는 많은 독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이함이 조금은 도를 지나쳐 작위적인 느낌을 강하게 줬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서는 왠지 끼워 맞추기 식의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름 개성 있는 법정물의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고, 가능하다면 변호사 모리에 시리즈를 계속 만나보고 싶은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역시 잘 만들어진 법정물은 독자의 아드레날린 활성화에는 최적의 장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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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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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은퇴한 식물학자인 할아버지 슈지가 살해되자 리노는 생전의 그가 공개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라던 정체불명의 노란 꽃을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모 요스케라는 경찰청 사람이 찾아와 블로그를 폐쇄하고 노란 꽃의 사진을 없애버릴 것을 강요합니다.

아내와 별거 중인 형사 하야세는 슈지의 죽음을 수사하던 중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생활안전국의 가모 요스케가 은밀히 사건 관계자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그가 의문의 노란 꽃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단독 조사에 나섭니다.

아버지의 3주기를 맞아 집에 돌아온 가모 소타는 형 요스케를 찾아온 리노와 만납니다. 리노를 돕다가 중학생 시절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찾은 소타는 본의 아니게 노란 꽃의 비밀과 슈지의 죽음의 진상을 캐는데 동참하게 되어 웬만한 형사나 탐정을 뛰어넘는 수완을 발휘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 - 전혀 몰랐던 충격적인 가족의 비밀은 물론 에도 시절부터 시작된 노란 꽃으로 인한 비극의 전말과 마주치게 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가운데 이야기의 사이즈나 서사의 구조만 놓고 보면 꽤 크고 방대한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노란 꽃 몽환화의 비밀을 비롯하여 살인사건의 수사는 물론 붕괴된 가족의 화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담은 성장기 등 각각 장편 한 편의 소재로도 충분한 다양한 담론들을 한꺼번에 버무려놓았습니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캐릭터와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채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가서 모든 비밀과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라 소개할 수 있는 줄거리는 대략적인 설정을 요약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단순한 잡초나 야생초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환각작용을 가진 식물을 통칭하는 몽환화는 에도 시대부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고, 이후 메이지 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특히 4(작품 속에는 3대라고 나오지만 엄연히 따지면 4대가 됩니다)에 걸쳐 몽환화와 악연을 맺어온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는 후반부에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충격적인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그저 돌연변이처럼 독특한 색깔을 지녔을 뿐, 평범한 식물에 불과한 꽃 하나에게 이만한 역사성과 사건을 일으키는 파괴력을 부여함으로써 히가시노 게이고는 생소한 소재가 주는 신선함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미스터리의 기본 서사인 진범 찾기가 가모 집안의 히스토리와 병행되는데, 리노가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란 꽃의 진실에 집착한다면, 소타는 형 요스케가 왜 신분까지 숨긴 채 노란 꽃의 뒤를 캐는 건지와 함께 어린 시절 헤어졌던 첫사랑 이바 다카미의 흔적을 쫓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여건도 능력도 턱없이 부족한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두 콤비는 짚어내야 할 사실들을 적시에 짚어내면서 정체에 빠진 경찰의 수사를 압도합니다.

 

복잡한 사건과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스피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이 한 번도 길을 잃거나 헤매지 않도록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또한 소타, 리노, 하야세 등 세 사람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통해 다양한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해주고, 적절한 생략과 비약을 효과적으로 구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뛰어난 활약 덕분에 몽환화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다섯 개도 부족할 만큼 탁월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무척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무엇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별 하나 정도는 빼야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제 결론이었습니다.

 

우선, 캐릭터 설정에 관한 아쉬움이 남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건만 보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각각의 인물에게 기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사연들을 입혀놓았지만, 쉽게 이입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인물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원자력을 전공했으나 후쿠시마 지진으로 인해 진로에 회의를 품은 소타, 올림픽까지 바라봤으나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리노, 불륜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속에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는 하야세 등 나름대로 힘든 현실과 잿빛 장래를 작가로부터 골고루 분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연은 사건과는 동떨어진 채 겉돌고 있어서 굳이 그런 포지션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노란 꽃과 사건은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정작 딱히 기억에 남거나 감동이든 증오든 어떤 종류의 감정을 남긴 인물은 없었습니다.

 

이야기 전체적인 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몽환화는 굳이 비유하자면, 정교하게 설계된 밑그림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입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복잡한 사건과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다 보니 작가가 사전에 이야기 전체를 잘 짜놓지 않으면 스스로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느 작품보다도 훨씬 더 공을 들여 정교한 밑그림을 만들었고, 그 정교함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완벽한 정교함이 감흥을 떨어뜨린 가장 큰 원인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정교함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설정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4대에 걸친 가모 가문과 노란 꽃의 악연 스토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눈으로는 활자들을 쫓아가고 있지만, 왠지 머릿속에서는 자꾸 거부감이 드는 느낌이랄까요? 작가는 여러 문장을 통해 거듭 그 개연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지만,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총평하자면 몽환화는 최고의 기술이 만들어낸 흠 잡을 데 없는 고가의 상품이긴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투박하면서도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진짜 명품의 향기는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최근 2~3년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계속 비슷한 인상을 받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초기작에서 만끽했던 투박함과 진정성이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그의 스타일이 변했을 수도 있고, 저의 감각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제 기대감이 충족된다면 최근 기억으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는데 -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는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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