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 형제 편 + 자매 편 - 전2권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이노우에 마기 지음, 김은모 옮김 / 알라딘 이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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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한때 사찰 마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락 중인 소도시 긴나미. 그곳엔 오래된 철골 아케이드 아래로 양념과 닭꼬치구이의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상점가가 있습니다.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이 상점가를 무대로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같은 사건, 두 미스터리 해결사, 두 개의 추리, 두 개의 진실을 표방하며 형제편’(은행나무)자매편’(북스피어)으로 나뉘어 출간됐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파헤치는 주인공은 고구레 가의 4형제와 우치야마 가의 3자매입니다. 20대인 맏이들보다는 중고생인 동생들이 탐정 역할을 맡고 있어서 좌충우돌 소년소녀 탐정단같은 인상을 풍기는데, 이들은 갖가지 이유 - 사건을 목격한 탓에, 범인으로 의심받은 탓에, 가족이 사건에 휘말린 탓에 본의 아니게 진실 찾기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4형제와 3자매는 전혀 다른 경로로 조사를 벌인 끝에 하나의 사건 안에 숨은 두 개의 진실을 찾아냅니다.

 

닭꼬치구이를 먹으며 운전하다가 꼬치가 목에 꽂혀 죽은 남자, 학생이 만든 악기가 미술준비실에서 무참하게 파손된 가운데 누군가 꼬치를 이용하여 현장에 남긴 우물 정()의 비밀, 불황에 빠진 상점가를 무대로 수상한 외지인이 벌인 미스터리 미식 투어의 실체 등 4형제와 3자매가 마주한 사건은 언뜻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의 소재로 보이지만, 추리 과정이나 막판에 드러난 진상은 결코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아서 소년소녀가 주인공인 안락한 코지 미스터리?”라는 선입견은 금세 무색해지고 맙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읽을 이야기는 어떤 사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4형제와 3자매가 같은 사건에서 완전히 다른 진상을 파악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잘못된 결론에 이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세 개의 사건은 ‘2단 엔딩을 품고 있어서, 어느 한쪽이 첫 번째 엔딩을 이끌어낸다면, 나머지 한쪽은 그 뒤에 숨은 두 번째 엔딩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을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두 권을 번갈아 읽는 것인데, 가령 형제편의 첫 사건을 읽은 뒤 같은 사건을 다룬 자매편의 챕터를 읽고, 이어서 두 번째 사건도 같은 방법으로 읽는 것입니다.

추리의 경로와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같은 사건이니만큼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새로운 읽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4형제와 3자매의 추리를 모두 읽어야 사건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편자매편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론 형제편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건과 추리, 4형제와 3자매의 캐릭터, 막판에 밝혀지는 뜻밖의 진상 등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해서 마지막까지 특별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인데, 평점에서 별 1개를 뺀 이유는 미스터리 구도 및 인물들의 관계를 다소 과하게 꼬아놓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세 번만 꼬았어도 충분한 상황을 거듭 복잡하게 설정한 탓에 정작 몰입이 필요한 지점에서 방해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이노우에 마기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읽은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은 걸 보면 아마 작가의 고유한 개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그 형식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한 챕터씩 번갈아 읽는 신기한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사건을 조사하는 4형제와 3자매가 어느 장면에서 서로 마주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던 추리가 어떤 계기로 접점을 가질지, 두 개의 진상은 어떻게 연결될지 등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긴나미 상점가를 무대로 한 4형제와 3자매의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을지 알 순 없지만, 만약 후속편이 나온다면 꼭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왠지 작가가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묘한 뉘앙스를 여기저기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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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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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절도 현장에서 체포될 뻔했던 루카 마리노는 스미스라는 정체불명의 남자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그의 지시를 받아 위험천만한 미션을 수행하는 스파이가 됐습니다. 매번 다른 이름과 신분을 제공받은 루카는 절도, 사기, 몰카 등 온갖 불법적인 미션에 투입돼왔고, 현재는 루이지애나의 사업가 라이언을 표적 삼아 활동하며 에비 포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순조롭게 라이언의 연인이 되어 스미스가 원하는 정보를 캐던 루카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나타나선 스스로를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한 것은 물론 진짜 루카 마리노의 과거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혼란에 빠졌던 루카는 이내 스미스가 어떤 목적을 갖고 그녀를 자신에게 보냈음을 깨닫습니다.

 


애슐리 엘스턴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첫 작품부터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도메스틱, 서스펜스, 스파이 등 다채로운 스릴러 서사가 혼재된 작품으로, 오랫동안 유능한 스파이로 암약해온 루카 마리노가 오직 사서함을 이용한 우편물과 기계음으로 변조된 통화만으로 지시를 내리는 미스터리한 보스 스미스와 정면 대결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유능함을 인정받긴 했지만 루카는 스미스가 결코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습니다. 특히 훈남 사업가 라이언을 상대로 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루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스미스의 지시 내용이나 미션 진행 속도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외모는 물론 자신의 과거까지 복제한 여자가 나타나고 뜻밖의 사건까지 벌어지자 루카는 이번 미션에 다른 의도가 깔려 있음을 확신합니다.

 

루카가 갖은 위기를 겪으며 스미스와의 대결을 도모하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와, 과거 루카가 수행했던 몇몇 미션의 전모를 그린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미스의 스파이가 되어 8년 동안 완벽한 거짓말과 가짜 신분으로 불법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루카는 매번 자신의 표적에게 동정심을 품거나 감정을 이입하는 등 뼛속까지 사악한 스파이가 되진 못했습니다. 스미스의 넘버원 스파이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한 적도 있지만 어느 샌가 스미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 루카는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조금씩 반격을 위한 무기들을 준비해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 직후부터 교묘하고 은밀하게 그를 무너뜨릴 계획을 진행시킵니다.

 

뛰어난 스파이이자 거짓말쟁이로서의 루카의 카리스마와 매력도 대단하지만, 엄청난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지닌 정체불명의 보스 스미스 역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입니다. 수하의 유능한 스파이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할 뿐인 단순한 악당 보스가 아니라 오락과 쾌감을 위해 수하들을 상대로 야비하고 잔혹한 계략을 일삼는 그의 행태는 그 어떤 악당 캐릭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서늘한 냉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루카가 뛰어난 스파이라 해도 언제 어디서든 상대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다가 죽일 수 있는 스미스는 난공불락처럼 보이는데, 이런 긴장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필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에 완주하지 못하고 서너 차례에 걸쳐 나눠 읽었는데, 그래선지 재미있게 읽고도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결과를 다 알고 읽어도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 작품이라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대로 꼭 한 번 찬찬히 재독할 계획인데, 어쩌면 띄엄띄엄 읽은 첫 번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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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레이디 조지애나 레이디 조지애나 시리즈 1
라이스 보엔 지음, 김명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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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32, 스코틀랜드 래녹 성에 사는 21살의 조지애나(이하 조지’)는 세계의 절반을 호령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왕족이지만 남은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답답한 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래녹 성의 공작인 이복오빠 빙키가 메리 왕비와 짜고 자신을 몰락한 동유럽 왕조로 시집보내려 하자 조지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곤 런던으로 가출합니다. 하녀 한 명 없이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겪으며 고난의 홀로서기에 나서지만 조지는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끔찍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집안 욕실에서 한 남자가 익사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경찰은 그 남자와 만나기로 돼있던 이복오빠 빙키는 물론 조지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결국 조지는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Rhys Bowen의 작품은 두 편인데, ‘탐정 레이디 조지애나는 라이스 보엔으로, ‘팔리 들판에서는 리스 보엔으로 작가명을 표기했습니다.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의 레이디 조지애나 시리즈2007‘Her Royal Spyness’(본 작품의 원작)를 시작으로 2023‘The Proof of The Pudding’까지 17편이나 출간된 베스트셀러 시리즈입니다. 다만 한국에는 이 작품 단 한 편만 소개된 뒤 더는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는데, 당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탓으로 보입니다.

 

일단 설정 자체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1932년의 영국이 배경인 점도,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음울한 분위기에 거의 파산 일보 직전인 래녹 성에 갇힌 채 청춘을 갉아먹고 있던 무늬만 왕족21살의 조지가 살인사건 해결사로 활약한다는 설정도 눈길을 끕니다. 또 조지가 런던에서 만난 다양한 조연들도 그 면면이 독특합니다. 왕족이지만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이복오빠 빙키를 비롯하여 우연히 재회한 스위스 귀족학교 동창생들, 2년 전 사교무대에서 만났던 아일랜드 귀족 가문의 자제, 어머니의 복잡한 남성편력 때문에 유년기에 잠시 가족이 됐던 남자 등이 그들인데, 문제는 적잖은 인물들이 살인사건 조사에 나선 조지를 꽤나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런던에서의 홀로서기를 도와주던 절친은 물론이거니와 노골적으로 대시하며 조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남자들마저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스러운 구석들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확신한 조지는 경찰의 의심을 뒤집기 위해 왕족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신을 거듭하며 분투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절반쯤은 골 때리는 왕족조지의 런던 정착기에 할애됩니다. 다소 지나칠 정도의 우연들을 통해 런던에서 여러 남자와 재회한 조지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1932년을 배경으로 한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흥분과 경계와 두근거림을 번갈아 경험합니다. 왕족으로 살아온 탓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집안일에 당황하는 장면들도 유쾌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집안 욕실에서 익사체가 발견되면서 조지의 상황은 180도 급변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지의 타고난 성정들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가문의 품격과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까지 함부로 결정당하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반골 스타일은 물론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진실을 향해 폭주하는 대단한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조지는 그 어떤 장르물의 여주인공보다 매력적이고 흡인력이 강합니다. 이 시리즈가 17편까지 이어진 건 거의 전적으로 조지의 캐릭터 덕분이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된 우연과 작위적인 상황들 때문에 조지의 추리와 조사는 현실감이 떨어지곤 합니다.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왕족 출신의 초짜 탐정인 조지가 베테랑 명탐정들처럼 뛰어난 추리와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기막힌 미스터리 해결사로 활약하는 것 자체가 더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결국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감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유머러스하게 그린 코지 미스터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탐정 입문기정도의 기대감만 갖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있는 책읽기를 경험할 순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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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의 흔들림 - 영혼을 담은 붓글씨로 마음을 전달하는 필경사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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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즈키 지카라는 오랜 역사와 진심 어린 서비스로 사랑받는 미카즈키 호텔에 근무하는 호텔리어입니다. 단골 고객의 연회를 준비하던 쓰즈키는 초대장 봉투에 붓글씨로 주소를 적어주는 서예가 도다를 찾아갔다가 경박하고 괴짜 같은 그의 언행에 깜짝 놀랍니다. 서예가라기보다는 꽃미남 바람둥이 혹은 거리낌 없이 막말을 내뱉는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맡게 된 편지 대필 작업 덕분에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쓰즈키는 도다의 수려한 붓놀림과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글씨에 반하고, 도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쓰즈키의 타고난 공감력과 이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도다의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통보 때문에 파열될 위기에 처합니다.

 


먹의 흔들림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를 엮다의 작가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란 점, 또 하나는 소재가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정서가 깃든 서예라는 점 때문입니다. ‘배를 엮다는 이제 더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인데, 연필과 볼펜조차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요즘 서예 역시 사전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소재라서, 또 서예가이자 필경사(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남다른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살아온 이력이나 직업, 성격, 타인과의 소통방식까지 정반대인 두 남자 쓰즈키와 도다가 서예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쓰즈키가 반듯한 모범생 같은 남자라면, 도다는 어딘가 삐딱한데다 서예가와는 거리가 먼 괴짜 같은 남자입니다. 당연히 첫 만남부터 충돌과 몰이해가 거듭되고 마치 만담 커플이 서로 딴 소리만 주고받는 듯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우연히 맡게 된 편지 대필 때문에 뜻밖의 협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는 다른 상대방의 진면목을 발견합니다.

 

제가 알기로 필경사는 한국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업입니다. 연회 초대장의 주소를 붓글씨로 대필하는 일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도 서예학원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예 자체가 무척 희귀하거나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겨진 지 오래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은 먹과 벼루가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라든가 화선지 위를 힘차게 또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붓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이 자아낸 갖가지 형태의 글씨의 향연 등 서예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필경사 도다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독자마저 그 아름다운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듭니다.

 

다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쓰즈키와 도다가 소중한 인연을 맺어가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 밋밋하고 감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접점을 만들어준 편지 대필은 다소 뜬금없는 설정 같았고, 그 대필 편지의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쓰즈키가 괴짜에 가까운 필경사 도다의 페이스에 말려들며 호감을 갖게 되는 에피소드들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쓰즈키의 말과 행동이 매번 ?”라는 의문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다 읽고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도다와의 만남을 기록한 쓰즈키의 일기장처럼 느껴진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예의 매력과 품격을 그린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정작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도 못했고 음미할 만한 여운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배를 엮다처럼 먹의 흔들림에서도 등장인물들이 품는 뭉클함과 뿌듯함, 그리고 충만한 아날로그 감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이 그린 서예를 통한 치유의 서사에 만족한 독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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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2 - 하우스메이드의 비밀
프리다 맥파든 지음, 황성연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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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나이에 대학에 다니며 사회복지사가 될 계획을 갖고 있는 밀리 캘러웨이는 살인 전과 때문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하우스메이드 외에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IT 재벌인 더글러스 개릭의 연락을 받고 맨해튼 펜트하우스의 하우스메이드가 된 밀리는 자신의 천운에 감격하지만, 이내 평범하지 않은 개릭 부부의 상황을 감지하곤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손님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내 웬디, 처음엔 친절했지만 밀리가 웬디에게 관심을 갖자 싸늘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 더글러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인 웬디의 멍투성이 얼굴, 그리고 빨래와 세면대에서 발견되는 핏자국 등 밀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밀리는 웬디가 처한 끔직한 상황을 직접 목격합니다.

 


서평에 앞서 편집에 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는 편인데도 12개나 되는 오타를 발견했는데, 모든 독자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제 경우엔 책읽기를 방해하는 오타를 견디지 못합니다. 또 그런 상태로 책을 판매한 출판사의 태도도, 일반독자조차 쉽게 찾아내는 12개의 오타를 방치한 편집자와 번역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우스메이드 2’는 내용만으론 별 5개도 충분하지만, 편집에 관한 한 별 1개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과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10년을 복역한 밀리는 출소 후 하우스메이드로 일하며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을 여러 번 구해낸 적 있습니다. 때론 불법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남자들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모태 오지라퍼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밀리가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그것이 법을 어기지 않고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리는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서 또다시 가혹한 상황에 처합니다. 전형적인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웬디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밀리는 그녀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밀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6개월 된 연인 브록의 존재입니다. 은수저 출신의 변호사인 그는 밀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결혼까지 꿈꿉니다. 하지만 밀리는 자신의 살인 전과를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와의 사랑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런 와중에 펜트하우스의 일이 터지자 밀리는 자신에겐 사랑과 결혼이란 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허상임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한편 위기에 처한 여자들을 구할 때마다 자신과 함께 행동했던 전 연인의 존재가 늘 밀리의 마음 한 편에 남아있습니다. 그가 곁에 있다면 웬디를 구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생각에 2년 전 일방적으로 소식을 끊고 이별을 초래한 그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연인의 이름이나 캐릭터를 밝히지 않은 건 전작인 하우스메이드에 대한 대형 스포일러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서평에서 이 연인의 이름을 공개할 텐데, ‘하우스메이드를 읽지 않은 채 그 서평들을 접한 독자라면 아쉽지만 그 스포일러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개를 뺄 정도로 아쉬웠던 건 서론이 너무나도 길고 장황했던 점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중반부쯤에 터지는데, 그 전까지는 전작과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되는데다 유사한 상황들이 반복될 뿐이고, 현재 연인인 브록과의 갈등 역시 밀리를 민폐캐릭터로 보이게 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됩니다.

물론 본격적인 사건이 터진 뒤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프리다 맥파든 특유의 몰아치는 반전과 짜릿한 스릴러 서사의 쾌감이 연이어 폭죽처럼 터집니다.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진 폭력과 학대의 진상이 드러나는가 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 속에서 허우적대던 밀리는 천운 같은 반전 덕분에 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모태 오지라퍼 하우스메이드로서의 타고난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우스메이드 시리즈는 모두 세 편이 출간됐습니다. ‘The Housemaid's Wedding’이라는 단편이 있긴 하지만, 장편으론 2024년에 출간된 ‘The Housemaid Is Watching’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치명적인 하우스메이드 밀리 캘러웨이의 세 번째 활약도 조만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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