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저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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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괴담과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조합한 미야베 월드 2가운데 막내라고 할 수 있는 기타기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의 명칭은 책을 담는 상자인 문고를 만들어 파는 행상에 불과한데다 비주얼도 완력도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10대 소년 기타이치와, 대중탕의 가마 담당으로 늘 꾀죄죄한 모습에 말수도 적지만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는 대단한 능력소년 기타지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미야베 월드 2대부분의 작품이 귀신이나 혼령을 등장시킨 괴담과 기담에 가깝다면, ‘기타기타 시리즈는 여러 능력자의 도움을 받는 소박한 소년탐정이 명백한 현실 속 사건을 풀어가는 정통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귀신 저택역시 정의감과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기타이치가 자신을 아껴주는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지원과 엄호를 받으며 비극적이고 참혹한 두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수록작인 통수치기는 기타이치가 어릴 때부터 몸담았던 문고가게가 방화로 인해 소실된 사건과 그 와중에 벌어진 사악한 절도사건을 다룹니다. 한 여인이 방화범으로 지목된 채 종적을 감췄지만 그녀를 잘 아는 기타이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방화 이면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또한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임시거처에서 거액의 도난사건이 발생하자 대중탕 가마 담당 기타지의 힘을 빌어 범인들을 잡기 위해 분투를 벌입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귀신 저택28년 전 한 여인이 납치된 뒤 살해된 사건에 주목한 기타이치가 동일범에 의한 또 다른 범행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연쇄 납치살인사건 조사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야기입니다. 괴팍하지만 꼼꼼하고 뛰어난 검시관과 지금은 은거 중인 전직 관리의 마음까지 움직인 기타이치는 끝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히며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귀신 저택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무게감도 대단하고 어둠의 농도도 상당히 짙은 작품입니다. 이제 막 17세가 된 기타이치가 감당하기엔 사건 자체도 잔인하고 흉악한데다 그 이면의 사연들은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더구나 기타이치와 기타지의 활약으로 사건은 일단종결되지만, 누가 봐도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기 어려운 상태로 막을 내립니다. 말하자면 기타이치의 마음속엔 숱한 의문과 회한과 아쉬움이 남아있다는 뜻인데,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이어지는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서 이 모든 잔념들이 해소된다고 합니다.

 

기타이치에게 이처럼 무거운 시련과 어려운 시험을 부여한 건 그를 한 뼘 이상 성장시키기 위한 미야베 미유키의 의도적인 채찍이라고 합니다. 기타이치는 세상을 떠난 오캇피키(하급관리의 지명을 받아 치안업무를 맡던 민간인) 센키치 대장에게 문고 행상 일을 배운 것은 물론 오캇피키로서의 자질도 물려받았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궁극적으로 기타이치를 뛰어난 오캇피키로 성장시킬 계획입니다. 지금은 마음만 앞서는 똑똑한 10대 소년에 불과하지만 에도 시대의 명탐정이자 모두에게 존경받는 오캇피키가 되려면 이만한 고비는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한다는 게 미야베 미유키가 구상한 큰 그림인 것입니다. 아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선 오캇피키가 되겠다는 기타이치의 꿈이 좀더 분명하고 구체화될 것 같은데, 과연 어떤 사건을 통해 그런 결심에 이를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타이치와 기타지의 활약도 흥미롭지만, 매번 그들을 돕는 에도 후카가와 어벤저스의 활약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어릴 때 천연두로 시력을 잃었지만 대신 뛰어난 후각과 직감을 보유한 마님, 현대의 과학수사도 무색하게 만드는 뛰어난 검시관, 계급 따윈 개나 줘버린 인간미 넘치는 사무라이, 성미는 고약하지만 정보와 인맥과 경륜이 넘치는 셋집 관리인 등 기타이치의 뒷배를 자처한 능력자들의 매력은 귀신 저택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의 막내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기타기타 시리즈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와 함께 필생의 사업이라 칭하며 작가 인생의 대단원을 장식할 작품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올 가을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이 출간된다고 하는데, 그에 못잖게 기타기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미야베 월드 2의 팬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일 거란 생각입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월드 2시리즈별 소개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1539848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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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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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캐럴 박사가 이끄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끔찍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성 여섯 명으로 이뤄진 상담과 치유를 위한 모임입니다. 리넷 타킹턴을 비롯하여 그녀들이 겪은 비극은 20여 년 전인 1980년대에 벌어졌고, 모임은 어느 새 1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 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그룹 자체의 존폐가 거론될 무렵 이들은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멤버 중 한 명이 대량 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군가 그룹 멤버 모두를 노리는 정황이 분명하다는 점. 이 사실을 눈치 챈 리넷 타킹턴은 멤버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인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오히려 멤버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물론 경찰에게 추적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파이널 걸은 슬래셔 무비 혹은 공포영화에서 대량 살인범의 만행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을 죽이거나 제압하는 역할을 맡곤 하는데, 영화는 가족 또는 연인과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악몽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 속 파이널 걸의 진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심신의 상처, 술과 약물에 찌들어도 잊히지 않는 사건 당일의 기억, 호기심과 관음증의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유명세를 타야 하는 절망감 등 파이널 걸에겐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대량 살인극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온 여섯 명의 파이널 걸의 이야기이자 자신들을 노리는 대량 살인범과의 절체절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리넷은 파이널 걸이 겪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엔 외출을 자제하며, 외출할 경우엔 단 한 시도 주위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습니다. CCTV, 철망, 금고 등 갖가지 안전장치를 해놓은 집에서조차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도소에 수감 중인 범인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거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범인은 감형을 받은 뒤 슬래셔 무비의 모델이 되거나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지만 피해자인 리넷의 악몽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멤버 중 한 명이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게 살해당하자 리넷은 극도의 공포에 빠집니다. 더구나 자신은 기관총 습격을 받고 다른 멤버들도 갖가지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 그룹을 노리고 살인극을 벌이려 한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정보를 감추며 살아온 멤버들에 대해 범인이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멤버 중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자기들 실수로 죽는다. 그럼 여자는? 우리는 여자라서 죽는다.” (p43)

 

슬래셔, 혹은 파이널 걸영화는 고기 분쇄기 같은 것이다. 제작자와 제작사 대표들이 기계를 돌리면, 남성 팬들이 침을 흘리며 그 폭력적이고 성적인 판타지를 덥석 받아먹는다.” (p61)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여섯 명의 멤버 모두 자신이 겪은 사건이 영화로 제작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성 범인여성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해체하는 슬래셔 무비로 만들어졌고, 실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멤버들을 한낱 오락거리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심지어 잔인무도한 대량 살인범의 캐릭터에만 공을 들임으로써 무참히 살해당한 여성들을 그야말로 이름 없는 소품처럼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대중의 뇌리에 남는 건 개성 강한 남성 범인일뿐 여성 희생자는 성적 또는 폭력적 판타지의 대상으로만 기억될 뿐인데, 이런 작태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려던 작가는 남성들을 위해 분쇄기에 쑤셔 박히는 고기취급을 받았던 파이널 걸의 이미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분투를 더욱 더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슬래셔 무비의 탈을 쓴 슬래셔 무비라고 할까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단순한 액션스릴러를 넘어 여성 연대서사 혹은 시스터 서사로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전개와 기대에 못 미친 미스터리(누가 새로운 대량살인범인가?) 때문에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메인 요리인 리넷과 멤버들의 생존 투쟁기보다 사이드 메뉴인 슬래셔 무비 관련 서술이 더 눈길을 끈 것도 아쉬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파이널 걸 자체가 워낙 매력적인 소재인데다 시스터 서사가 탄탄하게 그려진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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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황금시대의 살인 - 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
가모사키 단로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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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마니아인 17세 고교생 구즈시로 가스미는 과거 전설적인 미스터리 작가의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호텔로 운영 중인 설백관을 찾습니다. 무엇보다 10년 전 미스터리 작가가 출판 관계자들을 상대로 냈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 채 미제로 남아있는 밀실트릭의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돼있다는 게 구즈시로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즈시로가 설백관에 도착한 직후 전화가 끊기고, 계곡 다리가 불타는가 하면, 갑작스런 눈이 호텔 주위에 쌓입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연이어 밀실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자칭 명탐정이란 자가 수사에 나서고 구즈시로는 조수 역할을 맡지만 견고한 밀실트릭은 조금도 깨질 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밀실트릭이란 게 있을까, 싶지만 일본에선 신예와 베테랑을 불문하고 이 고전적이면서도 잘해야 본전에 가까운 어려운 소재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같습니다. 20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대상문고 그랑프리 수상작인 밀실 황금시대의 살인은 배경 설정, 등장인물의 캐릭터, 거듭된 반전 등 여러 면에서 기존의 익숙한 밀실트릭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신선하고 특이한 작품으로, 아직도 밀실트릭의 세계에는 새롭게 캐낼 영역이 무한히 남아있음을 제대로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발상부터 독특합니다. 3년 전 일본에서 벌어진 최초의 밀실살인사건에서 범인이 무죄를 선고받은 초유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재판부의 판결은 풀 수 없는 밀실을 만들면 살인도 무죄가 되는 세상을 선포한 셈입니다. 이후 일본에선 무죄를 노린 밀실살인이 급증했고, 경찰엔 밀실과가 신설됐으며 밀실전문탐정, 밀실감식자 등 새로운 직업은 물론 밀실대행업자, 즉 밀실트릭을 제공하거나 밀실살인을 청부받는 신종 범죄자까지 출현했습니다. 그야말로 밀실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이라는 부제대로 마니아들로부터 밀실의 성지로 불리는 설백관에서 여러 건의 밀실살인이 벌어지고 주인공 구즈시로를 비롯한 탐정들이 진상 파악에 도전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구즈시로가 화자이자 주인공을 맡고 있지만 실질적인 명탐정 역할은 17세 여고생 미쓰무라 시쓰리의 몫입니다. 10년 동안 미제로 남아있던 설백관의 밀실트릭을 깨뜨리는 것은 물론 연쇄 밀실살인까지 모조리 해결하는 미쓰무라는 “(현장의) 힌트들을 조합하면 자연스럽게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는지가 떠오르는 구조죠.”라는 태연한 말과 함께 불가해한 여러 밀실의 진상을 손쉽게 밝혀냅니다. 반면 구즈시로는 미쓰무라를 보좌하는 왓슨 역할이자 밀실의 함정에서 허우적대는 독자를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담 커플 같은 17세 탐정 듀오의 캐릭터는 이 작품을 기존의 무겁고 복잡한 밀실 미스터리와 차별화시켜주는 가장 큰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실트릭, 즉 하우더닛이 중심인 미스터리지만 밀실 황금시대의 살인은 후더닛과 와이더닛이 적절하게 믹스돼있어서 마지막까지 독자로 하여금 여러 궁금증을 동시에 품게 만듭니다. 불가해한 밀실트릭을 해결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뜻밖의 범인과 특이한 범행동기가 밝혀지는 순간의 재미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또한 무죄를 선고받아 밀실의 황금시대를 초래했던 3년 전 사건이 두 주인공의 최종 미션으로 설정돼서 과연 어떤 식으로 대미가 장식될지 마지막까지 긴장과 기대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다만, 일부 트릭에서 과연 저런 발상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다소 작위적이고 결과론적인 장치들이 등장한 건 아쉬웠습니다. 어쩌면 밀실트릭의 태생적인 한계’, 즉 명백히 물리적이고 합리적인 장치들로 밀실을 완성하려다 보니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드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의 경우 나름 기발한 발상과 친절한 설명으로 독자를 설득하곤 있지만 태생적인 한계가지 모두 극복하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이후 일본에선 밀실 광란시대의 살인’, ‘밀실 편애시대의 살인등 두 편의 후속작이 나왔습니다. 구즈시로와 미쓰무라가 계속 탐정 역할을 맡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밀실트릭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후속작들의 출간을 고대하게 될 것 같습니다. 더는 새로운 영역이 없을 것만 같은 밀실트릭의 세계에서 작가가 또 어떤 기발한 트릭을 발굴해서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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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 아름다운 밤에
아마네 료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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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모리에서 신원미상의 노숙자 중년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엽기 살인사건이 연이어 두 건이나 벌어지자 언론은 범인에게 플레임(Flame)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그런데 플레임의 세 번째 희생자가 신원이 확실한 여고생 가렌으로 밝혀지면서 수사진은 혼란에 빠집니다. 가렌의 오빠인 17세 소년 산시로는 범인을 향한 복수심에 사로잡히지만 그보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때 긴 은색 머리의 신비한 미소녀 탐정 오토미야 미야가 접근해선 플레임 사건을 의뢰받아 수사 중이라며 살해된 가렌에 대해 물어옵니다. 경계심이 앞서던 산시로는 미야가 공감각 능력자란 사실에 더욱 놀라지만 이내 그녀의 조수가 되어 가렌을 살해한 진범을 직접 응징하기로 합니다.

 


공감각 아름다운 밤에2024희망이 죽은 밤에’(일본 출간 2017) 이후 두 번째로 한국에 소개되는 아마네 료의 작품으로 2010년 메피스토상을 수상한 데뷔작이자 공감각 미소녀 탐정 오토미야 미야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희망이 죽은 밤에가 생활안전과 여경인 나카타를 앞세운 사회파 미스터리였던 반면, ‘공감각 아름다운 밤에는 공감각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미소녀 미야가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선 미야(美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2017년까지 모두 네 편이 출간됐는데, 그만큼 미야의 매력이 독자들에게 어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감각은 특정한 감각이 또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 “글자에서 색을 보거나 소리를 형태로 인식하는등 다양한 경우가 존재하는데, 주인공 미야의 공감각은 청각이 시각을 불러일으켜서 어떤 소리를 들으면 색이나 형태가 보이는, 이른바 색청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하는 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선명한 파란색이, 살인 욕구에 사로잡힌 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강렬한 진홍빛이 보이는 것입니다.

공감각 못잖게 미야를 돋보이게 하는 건 독특한 외모입니다. 뛰어난 미모와 은색의 긴 머리카락 덕분에 어딜 가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소리를 색과 형태로 볼 수 있는 능력에다 눈에 띄는 외모까지 갖춘 미야의 캐릭터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에 잘 어울려 보이지만 그녀가 다루는 사건은 잔혹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해서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동생 가렌을 살해한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미야의 조수가 된 산시로, 그리고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엘리트 경찰 야하기가 미야와 함께 플레임 추적에 나섭니다. 작은 단서 하나 남기지 않은 플레임의 완벽한 범행 때문에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는데, 무엇보다 여성 노숙자 사건과 가렌의 사건이 전혀 다른 패턴으로 이뤄져서 동일범에 의한 소행인지, 모방범이 개입한 상황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이 주목한 건 ?”, 즉 범행 동기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가운데 와이더닛 미스터리의 새 지평이란 문구가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에선 범인의 정체 자체보다 범행 동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리고 막판에 드러나는 플레임의 범행 동기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함 그 자체라서 반전 이상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미야의 캐릭터와 공감각 능력도 흥미롭고, 각기 다른 목적으로 플레임 추적에 나선 산시로와 야하기의 미묘한 갈등도 눈길을 끌어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공감각이란 설정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미스터리 서사가 다소 허술해 보였고, 초능력이 아니라 분명히 실존하는 증상인 미야의 공감각이 뒤로 갈수록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과대하게 포장돼서 현실감이 떨어진 점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겉으론 발랄한 미소녀로 보이지만 실은 공감각 능력이 초래한 지독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미야의 과거사가 후속작에서 밝혀질 것 같긴 한데, 계속 찾아 읽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론 희망이 죽은 밤에에서 맛본 아마네 료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어서 고른 작품인데, 뜻밖의 재미를 만끽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진하게 남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감각이란 특수한 능력과 본격 미스터리의 조합이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쯤 미야의 신비한 매력에 관심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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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 보이는 살인
테라시마 요우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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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사에코는 토사카 경찰서 형사과 소속이던 3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약혼자를 잃고 자신도 큰 부상과 함께 오른쪽 시력을 잃으며 형사과에서 내쳐졌습니다. 그런데 사고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현장을 찾은 오자키는 충격적인 경험을 합니다. 실명된 오른쪽 눈을 통해 당시 사고의 전말이 생생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임을 알게 된 오자키는 서장 코우키와 베테랑 형사 타쿠미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이 목격한 범인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처음엔 믿지 못하던 두 사람은 결국 오자키의 특별한 능력을 수긍하게 되는데, 서장 코우키는 사고를 재조사 하겠다면서도 의외의 조건을 내겁니다. 오자키가 곧 신설될 미제사건 특별팀에 들어와서 그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오자키 사에코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특별한 능력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3년 전 시점의 상황만 볼 수 있다는 점, 뇌에 걸리는 부하 때문에 몇 시간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점, 원하는 상황을 보려면 직접 그 장소에 가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사이코메트리 못잖게 특별한 능력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런 능력자가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게 된 건 과연 그 특별한 능력이 살인사건을 다루는 경찰 미스터리와 어떻게 믹스됐을까, 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오자키가 3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아낸 뒤 미제사건 특별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오른쪽 눈의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연작 단편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나에게만 보이는 살인은 영미권 스릴러에 등장할 법한 잔인무도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장편 미스터리입니다. 특별한 능력자 오자키, 신임 경찰서장이지만 신참 때는 오자키와 함께 훈련받았던 금수저 출신 코우키, 그리고 불량배를 제압하다가 손을 다쳐 총도 쏘지 못하는 애물단지가 됐지만 여전히 베테랑의 품격을 발산하는 중년의 여형사 타쿠미로 이뤄진 미제사건 특별팀3년 전에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이 다른 여러 살인사건에도 연루된 점을 포착하곤 갖은 고난을 겪으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애초 호기심을 자극했던 판타지 능력과 경찰 미스터리의 조합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했고, 그 설계 역시 별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성별, 계급, 성격 모두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케미를 뿜어낸 오자키-코우키-타쿠미 3인방의 캐릭터 플레이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끌었는데,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없어 보여서 이들이 이끄는 미제사건 특별팀의 활약을 그린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도 품게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하게 아쉬웠던 건 일가족 살해사건 수사를 시작한 이후 주인공들의 답답하고 지루한 탐문 과정입니다. 막상 미제사건 특별팀이 출범하긴 했지만 범인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탐문은 아무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은 탓에 마치 기승승승전결의 구도로 읽힐 정도로 고구마 같은 전개가 이어집니다.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다시 속도감을 회복하고 단번에 클라이맥스로 치닫긴 하지만 중반부의 이 지루함을 견뎌내는 게 독자에겐 나름 고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떡밥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독자 입장에선 당연히 미제사건 특별팀의 두 번째 사건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2023년 이후 아직 신간 소식은 없습니다. 1958년생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늦깎이 데뷔를 한 테라시마 요우가 언제쯤 미제사건 특별팀의 두 번째 이야기를 선보일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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