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 플레이어 그녀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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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성과 선정성의 적절한 조합, 엄청난 속도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절묘하게 비틀린 문장과 블랙 유머 등 온갖 재미 요소들이 골고루 잘 배합된 작품입니다. ‘포커 판을 무대로 한 스릴러라는 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세 주인공이 총과 폭력과 기막힌 카드 속임수를 앞세워 악당들을 제압하거나 가차 없이 복수하는 장면들은 프랑스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락성과 재미와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세 주인공에게 각각 끔찍하거나 비극적인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부여함으로써 화려하고 통쾌한 액션 스릴러에 적절한 균형추를 매달아놓습니다. 30대 초반인 주인공 막신은 권위적이고 탐욕스런 아버지로 인해 10대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트라우마는 고통스런 자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신을 망쳐놓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이후 16년 동안 막신은 복수를 위해 자신이 연마해야 할 모든 것들을 철저히 몸과 마음에 익혔고, 이제 인생을 건 복수를 도와줄 협력자를 찾아 나섭니다.

 

막신이 선택한 협력자는 작크.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에 의해 포커의 고수가 된 그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속임수 솜씨를 갖고 있지만 상대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속임수에 더 능합니다. 거하게 한 판을 치르고 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자를 찾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지 않습니다. 클럽이나 길거리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여자와 합의 하에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엔 감정 따윈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혹한 훈련으로 인해 감정 자체를 거세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평생 처음으로 불꽃 튀는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 상대가 바로 막신입니다.

세 번째 주인공인 발루는 작크와 콤비로 포커 판을 누비는 거구의 흑인입니다. 어려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수시로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만 작크와의 만남 이후 포커를 통해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있게 됩니다. 포커 외에 그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은 이른바 원정 처벌, 일부러 늦은 밤 유흥가를 찾아가선 여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일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정의 구현 방식이라고 할까요?

 

이야기의 골자는 포커 판을 전전하며 젊음을 탕진하던 작크가 막신의 복수극에 끼어든 뒤 롤러코스터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액션 스릴러 설정이지만, 세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심리묘사가 절묘하게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역동성과 묵직함을 오가는 흥미로운 양상을 띱니다. 무의미한 성욕 발산 외엔 어디에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포커의 고수작크, 자살충동과 원정처벌이라는 극단적인 심리적 동요를 겪는 발루, 그리고 악몽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자해를 저지르면서도 복수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막신은 작가의 리얼하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생생하고 뜨거운 캐릭터로 발전합니다. ‘포커 플레이어 그녀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오락물의 미덕을 갖춘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복수극 못잖게 눈길을 끈 건 무례한 마초들을 향한 사이다 같은 응징인데, 포커 판 자체가 남자들의 세계이자 술집이나 지하실 등 음습한 공간에서 벌어지다 보니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막신의 존재는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는 그녀의 환상적인 기술에 대해 존경심과 부끄러움을 갖는 대신 마초들 대부분 예외 없이야비하고 음란한 공격을 가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6년 동안 복수를 위한 모든 기술을 연마한 막신에게 그따위 무례한 수컷들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막신과 원 팀이 된 작크와 발루 역시 사이다 같은 응징에 기꺼이 참여하여 쾌감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작가의 전작인 루거 총을 든 할머니를 읽지 않은 건 (미스 마플이나 폴리팩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할머니 주인공이 취향에 잘 안 맞기도 했고, 표지 역시 조금은 비호감에 가까운 선입견을 갖게 했기 때문인데, ‘포커 플레이어 그녀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바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 브누아 필리퐁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매력덩어리 캐릭터들과 오락 이상의 재미와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겸비한 그의 신작 소식은 언제라도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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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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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캐리 화이트는 학교 샤워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초경을 겪습니다. 벌거벗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의 의미조차 알 수 없어 충격에 빠진 캐리를 향해 친구들은 생리대와 탐폰을 던지며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3살 이후 잠복해있던 캐리의 염력이 발현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기독교 원리주의자로서 딸의 모든 것을 통제해온 어머니 마거릿은 여자가 된 캐리가 육체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고 이 역시 캐리의 가공할 염력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염력은 졸업예정자들의 꿈의 무대인 무도회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대참극을 일으킵니다.

 

이 작품 전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은 모두 14편입니다. 그가 발표한 소설과 중단편집이 모두 74편이니 겨우 1/5 정도 읽은 셈이지만, 어쨌든 나름 스티븐 킹을 꽤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는 되는 실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 캐리를 읽지 못한 탓에 늘 숙제 하나를 빼먹은 듯한 아쉬움을 느껴왔는데, 드디어 그 숙제를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첫 공식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호러 킹으로서의 그의 매력과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제작입니다. 호러 코드는 염력’, 즉 정신력으로 물체를 이동하거나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유전되긴 했어도 잠재적 능력에 불과했던 캐리의 염력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분노입니다. 염력 유전자는 캐리의 인생에서 모두 세 번에 걸쳐 폭발합니다. 이웃집과의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던 3살 때 우박과 돌덩이를 불러들였고, 16살에 겪은 끔찍한 초경과 그것이 초래한 주위의 잔인한 공격은 잠복해있던 염력을 부활시켰으며, 잠시나마 세상과 화해하려던 순간 마지막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5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한 19795월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1~2년 후 캐리의 염력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대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터뷰 등 참고자료들이 간간이 끼어드는 형식입니다.

재미있는 건 극과 극을 달리는 학자들의 논쟁입니다. 누군가는 학문적 관점에서 염력의 유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는 2의 캐리는 시간문제라며 조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위험한 아이들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염력이란 실제 존재하는 힘이며 특히 유전되는 현상임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캐리의 염력과 그것이 일으킨 대참사를 명백한 현실의 사건으로 포장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픽션이란 점을 잊게 만듭니다. 더불어, ‘또 한 명의 캐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에필로그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서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사방에 난무하는 피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데, 캐리의 염력의 부활을 알린 생리혈, 온갖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양의 돼지피 등 시각적인 공포를 고조시키는 온갖 종류의 피가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피의 향연이 책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979년으로 설정된 점도 흥미로웠는데, 출간 시점인 1974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미래 소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첫 출간작을 내놓게 된 스티븐 킹에게 유전되는 염력이란 설정은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삼기엔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요?

 

스티븐 킹에게 홀딱 빠져들 정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별난 간식처럼 구미를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인정합니다. ‘캐리는 그의 공식 첫 작품이란 점 때문에 더욱 더 별난 간식처럼 느껴졌는데, 막판의 불가지론같은 일부 대목만 제외한다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팽팽한 긴장감과 호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리의 염력 자체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만든 어머니와 친구들과 마을을 통렬하게 날려버리는 복수 코드는 호러와는 별개의 쾌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스티븐 킹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 독자라면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추천이지만 재미와 호러를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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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미니 - 전면개정판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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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주의 남부에 위치한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 수사반장 헬렌 그레이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연인 혹은 직장동료 등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인적 없는 곳에 감금한 뒤 총알 한 개가 든 총과 함께 한 사람을 죽여야 나머지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에 포위당한 채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범인의 끔찍한 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 역시 죄책감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납치범의 범행 동기는 물론 어떤 식으로 희생자를 선택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헬렌과 수사팀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영국에서 2014년에 발표된 이니 미니는 한국에 2015년에 출간됐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실은 작가인 M. J. 알리지의 이름은 물론 시리즈 이름조차 생소해서 읽을까 말까 꽤 주저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작품이 왜 스릴러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했는지(제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궁금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이니 미니는 미국의 동요 “eeny, meeny, miny, moe!”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정도입니다.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선택을 강요하는 범인의 기괴한 행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인데, 납치된 사람들은 연인, 직장동료, 가족들이라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공포와 배고픔에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에 몰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발견되면서 헬렌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납치, 감금, 살인 강요로 이어지는 범죄 패턴은 동일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정말 상대를 죽일까? 누가 누구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은 모두 제각각이라 연이어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 역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가운데 다만 피해자들이 결코 무작위로 선택된 게 아니라고 여기는 헬렌의 추측 외에는 딱히 정해진 수사방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독자로선 초반 내내 헬렌과 수사팀이 느끼는 혼란과 무기력함에 고스란히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캐릭터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일 중독자에 아이 갖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발전기처럼 일했고, 거의 혼자서 부서 내의 사건 해결률을 높여놓았다.”는 표현대로 헬렌은 최연소 여성 수사반장이란 타이틀에 어울리는 최고의 형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비극으로 인해 진짜 자기 모습을 꽁꽁 감춘 채 완벽한 형사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오직 한 순간, SM클럽에서 채찍에 몸을 내맡긴 채 무자비한 상처를 낼 때뿐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헬렌은 오직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더욱 거센 채찍질을 요구합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던 그녀의 오랜 악몽과 비극은 막판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조연들 역시 특별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서 적잖은 분량이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할애됩니다. 유능한 형사지만 이혼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마크, 헬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맹렬히 노력하면서도 임신을 갈망하는 찰리, 어릴 적 황산테러로 얼굴 반쪽이 망가진 타블로이드 기자 에밀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난해한 표현 대신 쉽지만 절절한 문장들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적잖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더욱 강렬하게 읽히는 건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한국에는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단 세 편만 소개됐지만(‘죽음을 보는 재능은 스탠드얼론입니다.), 영국에선 모두 10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이 출간됐습니다. 올해 북플라자에서 이니 미니의 개정판을 낸 걸 보면 나머지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매력 넘치는 시리즈가 빠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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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샤일록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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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중요한 초반 설정이 포함된 서평입니다.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에 이미 공개한 내용이긴 하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이 서평은 나중에 읽으시기 바랍니다.)

 

은행 입사 후 3년간 엘리트 코스를 밟던 유키 신고는 섭외부로 발령을 받자 당황합니다. 채권 회수가 주 업무인 섭외부는 공공연히 은행 내 비주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직속상관이 된 야마가 과장은 샤일록’(‘베니스의 상인의 고리대금업자)이란 별명으로 얻을 정도로 채권 회수에 관한 한 무자비하고 냉혹하며 뛰어난 실적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유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회수 활동을 하며 유키는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진짜 샤일록같은 인물이지만 야마가에겐 돈과 은행에 대한 그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 코스만 바라보던 유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마가와의 동행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야마가가 칼에 찔려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경찰과 탐정 미스터리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던 나카야마 시치리가 이번에는 금융이란 테마에 살인사건을 접목시킨 독특한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은행원으로서 꽃길만 걷다가 채권 회수라는 비주류업무에 투입된 3년차 은행원 유키 신고와 샤일록혹은 채귀’(債鬼)로 불릴 정도로 가차 없이 채무자를 압박하여 채권을 회수하는 베테랑 은행원 야마가를 앞세워 금융계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거기에다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를 얹음으로써 매력적인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금융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진정한 은행원으로서 거듭 나는 유키의 성장 스토리입니다. 유키는 생전의 야마가로부터 그리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진 못했지만 돈과 은행에 관한 그의 철학만큼은 제대로 물려받았고, 덕분에 그가 담당했던 채무자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채권 회수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그의 철학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됩니다.

, 초반에 의외의 죽음을 맞이하며 조기 퇴장하긴 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거나 채귀라는 말에 화가 났나? 회수 담당자는 그런 말을 들어야 제 몫 하는 거다.”라는 명언을 남긴 야마가 역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였습니다.

 

주제와 캐릭터 모두 다소 모범적이고 묵직해 보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톤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형적인 스타일대로 무척 경쾌하고 스피디합니다. 유키가 상대하는 악성 채무자들은 히키코모리 주식투자자, 경영 마인드가 부족한 중소기업가, 무능한 2세 경영인,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 선거에서 참패한 전직 의원, 땅 투기에 실패한 야쿠자 등인데, 그야말로 악성 채무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온갖 부도덕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논리 가운데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준 은행을 탓하는 대목이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유키 역시 악덕기업으로서의 은행의 실상에 여러 번 분노하곤 하는데, 부실한 심사와 부적절한 커넥션으로 불량채권을 빚어낸 당사자가 은행이지만, 필요에 따라 당장 그 불량채권들을 회수하라며 직원을 압박하는 것도 은행이고, 막상 직원이 거친 방법으로라도 채권을 회수하려 들면 회사 이미지와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며 경고를 날리는 것도 은행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는 그리 큰 비중으로 그려지진 않고, 범인 역시 초반부터 대략 두세 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어서 긴장감이 덜 하긴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는 반전의 제왕답게 막판에 살짝 한 번 꼬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최종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유키의 몫인데, 결과적으론 그 추리 역시 야마가로부터 배운 교훈에 힘입은 덕분입니다.

 

독하고 세고 반전의 힘이 강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심심하고 밋밋한 건 사실이지만, 돈과 은행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건 의외로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빚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는 악성 채무자들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기어이 채권을 회수하고 마는 유키의 활약도 소소하긴 해도 적당한 통쾌함을 선사하는 재밋거리입니다.

 

사족으로... 나카야마 시치리는 인물 혹은 사건들을 서로 다른 작품에 교차 출연시키곤 합니다. 유키가 상대한 악성 채무자 가운데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가 있는데, 그 에피소드가 너무 낯익어서 예전에 써놓은 서평들을 뒤져보니 다시 비웃는 숙녀가운데 두 번째 챕터인 이노 덴젠과 연결된 에피소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시 비웃는 숙녀를 읽은 독자라면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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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통행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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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을 다룬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주인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재진행형이며 가장 매력적인 건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괴담 들어주기를 그린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라는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 덕분에 손님인 화자(話者)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하고 믿기 힘든 괴담을 편한 마음으로 털어놓습니다. 그 괴담들은 때론 안타깝기도, 때론 감동적이기도, 또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오랜 시간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바위덩어리를 치워버리거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영혼 통행증까지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중 앞의 네 편은 17살 소녀 오치카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았고,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함께 괴담을 들었으며,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도미지로가 단독으로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눈물점서평에도 썼던 내용이지만 도미지로는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다소 미덥지 못한 인물입니다.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하지 않은데다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아 손님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눈물점에서 단독 데뷔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도미지로는 아직 초보 티가 여전합니다. 괴담을 들려줄 손님이 등장하면 바짝 긴장하기도 하고, 간혹 앞질러 이야기를 예단하다가 당황하기도 하며,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간이긴 해도 도미지로가 분명히 성장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는 오치카의 도움이 간절할 정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든든한 두 하녀 오카쓰와 오시마에게 기대지도 않습니다. 나름 쌓은 노하우로 대화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능력도 갖추기 시작했고, 들은 괴담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 역시 꽤 진지한 구상과 고민을 담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제법 청자(聽者)로서 틀이 잡혀 간다고 할까요?

 

모두 세 편의 괴담이 실려 있는데, 산 속 용암 연못에 기거하는 터주의 은혜 덕분에 화기(火氣)를 제압할 수 있는 신비한 큰북 님을 갖게 된 오카지 번의 이야기(‘화염 큰북’), 맛있는 꼬치경단을 파는 소녀 오미요의 안타까운 가족사(‘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영혼의 비극적인 사연과 그 영혼을 돌보며 마지막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뱃사람의 애틋한 기행(‘영혼 통행증’) 등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이 비교적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그린 반면, ‘화염 큰북영혼 통행증은 괴담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화염 큰북의 경우 용암 속에 살던 생물이 산 속 연못에서 터주로 추앙받으며 불기운을 좌지우지한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터주에 얽힌 놀라운 반전은 괴담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충격과 감동을 전합니다. ‘영혼 통행증은 전형적인 한 맺힌 귀신 이야기같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뱃사람과 영혼을 볼 수 있는 15살 소년이 가세하면서 색다른 귀신 이야기로 장식됩니다.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클라이맥스는 카타르시스의 힘까지 담고 있어서 통쾌함과 애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작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야기의 결은 전혀 다르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자의 성실함과 진정성이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세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 기대보다 홀쭉했던 분량입니다. ‘편집자의 덧붙임을 읽어보니 애초 여섯 편이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과도해지고 출간시기가 많이 늦어질 수 있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세 편의 연재가 일본에서 마무리됐고 한국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니 저의 아쉬움은 그런대로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년 봄쯤에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1.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의 괴담 자리가 3년 전에 시작됐다는 서문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저의 체감으로는 족히 10년은 된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찾아보니 시리즈 첫 작품인 흑백이 한국에 소개된 게 2012년 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미시마야에 또다시 3년의 시간이 흐르려면 앞으로 1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요? 부디 절반 정도로라도 줄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족 2. 미미 여사는 이 시리즈를 통해 모두 99편의 괴담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한 바 있는데, (편집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 통행증까지 34편이 완성됐습니다. 1/3 지점인데, 그저 미미 여사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남은 65편의 괴담을 빠짐없이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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