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에게 생긴 일
이네스 바야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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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 중심가의 은행에서 자산 관리자로 일하는 마리는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런 즈음 남편 로랑과 상의하여 아기를 갖기로 한 마리는 더없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리의 꿈은 하룻밤 만에 산산조각 납니다. 직장 상사의 차안에서 끔찍한 방식으로 성폭행당한 마리는 그날 이후 바닥없는 지옥으로 추락하지만 끝내 자신이 당한 일을 은폐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겐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e Malheur du bas’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낯 뜨거운 느낌이 드는 아랫도리의 불행입니다. 이야기는 표면적으론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론 그 이상의 서사, 즉 주변인들의 2차 가해, 남성 혹은 그들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 또 여성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방식 등 잔혹하고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 읽은 후엔 낯 뜨겁게만 여겨졌던 제목이 더없이 슬프고 처연하고 분노를 자아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0여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열 배도 넘는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챕터에서 이미 마리의 마지막이 공개돼서 딱히 반전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었고, 중반쯤엔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 읽기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여러 번 들어 서평 같은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종의 보고서이자 경고장인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리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서평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보고서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인간의 추락은 가해자의 폭행과 희생자의 죽음이라는 인과성만으로 간명하게 설명되고 요약될 수 없다. 이 작품은 그 인과 관계 사이에 감추어진 몸과 마음의 흔적을 낱낱이 파헤쳐 사실적이고 아프게 그린 불행한 상처의 보고서다.”라는 옮긴이의 말에 적확하게 함축돼있습니다.

참혹한 사건들을 상세히 다룬 뉴스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사실 관계를 서술한 몇 줄의 기사 외엔 피해자가 겪은 상처와 악몽에 대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리에게 생긴 일은 그 빈 여백, 즉 성폭행을 당한 마리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 또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들의 본의 아닌 2차 가해로 인해 어떤 절망감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마리를 철저히 파멸시켰는지를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성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기를 바라는 건 어디에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이런 보고서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강간당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날, 마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침묵에 대해 심판과 비난을 받고, 수모를 겪을 것이다. (중략) 빌어먹을 진실로 인해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더러워지고 찢기는 것을 마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아름답다고 마리는 생각한다.” (p238, 247)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거기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옮긴이의 말)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경고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 이후 마리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몸과 마음 모두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립니다. 문제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그 누구도 마리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마리의 딜레마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로 인해 밤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편의 욕망이나 자신에게 웃음과 환호만 보내는 가족들의 밝은 표정은 마리에겐 잔혹한 2차 가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은 피해 사실을 은폐해놓고 어떻게 그들이 먼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성폭행 자체가 피해자 입장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추락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합당한 경고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여자는 구멍일 뿐이다. 물렁물렁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멍. 죄 많고 축축한 그 사막 한복판으로 남자가, 마치 신이 그렇게 하듯, 자기 길을 뚫고 지나간다.” (p167)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큰 충격을 준 문장인데, 어쩌면 이 두 줄의 문장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폭행은 더러운 욕망을 품은 개인의 범죄지만, 동시에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볼 뿐인 남성 중심 사회가 낳은 구조적 폐단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탐하는 데 급급한 남편을 통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관계를 거부당한 뒤 변태적인 포르노로 욕망을 채우는 남편을 지켜보며 사실 그가 원했던 건 마리가 아니라 구멍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직장 상사와 남편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이 사회가 멸시하는 모든 것의 표본처럼 느껴진다. 나약하고 비겁하고 뚱뚱하며, 제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든 가족을 내동댕이치기만을 꿈꾸며 성 생활에 소극적이고, 동적이지 않고, 업무에서도 뒤처질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미 늙어 버린 여자.” (p129)

 

이렇게 서평이 길어진 것은 그만큼 마리의 이야기가 저를 화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제가 남자라서 마리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한 나머지 멸시의 표본으로까지 여기게 된 마리를 지켜보며 분노와 자괴감과 안타까움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을 공유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되겠지만 가슴 아픈 보고서이자 누구나 귀 기울여야 할 경고장인 마리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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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집 안전가옥 오리지널 11
전건우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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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 나가는 그림동화 작가였던 유현민은 1년 전 불의의 사태로 인해 추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의 외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아내 명혜는 이사 첫날부터 느껴진 집의 한기가 심상치 않았고, 전에 살던 가족이 2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신경에 거슬립니다. 그러던 중 집안 곳곳에서 이상한 현상들까지 목격한 명혜는 악몽까지 꾸게 됐고, 끝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홀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한편 현민은 어딘가 이상해진 아내 명혜와 3남매 때문에 걱정이 되는데, 어느 날 도저히 믿기 힘든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곤 과거 이 집에 살다가 사라졌다는 가족의 사연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모티브는 귀신 들린 집에 사연 많은 가족이 이사를 왔다.”입니다. 사실 이 모티브 자체는 너무 많이 활용돼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작가는 흥미로운 컨셉으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뒤틀린 집은 소위 전문가(?) 용어로는 오귀택(五鬼宅)이라고 하는데, “대문과 안방 등의 방향 배치가 뒤틀려 있어 그로 인해 생긴 틈 사이로 나쁜 기운이 흘러나와 온갖 귀신을 불러 모으고 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집이란 뜻입니다. 애초 집 자체가 잘못 지어졌거나 방위(方位)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인데, 중요한 건 유현민의 가족이 이사 오기 전 이미 이 집은 귀신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고, 그들의 이사는 억눌려있던 귀신을 해방시킨 것은 물론 가공할 힘까지 부여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익숙한 공식대로 흘러갑니다. 부부와 3남매는 제각각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거나 악몽을 꾸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귀신의 힘에 지배되기도 합니다. 집의 과거를 조사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2년 전 갑자기 사라진 일가족의 수상쩍은 사연이 공개됩니다. 하지만 좀더 상세한 정보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은 너무나 잔혹했고,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가족들의 최후의 노력은 위험천만할 뿐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다 보니 뒤틀린 집역시 그런 스타일이 아닐까 무척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유현민의 가족이 정착한 집은 안팎으로 호러의 기운을 무지막지하게 내뿜는 공간으로 설정됐고, 가족들이 제각각 마주하는 초자연적 상황들은 오귀택, 귀신, 빙의, 악령, 학대와 폭력 등 웬만한 종류의 공포 코드를 모두 맛볼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거기에다 사라진 일가족의 미스터리까지 더해져 이야기는 분량에 비해 볼륨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좀 더 많았던 게 사실인데, 가장 두드러진 건 가족이 가족답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삿날의 흥분, 이른 아침의 술래잡기 등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가족다운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겪은 공포를 공유하지도 않고 서로를 지키겠다는 특별한 각오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작가가 가리키는대로 자신의 임무 - 연이어 기이한 현상을 겪는 일 - 만 열심히 수행할 뿐입니다.

집과 가족이 얽힌 호러라면 당연히 이 가족이 부디 살아남기를!”이란 바람을 독자에게 확실하게 심어놓아야 하는데, 가족이라기엔 애정도, 관심도, 연대도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귀신이 저지른 게 분명해 보이는) 초자연적 현상들과 피가 난무하는 사건들만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오히려 공포의 맛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가족이라면 귀신에게 다 잡아먹혀도 별로 안타까울 것 같지는 않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호러 자체는 풍성했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가족에게 걱정과 응원을 보내게 만드는 감정적 호소는 절대적으로 부족해보였습니다. 초자연적 현상 몇 가지를 줄여서라도 가족을 위해 약간의 분량을 할애했더라면 공포는 훨씬 더 고조되고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으로 읽혔을 거란 아쉬움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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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른의 유괴마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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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유괴사건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피해자는 모두 10대 소녀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자궁경부암 백신 부작용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부작용 피해를 입지 않은 소녀가 포함돼있었고 그녀가 백신 접종을 적극 권장해온 산부인과협회장의 딸로 밝혀져 수사진은 범인의 동기를 추정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또 유괴현장에서 발견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그림엽서의 의미를 알 수 없는데다 범인이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아 수사진은 그저 무의미한 탐문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70억 엔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며 탐욕을 위해 위험천만한 백신 접종을 강요해온 후생노동성과 제약회사와 산부인과협회의 죄를 묻는 범인의 성명이 발표되자 일본 전역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이누카이는 거듭된 실수와 오판 끝에 범인을 특정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멜른의 유괴마는 경시청 수사1과 형사 이누카이 하야토의 활약을 그린 세 번째 작품입니다. 2편인 일곱 색의 독은 올봄(2021)에 출간돼서 나카야마 시치리의 팬들에게 익숙하지만, 1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2014년에 출간된 탓에 이누카이 하야토의 첫 등장을 접하지 못한 독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멜른의 유괴마뇌사자의 장기 기증을 소재로 한 살인마 잭의 고백의 뒤를 잇는 사회파+메디컬 미스터리인데, 아마도 이누카이의 딸 사야카가 이식수술을 기다리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로 설정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가 사회파+메디컬 미스터리의 길을 계속 걸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후속작 제목이 닥터 데스의 유산인 걸 보면 제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건 이 작품의 소재인 자궁경부암 백신의 부작용입니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이 첨예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요즘 이 작품에서 다루는 백신의 부작용과 그 피해자들의 호소는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가 본인의 딸이 자궁경부암 백신 부작용을 겪었던 탓에 조금은 거칠고 비판적인 태도로 글을 쓴 것 같은데, 사리사욕을 위해 부작용을 은폐하고 접종을 적극 권장한 후생노동성-제약회사-산부인과협회의 카르텔에 대한 작가의 비난은 다분히 감정적이긴 해도 충분히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대목입니다.

 

주인공 이누카이 하야토는 독특한 재능을 지닌 인물입니다. 과거 연기학원을 다니며 상대방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거짓을 꿰뚫어보는 기술을 터득한 바 있는데, 그 기술 덕분에 현재 경시청 검거율 1,2위를 다툴 수 있게 됐지만, 문제는 이 기술이 남자에게만 통한다는 점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이누카이가 수시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건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납치된 건 소녀들이며 그밖에 피해자의 어머니들, 산부인과 의사 등 상대해야 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여자인 탓에 번번이 그들의 심리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이누카이는 자신을 못 마땅히 여기는 후배 여형사 아스카에게 툭하면 한 방씩 얻어맞곤 합니다.

 

이누카이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황상 자궁경부암 백신 부작용이 사건의 발단인 건 분명해 보이지만 백신 가해자중 하나인 산부인과협회장의 딸까지 유괴된 점, 현장에서 발견된 의미를 알 수 없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그림엽서, 그리고 70억 엔이라는 거액을 요구한 범인의 동기 등 무엇 하나 분명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단서에서부터 출발한 이누카이는 날카로운 추리와 특유의 직감으로 범인을 추론하지만, 작가는 반전의 제왕답게 거듭된 반전을 통해 주인공 이누카이에게 수시로 좌절을 안깁니다. 마지막에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이누카이마저 크게 놀라는 대목은 주인공의 뒤통수마저 후려친 작가의 특별한 서비스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하멜른의 유괴마에서 이누카이 못잖게 눈길을 끈 인물은 그의 파트너인 여형사 다카치호 아스카입니다. 25세인 그녀는 수사1과의 홍일점으로 본문에 따르면 실력은 좋은데 어째서인지 이누카이를 싫어합니다. 여자의 마음을 도통 이해 못하는 이누카이에게 따끔한 조언을 건네곤 하지만, 감정을 앞세운 채 재판관의 영역까지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 때문에 이누카이와 자주 충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누카이에게 앞뒤 분간 못하는 개를 어떻게 풀어놓겠어!”라는 험한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에선 아스카가 이 작품에서 첫 선을 보였다고 설명하지만, 실은 그녀는 작가 형사 부스지마’(2018, 북로드)를 통해 이미 한국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직 형사이자 현직 미스터리 작가인 괴짜 인물 부스지마와 악연인 이누카이는 그의 조언을 얻어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초짜인 후배 아스카를 대신 보냅니다. 어리바리하던 아스카는 부스지마와의 협업을 거치면서 입도 거칠어지고 행동도 대담해지는데, 어쩌면 그 일 때문에 이누카이를 미워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성 강한 여러 주인공들을 창조하고 다양한 소재를 구사해온 나카야마 시치리가 다음엔 어떤 주인공과 어떤 소재를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사뭇 기대가 되고 궁금해집니다. 개인적으론 비웃는 숙녀 시리즈가 가장 기다려지는데, 이누카이-아스카 콤비의 활약 역시 그에 못잖게 얼른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작품이 됐든 늘 재미 면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후속작 소식이 빨리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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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스토리콜렉터 1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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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에 이르는 고령층이 연이어 잔혹한 처형 방식에 의해 살해됩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유대인, 고급 요양시설에 머물던 노파, 지하실에 나치의 기념물을 소장한 노인 등 희생자들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워 수사에 난항을 겪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현장에 남겨진 ‘16145’라는 숫자의 의미도 알 수 없어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던 중 프랑크푸르트의 최고 부유층이자 사회 기여도가 높아 존경을 받는 86세의 여인 베라 칼텐제가 희생자들과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수사에 진척을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칼텐제 집안과 연관된 한 남자와 그 내연녀가 살해되고 칼텐제의 장남 엘라르트가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깊은 상처’(Tiefe Wunden)라는 제목에 걸맞게 무려 60여년에 걸친 증오와 복수, 위선과 위장을 다룬 작품입니다. 2차 대전 막바지, 나치의 추락과 러시아의 진격으로 대혼란에 빠진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이후 6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가해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은닉한 채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평온하게 살아온 반면,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며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잊기 위해 발버둥 쳐왔습니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엇갈린 운명 같은 만남들이 이뤄지고, 60여 년 전의 진실과 조우한 그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되갚아 줄 기회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살육이 시작됩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라는 묵직한 역사적 코드들이 동원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다큐 스타일의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개인들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진 덕분에 역사적 코드들의 부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오랜 과거와 현재가 한데 얽힌 사건의 특성 상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수사는 꽤 애를 먹습니다. 범행 동기나 피해자들의 공통점 등 사건 자체도 모호하지만, 피해자들과 접점이 있는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 역시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계속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베라 칼텐제와 그녀의 가족들이 사건의 열쇠라는 직감이 강해지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와 물증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칼텐제 집안 주위를 맴도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인물들 해고된 베라의 전 비서, 칼텐제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남자, 칼텐제 저택을 수리하다가 소송전을 벌인 건축가 등 까지 가세한데다, 그들 중 일부가 범죄 피해자가 되자 수사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사건 못잖게 흥미를 끄는 대목은 호프하임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수사과장 니콜라 엥겔의 존재입니다. 과거 보덴슈타인과 인연과 악연을 거듭했던 그녀의 등장은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속한 강력11팀을 초긴장상태로 몰아갑니다. 특히 보덴슈타인을 향한 악의를 숨기지 않는 그녀의 언행은 피아에게는 궁금증을, 보덴슈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격분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곤 하는데, 오랜만에 그들의 첫 만남을 다시 읽어 보니 예상외의 흥미진진함과 함께 이후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새삼 느낀 점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단 출전선수를 엄청나게 많이 등장시키고, 그만큼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설정하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깊은 상처60여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100페이지도 채 되기 전에 인물관계도를 그리면서 읽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제자리를 맴돌거나 출구 없는 미로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물론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조금씩 선명해지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정리되긴 하지만,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두통을 겪거나 적응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깊은 상처의 뒤를 잇는 작품은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지만 대중성이나 완성도 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품이라 가장 먼저 소개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도 타우누스 시리즈에 홀딱 빠진 계기가 된 작품이라 거의 10년 만의 다시 읽기가 신간보다 더 기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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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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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배 류지 일당에게 지독한 학교폭력과 갈취에 시달리던 고교 1년생 도키타는 끝내 류지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합니다. 그런 도키타 앞에 피에로 분장을 한 기이한 인물 페니가 나타납니다. 그는 도키타의 사연을 듣곤 자신이 류지를 죽여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대신 도키타에게 살인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대리 살인자가 돼주겠다는 페니로 인해 도키타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한 의문에 휩싸입니다.

한편, 3년 전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아들 시게아키가 자살한 뒤 그 충격으로 아내마저 자살한 가자미 가이스케는 뒤늦게 시게아키를 죽음으로 내몬 범인들을 알아내곤 자신만의 복수를 계획합니다. 경찰도, 학교도 외면한 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복수 후 아들과 아내의 곁으로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피해자 또는 유족이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복수법이 제정된 사회를 그린 저지먼트를 통해 처음 만났던 고바야시 유카의 신작입니다. 복수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그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학교폭력과 그로 인해 산산조각 난 가족의 비극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학교폭력의 직접 피해자인 고교 1년생 도키타, 그리고 아들과 아내를 학교폭력으로 인해 잃은 45살의 가장 가자미입니다. 도키타가 정체불명의 피에로 페니와 함께 살인계획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한 축이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범인의 정체와 증거를 집요하게 캐는 가자미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입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죄인이 기도할 때는 르포르타주 미스터리로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소소한 반전이 쉴 새 없이 거듭되고, 도키타를 돕는 피에로 페니의 정체가 독자의 궁금증을 고조시키긴 하지만 대체로 정공법에 가까운 기록물의 인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학교폭력의 잔혹성과 나만 아니면 돼.”라는 주위의 무관심, 그리고 소극적이거나 책임을 방기하는 경찰과 학교의 태도를 꽤 직설적으로 고발합니다. 그리고 전작인 저지먼트와 마찬가지로 복수는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라는 해답 없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복수를 실행한 건 누구?’라는 미스터리보다는 두 주인공 도키타와 가자미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더 두드러지게 묘사한 것 역시 르포르타주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이런 설정들 때문에 독자는 극적인 재미나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기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심정 혹은 출구 없는 분노에 휩싸인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게 되는데, “(피해자가)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상대처럼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웃고 피해자는 평생 참고 숨어 사는 사회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읽는 내내 독자가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잘 압축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작인 저지먼트의 서평에서 주제의식과 감정을 과하게 강요한 아쉬움을 언급한 적 있는데, ‘죄인이 기도할 때역시 다소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장편이라 그런지(‘저지먼트는 연작단편집) 스토리텔링에 좀더 공을 들인 점이 확실히 눈에 띄었고 이야기의 확장성도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복수가 합법화된 가상 사회를 배경으로 한 저지먼트와 달리 명백히 현실적인 학교폭력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캐릭터나 사건 모두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만큼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바야시 유카가 이후로도 계속 복수라는 주제에 천착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가 사적 복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신작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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