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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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소년, 학생, 주부, 할머니, 바리스타 등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취향이라 초등학교 5학년 콤비가 주인공인 나의 신은 애초 관심목록에 올릴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죄의 여백’,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2021년에만 세 편의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한국에 출간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이란 점 때문이었습니다.

 

교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것은 물론 친구들의 난감한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해주고 운동회 기마전 전략까지 완벽하게 짜내는 초등학교 5학년생 미즈타니는 동급생들로부터 이라 불리는 소년입니다. 거만하기는커녕 늘 고요한 호수 같은 성정까지 지녀 도무지 10대 초반으로 보이지 않는 애어른미즈타니지만 아무래도 접하는 사건은 그 또래에 걸맞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든 벚꽃절임이 담긴 병을 깼는데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지? 이번 운동회 기마전에서 모자를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주가 담긴 책을 다 읽고 나서부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데 이거 정말 저주야? (출판사 소개글 )

 

4학년 때부터 미즈타니와 단짝이 된 사토하라는 화자의 역할과 함께 홈즈의 파트너 왓슨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인데, ‘이라 불리는 미즈타니에게 존경과 질투를 함께 느끼는 딱 그 또래의 소년 캐릭터입니다. 미즈타니가 다소 비현실적인 천재 소년 캐릭터라면 사토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범한 소년으로 적당한 균형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즈타니와 사토하라가 맡은 사건들은 대체로 소소한 규모의 일상 미스터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실은 연작단편인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여학생 가와카미가 연루된 꽤 섬뜩한 살해모의입니다. 학대, 연민, 우정, 질투 등 여러 코드가 뒤섞인 이 사건은 미즈타니와 사토하라의 성장소설의 재료로도 활용되는데, 만일 주인공이 중고생쯤 됐다면 아시자와 요 특유의 세고 독한 미스터리가 되고도 남았을 소재라 한편으론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취향 상 아마추어 탐정 미스터리와 거리가 먼 이유는 아무래도 사건 자체가 다소 평이할 수밖에 없고 주인공들의 카리스마나 능력치 역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분명히 있지만 역시 초등학교 5학년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잔혹하거나 배배 꼬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저에겐 특별한 간식이상의 흥미를 느끼게 하기엔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소박한 일상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시자와 요가 그린 신으로 불리는 소년의 활약에서 의외의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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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대마초 여인
안네로르 케르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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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성 파티앙스 포르트푀의 직함은 프랑스 법무부 소속 아랍어 통번역사지만, 실은 불규칙한 시간당 페이를 받을 뿐 사회보장도 연금도 못 받는 불법노동자입니다. 두 딸의 교육비와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때문에 25년 넘게 고된 삶을 살아온 파티앙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워낙 어수룩한데다 순진함마저 엿보여 인간적인 호감까지 느꼈던 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의 통화 내역을 번역하던 파티앙스는 프랑스 경찰의 체포 계획을 눈치 채곤 엉겁결에 연락을 취해 당장 대마초를 버리고 신속히 피하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복잡한 심경들이 파티앙스를 뒤흔들었다는 점입니다. 늘 돈에 쪼들려온 비루한 자신의 현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무부의 이중성, 공공연한 마약 거래의 실상... 결국 파티앙스는 그 모든 지긋지긋한 현실을 증오하며 모로코 딜러가 버린 대마초를 빼돌리기로 결심합니다.

 

파리의 대마초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아랍권 범죄자의 통화 도청내역을 번역하던 일종의 감시자였던 평범한 여성이 감시대상이던 대마초 딜러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대량의 대마초를 손에 넣은 뒤 중간도매상으로 맹활약한다는 설정 자체만 봐도 이야기의 굴곡이 얼마나 크고 급격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이다’(1), ‘겁대가리 없는 유대인 여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3)라는 소제목들은 주인공 파티앙스가 어떤 캐릭터의 여성인지 잘 대변하고 있는데, 실제 이야기 속의 파티앙스는 그 이상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내뿜으며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내딛습니다.

 

하지만 대마초 중간도매상파티앙스의 석세스 스토리만 그려졌다면 아마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이상의 미덕을 찾아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현실에 분노하고 환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그녀의 기구한 성장기와 가족사입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사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부모 덕분에 파티앙스는 평생 전 세계의 여름을 찾아다니며 불꽃놀이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지만, 한순간 인생 경로가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뒤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왔습니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의 고함소리가 날뛰는 낡은 아파트는 지긋지긋했고, 딸들과 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돈은 한도 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아랍어 재능을 쥐어짜내면서도 결코 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들에 치인 나머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일부 아랍인 범죄자들에게 차별받는 약자라는 연대감과 함께 동정과 연민을 보내온 파티앙스로서는 엉겁결이긴 해도 어수룩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를 돕는 것이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후 자신이 다론’(엄마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대마초 도매상으로 맹활약할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대마초 딜러를 도망치게 돕고, 그의 대마초를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뒤 큰돈을 거머쥐는 파티앙스의 행동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지만, 파티앙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녀가 혐오한 프랑스의 현실이 설득력 있게 설정된 덕분에 옮긴이의 말대로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중년여성의 분투기 혹은 판타지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파티앙스의 여정은 그저 돈으로 처바른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경찰의 주요 목표물이 된 대마초 도매상 다론파티앙스의 행보 역시 결코 순탄하게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올해(2021) 프랑스 미스터리-스릴러를 세 편 읽었는데, ‘프랑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저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파리의 대마초 여인을 비롯하여 포커 플레이어 그녀’(브누아 필리퐁)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모두 독특한 매력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어서 스스로 무척 놀란 게 사실입니다. 영미권과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프랑스 장르물만의 스타일과 힘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라고 할까요? 내년에도 이런 즐거운 발견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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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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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시리즈가 제 책장에 꽂힌 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앞선 두 편만 읽은 뒤로 거의 방치해온 게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제 취향과 잘 안 맞은 탓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은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색다른 기대감이 들었던 건데, ‘살인의 예술1934~194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을 수록한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제각각의 (전현직)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복수와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사건부터 유쾌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절도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돼있습니다. 무미건조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설정돼있는데, 심성과 관계없이 대체로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훈훈한 캐릭터라 해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두는 인물들이라 나름 독특한 매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상처도 풍부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1930~40년대 미국 대도시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인물들이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사건의 배경 역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대충 숲은 보이는데 그 안의 나무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난감한 상황들과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두 번째, 다섯 번째 수록작인 영리한 살인자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인 설정들 때문에 범인의 동기나 사립탐정의 행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독한 이야기와 확실하고 선명한 구도를 선호하는 요즘의 스릴러 독자에겐 (레이먼드 챈들러가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라는 점과 관계없이)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다소 평범한 구도이긴 해도 의외의 범인이 폭로된 황금 옷을 입은 왕과 블랙코미디의 미덕이 빛났던 사라진 진주 목걸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몇 마디 꼭 보태고 싶은 점들이 있는데, 우선 책날개에 인쇄된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실합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마치 최근까지 활동한 작가처럼 보이게 만든 점도, 또 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설명 하나 없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 번역제목을 살인의 예술로 삼았고 원제를 ‘The Simple Art of Murder’로 소개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가 기존의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짧은 에세이 ‘The Simple Art of Murder’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목만 빌려오고 정작 그 에세이는 빠진 셈입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각주로 원제를 표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혹 두세 번 되읽어도 애매모호했던 번역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앞뒤 맥락이 안 맞거나 비문처럼 읽힌 경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재도전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본 게 사실입니다. 절반쯤은 여전히 그 욕심이 꿈틀대지만, 절반쯤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머잖아 시리즈 첫 편인 빅 슬립을 통해 결단(?)을 내려 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 기억과 달리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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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워칭 유
테레사 드리스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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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 기차를 탄 중년여성 엘라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20대 남자들이 런던이 초행인 10대 소녀들을 유혹하는 위험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엘라는 소녀들을 도우려던 생각을 접습니다. 다음 날 소녀들 중 한 명인 애나 밸러드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본 엘라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목격 증언을 한 뒤로 엘라는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았다며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맹비난을 받는 처지가 됩니다. 사건 1주년 특별방송 즈음, 엘라를 비롯하여 애나 주위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이 혹시라도 애나의 실종과 이어져 있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라는 익명의 검은 엽서를 받는데, 거기엔 1년 전 그녀의 실수를 비난하는 협박 메시지가 적혀있습니다.

 

1년 전 실종된 애나를 찾는 이야기(누가 애나를 납치했나?)와 현재 엘라에게 협박 엽서를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미스터리가 핵심이지만, 오히려 애나의 실종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비밀과 두려움을 다룬 심리 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은 일 때문에 사회적인 비난은 물론 그녀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던 엘라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과 가정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실종 당일 애나와 동행했던 세라는 혹시 자신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애나가 끔찍한 짓을 당한 게 아닐지 두려워합니다. 애나의 아버지 헨리는 실종 당일 애나가 자신에게 실망하며 격분했던 일도 걱정되지만, 그날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진술했던 일 때문에 더욱 전전긍긍합니다. 엘라에게 고용된 전직 경찰이자 사설탐정인 매슈는 검은 엽서의 발신자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애나 실종사건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엘라를 포함하여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챕터를 이끌어 가는데, 덕분에 애나 실종사건의 이면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이 사건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런 설정은 사건의 단순성을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사건 자체를 덜 흥미롭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애나 실종사건 자체와 별 관계없는, 그러니까 어차피 벌어졌을 일들이 꽤 많은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실종사건과 무관하게 별거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애나 부모의 사정이라든가, 애나의 실종에 가장 큰 죄책감을 갖고 있는 세라의 끔찍한 가족사,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의 길을 택한 매슈의 개인적인 사정 등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모두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중심 사건인 애나의 실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특히 막판에 밝혀진 애나 실종사건의 진실과 범인의 정체는 반전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뜬금없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억지스럽게 보여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종 미스터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렇다고 심리스릴러로 보기에는 각 인물의 에피소드가 독립성이 너무 강해서 중심사건과 무관한 따로국밥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종사건에 연루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비밀은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됐던 실종 미스터리가 너무 맥없이 풀리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엔딩이 되고 말았다고 할까요?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읽은 건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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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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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편집자를 꿈꾸는 여대생 오카노 케이코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하루 빨리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고 싶지만 취업은 요원하고 대출금은 무섭게 불어나는 탓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케이코는 어느 날 집 인근에서 단골손님 쿠니에다를 목격합니다. 문제는 그가 뛰쳐나온 맨션에서 피살자가 발견됐고, 사망추정시간 역시 케이코가 그를 발견한 시간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케이코는 그날 이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악의 때문에 갈등에 빠집니다. 고급인력 파견업체 사장인데다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진 쿠니에다라면 쉽게 협박에 응해 적잖은 돈을 내놓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당신이 살인범임을 알고 있다.”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보낸 케이코. 하지만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낯선 이름이라 당연히 신인작가라고 여겼지만 다 읽은 뒤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니 1950년생으로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나오키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을 유작으로 2020년 세상을 떠난 베테랑 작가였습니다. 이전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2008텐텐’()이 유일했는데, 경력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로 덜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彼女恐喝’, 직역하면 그녀의 공갈입니다.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 때문에 눈길이 확 끌렸는데, 얼핏 가벼운 톤의 미스터리로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실은 인물이나 사건 모두 꽤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다만, 케이코가 단골손님이자 살인범인 쿠니에다를 협박하는 이야기는 대략 1/3지점에서 마무리되고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그 이후부터 전개되는데, 그 내용을 설명하려면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이 없어서 대략적인 인상비평 이상의 서평을 쓰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딱 그 대목까지만 간략하게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협박범 케이코와 살인범 쿠니에다의 관계입니다. 20대 호스티스와 50대 손님이라는 통속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케이코로서는 호스티스인 자신을 늘 정중하고 젠틀하게 자신을 대해준 쿠니에다가 살인범이란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를 상대로 공갈 협박을 저질러도 되는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말 못할 사연을 지닌 듯한 쿠니에다는 어떻게든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려 애쓰는 자신을 대견히 여기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한 관계에 만족하면서도 물심양면으로 돕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이 협박범과 살인범으로 엮였으니 이야기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케이코의 협박이 마무리되는 1/3지점까지는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장은 지나치게 짧고 간결하고, 내용 역시 진중한 구석 하나 없이 숭덩숭덩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쿠니에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는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면서 전혀 다른 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케이코의 협박장이 초래한 의외의 사태들이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견뎌낸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성급한 독자라면 조금만 인내심을 갖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은데, 자잘한 오타 정도는 몰라도 간혹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거나(아야나 아야네, 미노베 미노부, 요코타 료코 요코타 요시코), 시제나 표현의 오류를 발견했을 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작가 약력에도 오류가 있었는데, “2017년에는 폭설 이야기로 제51회 후루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이라고 돼있지만,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 작품의 원제는 大雪物語이며, 그 작품이 수상한 상은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吉川英治文学賞)입니다. 역자나 편집자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들이라 아쉬움이 더 컸는데, 매번 오역이나 오타를 발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인쇄하기 전 한번만 더 자신들의 작품을 성의 있게 살펴볼 수는 없는 건지, 하다못해 가제본 서평단이라도 꾸려서 체크해볼 수는 없는 건지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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