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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IN ㅣ 레드 문 클럽 Red Moon Club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살림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스즈키 다마키는 “연애의 말살”을 주제로 소설 ‘IN’을 쓰려 한다. 주인공은 1970년대에 발표된 미도리카와 미키오의 소설 ‘무쿠비토’에 등장하는 내연녀 O코. 말하자면, 다른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인물을 주인공 삼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 ‘무쿠비토’는 불륜으로 인해 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사소설(私小說)인데, 불륜관계인 남편과 O코를 향한 아내의 광기와 싸움을 불쾌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린 건 물론 등장인물 대부분을 실명으로 등장시켰던 작품. 이 소설에서 실명이 드러나지 않은 건 오직 O코뿐이었다. 다마키는 ‘무쿠비토’에서 두 번의 낙태를 겪고도 악질적인 가정파괴범으로만 그려진 O코가 현재 유부남 편집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연민까지 느낀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대표작 ‘OUT’ 이후 ‘무라노 미로 시리즈’ 같은 미스터리는 물론 ‘다마모에’ 같은 순문학까지 대략 4~5편의 작품을 통해 기리노 나쓰오와 만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다”라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작품을 읽진 못했지만, 재미와 의미가 균형감을 이루고 있어서 대체로 만족도가 높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처럼 좀 허망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 읽은 ‘OUT’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IN’은 여러 가지로 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입니다. 제목 자체만 보면 서로 연결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애의 말살”을 다뤘다는 카피를 보곤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지만, 살짝 불온한 냄새를 풍기는 그 주제 역시 충분히 매력이 느껴졌고 호기심을 자극해왔습니다.
일본어 발음 ‘IN’으로 읽히는 한자들(淫, 隱, 陰, 因, 姻)로 이뤄진 소제목들은 그 챕터에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사뭇 궁금함을 자아냈고, 주인공 다마키가 ‘무쿠비토’에 등장한 내연녀 O코의 정체를 추적하는 대목도 소소한 미스터리 코드가 내재되어 있어서 흥미를 배가시켰습니다.
“연애는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은밀하게 변질되어 간다. 부패해간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이다. 가스가 차서 한꺼번에 폭발한다. 폭발한 뒤에는 두 사람 다 제각각 내동댕이쳐져 주위를 둘러보면 눈앞에 낯설고 거친 들판이 펼쳐진다.” (p76)
요약한 줄거리대로 이야기는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지는데, 하나는 현실에서 각자 가정을 갖고 있는 소설가 다마키와 편집자 세이지 사이의 “연애의 말살”이고, 또 하나는 소설 속 소설인 ‘무쿠비토’에 등장하는 소설가 미키오와 그의 아내 치요코와 내연녀 O코 등 세 사람의 “연애의 말살”입니다. “정열적인 사랑의 끝에 그 흔적을 말살하려는 심리가 괴물적으로 비쳐진다.”라는 소개글대로 이 작품은 사랑이나 불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종료된 뒤의 서늘한 심리를 다룹니다. 그래선지 비슷한 소재를 갖고 치정 또는 복수를 그린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 심하게 구부러지고 왜곡된 듯한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다 읽은 뒤의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허전함’이었습니다. “연애의 말살이란 서로를 상처내고, 타인 앞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폭력까지 주고받다가 끝내는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그런 과정의 종결”이라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현실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씁쓸한 연애 뒤끝의 담론을 다소 어렵고 복잡하게 풀어간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소설은 허구와 현실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다.” 라는, 몇 번씩 반복적으로 강조된 주제의식도 거북했고, 두 이야기의 접점을 위해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엮은 것도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환영(幻影)과 예지현상까지 벌어지는 부분에선 솔직히 집중도가 많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소재는 흥미로웠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저와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읽어야 할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 많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에서 그녀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일단 궁금함과 호기심을 접지는 못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