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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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라이 겐야는 삶에 대한 의욕도 없고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백수 남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고 지내던 아사미라는 젊은 여자가 목 졸려 죽은 채 발견되자 와타라이는 그녀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녀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댑니다. 아사미와 불륜관계였던 직장 상사, 아사미의 옆집에 살던 여자, 불행한 과거를 가진 아사미의 어머니 등 여섯 명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모든 에피소드마다 죽지 그래라는 독설이 담겨있습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정말 이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부지런한 취재의 결과라고만은 할 수 없는 놀라운 박학다식은 물론, 사람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그 움직임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후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지 등 사람에 대한 무수하고 진지한 고찰의 깊이가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잘 쓰는 작가이상의 뭔가를 지닌 특이한 존재라고 할까요?

 

죽지 그래의 경우 읽은 사람마다 만족도가 크게 갈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 중 비슷한 포맷을 지닌 싫은 소설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중도 포기했는데, 독자에 따라 죽지 그래에서 그런 식의 인상을 받는 경우가 적잖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아사미의 내밀한 개인사를 확인하는 와타라이 겐야의 행보와 목적 자체도 그렇고, 그에게 아사미에 대해 얘기해주는 상대방들 역시 조금은 인공미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엔, “1년쯤 있다가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뭔가 묵직한 뒤끝이 남은 덕분인지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가 1년쯤 후에 다시 한번 읽으면 새로운 또는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 강추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독성도 좋고 적당히 자극적이면서도 묵직함을 잃지 않는 서사의 힘도 괜찮아서 보통 수준의 추천에는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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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조곡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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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독을 먹고 죽은 유명 작가 도키코의 기일을 맞아 5명의 여자가 우스쿠이 저택에 모입니다. 도키코의 그림자나 다름없던 편집자 에이코를 비롯하여 에리코, 시즈코, 나오미, 츠카사 등 그녀와 혈연관계이며 동시에 작가로 활동 중인 여자들이 매년 도키코의 기일인 목요일부터 3일간 그녀를 추모해왔는데 올해가 4년째 모임입니다.

낯선 이가 보낸 꽃다발 속에 든 도키코는 멤버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는 메모 때문에 5명의 여자들은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됩니다. 더구나 만년의 도키코가 지독한 망상을 품었으며 실은 멤버 대부분과 심한 갈등을 벌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폭로되면서 우스쿠이 저택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온다 리쿠 작품 가운데 예외적으로(?) 아주 현실적이며 리얼리티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그녀의 몽환적인 서사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의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온다 리쿠의 작품을 무척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던 만족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얼마 전 읽은 기리노 나쓰오의 ‘IN’처럼 목요조곡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글쓰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입니다. ‘글쓰기라는 창작 행위가 지닌 양면의 얼굴 - 명예와 스트레스 - 을 줄기 삼아 팽팽한 긴장감을 한시도 놓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자살인 줄 알았던 도키코의 죽음이 실은 살인의 결과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멤버 중에 범인이 있다는 예기치 못한 폭로로 인해 저택에 모인 여자들 사이에는 단순한 팩트 체크를 넘어 심리전의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4년 전에 벌어진 똑같은 현상에 대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5명의 기억은 논쟁과 폭로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형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사건 자체도 이미 4년 전에 벌어진 탓에 읽기 전에 이 작품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게 된 독자라면 다소 김빠진 예감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택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범인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진실게임을 벌이는 설정은 온다 리쿠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여느 미스터리에 전혀 뒤지지 않는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목요조곡은 차 한 잔과 클래식이 어우러진 나른한 아침 정경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지만 다 읽고 보면 오히려 음울한 기운이 잔뜩 배어있는 역설적인 제목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과연 도키코의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지, 정말 살인이었다면 누가, 왜 저질렀으며, 빠지지 않고 그녀의 기일에 참석해 온 범인의 심리는 무엇인지 천천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해(2012) 부산영화제에 갔을 때 다음 영화를 기다리면서 짬짬이 읽었던 작품입니다. 유독 기억나는 일은, 4년 전 죽은 도키코를 포함하여 모두 여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중 넷의 이름이 ’()로 끝나는 탓에 영화를 보느라 책갈피를 끼워놨다가 다시 읽으려면 이 코()와 저 코()를 식별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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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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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서로 주고받은 편지 내용으로 이뤄진 세 편의 중편 모음집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같은 사건을 겪었던 사람들끼리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천천히 과거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십 년 뒤의 졸업문집에는 고교 시절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뒤 연락을 끊고 잠적한 지아키와 그녀 대신 고이치와 결혼한 시즈카, 그리고 또 다른 동창생인 에스코와 아즈미가 등장합니다. 고교 시절이던 10년 전에 벌어진 사건과 지아키의 잠적에 대해 네 명의 여고 동창생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실에 접근해갑니다.

 

두 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는 퇴직을 앞둔 초등학교 교사 마치코가 20년 전 비극적인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섯 제자들의 안녕을 확인하고자 현재 교사로 재직 중인 오바를 통해 간접적인 서신을 교환하는 이야기로, 그날의 사고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과 기억을 갖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심리적 동요는 물론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나?’라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해외에서 국제자원봉사 중인 준이치와 그를 기다리는 연인 마리코가 중학교 시절 일어난 (준이치가 마리코를 구했던) 화재 사건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다가 지금까지 알아온 사실이 모두 허구이며, 진실은 따로 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고백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형식미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편지라는 특성상 계속 화자가 바뀌는 것은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서술인 탓에 편지의 내용에 대해 계속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정인 또는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됐다면 굉장히 밋밋하고 특색 없는 일상 미스터리 정도로 남았겠지만, 미나토 가나에만의 개성 있는 작법 덕분에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백의 충격과 반전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나름 아쉬움과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제겐 고백직후 읽었던 야행관람차로 받은 실망감을 많이 상쇄해준 작품이었습니다. 아직 그녀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미나토 가나에를 다소 기복 있는 작가로 여기게 되는 건 어느 독자의 평처럼 자신이 낳은 고백이라는 괴물때문에 빚어진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그녀의 신작이 발표된다면 어쩔 수 없는 기대감에 누구보다 먼저 서점을 찾게 될 것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그 기대감이 100% 이상 충족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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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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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을 다룬 드라마나 소설이 많이 나오면서 제각기 차별화된 특징을 갖추기 위해 다양한 설정들을 사용하는데, 이 작품 역시 특정 시간(1958)으로만 되돌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주인공 에핑의 시간여행의 주된 목적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저지인데, 문제는 암살 사건이 1963년에 벌어지기 때문에 1958년에 도착한 에핑은 5년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1권은 시간여행을 통해 1958년에 온 에핑이 몇 가지 개인적인 사건을 해결하며 고생하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2권을 읽지 않은 상태라 (2권은 읽을 생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에핑의 목적인 케네디 암살 저지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프롤로그의 성격 치고는 1권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지루한 느낌이었습니다. 드라마 두 회 정도 분량의 에피소드가 너무나도 익숙한 시간여행의 문법을 따라 정석대로만 진행되다 보니 1권 표지에 그려진 케네디의 얼굴이 자꾸 미끼로만 보이게 됐습니다.

 

1권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분들이 많은 듯한데, (특히 인터넷서점 별표는 대부분 5, 드문드문 4) 물론 스티븐 킹의 필력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탄탄함은 대단했지만, 이번만큼은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운 소감만 얻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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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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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

 

다 읽고 나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본 뒤에야 “3년간 수상작이 없던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연작단편집 부문 수상작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사실, 미스터리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목에 꽂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작품입니다. 수록된 여섯 편을 읽고 나니, 제목에서 느낀 정서 그대로 애틋하고 안쓰럽고 그래도 어딘가 환하고 따뜻해지는, 그런 뒷맛이 남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첫 수록작과 마지막 수록작은 하이쿠 동인인 가타오카 소교의 죽음, 그리고 그와 관계를 가졌던 나나오의 이야기입니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이라는 제목은 죽은 카타오카가 지은 하이쿠에서 따온 것인데, 나나오가 카타오카의 유품을 전하기 위해 그의 고향에 내려갔다가 알게 된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과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맥락도 전혀 다르고, 사건이나 주변 환경도 전혀 다르지만, 카타오카에게선 아사다 지로의 명품 칼에 지다의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절절함이 느껴집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처해있던 상황에서 느꼈을 절망감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간절히 바랐던 마음이 비슷한 깊이와 무게의 처연함을 전해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네 편 역시 비슷한 정서들을 품고 있는 휴먼 미스터리입니다. 여섯 편을 관통하는 교집합은 골목 구석에 자리 잡은 운치 있는 맥주집 가나리야와 요리솜씨는 물론 사람 좋기로 소문난 주방장 구도입니다. 순한 맛부터 독한 맛까지 네 가지 맥주를 팔면서 기막힌 요리들을 안주로 내놓는 구도는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드는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또 얼마나 많은 정보원(?)을 두었는지, 뛰어난 추리력으로 손님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모두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일이라, 두 편 정도는 조금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1년 후쯤 꼭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애잔해지는, 그런 글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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