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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각 수록작 별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금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따뜻한 소설보다도 진한 여운을 남겼던 구보 미스미의 전작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의 ‘동생’같은 작품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네 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고, 내용적으로는 ‘아픈 과거를 지닌 채 겨우겨우 살아가는 상처투성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과 닮은꼴 또는 시즌 2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① 소라낙스 루복스 – 유토의 이야기
형과 여동생만 편애했던 어머니. 하지만 형은 히키코모리가 됐고, 여동생은 15살에 임신과 출산을 겪은...
② 물고기 그림 – 노노카의 이야기
천부적인 미술 재능을 타고났지만, 17살의 임신으로 모든 꿈이 사라진... 믿었던 어머니는 거래하듯 자신을 부자 정치인의 집안으로 시집보냈고, 이후 딸 하루나를 출산하면서 악몽 같은 나날을 겪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쿄로 도망친...
③ 소다아이스크림과 여름방학 – 마사코의 이야기
병으로 7개월 만에 죽은 언니 때문에 마사코는 엄마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지만 살아온 16년 내내 그것이 마사코의 삶을 시들게 만들었던... 손목에 칼자국을 내보았던 어느 새벽, 거리로 나섰다가 노노카와 유토를 만난...
④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 세 사람의 이야기
해변 가까이 들어와 목숨이 위험해진 고래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진 어촌 마을. 그곳에 모인 세 사람은 ‘어머니와 남매’로 위장한 채 며칠의 시간을 보내는... 자살로 치닫던 각자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됐을 때, 길 잃은 고래가 바다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세 주인공에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를 각인시킨 것은 각자의 어머니입니다. 비뚤어졌거나, 이기적이었거나, 혹은 집착에 가까운 광기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며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공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과거 또는 현재의 상처들이 꾸준히 자가발전하면서 결국 이들을 모두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서로를 만남으로써 치유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의 19금 에피소드에 비해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현실감에 있어서는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강합니다. 다만, 우연에 우연을 통해 만난 주인공들이 ‘평범하지 않은 유사한 상처’를 지닌 점은 조금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구보 미스미는 “매일 애를 쓰지만,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다든가 멀리 가버리고 싶다든가... 그런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작의를 밝혔습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캐릭터에 관한 한 ‘일부러 작정하고’ 설정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을 잃고 해변으로 밀려온 고래 역시 세 주인공의 치유를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으로 설정됐는데, 우선은 그들을 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 – 마치 죽기 위해 해변 가까이로 다가온 듯 – 임을 암시했으며, 더 나아가 자살을 꿈꾸던 주인공들이 같은 처지인 자신(고래)에게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살아남으라”고 응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현학적인 문장을 동원하여 ‘상징’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부작용이 났겠지만, 구보 미스미만의 편안한 문장 덕분에 전체 이야기에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의 메인 코드가 ‘불임’, ‘출산’, ‘사랑’이었다면, 이 작품은 ‘일그러진 가족과 모성’, 그리고 ‘삶과 죽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두 편 모두 캐릭터는 상처투성이들이고,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일상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비록 구보 미스미가 그들에게 “살아남아 사랑하라”고 끝까지 힘을 주고 길을 열어주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들이 앞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나마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제법 기운을 차린 캐릭터들 덕분에 위안을 받았지만, 이 작품은 어딘가 불안함이 남아있는 그들을 방치하고 돌아선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출판사 소개에 “절망을 탁월하게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고 적혀있는데, 그것이 구보 미스미의 개성이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평가이긴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가끔씩 웃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