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의 손바닥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윤덕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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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이 살육에 이르는 병보다 두 달 정도 먼저 출간(국내 기준)됐지만,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에 올라온 서평을 살펴보면,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가 아비코 다케마루와의 첫 인연을 살육에 이르는 병을 통해 맺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탓인지 기대감은 만발했으나 실망했음이란 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쪽에 더 가까운 편임을 전제로 간략하게 서평을 써볼까 합니다.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홀수 장이 교사’, 짝수 장이 형사로 되어있고, 마지막 9장만 미륵이란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교사 쓰지는 여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때문에 근무하던 학교도 옮겨야 했고, 아내 히토미와는 각 방을 쓰며 거의 별거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히토미가 사라집니다. 냉전 중이었던 상황 탓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쓰지는 경찰이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누명을 벗기 위해 아내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곧 히토미가 구원의 손길이라는 신흥종교단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형사 에비하라는 야쿠자와의 연루설에 뇌물수수 등 부패혐의로 내사를 받던 중 아내 가즈코가 러브호텔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되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발견된 고가의 미륵상을 통해 가즈코를 살해한 범인이 구원의 손길이라는 신흥종교단체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만난 두 남자가 실종된 아내를 찾기 위해, 또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구원의 손길에 잠입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두 챕터 쯤 읽은 후 이 작품의 제목이 미륵의 손바닥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곤 두 남자의 결말이 꽤나 씁쓸하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아무리 애써봐야 결국 미륵의 손바닥안에서 놀아난 꼴밖에 안됐다는, 그런 결론이 기다릴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습니다.

두 남자의 이력을 보면 그런 결말을 맞게 돼도 그리 불쌍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애초에 원조교제와 부정부패라는 전과가 달려있고, 아내를 찾거나 아내의 살해범을 찾는 목적도 전혀 정의롭지 않습니다. 쓰지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마지못해 아내를 찾아 나선 셈이고, 에비하라는 아내가 살해됐다는 사실보다는 러브호텔에서 저지른 불륜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적잖은 반전과 충격을 주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을 먼저 본 업보(?) 탓인지,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아쉬웠습니다. 미륵의 정체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분량이 크게 넘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급 마무리된 이유도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물론 아비코 다케마루만의 개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지만, 앞서 깔아온 이야기의 기초공사들이 허망해진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100% 몰입해서 읽기가 어려웠던 것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신흥 종교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만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정도는 아니다보니 리얼리티 면에서 왠지 남 얘기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신흥종교라는 소재 자체는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나절도 안 돼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만들었던 쉬운 전개와 복잡하지 않은 구도덕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장르물에 있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이 작품에 관해 판정 내리자면 장점 대 단점이 4:6 정도? 그래도 장점을 4로 본 것은 쉽고 안이하게(?) 읽은 덕분에 결말의 충격을 어느 정도는 무방비 상태에서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의 서평에 아예 더 많은 내용을 넣어서 보다 긴 장편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단편 정도로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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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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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각 수록작 별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금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따뜻한 소설보다도 진한 여운을 남겼던 구보 미스미의 전작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동생같은 작품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네 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고, 내용적으로는 아픈 과거를 지닌 채 겨우겨우 살아가는 상처투성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과 닮은꼴 또는 시즌 2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소라낙스 루복스 유토의 이야기

형과 여동생만 편애했던 어머니. 하지만 형은 히키코모리가 됐고, 여동생은 15살에 임신과 출산을 겪은...

 

물고기 그림 노노카의 이야기

천부적인 미술 재능을 타고났지만, 17살의 임신으로 모든 꿈이 사라진... 믿었던 어머니는 거래하듯 자신을 부자 정치인의 집안으로 시집보냈고, 이후 딸 하루나를 출산하면서 악몽 같은 나날을 겪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쿄로 도망친...

 

소다아이스크림과 여름방학 마사코의 이야기

병으로 7개월 만에 죽은 언니 때문에 마사코는 엄마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지만 살아온 16년 내내 그것이 마사코의 삶을 시들게 만들었던... 손목에 칼자국을 내보았던 어느 새벽, 거리로 나섰다가 노노카와 유토를 만난...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세 사람의 이야기

해변 가까이 들어와 목숨이 위험해진 고래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진 어촌 마을. 그곳에 모인 세 사람은 어머니와 남매로 위장한 채 며칠의 시간을 보내는... 자살로 치닫던 각자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됐을 때, 길 잃은 고래가 바다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세 주인공에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를 각인시킨 것은 각자의 어머니입니다. 비뚤어졌거나, 이기적이었거나, 혹은 집착에 가까운 광기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며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공범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과거 또는 현재의 상처들이 꾸준히 자가발전하면서 결국 이들을 모두 죽어버리고 싶은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서로를 만남으로써 치유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19금 에피소드에 비해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현실감에 있어서는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강합니다. 다만, 우연에 우연을 통해 만난 주인공들이 평범하지 않은 유사한 상처를 지닌 점은 조금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구보 미스미는 매일 애를 쓰지만,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다든가 멀리 가버리고 싶다든가... 그런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작의를 밝혔습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캐릭터에 관한 한 일부러 작정하고설정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을 잃고 해변으로 밀려온 고래 역시 세 주인공의 치유를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으로 설정됐는데, 우선은 그들을 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 마치 죽기 위해 해변 가까이로 다가온 듯 임을 암시했으며, 더 나아가 자살을 꿈꾸던 주인공들이 같은 처지인 자신(고래)에게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살아남으라고 응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현학적인 문장을 동원하여 상징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부작용이 났겠지만, 구보 미스미만의 편안한 문장 덕분에 전체 이야기에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의 메인 코드가 불임’, ‘출산’, ‘사랑이었다면, 이 작품은 일그러진 가족과 모성’, 그리고 삶과 죽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두 편 모두 캐릭터는 상처투성이들이고,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일상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비록 구보 미스미가 그들에게 살아남아 사랑하라고 끝까지 힘을 주고 길을 열어주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들이 앞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나마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제법 기운을 차린 캐릭터들 덕분에 위안을 받았지만, 이 작품은 어딘가 불안함이 남아있는 그들을 방치하고 돌아선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출판사 소개에 절망을 탁월하게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나있다.”고 적혀있는데, 그것이 구보 미스미의 개성이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평가이긴 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가끔씩 웃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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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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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소설들의 공통점은 표지에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19금 딱지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할 텐데, 이왕이면 구매 의욕까지 북돋기 위해 자극적인 표지를 덤으로 내놓곤 합니다. 그에 비해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겉모습이 참 얌전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끌어냅니다. “이런 평범한 표지인데, 19금이라고?”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수록작 미쿠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실은 16살 타쿠미와 28살 주부 안즈를 주인공으로 한 한 편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한 연작소설입니다. 각각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미성년자인 타쿠미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주부 안즈의 변태적인 관계의 시작과 끝, 안즈의 고통스런 성장 과정과 불임이라는 비극, 동급생 타쿠미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은 나나의 이야기, (약간 독립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타쿠미의 친구 료타의 고군분투기, 그리고 조산원을 배경으로 한 타쿠미 어머니의 생명또는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 등입니다.

 

나중에 읽은 같은 작가의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역시 비슷한 포맷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형식이 주는 매력은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고 생각됐던 이야기를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타쿠미에게 초점이 맞춰진 미쿠마리에서 안즈는 철저히 변태적인 주부로만 나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에서는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안즈의 과거를 깡그리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안즈와의 이별 후 히키코모리처럼 폐인이 된 타쿠미를 곁에서 지켜주는 나나의 이야기 역시 앞서 두 에피소드에서 조연에 불과했던 나나의 속마음을 애틋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제나 의지처가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했던 타쿠미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대단원을 장식하며 마지막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건 첫 수록작 미쿠마리지만 개인적으론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을 한 세트로 묶었을 때 수상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두 수록작은 이 연작 단편집이 왜 19금 판정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만큼 파격적인 묘사가 들어있는데, 재미있는 건 정작 포르노그래피나 다름없는 그 묘사들 때문에 결국 울컥,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이라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적잖겠지만, 제겐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애 묘사가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에 최대한 이입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열쇠로 보였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수는 없지만,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울컥했다고?”라고 반문하는 독자에겐 그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다, 라는 대답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 세 편은 ‘19과는 전혀 무관한 타쿠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늘을 바라보는 한심한 나의 이야기이고, 캐릭터들이 겪는 통증은 앞의 두 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공감 역시 앞의 두 편에 못지않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한심한가? 혹시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면서 살아오진 않았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한심한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다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내상을 감추고 있진 않은가?

결국 하늘을 보는 한심한 나는 스스로만 볼 수 있고, 스스로만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구보 미스미가 짜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엔 상처투성이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타쿠미였다면, 안즈였다면, 나나였다면, 료타였다면, 타쿠미의 어머니였다면, 과연 나는 그들만큼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거나 세상과 맞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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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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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강직한 관리였던 슈코쿠는 자신이 모시던 번주의 측실과 밀통했다는 죄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무카이야마에 유폐됩니다. 당장 할복해야 할 죄목이지만, 번주는 자신의 가문에 관한 기록(미우라 가보)을 완성하라며 10년의 유예를 줍니다. 7년 후, 슈코쿠를 못마땅해 하던 세력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쇼자부로를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쇼자부로는 슈코쿠의 인품에 빠져들고, 마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을 지켜보면서 본연의 임무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슈코쿠를 유폐시켰던 10년 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 비밀을 지키려는 세력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슈코쿠를 압박합니다. 하지만 슈코쿠는 번주 가문에 관한 기록을 마침과 동시에 중대 결단을 내립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늘 책읽기의 만족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쯤 서점의 서가에서 꺼내보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저녁매미 일기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이면서 동시에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매력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인 저녁매미 일기는 유폐된 10년 동안 슈코쿠가 쓴 일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과 감상이 실린 일기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그날그날의 기록일 뿐입니다. 각주를 보면 일본에서는 저녁매미가 하루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돼있습니다. 슈코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일기 제목을 그리 지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일기는 큰 비중 없이 다뤄집니다. 슈코쿠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조그마한 소품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 그의 인격과 신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일기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슈코쿠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온 쇼자부로에게 해준 이야기 가운데 무사는 명예를 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명예를 버리고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봉공(奉公)이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와 함께 그의 일생을 함축한 적확한 표현으로 보였는데, 사실 그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 슈코쿠에게 감화 받은 쇼자부로처럼 기득권을 포기해가면서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거나 옳다고 믿게 된 바를 목숨 걸고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대해,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 한없이 가볍고 하찮게 여길 뿐인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억지 교훈이나 계몽과 달리 피부에 와 닿는 온기가 남다르다고 할까요?

 

가장 아쉬웠던 점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슈코쿠가 작성하는 미우라 가보는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족보보다 상세한 인명사전으로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책자입니다. 미우라 가보의 내용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인명과 지명, 복잡한 중세 일본의 관직명 등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양자나 양녀로 들어가면서 이름이 바뀌고, 관례(성인식)를 치른 후 이름이 바뀌다 보니 한 인물에 딸린 이름이 두세 개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 관직이나 직책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주변 조연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메모 없이는 앞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각주마저 거의 없어서 수시로 짜증이 났는데, 맨 마지막 장에 (약간이긴 하지만) ‘관직에 관한 도움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를 위해 조금은 친절한 배려가 아쉬웠던 부분인데, 내용만 보면 별 4개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별 3개에 머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들 때문에 작품 자체의 미덕이 가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역사소설에 관심도 있고 약간의 노력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라면 슈코쿠와 쇼자부로의 삶을 통해 나름 묵직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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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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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자 원적지를 벗어나는 것이 중죄이던 시절,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고향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라 불리던 도쿠가와 막부의 친위부대 신센구미에 몸을 의탁합니다. 살인과 할복이 난무하던 신센구미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돈이라면 자존심도 팔아먹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습니다. 유신세력이 힘을 얻고, 대세는 막부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지만, 신센구미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도망을 치게 되고, 오사카에 있던 고향의 번 저택으로 숨어들지만, 그곳에서 그는 애초 고향을 떠났던 탈번의 죄 때문에 할복을 지시받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팬으로서 칼에 지다는 비교적 그의 책 가운데 뒤늦게 읽은 편에 속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마니아라 자처하면서도 막상 두 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의 소설을 통해 막부, 사무라이, 신센구미라는 소재들을 읽는다는 게 어딘가 내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다 지로가 만들어낸 막부 말기의 이야기에는 전형적인 영웅적 사무라이 활극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오랜 주저 끝에 결국 하드커버로 된 상권을 집어 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하권까지 읽어 내렸습니다.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닙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이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입니다.

숙명처럼 칼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던 사무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의는 메이지 유신도, 도쿠가와 막부도, 무사도도, 할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 그들이 굶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목숨을 지키고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치욕도 감내할 수 있다는 신념. 이것이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대의였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 수많은 목숨들이 한없이 가볍게 사라져야했던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아사다 지로 특유의 따뜻함과 애틋함은 오히려 그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나가면서 아사다 지로는 시대개인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지었으며, 개인은 운명처럼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갔는지, 또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개인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소화해냈는지, 어느 하나 사소하게 넘기지 않고 찬찬히 짚어나갑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중에는 몇 번씩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져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민망한 상황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씩 겪는 일이긴 하지만, 막부 말기의 한 무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그날로 새 책을 주문했습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허망해질 때,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찾아 읽게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지처가 되는 책이 몇 권 있지만, ‘칼에 지다는 조금은 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 리스트에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탓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 지방 제도, 유신지사 대 도쿠가와 막부의 갈등, 신센구미의 역할 등 무시하고 읽기엔 좀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냥 읽어도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사전 정보라도 습득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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