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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평점 :
다 읽은 뒤 표지 안쪽에 실린 작가 길리언 플린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생각났습니다. “우아하게 생긴 작가가 글 한번 진짜 독하게 썼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작가의 외모와 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헛소리인 건 분명하지만 외모와 글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긴 탓에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얘기하자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케이스였습니다.
크게 세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번째 장 이후의 줄거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스포일러라서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장의 전개 부분까지밖에 소개할 수 없습니다. 남편 닉과 아내 에이미가 한 챕터씩 번갈아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5주년 날, 에이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닉의 챕터는 수사진의 개입, 주변 인물이나 언론의 반응, 그리고 닉에게 집중되는 혐의와 그의 치명적인 비밀을 그립니다. 보통 아내가 사고를 당하면 제일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이 손꼽히기 마련입니다. 닉도 마찬가지여서 수사를 맡은 형사 보니와 길핀은 닉을 유심히 살핍니다. 더구나 살인사건으로 추정할만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사건이 언론을 통해 갈수록 부풀려지자 닉은 어떻게든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사방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정황들이 나타나면서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에이미의 챕터는 그녀가 기록한 일기장의 내용들입니다. 7년 전, 닉과 사랑에 빠진 에이미의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시작된 일기는 5년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악몽으로 변질됐는지를 묘사하다가 결국 실종 일주일 전, 절망만 남은 에이미의 비참함으로 마무리됩니다. 에이미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남자가 나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
월스트리트저널은 “피가 난무하지 않아도 이런 서스펜스를...”이라고 평했고, 뉴욕데일리 뉴스는 ‘장미의 전쟁’과 비교하며 호평했지만, 난무하지만 않을 뿐 피는 적당히 등장하는 편이고, ‘장미의 전쟁’이 부부간의 과장된 물리적, 폭력적 충돌 때문에 히트를 쳤다면, ‘나를 찾아줘’는 고도의 지능전(?)이 베스트셀러의 동력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곳곳에 적절한 부비트랩을 잘 설치해놓았습니다. 인물, 사건, 소품 등 그 종류도 다양하고, 파괴력 역시 에피소드에 맞춰 잘 조율해놓았습니다. 스트레이트로 완독하려다 보니 몸도 피곤하고 눈도 뻐근해졌지만, 지루해질 만하면 사방에서 터져준 폭탄들 덕분에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비트랩 중 한두 가지만 털어놔도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모호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내용의 절반 정도는 서스펜스나 스릴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불꽃 튀는 사랑을 나눈 연인들이 행복한 결혼에 골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은 시들해지고, 끝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최악의 존재로 추락하는 이야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스피디한 장르물의 덕목을 갖추고 있고, 특히 두 번째 장부터는 페이지 터닝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지지만, 성격 급한 독자들에겐 초반부의 식상한 부부 갈등이 다소 지루하고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스펜스와 스릴러를 위한 필수적인 토대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과하게 보인 게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론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지만, 별 0.5개를 빼게 만든 유일한 단점은 ‘분량’의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700페이지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자주 읽은 탓인지 ‘나를 찾아줘’(693페이지)의 첫 페이지를 펼칠 때만 해도 큰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경우 연이은 사건,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를 위한 충분한 수의 조연들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 주인공 외에도 여러 캐릭터와 사건들이 방대한 분량을 나눠 책임지는 일종의 분업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나를 찾아줘’는 주인공 닉과 에이미 두 사람에게 거의 모든 것이 맞춰져 있는데다, 이야기 역시 ‘좁고 깊게’ 파들어가는 스타일이다 보니, 적어도 2-3일에 나눠서 읽어야 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작품입니다. 괜한 욕심에 일요일 하루에 끝내겠다고 덤볐다가 밥시간 빼고 읽는 데만 9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리언 플린이 해외에서 받은 호평은 결코 공치사나 홍보를 위한 미사여구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2009년에 출간된 첫 소설 ‘그 여자의 살인법’을 빨리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동시에 신작까지 기다리게 되는 기대 이상의 느낌을 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