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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텀 스쿨 어페어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2
토머스 H. 쿡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한두 줄의 홍보카피 외엔 책을 읽기 전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다른 독자의 서평을 보지 않는 편이라 처음엔 학교를 배경으로 한 연쇄살인 또는 학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 짐작한 게 사실입니다. ‘붉은 낙엽’이나 ‘심문’ 등 귀에 익은 작품들은 몇 편 있지만 토머스 H. 쿡을 만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보니 그의 작품 세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에 들어간 ‘스쿨’과 “죄의식의 저울 건너편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잔혹한 진실”이란 홍보카피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었는데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는 1926년 8월에서 1927년 8월에 이르는 1년여의 시간 동안 보스턴 인근 조그마한 소도시 채텀에서 벌어진 한없이 어둡고 무거운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비밀을 잔뜩 끌어안고 있거나 또는 불발탄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채텀스쿨 미술교사로 부임한 미모의 엘리자베스 채닝, 그녀로 인해 새로운 세계와 자유를 열망하게 된 고등학생 헨리, 그녀와의 치정으로 인해 여러 인물의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유부남 교사 리드, 그녀로 인해 가족의 붕괴를 목전에 둔 히스테릭한 리드 부인, 그리고 그녀를 채텀스쿨로 초빙한 장본인이자 헨리의 아버지이며 보수적 교육자인 아서 등이 그들입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 – 보수적인 소도시에서 벌어진 두 남녀의 불륜의 비극적 결말 – 에 그칠 수도 있는 소재지만, 토마스 H. 쿡의 필력은 주조연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의 심리와 이야기의 배경인 채텀의 분위기를 잘 버무림으로써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과 기대감을 놓치지 않는 중량급 서사로 만들어냈습니다.
먹구름과 광풍, 안개로 가득한 잉글랜드의 황무지를 연상시키는 해변가 소도시 채텀의 1920년대 풍경은 인물들을 더욱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다 보면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가 연상되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띕니다. 음울하고 불길한 분위기에 휩싸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행보를 미묘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한 대목이 겹쳐 보인 탓입니다. 또 장르소설이라기 보다는 순문학에 가깝다는 인상도 자주 받게 됩니다. “자신의 시적, 문학적 재능을 선보이는”, “장르소설과 순문학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드러냄으로서 ‘슬픔의 미학’을 느낄 수 있게 한” 등 인터넷서점의 작가 소개글 역시 그런 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특이했던 점은 다양한 시간적 배경입니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헨리가 살고 있는 1960년대 후반, 헨리의 10대 시절이자 채텀스쿨의 비극이 벌어졌던 1926~1927년, 그리고 잠깐이지만 중년의 헨리가 등장하는 수년 전 등 다양한 시간적 배경이 등장합니다. 이럴 경우 보통 챕터별로 시간이 분류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비해 ‘채텀 스쿨 어페어’는 때론 문장 단위로 시간적 배경이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읽으면서 집중하지 않으면 이 인물이 존재하는 시점을 놓치기 쉬울 정도입니다. 1920년대에 있는 건지 1960년대에 있는 건지, 사고가 난 그날의 이야기인지 그 전후의 이야기인지, 채닝이 채텀에 온 시점의 이야기인지 리드가 채텀에 온 시점의 이야기인지 등 수시로 앞뒤 맥락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읽는 중에는 가끔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다 읽은 후엔 그런 시간적 구성이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훨씬 좋은 장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스쿨 어페어’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기대감으로 이 작품을 접한 독자에겐 좀 지루하거나 심심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순문학적인 특징 때문이겠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사건의 실체가 그리 강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을뿐더러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의 개운치 못한 느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조만간 토마스 H. 쿡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붉은 낙엽’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유괴를 소재로 했다는데, 과연 어떤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냈는지, 일반적인 유괴 미스터리와 어떤 식으로 다른 서사를 구축했는지 궁금합니다. 고백하자면 제 취향과는 조금은 거리가 먼 작가 같지만 호기심을 버리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