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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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일 만에 탐정에 복귀한 사와자키를 찾아온 건 전직 야구선수인 30대 남성입니다. 그는 11년 전 아파트 6층에서 자살한 의붓 누이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살, 그것도 11년 전의 일이라 다소 난감한 태도를 보였던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괴한에게 피습 당하자 정식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누이의 자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애매한 진술만 늘어놓았고, 주변 인물들 역시 과거의 불행한 일을 들춰내는 일에 비협조적인데다 의뢰인을 비롯하여 사와자키 본인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는 등 험난한 곡절을 겪지만 사와자키는 기어이 11년 전의 진실에 다가섭니다. 하지만 거기엔 추악한 탐욕과 비열한 은폐 시도만이 남아있을 뿐, 결국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니시신주쿠의 해가 들지 않는 2층 사무실, 필터 없는 피스담배, 아직도 굴러가는 것이 신기한 낡은 애차 블루버드, 10년 넘게 악연으로 이어진 조연(사라진 옛 파트너 와타나베, 신주쿠 형사 니시고리,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중간간부 하시즈메) 등 시리즈 첫 편에서부터 꾸준히 사와자키의 캐릭터를 뒷받침해온 공간, 소품, 인물들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반면, ‘안녕 긴 잠이여의 시간적 배경은 시리즈 첫 편으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사와자키의 노화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일본에서는 네 번째 작품(‘어리석은 자는 죽는다’)까지 출간된 것으로 아는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 사와자키가 몇 살을 더 먹은 상태일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하라 료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고, 그의 집요하면서도 시크한 탐문 역시 언제나처럼 쾌감과 함께 카리스마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하라 료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집필했을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는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때론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거나 모호함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사와자키의 특별한 재능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사건을 해결하고도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사와자키의 씁쓸함 역시 이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우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겐 사와자키의 공간과 소품과 조연들이 다소 생소하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공간과 소품이야 논외로 칠 수 있지만 1~2편에 비해 역할이 훌쩍 커진 니시고리 형사나 폭력배 하시즈메의 경우 전작들의 정보 없이는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중반부에 느닷없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급선회한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어찌어찌 어렵게 수사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는데, 그 돌파구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그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사와자키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린 것 같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전작과 비슷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구조가 상대적으로 심플하다는 점, 그래서 전개가 다소 느슨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다 동어반복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지루하게 읽히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사와자키를 처음 만난 한 독자는 지루해서 중도에 포기했다라는 서평을 남겼는데, 그래서인지 사와자키와의 첫 만남으로 안녕, 긴 잠이여를 택하는 것은 만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지만, (, 일본 전통 가면악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상 장황해 보인 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초중반에는 그리 자주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일부 조연들의 역할이나 그들이 안고 있는 비밀 또는 혐의점들이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제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선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애정하는 작가와 주인공은 언제나 미스터리 독자에게 다음 이야기에 대한 갈증만 남겨놓곤 하는데, 그저 후속작인 어리석은 자는 죽는다의 출간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사족 1.

시리즈 세 작품 모두 좋아하지만 굳이 호감도를 따진다면 내가 죽인 소녀’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안녕, 긴 잠이여순이 될 것 같습니다.

 

사족 2.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하라 료가 헌사를 바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제목들 -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빅 슬립(Big Sleep)‘ - 에서 따온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해설을 보니 역시나 헛짚은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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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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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 시리즈’ 3안녕, 긴 잠이여를 읽기 전에 전작인 1편과 2편을 다시 읽었습니다. 얼마 전 서평을 올린 1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마찬가지로 2편인 내가 죽인 소녀역시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작품이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3편을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아는 상태에서의 두 번째 읽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긴장감은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소홀히 넘겼던 문장들이나 상황들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듯 즐기다 보니 속도전으로 페이지를 넘겼던 첫 번째 읽기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쳤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사건을 의뢰받거나 자발적으로 사건을 맡은 탐정이 진실 혹은 범인을 찾겠다는 명확한 스탠스를 취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죽인 소녀의 경우엔 휘말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사와자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11세 소녀의 유괴-살해 사건에 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사와자키는 낯선 괴전화를 받고 마카베의 집을 찾지만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에서 마카베의 11살 딸 사야카의 유괴 공범으로 체포됩니다. 혐의는 곧 풀렸지만 다시금 괴전화를 받은 사와자키는 본의 아니게 유괴범의 지시를 받게 된 것은 물론 사야카의 몸값을 배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됩니다. 뒤늦게 오해를 완전히 풀어낸 사와자키에게 사야카를 찾고 유괴범을 잡아 달라.”는 관계자의 정식 의뢰가 들어옵니다. 관할서인 메지로 경찰서 수사팀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조사하며 열정적으로 조사를 이어나갔지만 (작품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결국 사와자키에게 들려온 건 사야카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분노보다 사와자키를 더 사로잡은 건 내가 소녀를 죽였다.”라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사건은 해결 기미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배신하면서 동분서주합니다. 막판 반전과 엔딩에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장면을 마주하고도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가 내가 죽인 소녀라는 다소 난감한 제목을 붙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작품 내용을 복기하며 제목에 내재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죽인 소녀라는 제목이 교묘하면서도 고도로 위장된, 그래서 이 작품에 딱 맞는 제목이란 점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사와자키의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사건 관계자를 탐문하거나 용의자를 몰아붙일 때면 얼음장 같은 시크한 태도와 촌철살인 식의 짧고 굵은 한마디로 정신을 번쩍 나게 합니다. 탐정의 개입을 못 마땅히 여기고 그저 권위로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려던 메지로 경찰서의 형사들은 사와자키의 쿨하고 빈틈없는 태도에 늘 찌그러지기 바쁩니다. 독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최고의 대목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독자들이 기대했던 친절한 설명이 다소 안이하게 처리된 점입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 즉 사와자키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예상 밖의 결과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전부 사와자키의 뇌 속에서 진행된 은밀한 추리의 결과로 처리되다 보니 팩트 폭격의 시원한 맛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생뚱맞은 비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사와자키의 설명을 듣다보면 , 그랬던 거네.”라며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2% 이상 부족하게 느껴진 아쉬움이 남고 말았습니다.

 

1, 2편의 복습을 끝내고 이제 따끈따끈한 신간인 안녕, 긴 잠이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안 봤기 때문에 개인적인 망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혹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차용된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말미에 작가 후기 대신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초단편소설을 실을 정도로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헌사를 바친 점을 감안하면, ‘필립 말로 시리즈가운데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빅 슬립(Big Sleep)‘을 조합해서 제목을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오마주에 가까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읽는 재미가 배가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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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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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자키 시리즈세 번째 작품인 안녕, 긴 잠이여서평단에 뽑혀 책을 배송 받았지만, 그 전에 오래 전에 읽고도 서평을 남겨놓지 못한 시리즈 1편과 2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잘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아무래도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제대로 맛보려면 순서대로 읽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배신한 옛 동료의 이름을 딴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라는 간판을 단 채 신주쿠 외곽에서 시크한 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사와자키는 재벌가 도신그룹의 딸 나오코로부터 이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남편 사에키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평범한 의뢰처럼 보였지만 사와자키가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사에키의 주거지에서 피살된 시신이 발견되는가 하면, 굴곡 많은 가족사를 지닌 도신그룹의 일족들과 충돌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거유세 중 피격을 당한 현직 도쿄 도지사는 물론 구린 냄새를 풍기는 그의 형제 및 참모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과거 사에키가 르포라이터로서 조사하고 있던 사안에 주목한 사와자키는 이 사건이 단순 실종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확신합니다.

 

사와자키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지나치게완벽한 인물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냉정함, 아무도 보지 못하는 디테일을 포착해내는 천리안, 본능적인 욕망조차 쿨하게 걷어차는 발군의 이성 등 남자라면 한번쯤은 로망처럼 꿈꿔봤을 이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르물 독자에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매력적인 탐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편 뒤에 작가 후기를 대신 한 초단편소설 말로라는 사나이가 실려 있습니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캐릭터 필립 말로에 대한 하라 료의 헌정사에 다름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같은 문화권이라서 그런지) 여러 면에서 사와자키에게 더 호감이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폐차나 다름없는 블루버드를 몰며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의 고민이 피부에 와 닿았고, 거들먹거리는 상대방을 간결한 말 한마디로 찌그러뜨릴때마다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 사소한 단서에서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 사실들을 포착해낼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람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냉정하고 시크한 면모 때문에 얄미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사와자키의 행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싶게 만들만큼 매력적입니다.

 

서평이라기보다 사와자키 예찬론에 가까운 글이 돼버렸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사건 자체나 해법보다도 주인공 사와자키의 매력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고도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사건을 복잡하게 보이려는 의도였겠지만, 두세 번씩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난해한 상황 설명들이 곳곳에서 발견됐고, 몇몇 인물들의 행동은 다분히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이곤 했습니다. 평범한 개인의 실종에 정치권력과 재벌이 끼어들다 보니 인물간의 관계 자체가 거미줄처럼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것을 독자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풀어내는 과정에서는 분명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중반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오타가 후반부로 갈수록 급증한 점입니다. 심지어 사와자키와 사에키의 이름이 혼동된 부분도 눈에 띄었는데, 단순히 옥의 티라고 하기엔 꽤 큰 실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따끈따끈한 신간 안녕, 긴 잠이여가 눈앞에서 어른거리지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읽고 보니 역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내가 죽인 소녀도 제대로 복습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새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도 참을 수 없지만 그보다는 사와자키의 인생행로를 순서대로 따라 가면서 그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게 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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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서지희 옮김 / 살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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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살인사건 전담반의 꼴통칼 뫼르크는 동료들을 잃는 참극을 겪은 후 지하실에 위치한 신설 부서 미결사건 특별수사반으로 좌천됩니다. 시리아 출신 아사드를 조수로 맞이한 칼 뫼르크는 특별수사반의 첫 미션으로 5년 전 실종된 여성정치인 메레테 륑고르 사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딱히 해결할 생각도 없고, 그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참극을 원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어준 건 다름 아닌 조수 아사드입니다. 5년 전 사건 발생 당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조그마한 단서에서 출발한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메레테를 납치한 범인을 특정하지만, 마지막 순간, 메레테는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리고 맙니다.

 

지난 해 화제가 됐지만 번번이 독서 리스트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작품입니다. 북유럽 스릴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편이고, 미결사건 전담반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백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지’(가벼운 판타지 또는 게임 소설 같은 느낌?) 때문에 매번 주저하곤 했습니다. 표지와 작품의 사이엔 아무 상관도 없지만 어쨌든 첫인상이 중요한 건 사람이나 책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시리즈 2편인 도살자들이 출간된 걸 알곤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첫 페이지를 열게 됐습니다.

 

꼴통에 퇴물 취급까지 받던 칼 뫼르크와 시리아 출신의 능력자 아사드의 조합은 여느 콤비보다 흥미롭고 독특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칼 뫼르크는 언뜻 요 네스뵈의 히어로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지만, 그만의 뚜렷한 개성과 상처투성이 이력으로 인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정식 경찰도 아니고, 칼 뫼르크 밑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불분명한 아사드는 전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과 날카로운 눈매를 자랑합니다.

 

메레테의 실종이 메인 사건이라면, 동료들을 죽거나 부상 입히고 칼 뫼르크를 좌천시킨 체크무늬 총격 사건(라이벌인 바크 형사가 수사 중인) ‘자전거 살인사건이 서브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칼 뫼르크는 동시에 3개의 사건에 연루된 채 이야기를 이끄는데, 시리즈 첫 편답게 그의 캐릭터를 다양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입체적인 설정입니다. 적잖은 분량 속에 3개의 사건이 어지럽지 않게 구성되어 있어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메인 사건인 메레테의 실종이 동기도 허약하고 이야기도 다소 맥이 빠지게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은 언급할 수 없지만, 읽는 내내 설마 아니겠지?”라고 짐작했던 것이 실제 동기로 밝혀졌는데, 개연성이 없진 않지만 이야기의 무게감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갇힌 공간으로 한정된 메레테의 동선 역시 지나치게 단조로워서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중간중간 그녀의 과거가 등장하긴 하지만 칼 뫼르크-아사드 콤비의 활약만큼이나 메레테의 역할을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많이 남은 대목입니다.

 

표지에 대한 불만은 여전하지만, 머지않아 후속편인 도살자들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모처럼 기대감을 갖게 만든 칼 뫼르크와 아사드의 캐릭터 때문이기도 하고, 촘촘하면서도 무거움과 가벼움을 겸비한, 새로 만난 북유럽 작가의 필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10년 전쯤 닷새간 머물렀던 덴마크의 풍경이 상세하게 묘사된 건 이야기와는 무관한 특별한 재미를 남겨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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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 죽은 남자 스토리콜렉터 18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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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여러 번 타임 루프를 경험한 히사타로는 신년회 날인 12, 또다시 타임 루프를 겪던 중 충격적인 사건을 접합니다. 같은 날이 아홉 번 반복된 후에야 다음 날로 넘어가는데, 두 번째 12일에 할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랫동안 반목하던 일가들이 신년회에서 유산 분배를 놓고 격돌하는 와중에 할아버지가 살해된 탓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문제는 12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어디선가 인과율에 오류가 생겼고, 그로 인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한 히사타로는 나머지 일곱 번의 12일에서 범인 찾기와 동시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분투하지만, 매번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속목격해야만 맙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 12, 모든 정황을 뒤집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히사타로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일곱 번 죽은 남자“20년 동안 미스터리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던 작품으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대표작입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타임 트립과는 조금은 다른 개념인 타임 루프(같은 시간이 반복되는)를 반복살인이라는 미스터리와 조합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을 통해 다양한 시간관련 이야기를 봐온 탓인지 타임 루프라는 소재 자체가 크게 매력적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인물이 계속 살해당한다!”라는 설정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첫 페이지부터 홀딱 빠져들기 시작해 할아버지가 살해된 두 번째 12부터는 거의 속독 수준으로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한달음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타임 루프 와중의 살인 미스터리 외에도 불행한 과거사가 갈라놓은 부녀간-자매간의 반목, 그로 인해 파생된 유산 상속전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할아버지의 비밀, 그리고 탐욕으로 뒤범벅된 사촌 간의 치정 등 이야기를 다채롭게 끌고 가는 설정들이 많아서 비교적 간결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호기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백미는 타임 루프이고, 그 핵심에는 일곱 번의 12일과 일곱 번의 살인, 그리고 정체불명의 범인이 있습니다. 작가는 반복되는 12일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독자에게 미리 힌트를 주면서도 결국에는 늘 뒤통수를 치는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뒤통수치기는 마지막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20년 동안 미스터리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던 작품이란 평이 과장이 아님을 진심으로 깨닫게 만들 정도로 얼얼하고 충격적입니다.

 

모든 진실이 폭로되는 후반부에서 설명이 지나치게 많았고 그 때문에 작위적인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이라는 인간의 대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직설적 묘사, 지독한 풍자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통속적인 콩가루 집안설정, 그리고 적절한 비율로 배합된 타임 루프와 살인 미스터리 등 장점이 훨씬 더 도드라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대표작이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다른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무조건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대표작보다 좀 딸릴지는 몰라도 일곱 번 죽은 남자를 써낸 작가의 작품이라면 충분히 신뢰해도 괜찮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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