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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평점 :
패전후 일본. 가가치家와 가미구시家가 양분하고 있는 가가구시촌은 허수아비님으로 일컬어지는 산신을 숭배하는 뿌리 깊은 민간신앙촌입니다. 자료 조사 차 가가구시촌을 찾은 도조 겐야는 도착과 동시에 연이은 괴사 사건에 휘말립니다. 특이한 모습으로 발견된 시신들 때문에 마을에서는 허수아비님 또는 염매의 징벌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집니다. 도조 겐야 역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자신이 가가구시촌의 ‘미신’에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도조 겐야는 자신만의 논리로 범인을 지목하지만, 그 자리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상황이 발생하고, 사건에 연루됐던 모든 이들은 도조 겐야의 최종 진술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특징이 가미된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눈에 확 띄는 표지를 발견한 덕분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먼저 읽게 됐고, (사실 ‘호러’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장르지만) 이런저런 좋은 기억 때문에 ‘도조 겐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새 작품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의 출간 소식을 들었는데, 크게 지장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전작들을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몇 달 전에 구해놓고 계속 책장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던 시리즈 첫 작품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린 머리~’에 비해 ‘염매처럼~’은 초반부터 페이지를 넘기기가 조금은 버거웠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인 ‘방대한 민속학 자료’ 때문이었습니다. 전후 일본이라는 무대, 외진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의 독특한 내력, 조상의 지벌 등 주요 설정들은 ‘잘린 머리~’와 비슷하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과잉’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방대했고, 특히 일본 전역에 걸친 마귀에 얽힌 묘사는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으며, 메인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라고 치더라도 그 도가 지나쳐 지적 자랑 또는 현학적인 과시로 여겨지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거나 난해했던 점입니다. 물론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도 있지만 가끔은 짜증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무대인 가가구시촌의 경우 맨 앞에 첨부된 지도를 몇 번씩 들춰보게 만들었고, 건물의 내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간중간 평면도를 첨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좌우 등 방향과 위치 묘사가 지나치게 상세하게 이루어져, 정작 사건과 본 내용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습니다.
아쉬운 점을 먼저 언급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도조 겐야 시리즈’ 첫 편으로서의 ‘염매처럼~’의 매력은 이 아쉬움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점입니다.
온갖 흉흉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도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기괴한 형체의 구구山, 마을을 감싼 채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흐르고 있는 두 개의 강(히센천과 오주천), 가가치家의 무신당을 비롯하여 허수아비님의 마성이 느껴지는 건축물 등 존재 자체가 호러라고 할 만한 가가구시촌은 말 그대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미스터리의 무대입니다.
또한, 대대로 가가치家 쌍둥이 자매들이 그랬듯이 무녀와 혼령받이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기리 자매, 어릴 적 출입이 금기시 됐던 구구山에 올랐다가 평생 잊지 못할 공포와 상처를 겪은 렌자부로를 비롯하여 오랜 구원(舊怨)과 비극적인 인연으로 묶인 가가구시촌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공포와 공감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혼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기이한 의례, 빙의를 쫓기 위한 주술 의식, 신령납치로 여겨지는 아이들의 실종, 뱀을 비롯한 온갖 동물들과 연관된 마귀에 대한 전설 등 역사-호러-미스터리를 위한 디테일한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550여 페이지의 분량 어디에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과 특징들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지만,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호러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작품임엔 틀림없습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읽기 전에 앞선 ‘도조 겐야 시리즈’를 모두 읽을 생각이었지만, ‘염매처럼~’을 읽는 도중 문득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한 달에 한 권씩만 보든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느새 다시 생각이 바뀌게 됐습니다. 이어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산마처럼 비웃는 것’을 읽을 계획인데, 미쓰다 신조만의 ‘마귀 같은 매력’ 덕분에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러물과 함께 연말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