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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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제3중학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묘사한 1권과 학생들 스스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교내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2권에 이어 엿새 동안 벌어진 교내 재판의 기록과 그를 통해 드러난 진실을 담은 마지막 3권입니다.

 

가시와기 다쿠야와 아사이 마쓰코의 죽음, 모리우치 선생의 피습, 오이데 집의 화재 등 조토 제3중학교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이 증인으로 등장하여 이미 밝혀진 사실 또는 새롭게 등장한 단서들에 대해 진술합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은 실제 법정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고, 심지어 상대방이 전혀 예상 못한 증인을 채택함으로써 날선 공방을 벌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혹독한 시간들이었지만 조금씩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결국 마지막 날에 이르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 증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대단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앞서 1~2권을 읽은 독자라면 대부분(또는 적잖이) 교내 재판을 통해 드러날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은 상태에서 3권을 시작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반전이 어울리는 내용도 아니고,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이런 사소한호기심과 궁금증을 미끼삼아 3권의 내용이 전개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을 하면서 책을 읽은 탓인지, 본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어. 모두 상처투성이야. 그래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니까 다들 노력하는 거야. 올바른 일을 하고 싶으니까.”

 

1~3권 전체의 테마이자 마지막 3권의 의미를 짧고 명료하게 정리한 문장입니다. 실제로 교내 재판 팀 대부분은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크고 작은 상처를 얻게 됩니다. 차라리 그들이 찾아낸 진실이 무엇’, 자살 또는 타살? 범인은 누구?’ 같은 팩트뿐이었다면 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 앞에 나타난 진실은 ?’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던 걸까? 그녀는 왜 그랬던 걸까? 그들은 왜 그랬던 걸까? 그 이유들은 하나같이 아프고, 절실하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 방관했던 자, 모른 척했던 자들이 그 이유를 깨닫게 된 순간 안타까워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2,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미리부터 독자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설정 역시 독하거나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15살의 중3 학생들의 노력과 성과라고 보기엔 너무 뛰어나거나 비상해 보인 나머지 사실감이 떨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으며, 특히 3권의 경우 느리고 완만한 속기록의 느낌이 강해서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엔딩은 개운치도 깔끔하지도 않고, 언뜻 납득이 가지 않거나 조금은 억지스럽게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1~3권의 서평이 조금씩 갈린 것은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미 여사가 추구한 캐릭터의 진정성덕분에 그 모든 아쉬움들이 충분히 커버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주연과 조연, 남자와 여자, 학생과 어른, 선인과 악인, 그리고 이 이분법의 가운데에 위치한 모든 인물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일관되고 충실하게 해낸 덕분에 적잖은 분량임에도 멈추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폭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하고 스케일 큰 사건보다는 작아도 진정성 있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취향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독자들과는 의견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1주일 동안 푹 빠져들었던 솔로몬의 위증은 제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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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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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25, 학교 후문에서 2학년 생 가시와기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이듬해 초여름까지 조토 제3중학교 주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한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후지노 료코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경찰과 학교가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사건의 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파헤치기 위해 교내 재판을 준비하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익명의 고발장에 의해 가시와기 살인범으로 지목받은 오이데 슌지를 피고인으로 놓고 후지노 료코, 노다 겐이치 등 조토 제3중학교 학생들이 판사, 변호사, 검사, 배심원 등의 역할을 맡아 여름방학 동안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변호사와 검사로 나뉜 학생들은 오이데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의 탐문은 물론 철저한 자료조사를 위해 거의 형사를 방불케 하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물론 그 과정들은 결코 순탄치 않을뿐더러 진작 예상했으나 막상 부딪혀보니 훨씬 더 공고하게 자신들을 가로막는 장벽 때문에 몇 번의 크고 작은 고비를 겪게 됩니다. 임시교장과 대부분의 교사들, 심지어 동료 학생들조차 비협조적이거나 방해꾼 노릇을 했고, 중요한 진술을 기대했던 인물들은 변호사든 검사든 어느 쪽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한 노력 덕분에 나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경찰이나 교사, 학부모들이 깜짝 놀랄만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관련 인물 중 일부가 방화, 상해 등에 휘말리면서 가시와기의 죽음에서 출발한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지난 1권의 서평에 달린 댓글 가운데 “1권과 2,3권의 서평이 극과 극이라는 내용이 있어서 내심 걱정도 됐고, ‘무슨 이야기로 남은 두 권의 분량을 채울 것인가?’라고 우려도 했었지만, 2권까지 읽은 현재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고, 이 서평을 마치는 대로 마지막 3법정을 큰 기대와 함께 읽기 시작할 생각입니다.

 

사건을 다룬 1권과 법정을 다룰 3권 사이에서 과연 결의라는 소제목을 지닌 2권이 무슨 내용으로 채워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는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들과 가지 치듯 발생하는 연관 사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같은 말을 반복하지도 않고 지루하게 늘어뜨리지도 않으면서 알차게 채워놓았습니다. 동시에 마지막에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묘한 위화감을 곳곳에 배치해 놓음으로써 본격 법정물이 될 3권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높여놓고 있습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롭게 진행되지만 제일 관심을 끈 것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 간의 다양한 인간관계들입니다. 가시와기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사, 검사, 판사, 배심원으로 나뉜 학생들은 각기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가치관과 성격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됩니다. 또한 교내 재판을 그저 학생들의 치기어린 장난쯤으로만 여겼던 학부모, 교사, 경찰 역시 어느 시점인가부터 각기 다른 심정과 목적으로 주시합니다.

진실은 하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캐릭터 수만큼 다양합니다. 동시에 어느 누구도 일관되게 선하거나 일관되게 악한 모습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됐다가 피해자가 됐다가 또는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누구나 진실을 원하지만 때에 따라 진실을 묻어두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가시와기의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다고 해도 교내 재판을 진행한 학생들이 웃을일은 없습니다.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독자 입장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엔딩이 되어줄지 오리무중이 됩니다. 작가가 이런 서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독자들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책읽기만 강요받게 되지만, 미미 여사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등장인물들과 골고루 교류할 수 있도록 꼼꼼히 안배했고, 그 결과 그저 재미있는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또 작가가 정해준 주인공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료코가 되어, 어떤 때는 오이데가 되어, 또 어떤 때는 교사나 형사가 되어 제 나름만의 진실 찾기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조토 제3중학교에서 벌어질 엿새간의 재판이 어떤 파란을 겪게 될지, 아직 터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건은 무엇이 있을지, 몇몇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감춰진 비밀은 어떤 형태로 공개될지,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질 진실이 료코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길지 이런저런 궁금함을 떠올리면 남은 3법정의 분량이 좀 모자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1권을 마친 후 무슨 이야기로 남은 두 권의 분량을 채울 것인가?’라고 걱정했던 일이 새삼 민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사족으로, 굳이 아쉬운 점을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2권부터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 상당히 많고, 그들이 료코나 겐이치와 함께 주연급으로 활약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교내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캐릭터가 필요한 점은 이해가 되지만, 몇몇 캐릭터는 전형적인 슈퍼맨’, ‘캔디걸등의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좀더 사소한 점이지만, 15세의 중3이라는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문득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탐문이나 자료조사 등 교내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 말하는 수준이나 사고방식을 지켜보고 있으면 웬만큼 철든 성인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특히, 상대방의 속내를 읽어내거나, 두세 수를 내다보는 혜안을 과시할 때면 내가 중3보다도 사고력이 떨어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딱히 아쉬움이라기보다는 그저 읽는 동안 느꼈던 묘한 위화감에 대한 호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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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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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에 제대로입문하게 된 계기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었습니다. 두툼한 분량의, 그것도 세 권으로 구성된 솔로몬의 위증을 앞에 두고 보니 오래 전 모방범’ 1~3권을 지켜보며 이걸 언제 다 읽나?’ 고민했던 일이 새삼 기억이 났습니다. 물론 모방범을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새삼 고민할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위증을 집어 들기까지 꽤 여러 번 주저한 것이 사실입니다.

중학교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건2,00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채울 만한 소재인가? 아무리 미미 여사라지만 2,000여 페이지를 채우려면 메인 스토리 외에 이런저런 주변부 이야기와 조연들을 다수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작품의 밀도와 재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뒤늦게 ‘9년 간 연재됐던 원고지 8,500매의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 글을 읽고서야 이 방대한 분량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우려(?)와 선입견을 지닌 채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사건(1) - 결의(2) - 법정(3)이라는 소제목대로, 1권은 조토 제3중학교에서 연이어 벌어진 사건들이 주 내용입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학교 후문에서 발견된 가시와기의 시신,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학교와 경찰, 학부모와 학생이 벌이는 갈등과 공방전, 그 와중에 날아든 익명의 고발장이 야기한 예기치 못한 사태들, 3자의 악의적 장난의 결과로 개입하게 된 매스컴과 그로 인한 대혼란, 그리고 연이은 희생자와 사고의 발발 등이 이어지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갑니다.

 

1권까지만 읽은 상태라서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앞서 가졌던 선입견 중 일부는 맞아들었고, 일부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관한 한 역시 두 권 정도가 알맞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나머지 2,3권을 읽은 후에 이 생각이 180도로 바뀔 수도 있지만, 1권의 템포와 구성을 감안한다면 3권까지 끌고 갈만한 동력이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만 하루 만에 읽어낼 정도로 페이지터너로서의 미미 여사의 필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쉽고 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사건과 인물들을 사실감 있게 묘사했고, 중학교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몰입도는 웬만한 연쇄살인 에피소드 못지않게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또한, 학생, 학부모, 교사, 경찰, 기자 등 다양한 계층의 방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촘촘하게 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뚜렷한 개성과 특징을 지닌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1권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 중 하나는 미미 여사가 궁극적으로 이 방대한 내용을 통해 하려는 얘기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미미 여사의 작품 뿐 아니라 여느 미스터리를 막론하고 진범 찾기 과정 속에는 독자들이 응원하거나 증오할 대상이, 즉 선과 악이 선명하게 구분되기 마련이고, 반전을 감안하더라도 대체로 캐릭터에 대한 애증은 큰 혼란 없이 유지되는 편이지만, ‘솔로몬의 위증은 그런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 이 캐릭터를 미워해야 하는 건지 응원해야 하는 건지, 이 캐릭터가 진범으로 드러났을 때 통쾌함을 느끼게 될지 찜찜함만 남을지, 사건의 진실이 어느 쪽으로 판명돼야 정의가 승리하는 건지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는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기적이기 짝이 없으며, 주관과 소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정당화에 급급한 성격일 뿐이며, 정의를 부르짖지만 남들은 동의해주지 않는 혼자만의 정의에 함몰되어 있기도 합니다.

누구도 응원할 수 없고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보니 오히려 지나치게 몰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지켜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결국 대단원에 이르러 드러날 진실이 무엇이든, 진범이 누구이든 간에 이 방대한 내용에 휩쓸렸던 모든 캐릭터들에게는 평생을 안고 가야할 상처만 남을 것만 같고, 독자들 역시 깊고 묵직한 독후감을 떠안아야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이르게 됐습니다.

 

2권의 소제목은 결의입니다. 1권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해결하겠어.”라는 다짐이 나온 점을 감안하면 아마 진실을 찾는 주인공들의 지난한 여정이 묘사될 것으로 보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실이나 진범, 사건의 전개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성장이나 변모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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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
길리언 플린 지음, 유수아 옮김 / 푸른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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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 캔자스의 시골 농장에서 일가족이 참혹하게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어머니 패티와 두 딸이 피살됐고 막내딸 리비는 겨우 목숨을 건졌으며 맏아들 벤은 가족 살해범으로 체포됩니다. 그렇게 24년이 흐른 어느 날, 리비는 벤의 무죄를 믿는 추종자들의 연락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사건과 관련된 물건을 넘겨주거나 자신들이 조사했던 내용을 토대로 수감 중인 벤과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주면 비용은 물론 사례까지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벤이 무죄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했던 리비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24년 전 참사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만남이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단서와 낯선 이름들이 등장하고 리비는 가족의 비극 뒤에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과거(사건 발생 당일)와 현재가 교차로 진행되는 방식이며 과거의 경우 어머니 패티와 오빠 벤의 챕터로 다시 나뉩니다. 필요에 따라 다른 인물들의 챕터가 간간히 등장하기도 하지만,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현재의 리비의 이야기에 맞춰 24년 전 사건 당일의 이야기가 맞물리듯 교차되면서 긴장감을 높입니다.

 

나를 찾아줘를 읽었을 때의 느낌도 그랬지만, 길리언 플린의 작품은 묵지근한데다 후유증을 길게 남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평범한 개인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참담함을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하게 파고들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비밀들과 그것이 남기는 충격 역시 억지스럽게 과장하거나 강조하기 보다는 태연스러울 만큼 담담하게 묘사해서 오히려 독자들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1980년대 중반 캔자스의 황량한 농장과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리비 가족에 대한 묘사, 오빠 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한 묘사, 리비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오랜 상처 일명 다크 플레이스’ - 에 대한 묘사, 그리고 현재의 그녀의 눈에 비친, 24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암울한 소도시의 황폐함에 대한 묘사 등 길리언 플린의 냉정하면서도 섬세한 문장들은 들여다봐서는 안 될 심연의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호기심을 동시에 전해주는 일종의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서사 때문에 속도감이 다소 떨어지고 대목에 따라 장황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4년 전의 진실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라는 선입견이 들기도 했고, 리비 역시 영민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캐릭터가 아니라 가난하고, 투명인간 같고, 스스로 삶을 폐쇄시킨 채 살아온 평균 이하의 여자이다 보니 읽는 내내 긴박한 미스터리보다는 고통스러운 진실 찾기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길리언 플린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에 이르러 본색을 드러내며 속도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리비가 가족의 비극의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저절로 빨라지고 길리언 플린만의 중독성 강한 매력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다크 플레이스2013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독자들도 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이 내뿜는 무겁고 어둡고 긴 후유증에 대한 호불호 때문이겠지만, 사건보다 캐릭터에 천착하는 작품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한번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에 동참해볼 것을 권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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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왕실 법정에 서다 제인 오스틴 미스터리 1
스테파니 배런 지음, 이경아 옮김 / 두드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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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이소벨의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카그레이브 백작의 저택을 찾은 제인 오스틴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의 주요 목격자이자 참고인이 되어 얼떨결에 사건에 휘말립니다. 더구나 절친 이소벨과 그녀가 흠모하는 피츠로이 페인이 용의자로 지목되자 제인은 그들의 결백을 확신하며 관계자들에 대한 은밀한 탐문을 시작합니다. 무도회가 열린 스카그레이브 가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꼼꼼히 조사하지만 막연한 심증만 늘어갈 뿐 명쾌하게 걸려드는 단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소벨과 피츠로이 페인은 귀족의 범죄를 다루는 왕실법정으로 소환되고, 제인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디어 왕실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진실규명의 기회를 동시에 맞이합니다.

실존했던 작가를 픽션 속 주인공으로 설정한 특이한 형식, 19세기 초반의 영문학을 들여다보는 듯한 고전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연쇄살인의 진범 찾기가 함께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가 젊은 실학자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연쇄살인 미스터리를 선보인 바 있지만, ‘제인 오스틴, 왕실 법정에 서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사랑받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삶 자체를 픽션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을 뿐 아니라 원탑 주인공으로서 손색없는 활약을 부여함으로써 여자 셜록 홈즈라 불릴만한 당대의 탐정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말하자면 팬픽(fan fiction)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오만과 편견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할 정도로 오래 전에 읽었고, ‘엠마는 영화로만 보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제인 오스틴이 스테파니 배런을 통해 우리 곁에 온 게 틀림없다.” 라는 미국 소설가의 평에 전적으로 공감할 정도로 마치 제인 오스틴 본인이 쓴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스터리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순간순간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면서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고, 필요할 때마다 상대방의 맹점을 야무지게 톡 쏘는 듯한 영국식 위트와 유머가 살아있으며 남녀 관계에 관한 한 요즘과는 확연히 다른 고전 영문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은 원작의 맛을 잘 살려낸 번역가의 힘에도 크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미스터리로서의 장점도 잘 갖추고 있는데, 무엇보다 편지와 인편 외에는 달리 통신 수단이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덕분에 오롯이 탐정의 명민한 두뇌와 부지런한 발품에 의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장점은 셜록 홈즈와 그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 탐정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엽기적인 잔혹함이나 롤러코스터를 탄 듯 현란한 구성은 없지만 고전적인 추리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묵직하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만으로 독자들을 열광시켰던 그들의 활약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고전적인 미덕만 갖춘 작품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후반부는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이 가득하고, 초반부의 예열을 거쳐 서서히 가속이 붙는 이야기의 전개 속도도 꽤나 스피디합니다. 이 작품이 제인 오스틴 시리즈의 첫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후 발간될 시리즈를 통해 셜록 홈즈라는 남자에 필적하는 여자 탐정 제인 오스틴의 탄생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채로운 구성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매력적인 주인공까지 더해진 덕분에 모처럼 즐거운 책읽기의 시간을 선사해준 제인 오스틴 시리즈가 한국에도 계속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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