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케이스 속의 소년 니나보르 케이스 (NINA BORG Case) 1
레네 코베르뵐.아그네테 프리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이색적인 질감과 다양한 캐릭터로 무장한 북유럽 스릴러의 관심 목록에 새롭고 독특한 여성 트리오가 추가됐습니다. 레네 코베르뵐과 아그네테 프리스는 여성 듀오 스릴러 작가라는 보기 드문 명함을 내밀었고,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난민과 불법체류자를 위해 일하는 간호사 니나 보르는 웬만한 액션 스릴러 여주인공 못잖은 활약을 펼칩니다.

 

작품 속에는 네 명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아이의 유괴를 의뢰한 부도덕한 남자, 의뢰받은 유괴를 성사시켰으나 아이는 사라지고 돈도 받지 못하게 된 남자, 뜻하지 않게 유괴된 아이를 맡게 된 여자, 그리고 유괴된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여자.

네 명 모두 평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삶을 사는 인물들입니다. 유괴를 의뢰한 자는 그릇된 이기심으로 인해, 유괴를 의뢰받은 자는 탐욕으로 인해 타인의 삶을 파괴시키거나 무너뜨립니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유년의 불행을 되밟으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지고, 아이를 맡게 된 여자는 오로지 신념 하나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위험을 감수합니다.

 

작품 속 공간은 크게 덴마크와 리투아니아로 나눠지는데, 돈과 직업을 위해 부유한 이웃나라로 흘러들어온 동유럽인들이 겪는 참상과 그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부유한 이웃나라들의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간 뿐 아니라 인물들도 두 나라로 나뉘는데 그 대비가 무척이나 극단적입니다.

유괴를 의뢰한 자와 아이를 맡게 된 여자는 같은 덴마크인이지만, 전자가 동유럽 사람들을 하찮은 물건이나 소모품처럼 여기는 반면 후자는 그들을 동정하고, 보호하고, 간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유괴를 실행한 자와 아이를 잃은 여자는 같은 리투아니아인이지만, 한 사람이 가난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악의 행보를 걷게 된 반면 한 사람은 부유한 이웃나라 사람은 물론 동족에게까지 착취당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유괴의 목적을 알게 된 뒤 새삼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과 탐욕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그로 인해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이 어디까지, 얼마나 파괴될 수 있는지 자문해봤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만한 일이었고, 특히 어린 아이의 생명이 사건의 중심에 놓여있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 씁쓸함과 혐오스러움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인 니나 보르가 형사나 탐정처럼 전문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두 아이의 엄마이자 (평범하진 않지만) 가정주부였던 점도 이야기의 긴장감과 사실감을 높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위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아이를 손에서 놓지 않는 니나의 행보는 모성애와 간호사로서의 헌신적인 태도가 아니라면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은 행동들입니다.

 

인터넷 서점 소개글에 휴머니즘 스릴러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마 이 작품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설명한 문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이를 잃은 여자와 아이를 맡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두 작가는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악인들을 위해서조차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수준에서 어쩔 수 없는 사연을 대변해줍니다. 덕분에 단순한 선의 승리, 악의 구축이라는 구도에 머물지 않고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여러 종류의 캐릭터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미덕이나 장점 못잖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 때문에 페이지가 좀처럼 넘어가지 않은 점입니다. 중후반에 이르러 사건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런 점은 많이 개선되지만, 초중반의 인물과 상황 소개에서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보이려고 했던 것인지 적절치 못하거나 문맥에 안 맞는 어휘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너무 힘을 주느라 불필요한 포장을 이중삼중으로 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 문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그냥 넘겨버리기도 했습니다.

 

니나 보르 시리즈 1’이라는 부제대로 이 작품의 엔딩은 새로운 사건의 발발을 예고하며 마무리됩니다. 주인공 니나 보르가 느닷없이 덴마크전천후 슈퍼우먼으로 변신하지만 않는다면 그녀의 두 번째 활약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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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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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이도 다케루 스타일의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기대하고 읽어나가다가 ? 이거 소설 맞아?” 하며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특이한 이력을 지닌 우루시하라 다다스라는 노인클리닉 원장이 1인칭 서술을 통해 자신이 고안한 A케어의 증례를 설명하는, 말하자면 르포 형식의 서술이 중반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르포가 마무리되고 편집부 주라는 소제목으로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사전 정보 없이 읽을 경우 성격 급한 독자는 중반에 이르기도 전에 책을 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의 원제는 폐용신(廢用身)’입니다. 폐용신은 말 그대로 손상을 입어 영구적으로 불구가 된 신체, 특히 사지(四肢)를 뜻합니다. 우루시하라의 A케어는 폐용신에 대한 혁신적인 치료 방법을 뜻하는데, 워낙 과격하고 충격적인 요법이라 대외적으로 알리거나 발표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원장으로 있는 클리닉에서만 실시되고 있습니다. 시술을 받은 노인들이 폐용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효과까지 보이자 우루시하라의 A케어는 클리닉 내의 노인들과 스탭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클리닉 밖으로 소문이 퍼지고 충격적인 폐용신 요법에 관심을 가진 매스컴이 달려들면서 사태는 급전됩니다. A케어의 긍정적인 효과는 제쳐두고 비인간적인 시술 형태만 집요하게 파고든 탓에 우루시하라의 A케어는 순식간에 전국적인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일부 매스컴이 우루시하라의 특이한 이력들까지 들춰내면서 비난을 거듭하자 클리닉 경영자는 우루시하라에게 클리닉 폐쇄를 통보하기에 이르고 얼마 후우루시하라는 종적을 감춥니다.

 

우루시하라가 출간을 위해 준비했던 원고가 중반까지의 르포 형식의 서술입니다. 심각한 일본의 노인 의료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루시하라가 제시한 A케어는 동기나 방법, 효과에 있어서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 못했던 대안을 제시합니다. 처음엔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기록을 찬찬히 읽다보면 이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A케어에 대한 믿음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벌떼같이 달려든 매스컴은 당연히 주인공을 못 살게 구는악당처럼 보이고, 우루시하라의 A케어가 제대로 인정을 받아 해피한 엔딩이 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반부터 이어지는 편집자(우루시하라의 원고를 출간하려 했던)의 주석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과연 A케어가 폐용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노인들에게 효과적인 요법인가? 우루시하라의 진정성은 그가 집필한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선하고 인도적이기만 했는가? 의사로서 특이했던 그의 이력을 보면 매스컴의 공격이 악의로 가득찬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사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A케어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됩니다. 잠든 채 편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적잖은 노년의 삶이 치매, 뇌졸중, 전신마비 등으로 얼룩집니다. 특히 내 몸에 달린 사지가 폐용신이 되었을 때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루시하라의 A케어는 심각한 고령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노인 의료문제의 대안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가는 A케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런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일종의 경고 또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동시에 독자들에게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A케어를 받아들이겠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이도 다케루가 메디컬과 엔터테인먼트를 잘 결합한 미스터리를 지향했다면, 구사카베 요는 좀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문제, 특히 당면한 노인 의료문제에 초점을 맞췄고, 결과적으로 A케어는 소설의 형식을 빌린 르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 때문에 리얼리티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후반부로 갈수록 우루시하라 개인의 과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A케어를 다뤄온 앞부분의 내용을 무색하게 만든 점입니다. , 너무 앞서나간 나머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현명한 대안으로서의 A케어가 아니라, 한 개인의 특이한 성격 덕분에 우연히 또는 불행하게 탄생한 A케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어쩌면 작가가 작품의 성격이 너무 르포 쪽으로 흐른 나머지 소설의 맛을 가미하기 위해 무리하게 설정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기대했던 미스터리는 아니었지만 독특한 형식과 충격적인 내용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세 명을 죽이고서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의사가 된다.”라는 내용을 담은 구사카베 요의 또 다른 작품 파멸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됐습니다. 물론 요약된 줄거리를 보면 형식과 내용 모두 ‘A케어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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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 톰의 집에 어서 오세요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5
벤 엘튼 지음, 박슬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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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청률과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아치울 피핑 톰 프로덕션의 대표 제럴딘 헤네시는 리얼리티 쇼 하우스 어레스트의 세 번째 시즌을 런칭합니다. 10명의 남녀가 9주 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함께 생활하면서 매주 한 명씩 탈락자를 선정하는 전형적인 엿보기 리얼리티 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선정성을 무기로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방송 27일째 날, 쇼는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참가자 한 명이 참혹하게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는 여럿이지만 아무도 범인의 얼굴을 못 봤고, 참가자 모두 어정쩡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어서 수사는 초기부터 난항을 겪습니다. 이스트서식스의 콜리지 경감은 부하인 후퍼, 퍼트리샤와 함께 촬영 테이프를 확인하며 사건 당일의 행적, 참가자들 간의 관계 등을 포착하려 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아내지 못합니다. 특히 추가 살인을 암시하는 살인예고장이 발견되면서 초긴장 상태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계속 방송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관객과 카메라 앞에서 우승자를 발표하는 생방송 도중 아무도 예상 못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진실이 밝혀집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은밀하고 다양한 코드들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관음증을 의미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을 전면에 내세웠고, 빅 브라더로 군림하는 미디어, B급 정서로 가득한 캐릭터들, 물샐 틈 없는 밀실살인 등 일단 포장만 봐도 야릇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설정들이 가득합니다.

리얼리티 쇼 도중 일어난 살인사건이라는 독특한 설정에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이 작품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엿보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엿보기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독자의 심리를 잘 활용합니다. 가볍고 선정적인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음란하고 위험한 쇼의 목격자가 돼라!”라고 유혹합니다.

 

저 역시 어느 지점부터인가 쇼에 열광하는 집단관음중 환자 중의 한 명, 또는 쇼에 참가한 열 명 중의 한 명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건 발생 이후 리얼리티 쇼와 진범 찾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중독성은 더 강해졌습니다. 살아남아 우승자가 되어 50만 파운드와 지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될 기대감과 누가 범인일까? 혹시 내가 두 번째 희생자는 아닐까?’라는 공포심을 쇼의 참가자들과 100% 공유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내밀한 심리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작가의 능력은 TV, 연극, 영화에서 연출자와 연기자,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이력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이야기의 전개나 구성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작가는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피살된 사람이 누구인지,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내내 누가 살해당할 만한 캐릭터인지, 누가 잔혹한 살인마가 될 만한 캐릭터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간 순의 배열이 아니라 현재 수사 시점과 과거 촬영 시점을 뒤죽박죽으로 섞음으로써 긴장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이런 수준의 방송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전라 노출은 기본이고 출연자 간의 성관계를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으며, 소위 비속어라 불리는 욕들이 생방송 중에도 난무합니다. 사실과 관계없이 흥미 위주의 편집을 통해 출연자를 쓰레기나 악인을 만들기도 하고, 지고지순한 순정남녀나 인기절정의 매력남녀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날 촬영한 분량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시청자들은 이런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집단적 관음증에 열광하며 쇼에 몰입합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장면들과 비속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표현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 다루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거나 선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우울한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빅브라더로 자리 잡은 인터넷과 미디어, 그에 호응하는 무뇌아에 다름 아닌 개인들, 탈정치화와 탈사회화를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권력의 실체 등 행간에 숨은 명백한 메시지들이 선정적인 포장에 가려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가장 아쉬운 부분은 우유부단 또는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찰 캐릭터들입니다. 경찰들 사이의 세대 간 대결 구도는 흥미롭게 보였지만, 본연의 역할인 수사에 있어서는 분량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작품 평가에서 별 하나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밀실살인의 진범 찾기 과정은 지루하거나 뜬금없는 부분들이 눈에 자주 띄었고, 특히 마지막 진범 지목 퍼포먼스는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중반부까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출연진 간의 긴장과 갈등이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초반부의 지루함과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만 잘 견뎌낸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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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린우드 바클레이 지음, 신상일 옮김 / 해문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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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을 맞이한 글렌과 실라, 그리고 딸 켈리. 하지만 그날 밤, 실라는 만취한 채 차 안에서 정신을 놓고 있던 중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와 부딪혀 즉사합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글렌과 딸 켈리는 심각한 패닉에 빠집니다. 개축 중이던 고객의 집이 전기 설비 불량으로 전소된 일로 글렌의 회사는 위기에 처하고, 딸 켈리는 실라의 사고로 인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에 이릅니다. 원수처럼 지내던 장모는 이 기회에 손녀 켈리를 데려가려고 하고, 실라의 절친이었던 앤 부부와 벨린다 부부에게까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깁니다. 그러던 중 글렌은 한 사설탐정으로부터 실라와 그녀의 절친들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실라의 소지품과 관련된 협박까지 받게 되자 글렌은 실라의 죽음이 단순한 음주운전 사고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량(500페이지 내외)인데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과 에피소드 덕분에 오후 한나절 만에 마지막까지 달렸습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가족 지키기 스릴러의 원작으로 손색없을 만큼 스피드와 재미, 반전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글렌 가버를 지켜보고 있으면 나쁜 것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아내의 의문의 죽음, 회사의 위기, 천문학적 금액의 소송, 딸 켈리 방을 향한 괴한의 총격 등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이라도 겪기 어려운 일들을 불과 몇 주 사이에 집중포화를 맞듯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평화롭던 가족은 해체되고,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자들의 고통은 깊어질 뿐입니다.

 

이별 없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사고역시 린우드 바클레이가 가족을 중심에 놓고 풀어간 이야기입니다. 가족이 주인공인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대체로 재미와 불편함을 동시에 주는 편이지만, 이렇게 쉴 새 없이 연타를 맞는 주인공을 보면 불편함 쪽이 훨씬 더 배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제대로 된 악에 대한 응징이 없다면 책을 다 읽고도 찜찜할 것 같다는, 즉 주인공이 현실성이 떨어지는 슈퍼맨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악을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이 맺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사고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자 가장 취약한 고리입니다. 글렌 가버는 형사도, 탐정도 아닌 평범한 건축회사 대표입니다. 무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두뇌 회전이 뛰어난 지략가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리와 탐문은 언제나 제대로 갈 길을 찾아갑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실함과 근면함까지 갖춘 그는 인간적 슈퍼맨임에 분명합니다.

 

반면, 그와 동시에 그의 지나치게 현명한 행보가 눈에 거슬릴 때가 종종 있는데, 작가가 너무 친절하고 쉽게 글렌이 나아갈 길을 설정해준 탓입니다. 여기 가면 단서가 기다리고 있고, 저기 가면 증거가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방이 알아서 심증을 굳힐만한 진술을 흘려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면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 힌트를 건네줍니다. 그러다 보니 글렌은 본의 아니게 점점 진짜 슈퍼맨이 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인가 이미 뛰어난 탐정이 되어 있는 그를 보며 묘한 거부감과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을 제외하면 사고는 대체로 잘 읽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단순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에피소드들은 다채롭게 뻗어나갑니다. 억지로 갖다 붙인 설정이 아니다 보니 사실감과 설득력은 자연스레 얻어집니다. 또한 짧다고 느껴질 만큼 챕터들을 세분화 해놓았는데, 이런 구성 덕분에 속도감과 긴장감이 상승될 수 있었습니다.

 

나름 아쉬움도 있었지만, 린우드 바클레이의 필력에는 대체로 만족한 편이었고,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 두 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주는데도 충분했습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만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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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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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지역의 한 스키장 어딘가에 감춰진 치명적인 탄저균을 찾기 위해 아들과 함께 도쿄에서 달려온 대학병원 주임연구원 구리바야시는 광활한 스키장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된 안전요원 네즈 덕분에 가까스로 탄저균을 찾아냅니다. 정체불명의 미행자도 따돌렸고, 경찰에 알리지 않고도 탄저균을 손에 넣은 구리바야시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안심하지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금세 얼굴에 핏기를 잃고 맙니다. 실은 해결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탄저균의 행방마저 모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키장 슬로프에 폭탄을 묻어놓은 범인과 스키장 스태프들의 대결을 다룬 백은의 잭에 이어 히가시노 게이고가 두 번째로(제가 알기로는) 스키장을 무대로 삼아 집필한 작품입니다. 스키장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새로 등장한 인물도 많지만 백은의 잭에서 활약했던 네즈 쇼헤이와 세리 치아키가 등장하고 있어서 네즈 시리즈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은의 잭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점은 광활한 스키장에서 위험물질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스키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스키어 또는 보더들의 질주가 자주 묘사됩니다. 덕분에 독자 역시 함께 속도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활자나 문단 간격이 크고 넓은데다 종이도 비교적 두텁게 느껴진 이유도 있지만, 이런 속도감 덕분에 반나절 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단선적이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가벼워보였던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식의 스키장 수색에 할애되어 있어 미스터리를 읽는 긴장감보다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캐릭터 면에서도 탄저균을 감춘 범인이나 그것을 되찾으려는 주인공들이나 딱히 대립구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고, 스키장 온천마을의 가족이야기는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아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엔터테인먼트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복잡하고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점수를 못 얻겠지만, 후반 막판에 이르러 두세 번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덕분에 히가시노 특유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가볍게 머리를 식히거나 속도감 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분에게는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책읽기가 되어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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