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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 톰의 집에 어서 오세요 ㅣ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5
벤 엘튼 지음, 박슬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시청률과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아치울 피핑 톰 프로덕션의 대표 제럴딘 헤네시는 리얼리티 쇼 ‘하우스 어레스트’의 세 번째 시즌을 런칭합니다. 10명의 남녀가 9주 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함께 생활하면서 매주 한 명씩 탈락자를 선정하는 전형적인 엿보기 리얼리티 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선정성을 무기로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방송 27일째 날, 쇼는 최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참가자 한 명이 참혹하게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는 여럿이지만 아무도 범인의 얼굴을 못 봤고, 참가자 모두 어정쩡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어서 수사는 초기부터 난항을 겪습니다. 이스트서식스의 콜리지 경감은 부하인 후퍼, 퍼트리샤와 함께 촬영 테이프를 확인하며 사건 당일의 행적, 참가자들 간의 관계 등을 포착하려 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아내지 못합니다. 특히 추가 살인을 암시하는 살인예고장이 발견되면서 초긴장 상태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계속 방송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관객과 카메라 앞에서 우승자를 발표하는 생방송 도중 아무도 예상 못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진실이 밝혀집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은밀하고 다양한 코드들이 한꺼번에 버무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관음증을 의미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을 전면에 내세웠고, 빅 브라더로 군림하는 미디어, B급 정서로 가득한 캐릭터들, 물샐 틈 없는 밀실살인 등 일단 포장만 봐도 야릇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설정들이 가득합니다.
리얼리티 쇼 도중 일어난 살인사건이라는 독특한 설정에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이 작품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엿보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엿보기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독자의 심리를 잘 활용합니다. 가볍고 선정적인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음란하고 위험한 쇼의 목격자가 돼라!”라고 유혹합니다.
저 역시 어느 지점부터인가 쇼에 열광하는 집단관음중 환자 중의 한 명, 또는 쇼에 참가한 열 명 중의 한 명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건 발생 이후 리얼리티 쇼와 진범 찾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중독성은 더 강해졌습니다. 살아남아 우승자가 되어 50만 파운드와 지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될 기대감과 ‘누가 범인일까? 혹시 내가 두 번째 희생자는 아닐까?’라는 공포심을 쇼의 참가자들과 100% 공유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내밀한 심리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작가의 능력은 TV, 연극, 영화에서 연출자와 연기자,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이력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이야기의 전개나 구성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작가는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피살된 사람이 누구인지,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내내 누가 살해당할 만한 캐릭터인지, 누가 잔혹한 살인마가 될 만한 캐릭터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간 순의 배열이 아니라 현재 수사 시점과 과거 촬영 시점을 뒤죽박죽으로 섞음으로써 긴장감과 호기심을 증폭시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이런 수준의 방송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전라 노출은 기본이고 출연자 간의 성관계를 조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으며, 소위 비속어라 불리는 욕들이 생방송 중에도 난무합니다. 사실과 관계없이 흥미 위주의 편집을 통해 출연자를 쓰레기나 악인을 만들기도 하고, 지고지순한 순정남녀나 인기절정의 매력남녀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른 날 촬영한 분량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시청자들은 이런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집단적 관음증에 열광하며 쇼에 몰입합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장면들과 비속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표현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 다루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거나 선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우울한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빅브라더로 자리 잡은 인터넷과 미디어, 그에 호응하는 무뇌아에 다름 아닌 개인들, 탈정치화와 탈사회화를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권력의 실체 등 행간에 숨은 명백한 메시지들이 선정적인 포장에 가려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가장 아쉬운 부분은 우유부단 또는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찰 캐릭터들입니다. 경찰들 사이의 세대 간 대결 구도는 흥미롭게 보였지만, 본연의 역할인 수사에 있어서는 분량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작품 평가에서 별 하나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밀실살인의 진범 찾기 과정은 지루하거나 뜬금없는 부분들이 눈에 자주 띄었고, 특히 마지막 진범 지목 퍼포먼스는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중반부까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출연진 간의 긴장과 갈등이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초반부의 지루함과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만 잘 견뎌낸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