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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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 독일의 소도시 숀가우에서 소년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들의 어깨엔 하나같이 비너스의 상징이자 마녀의 상징인 표식이 새겨져 있었고, 그로 인해 숀가우의 산파 마르타 슈테홀린이 범인이자 마녀로 체포되어 투옥됩니다. 하지만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과 청년 의사 지몬 프론비저는 마르타를 마녀로 몰아가려는 숀가우의 권력층과 성난 군중들과는 달리 소년들을 살해한 범인이 따로 있다고 판단합니다. 더불어, 살해당한 소년들과 함께 어울렸던 두 명의 소녀가 실종 상태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사형집행인으로서 권력층의 지시에 무조건 승복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야콥 퀴슬은 딸 막달레나, 청년 의사 지몬 등과 함께 위험한 진범 찾기에 뛰어듭니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데다 사형집행인과 그의 딸이 주인공이자 타이틀 롤까지 맡아서인지 읽기 전부터 여러 가지로 호기심이 많이 생겼던 작품입니다. 주술과 마녀사냥이 만연하던 시절의 인간의 잔혹함과 원시성, 대를 이어 합법적인 살인이라는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형집행인의 운명,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사형집행인의 딸과 청년 의사의 사랑,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추악한 인간의 탐욕이 낳은 참혹한 연쇄 살인 등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져 한 편의 독특한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언뜻 사형집행인 하면 우리 역사 속의 망나니를 연상하게 되지만, 야콥 퀴슬은 사형집행인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민간요법을 숙지한 영리한 캐릭터입니다. 망나니와 마찬가지로 사형집행인 역시 천민 취급을 받는 처지였지만, 적잖은 숀가우의 주민들이 의사보다 더 의지하기도 하는 특이한 위치에 있습니다. 또한 강철 같은 체력과 뛰어난 전투력에 기인하는 카리스마 덕분에 숀가우의 권력자들마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주인공으로서의 극성(劇性)과 미덕을 모두 갖춘 캐릭터입니다.

 

누명을 벗기고, 탐욕을 징벌하며, 진범을 찾는심플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낯설지만 독특한 캐릭터들, 정해진 시간 안에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구성, 적재적소에 배치된 공포의 요소들(마녀사냥, 살인과 고문, 납치와 추격전 등)로 인해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느슨하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악당들의 캐릭터와 전략입니다. 악당들의 정체는 딱히 충격이나 반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심했고, 그들이 숀가우를 혼란에 빠뜨린 이유나 목적을 위해 설정한 전략은 밋밋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은 피땀 흘리며 열심히 뛰고 있는데 정작 상대할 악당들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도, 탐욕의 정도가 심오(?)하지도 않아서 주인공들의 목숨까지 건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흥미가 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형집행인이라는 캐릭터와 마녀사냥이라는 코드가 읽기 전의 기대감과 읽은 후의 만족감을 충족시킨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안 그래도 야콥 퀴슬과 막달레나, 지몬이 등장하는 시리즈가 나올 법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속지를 보니 세 편의 후속작이 더 나왔다고 합니다. 조만간 국내에 사형집행인시리즈 전권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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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에 본 것들
재클린 미처드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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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와 로브, 줄리엣은 밤에만 외출할 수 있는 XP(햇빛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색소성 건피증) 환자입니다. 줄리엣의 리드로 파르쿠(야마카시와 유사한 익스트림 스포츠)에 빠져든 세 사람은 밤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앨리는 어느 건물의 창을 통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후 세 사람의 주변에서는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심지어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어느 날, 앨리는 자신이 창을 통해 목격했던 남자를 축제장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남자의 정체까지 파악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앨리는 자신 뿐 아니라 절친인 로브와 줄리엣까지 커다란 위험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릴러라는 장르에 여러 가지 코드들이 융합되면서 무슨무슨 스릴러라고 신조어처럼 칭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면에서 굳이 이 작품의 카테고리를 설정한다면 아마 성장 스릴러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2013년에 읽은 스페인 작가 마이테 카란사의 독이 서린 말이나 게임 스릴러에 가까운 우르술라 포츠난스키의 에레보스가 비슷한 범주였지만, ‘우리가 밤에 본 것들은 좀더 순수한 성장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17살인 세 명의 남녀 주인공 모두 희귀병을 앓고 있다 보니 메디컬 스릴러의 코드도 함께 버무려져 있어서 캐릭터는 물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미덕은 희귀병에 걸린 주인공들과 그들의 가족, 이웃들이 병에 굴복한 채 무기력하고 침체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완강히 저항하면서, 때로는 선선히 받아들이면서 병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XP라는 병명을 처음 접한 일본 소설 태양의 노래’(덴카와 아야)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파르쿠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주인공들의 긍정적인 태도나 그들의 일탈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응원을 보내주고 싶을 만큼 밝고 건강해 보입니다.

물론, ‘주간형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깊은 상처와 아픔 역시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 사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할 것이다.”라는 평을 남긴 것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스릴러로서의 구조는 그다지 탄탄해 보이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이 탐정이나 형사처럼 탐문과 추리를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이 우연한 목격 또는 당사자의 고백 등으로 이뤄지고 있고, 특히 후반부에 가서는 앞서 벌여놓은 이야기들을 제대로(일반적인 의미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스릴러보다는 성장에 좀더 신경을 쓴 엔딩을 원했던 것 같고, 그 결과 보편적인 스릴러의 공식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이해는 되지만, 아쉬움이 남는 엔딩으로 느껴질 소지가 다분하다고 보입니다.

 

화려한 이력에 비해 재클린 미처드의 한국 출간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릴러 전문 작가는 아닌 것 같지만, “결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평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녀의 작품들이 국내에 좀더 많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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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3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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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참 다양합니다. 한여름의 피서지, 내쳐진 자의 유배지, 고독을 원하는 자의 은둔지, 도망자의 은닉처 등등. 하지만 이런 느낌들은 대부분 섬 외부인이 갖게 되는 것들이고,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해서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삶을 옥죄는 감옥처럼 답답해서 틈만 나면 탈출하고 싶은 곳이거나...

 

망향은 세토 내해(內海)에 자리 잡은 섬 시라쓰나지마를 배경으로 이런 극단적인 느낌을 가진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여섯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불행한 기억만 간직한 채 야반도주하듯 섬을 도망쳤던 사람,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한번 떠난 적이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낳아준 섬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 등 시라쓰나지마에서 삶을 얻은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동정 받거나 일방적으로 미움 받는 캐릭터는 아닙니다.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대로, 도망친 사람은 도망친 사람대로 다들 타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나름만의 사연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동정하거나 미워하다가도 이면의 사연과 이유를 알고 나면 그들의 선택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미나토 가나에답게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살인, 사고, 병사 등 여러 가지 죽음이 등장하지만,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안타깝거나 애틋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섬에서의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함과 뭉클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통 단편집의 표제는 수록작 가운데 대표작으로 삼기 마련인데, ‘망향이라는 제목은 수록작의 제목이 아니면서도 실려 있는 여섯 작품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이후에 새삼 눈길이 가는 제목이었습니다. 마치 등장인물 모두가 나란히 서서 멀리 바다 위에 떠있는 시라쓰나지마를 바라보는 그림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랄까요?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면모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고, 이틀 반나절 정도, 따뜻한 책읽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더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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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저어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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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흥미롭게 읽은 덕분에 진작부터 그의 신작을 기대했는데, 스파이 스릴러(또는 첩보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통해 다시 만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에서 보여준 호러작가로서의 진면목과 지푸라기~’에서 만끽했던 탁월한 디테일 라이터로서의 진가가 과연 스파이나 첩보라는 코드들과 잘 맞아떨어질까 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침저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의 반전과 곳곳에 설치된 트랩들 때문에 줄거리를 정리하기가 쉽진 않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일본의 기밀을 중국에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 거물 스파이 침저어 맥베스 - 를 잡기 위해 경시청 외사 2과에 수사팀이 꾸려집니다. ‘고독한 솔로 스타일인 후와는 낙하산으로 내려온 도쓰이의 의견에 동조하며 수사를 진행하고, 후배 와카바야시와 함께 도쿄와 베이징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조금씩 캐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할수록 배후는 점점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파헤쳐진 진실은 쉴 새 없이 후와와 와카바야시의 뒤통수를 두들기며 어딘가 석연치 않은, 또는 불온하기까지 한 음모의 기운을 내뿜습니다. 더구나 수사가 중대한 국면을 맞이할 즈음 살인과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후와를 비롯한 모든 관련자들은 혼란과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스파이 스릴러 치곤 길지 않은 분량(346p)이라 읽기 전부터 아쉬운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소네 게이스케는 적잖은 규모의 이야기를 불필요한 사족들 없이 깔끔하게 구현해냈습니다. 화려하기보다는 소탈하다고 할 정도로 평이한 문장들, 쉽게 읽히면서도 허투루 넘어가게 만들지 않는 치밀한 구성, 그러면서도 독자들의 기대를 번번이 무너뜨리는 반전 등 흔히 스파이 스릴러나 첩보 미스터리 하면 떠오르는 전형성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그만의 개성을 잘 살려냈습니다.

 

또한 캐릭터 하나하나에 디테일한 사실감을 부여하는 소네 게이스케의 필력 덕분에 주인공은 물론 말단 조연에 이르기까지 생동감 있는 활약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후와와 와카바야시도 매력적이지만, 이른바 외사 2과에 일가(一家)를 거느린 보스형 캐릭터 고미, 그런 고미를 추종하는 소리마치, 낙하산 도쓰이, 소심한 과장 안도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자신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활약합니다.

 

아쉬운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 조금은 부족한 개연성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가 여기저기 설치한 트랩 가운데 독자들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것들도 많았지만, 어떤 것들은 뜬금없이, 어떤 것들은 억지스럽게 설치된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느껴지는 지점도 있고, 좀 심하게 말하면 (극히 일부지만) ‘말장난이라는 느낌을 받은 지점도 있습니다.

또한, 앞서 불필요한 사족들 없이 깔끔하게라는 표현을 썼는데, 때론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이야기를 건조하게 만든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적당히 먼지도 쌓여있고, 흐트러진 물건들도 있어야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침저어는 너무 깨끗하게 잘 닦인 대리석 바닥 같은 느낌이 더 강한 작품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소네 게이스케의 작품이라 반가움이 컸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는 지푸라기~’처럼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끼다 보니 다음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품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옥의 티라고 하기엔 오타가 꽤 많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와카바야시는 와카바야’, ‘아카바야시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고, 심지어 같은 문장이 반복 인쇄된 경우(262p 하단 세 줄 ~ 263p 상단 첫 줄)도 있습니다. 출간 전 마지막 마무리가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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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악마
모 헤이더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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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난징대학살을 다룬 책을 읽었던 그레이는 10년이 지난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스충밍이라는 중국인 교수가 대학살과 관련된 필름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무작정 일본으로 찾아갔지만 필름은커녕 인터뷰조차 거절당합니다. 땡전 한 푼 없던 그레이는 우연히 만난 제이슨이라는 정체불명의 미국인 덕분에 숙소와 클럽 호스티스 일자리를 구합니다.

하지만 클럽에서 만난 후유키라는 야쿠자 보스 덕분에 스충밍과의 접점이 생깁니다. 만남을 거부하던 스충밍은 그레이가 후유키를 접대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곤 특이한 요구를 합니다. , 노년의 후유키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구체적으로는 그가 복용하는 약의 비밀을 캐온다면 그녀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그레이는 후유키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를 통해 조금씩 약의 비밀에 다가가지만, 그것이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만큼 위험천만한 미션이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레이가 후유키의 약의 비밀과 그의 은밀한 과거를 좇는 이야기와 함께 스충밍이 1937년 난징대학살의 현장을 헤쳐나온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아내 슈진의 충고를 무시하고 국민당에 대한 믿음만으로 난징에 남기를 고집했던 그에게 난징의 악마는 평생 잊히지 않을 화인(火印)을 남겼습니다.

 

전무후무한 희생자와 그 참혹함으로 인해 일본이 저지른 만행 가운데에서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최악의 사건으로 알려진 난징(南京) 대학살은 영화나 소설, 다큐 등을 통해 수없이 조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르에 관계없이 그것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여전히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모 헤이더의 난징의 악마1937년 당시의 상황을 정면으로 다뤘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현재(1990)와 과거(1937)를 오가는 구성,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영국 여성의 시점, 충격적인 엔딩을 품은 스릴러 형식 등 독특한 설정을 통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그날의 상처를 철저히 개인의 시각에서 들여다봅니다.

 

출간 직후부터 이곳저곳에서 호평이 이어졌고,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도 2013년 베스트10에 꼽히는 등 스릴러 마니아들에게는 필독 목록에 오른 작품이라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오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쉬운 부분도 그만큼 많았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잔혹함이나 선정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일기 형식의 담담한 기록과 스릴러 형식의 진실 찾기로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그레이가 좇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여느 작품 못잖은 잔혹함이 묘사되지만, 작품 전반의 기조는 기존의 난징대학살을 다룬 작품들에 비해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시선 덕분에 오히려 당시의 공포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스충밍의 일기와 그레이의 스릴러를 교차시킨 구성은 20대의 스충밍과 70대의 스충밍 사이에 존재하는 세월만큼이나 큰 간극과 변화를 그레이의 눈을 통해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 이상의 긴장감과 사실감을 전해줍니다.

 

또한, 거창한 이념이나 역사에 대한 일방통행식 설명보다는 그날을 살아온, 또 그날의 진실을 좇는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좀더 사실감을 부여하고, 공감할 여지를 준 점도 호평의 한 이유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물론 규모에 관계없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지 이념의 옳고 그름 따위는 아니었습니다. 스충밍의 일기가 일본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면 이 작품의 미덕은 상당부분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 슈진과 그녀의 뱃속에 있는 2세의 생존을 갈망하는 절절한 묘사가 학살의 공포를 더욱 실감나게 해준 것입니다.

 

작품성과 대중성이 잘 버무려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던 첫 번째 이유는 주로 그레이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어린 시절 우연히 접한 책 한 권으로 인해 난징대학살에 10년 가까이 집착했으며,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찾아와 스충밍에게 필름을 요구한다는 도입부부터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는, 그녀가 도쿄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입니다. 제이슨은 도쿄에서 처음 만난 노숙자그레이에게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우연한 만남이나 과도한 친절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의 캐릭터와 성적 취향이 그레이의 그것과 마치 약속된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점은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이었습니다. 차라리 스충밍이 그레이를 이용하기 위해 제이슨을 보냈다는 설정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일부 조연은 불필요하게 범상치 않은 캐릭터로 그려지거나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그레이와 스충밍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적시에 전달해줍니다.

 

하지만, 우연과 작위의 절정은 하필 그레이가 일하는 클럽의 단골인 야쿠자 보스 후유키입니다. 그레이가 제이슨이라는 인물을 만나 호스티스가 된 것도 아이러니한데, 마침 스충밍이 오랜 시간 쫓았던 후유키가 손님으로 나타나 그레이의 접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레이를 일언지하에 내쳤던 스충밍은 (물론 본색은 따로 있었지만) 후유키의 비밀을 알아내면 필름을 공개하겠다는, 앞뒤가 기가 막히게 딱 떨어지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후유키의 과거와 스충밍의 진의가 드러나는 순간 이 우연과 작위의 절정은, 좀 심하게 말하면, 막장드라마의 절정을 방불케 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사실, 이런 우연, 억지, 작위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대목에 이를 때마다 , 이건 소설이지... , 소설이니까 이럴 수도 있지..’라는, 감동과 몰입을 방해하는 잡생각이 수시로 떠올랐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어떤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말하자면, 이쯤 됐으면 더 이상 못 나올 우연 같은 건 없겠군, 이라는 시니컬한 느낌까지 갖게 되면서 많은 독자들과 평론가의 호평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만행과 그 안에서 사선을 넘어온 평범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으로 버무린 필력 덕분에 의미 있는 책읽기의 시간을 가졌지만 아쉬운 점도 무척 많았던 작품입니다. 좀더 평범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좀더 개연성 있는 설정과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스충밍의 주변에 포진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남긴 난징의 악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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