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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악마
모 헤이더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난징대학살을 다룬 책을 읽었던 그레이는 10년이 지난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스충밍이라는 중국인 교수가 대학살과 관련된 필름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무작정 일본으로 찾아갔지만 필름은커녕 인터뷰조차 거절당합니다. 땡전 한 푼 없던 그레이는 우연히 만난 제이슨이라는 정체불명의 미국인 덕분에 숙소와 클럽 호스티스 일자리를 구합니다.
하지만 클럽에서 만난 후유키라는 야쿠자 보스 덕분에 스충밍과의 접점이 생깁니다. 만남을 거부하던 스충밍은 그레이가 후유키를 접대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곤 특이한 요구를 합니다. 즉, 노년의 후유키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구체적으로는 그가 복용하는 약의 비밀을 캐온다면 그녀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그레이는 후유키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를 통해 조금씩 약의 비밀에 다가가지만, 그것이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만큼 위험천만한 미션이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레이가 후유키의 약의 비밀과 그의 은밀한 과거를 좇는 이야기와 함께 스충밍이 1937년 난징대학살의 현장을 헤쳐나온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아내 슈진의 충고를 무시하고 국민당에 대한 믿음만으로 난징에 남기를 고집했던 그에게 ‘난징의 악마’는 평생 잊히지 않을 화인(火印)을 남겼습니다.
전무후무한 희생자와 그 참혹함으로 인해 일본이 저지른 만행 가운데에서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최악의 사건으로 알려진 난징(南京) 대학살은 영화나 소설, 다큐 등을 통해 수없이 조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르에 관계없이 그것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여전히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모 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는 1937년 당시의 상황을 정면으로 다뤘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현재(1990년)와 과거(1937년)를 오가는 구성,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영국 여성의 시점, 충격적인 엔딩을 품은 스릴러 형식 등 독특한 설정을 통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그날의 상처를 철저히 개인의 시각에서 들여다봅니다.
출간 직후부터 이곳저곳에서 호평이 이어졌고,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도 2013년 베스트10에 꼽히는 등 스릴러 마니아들에게는 필독 목록에 오른 작품이라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오래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쉬운 부분도 그만큼 많았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잔혹함이나 선정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일기 형식의 담담한 기록과 스릴러 형식의 진실 찾기로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그레이가 좇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여느 작품 못잖은 잔혹함이 묘사되지만, 작품 전반의 기조는 기존의 난징대학살을 다룬 작품들에 비해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시선 덕분에 오히려 당시의 공포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스충밍의 일기와 그레이의 스릴러를 교차시킨 구성은 20대의 스충밍과 70대의 스충밍 사이에 존재하는 세월만큼이나 큰 간극과 변화를 그레이의 눈을 통해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 이상의 긴장감과 사실감을 전해줍니다.
또한, 거창한 이념이나 역사에 대한 일방통행식 설명보다는 그날을 살아온, 또 그날의 진실을 좇는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좀더 사실감을 부여하고, 공감할 여지를 준 점도 호평의 한 이유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물론 규모에 관계없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지 이념의 옳고 그름 따위는 아니었습니다. 스충밍의 일기가 ‘일본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면 이 작품의 미덕은 상당부분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내 슈진과 그녀의 뱃속에 있는 2세의 생존을 갈망하는 절절한 묘사가 학살의 공포를 더욱 실감나게 해준 것입니다.
작품성과 대중성이 잘 버무려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던 첫 번째 이유는 주로 그레이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어린 시절 우연히 접한 책 한 권으로 인해 난징대학살에 10년 가까이 집착했으며,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찾아와 스충밍에게 필름을 요구한다는 도입부부터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는, 그녀가 도쿄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입니다. 제이슨은 도쿄에서 처음 만난 ‘노숙자’ 그레이에게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우연한 만남이나 과도한 친절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의 캐릭터와 성적 취향이 그레이의 그것과 마치 약속된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점은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이었습니다. 차라리 스충밍이 그레이를 이용하기 위해 제이슨을 보냈다는 설정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일부 조연은 불필요하게 범상치 않은 캐릭터로 그려지거나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그레이와 스충밍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적시에 전달해줍니다.
하지만, 우연과 작위의 절정은 하필 그레이가 일하는 클럽의 단골인 야쿠자 보스 후유키입니다. 그레이가 제이슨이라는 인물을 만나 호스티스가 된 것도 아이러니한데, 마침 스충밍이 오랜 시간 쫓았던 후유키가 손님으로 나타나 그레이의 접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레이를 일언지하에 내쳤던 스충밍은 (물론 본색은 따로 있었지만) 후유키의 비밀을 알아내면 필름을 공개하겠다는, 앞뒤가 기가 막히게 딱 떨어지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후유키의 과거와 스충밍의 진의가 드러나는 순간 이 우연과 작위의 절정은, 좀 심하게 말하면, 막장드라마의 절정을 방불케 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사실, 이런 우연, 억지, 작위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대목에 이를 때마다 ‘아, 이건 소설이지... 뭐, 소설이니까 이럴 수도 있지..’라는, 감동과 몰입을 방해하는 잡생각이 수시로 떠올랐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어떤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말하자면, 이쯤 됐으면 더 이상 못 나올 우연 같은 건 없겠군, 이라는 시니컬한 느낌까지 갖게 되면서 많은 독자들과 평론가의 호평이 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만행과 그 안에서 사선을 넘어온 평범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으로 버무린 필력 덕분에 의미 있는 책읽기의 시간을 가졌지만 아쉬운 점도 무척 많았던 작품입니다. 좀더 평범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좀더 개연성 있는 설정과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이 스충밍의 주변에 포진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남긴 ‘난징의 악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