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1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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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작가의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이력 뿐 아니라 팔순을 넘은 나이에 제12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 또 셜록 홈즈보다 100년을 앞선, 아직 과학이 맹아기를 거치고 있던 시기를 무대로 해부학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졌습니다.

 

혹시나 일본인 캐릭터가 등장할까 했는데, 100% 영국산 캐릭터로만 이뤄진 작품입니다. 형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개인해부교실을 열어 연구에 몰두해온 대니얼 버턴을 비롯, 에드워드, 나이절 등 그의 제자들이 겪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또한,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17살 청년 네이선이 런던에서 겪는 기구한 고난들이 서브스토리로 진행되다가 대니얼의 제자인 에드워드와 나이절을 만나게 되면서 본 이야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열게 되어~’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탐정 역할은 강직한 심성의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그의 여조수 앤이 맡습니다. 대니얼의 해부교실에서 발견된 참혹한 2구의 시신뿐 아니라 연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에 대니얼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정황들 때문에 진범 찾기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열게 되어~’는 독특한 캐릭터 묘사가 장점인 작품입니다. 소심한 외과의사지만 해부학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는 소심남 대니얼, 뛰어난 외모와 언변을 갖춘 대니얼의 수제자이자 어딘가 냉소적인 면을 가진 에드워드, 시력을 잃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하여 호흡과 말투만으로 진위를 가려내는 치안판사 존, 그의 조카이자 조수면서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열혈 여성 사법관 앤 등 다양하고 특이한 캐릭터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열게 되어~’가 갖고 있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기대보다는 조금 못 미쳤는데, ‘해부학을 이용하여 사건의 진상과 진범을 찾아내는 스토리가 아닐까, 라는 기대와 달리 대니얼의 해부교실이 사건의 주요 공간으로만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물론 임신 6개월의 상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 귀족 미혼녀의 사체를 해부한다든가 연구를 위해 도굴꾼이나 유족들로부터 돈을 주고 시신을 거래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등 해부학과 관련된 풍부한 묘사들이 책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지만, 치안판사의 등장 이후 대니얼과 제자들이 조연으로 밀려난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와 함께 18세기 말 런던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맛깔난 문장들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편안하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피폐화된 런던의 뒷골목 풍경이나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사법 체계,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주가 조작 등 현실에 대한 묘사는 세밀하게 이뤄졌고, 간간히 등장하는 영국식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유쾌한 소동극 장면은 참혹한 살인사건의 와중에 잠깐 잠깐씩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습니다.

 

본격미스터리 대상작에 대한 기대감 치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은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작품 자체가 지닌 독특함 때문에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셜록 홈즈가 활약하던 런던의 풍경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보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해부교실 멤버들과 치안판사의 활약, 그리고 조금은 더 날것 같은 느낌을 주는 런던의 모습에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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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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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는 역사 속 인물 가운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조명된 인물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손자가 (할아버지 손에 죽은) 아버지의 뜻을 잇는, 어찌 보면 비극이면서도 막장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동시에 극성(劇性) 강한 소재이다 보니 여러 장르를 통해 오늘날까지 복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린의 실질적 주인공은 이산 정조대왕이겠지만, 1권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의 동 시대를 다룬 무수한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위해 작가는 몇몇 픽션의 인물을 탄생시켰는데, 아무래도 낯익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낯선 인물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세자 이선의 위기를 지켜내는 강직한 무관 황율과 그의 여인 개울, 난폭한 살인기계 광백과 그가 길러내는 살수들, 광백의 살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갑수 등이 그들입니다. 일부는 1권에서 운명을 다하기도 하고, 일부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들을 이야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연스럽게 끌고 오는 작가의 필력이 돋보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 외에도 역린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문장이라는 매력이 있는데, 때론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론 중의적이거나 화두를 닮은 언변으로 정치인들의 내밀한 대화를 표현하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지나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의 어지러운 정치판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노회한 정객들의 진면목을 설명하는데 있어 더없이 적절한 문장들입니다.

 

30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한나절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덕분이었습니다. ‘역린이 몇 권까지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과 픽션의 조합을 통해 이전의 작품들과 차별화된 영정조 시대를 다룬다면 오랜만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대하소설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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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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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이 된 1945, 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잊힌 책들의 묘지라는 신비하고 거대한 책들의 보고를 방문한 다니엘은 운명처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만납니다. 책의 매력에 빠진 다니엘은 작가 훌리안 카락스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서점이나 도서관 어디에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남자가 훌리안의 작품들을 찾아 불태워버린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더구나 그 남자가 자신에게까지 접근하여 협박하자 다니엘은 책을 잊힌 책들의 묘지에 다시 숨긴 채 베일에 싸인 작가 훌리안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됐던 훌리안의 유년기인 1919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됐고,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할 증오와 원한이 싹텄던 그 해의 진실을 접한 다니엘은 더욱 더 훌리안의 삶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그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점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전후로 한 30여년의 시간과, 지금은 축구와 올림픽의 도시로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한때 살육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던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역사와 멜로는 물론 미스터리와 복수까지 뒤얽힌 방대한 서사 덕분에 2권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스페인을 혼란 속에 빠뜨렸던 잔혹한 내전의 상흔, 서로의 등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들, 유년의 우정과 상처가 증오와 복수로 진화하는 안타까운 사연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이은 죽음과 미스터리한 사건 등 이야기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마치 양파껍질처럼, 내부에 여러 개의 미니어처를 품고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펼쳐집니다.

 

크게 보면 훌리안의 삶을 추적하는 현재의 다니엘의 이야기와 비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씩 넘나들어야 했던 훌리안의 과거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하지만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킬 정도로 닮은꼴인 다니엘과 훌리안의 삶 때문에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로 분리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한줄기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그 덕분에 1919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적 배경과 무수히 많은 사건들, 그리고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적잖은 조연들에도 불구하고 8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코멘트만으로도 서평을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워낙 특이한 히스토리와 뚜렷한 개성, 굴곡으로 가득 찬 운명들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하면 가볍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마다 몰입도가 가장 높았던 캐릭터가 조금씩 다를 것이라는 점인데,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비련의 캐릭터나 한 많은 캐릭터는 또 그들 나름대로 독자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을 잔뜩 등에 업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악역(처음부터 공개되는 점이니 스포는 아닙니다)을 맡은 푸메로가 그랬는데, 용서할 수 없는 캐릭터이긴 해도 그의 유년기의 상처가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점이 별 네 개에서 그친 이유는 1권 중반까지 읽는 동안 느꼈던 몇 번의 고비(?) 때문입니다. (무지에 의한 오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스페인 문학만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만의 독특한 문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시끌시끌하고, 조금은 현학적이고, 조금은 과장이 심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여러 가지 비유법이 혼재한 것은 물론 길이까지 길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문장을 두세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어떤 때는 뉘앙스만 파악한 것으로 만족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의 파트너인 페르민의 해학 넘치는 달변은 예외입니다. 그의 독특한 비유와 재치 넘치는 수다는 돈키호테를 연상시킬 정도로 유쾌한 스페인 식 풍자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장문의 난해함이 번역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근래 읽은 번역서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오류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인데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번역자가 노력한 흔적이 책 전체에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1권 중반까지만 작가가 짜놓은 판을 잘 쫓아간다면 그 뒤로는 2권 마지막까지 한 번에 달리고도 남을 만큼 속도감과 긴장감이 배가됩니다.

 

바람의 그림자는 내용만큼이나 시각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 안개, 암울함, 서늘함 등을 주조 삼아 묘사된 바르셀로나의 풍경, 신비한 도서관 잊힌 책들의 묘지’, 악몽을 간직한 폐 저택 안개의 천사등 독특한 공간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눈앞에서 목격하듯 생생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새벽과 저녁의 미묘한 정경, 세밀화를 보는 듯한 캐릭터의 외양은 물론 만년필, 모자, 시계, 타자기 등 세세한 소품들까지 공들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조만간 천사의 게임천국의 수인을 읽을 예정인데, 시간과 공을 들여 읽어야 할 묵직한 부담감은 있지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는 그에 상응하는 만족감과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남겨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쉽고 심플한 이야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번쯤 도전해볼만 한 작품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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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동냥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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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단편집을 만났습니다.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인데, 뭐랄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무시무시하거나 정교한 범인 찾기가 아니라, 생활 속의 소소한 비밀을 찾아가는, 그래서 따뜻한 감동과 함께 막을 내리는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면면 역시 휴먼 스토리에 가깝게 설정됐습니다. 같은 구급대원이지만 처음으로 함께 근무하게 된 예비 장인과 사위(‘경로 이탈’), 사춘기 딸과 실랑이를 벌이며 살아가는 싱글맘 형사(‘귀동냥’), 옆집 사는 미모의 아기엄마를 흠모하는 소방관(‘899’), 전과자들의 갱생을 돕는 노년의 갱생원장(‘고민 상자’)이 그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속에 설치된 트릭들이 가볍거나 허술하게 짜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트릭이다! 한 문장도 놓치지 마라!”는 홍보 카피처럼 트릭은 평범한 문장들 곳곳에 숨어있어서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줍니다. 다만, 트릭 자체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서늘한 느낌보다는 , 그래서 그때 그랬던 거구나라는 따뜻한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전형적인 트릭과는 색다른 감흥을 전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인 귀동냥이 가장 좋았습니다. 사건이 해결되고, 오해가 풀어지고, 모녀가 화해하는 과정에서 대단하진 않아도 오밀조밀한 트릭들이 드러나는 전개가 흥미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작품 역시 비슷한 톤의 작품들인데, 내용이라든가 분량으로 볼 때 부담 없고 훈훈한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는 쉼터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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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무지개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수미 옮김 / 청하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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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함께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선 굵은 전작들 덕분에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오케이!”라는 기대감과 신뢰감을 함께 갖게 됐습니다. ‘잿빛 무지개는 누명과 복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대했던 대로 누쿠이 도쿠로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등 어찌 보면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형식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무성의하고 양식 없는 편집 덕분에 책읽기가 참 불편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족에서 언급하겠습니다.)

 

법 없이도 살 것 같던 한 평범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1심과 2심을 거쳐 최고재판소, 즉 대법원에서까지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명백한 오판이고 억울한 누명이었지만, 전근대적인 강압수사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형사는 자백을 강요했고,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한 원칙주의자 검사는 강요된 자백에 매달려 진실을 외면했으며, 빗나간 영웅심에 사로잡힌 목격자는 어설픈 증언으로 오판과 누명을 공고히 했고, 의욕 따위는 개나 줘버린 무기력한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을 방치했으며, 그 결과,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고지식한 판사는 별 생각 없이 유죄를 선고합니다.

6년 동안 사회에서 격리됐던 평범한 청년 에기 마사후미가 자유의 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의 가족은 이미 완벽하게 박살나고 해체된 상태였습니다. 직장과 이웃은 그의 가족들을 추방했고, 추방당한 가족들은 자살과 의절을 통해 스스로 절멸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믿어준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에기 마사후미는 자신의 무지개를 잿빛으로 만든 이들을 향해 복수의 길을 떠납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들은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진퇴양난에 처한 캐릭터들덕분인데, 그들을 포위한 상황들이 워낙 극단적이거나 자포자기하고 싶을 만큼 강고한데다 분노, 연민, 증오로 이어지는 그들의 감정은 날것처럼 생생하고, 거기에 사실감을 높여주는 민감한 사회적 이슈까지 가미되다 보니 읽는 독자 입장에서 묵직한 추를 마음 한쪽에 달아놓은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잿빛 무지개에서 살인죄를 뒤집어쓴 에기 마사후미는 지금껏 봐온 누쿠이 도쿠로의 그 어떤 캐릭터들보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직장에서의 해고, 연인과의 이별, 가족의 해체를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그가 전대미문의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너무나 당연해보인 나머지 단순한 공감을 넘어 그를 응원하고 보호하고픈 욕구까지 일으킵니다.

동시에, 체포에서 판결에 이르기까지 그의 누명을 차곡차곡 완성시킨 후 6년의 옥살이와 함께 가족의 해체를 제공한 주범들은 각자 맡은 챕터들을 통해 에기 마사후미와 독자의 도대체 왜 그랬어?’라는 질문에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들이란 대부분 초라하거나, 구차하거나, 이기적이기 짝이 없어서 그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에기 마사후미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시킵니다.

에기 마사후미를 쫓는 형사 야마나만이 독자들을 위로해주는데, 아무도 들추려 하지 않는 7년 전 사건의 진실을 캐는 것과 함께 막장으로 폭주하는 에기 마사후미를 멈추게 하려는 진정성 있는 노력을 다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누쿠이 도쿠로는 형사 야마나를 통해 복수에 대한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복수는 진정 회한을 풀어줄 유일한 길인지? 복수가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누쿠이 도쿠로의 전작들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개운한 기분이 들진 않았습니다. ‘내가 에기 마사후미였다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에기 마사후미가 있을까?’ 등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누쿠이 도쿠로 작품의 매력이고, ‘잿빛 무지개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비교적 심플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음에도 파괴력에 있어서는 여느 작품 못잖은 힘을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에기 마사후미와 그의 연인 유리에가 나눴던 짧지만 행복했던, 진정한 무지개를 꿈꿨던 순간이 너무 애틋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조금 긴 사족 : 무성의하고 양식 없는 편집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무성의한 편집에 의해 훼손된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 일입니다. 오역과 오타로 범벅이 된 번역서가 보기 드문 현상은 아니지만 잿빛 무지개는 그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어선 경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수시로 바뀌는가 하면,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오타는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페이지에 서너 개씩 보이는 띄어쓰기 오류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습니다.

 

등장인물의 개명(?)이 가장 심각했던 두 가지 경우를 보면, 이사야마는 아사야마’, ‘이시야마’, ‘이사야와, 야마나는 야마다’, ‘야마하’, ‘야마니로 바뀌곤 합니다.

근무하시니면서’, ‘가혹한 조건이에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이 갈망하는’, ‘매력 없는 사람으로 낚인 찍혀’, ‘자기가 싫어하할 것을 알았기..’ 등 단순 오타만 해도 수십 군데가 넘었고, 번역자의 문제인지, 출판사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들도 있습니다.

 

- ‘아키야마가 큰 소리에 놀라 아키야마가 얼굴을 들었다.’

- ‘분명으므로 그의 수사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 ‘10시 이후에 있을 재판과 관련된 담당할 재판기록도 읽어둬야 했다.’

- ‘하루에의 몸에서 비누냄새가 났다.’

- ‘7년 전이 낳은 사건 암담한 결과가 이 집에 응축된 듯 했다.’

- ‘자신이 후회 없이 다음 살았다고 생각한 만큼...’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페이지 여백이며 글자 크기부터 이해 안 되는 편집을 목격했고, 첫 페이지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잘못 표기된 것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편집을 했고, 얼마나 오타가 튀어나오나 보자, 하고 체크해본 것인데, 이곳에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 오타와 비문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무성의하고 양식 없는 편집의 결과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아마 100페이지도 못 가서 책을 집어던졌을 것입니다. 책은 상품이지만 동시에 작품이며, 그것을 낸 출판사의 얼굴일 텐데, 이런 결과물을 독자들 앞에 내놓으면서 부끄럽지도 않았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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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로 2014-11-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가의 문제인가 하고 봤는데, 저 분이 번역한 다른 책인 ˝무지개 곶의 찻집˝은 아주 잘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건 틀림없이 출판사의 문제입니다. 정말 읽으면서 괴롭네요. 좋은 작가의 좋은 책이 이렇게 성의없이 나온 것을 보니 안타까워요.

하나비 2014-11-05 09:17   좋아요 0 | URL
번역 출판의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정도 문제라면 번역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최종본을 인쇄하기 전에 제대로 체크조차 안 한 출판사가 가장 큰 책임이지만요... 저 역시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더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