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라지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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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작품들(‘용서할 수 없는’, ‘아들의 방’, ‘’)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출발합니다. 11년 전, 형 켄 클라인이 이웃의 줄리 밀러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춘 뒤로 줄리의 가족은 물론 용의자 켄의 가족 역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특히 동생인 윌 클라인은 피살된 줄리와 연인이었던 탓에, 또 존경하며 따랐던 형 켄이 용의자였던 탓에 황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줄리 이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실러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윌의 삶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여겼던 형 켄이 살아있으며 진심으로 사랑했던 실러에게 추악한 과거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윌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절친인 스퀘어즈의 도움을 받아 켄과 실러에 관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숱한 난관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데, FBI는 물론 정체불명의 괴한들까지 가세하여 곳곳에서 윌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동감하지 못할 독자들이 많겠지만, ‘영원히 사라지다는 지금껏 읽은 할런 코벤의 작품 중 가장 몰입하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호의적이거나 극찬을 남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되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그랬듯이 코벤의 설정은 정교하고 극적입니다. 마치 볼트 하나, 나사 하나까지 상세히 그려진 초고층 건물의 설계도처럼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한 줄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집필을 한 느낌을 줍니다. 많은 독자들이 극찬하는 반전의 힘은 아마 이런 정교한 설계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번 코벤의 작품에서 아쉽게 느껴진 부분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다가 이야기의 맥이 산만하게 흩어진다는 점입니다. 인물도, 사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동료 스퀘어즈와 줄리의 여동생 케이티를 제외하곤 존재의 이유가 명확한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나마 FBI 멤버들이 돋보이긴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구원투수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윌과 스퀘어즈를 위협하는 인물들은 너무 멀리서 아스라한 모습으로만, 그것도 느닷없이 툭툭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윌과 스퀘어즈에게 적절한 맞춤형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캐릭터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교적 존재감이 명확한 스퀘어즈마저도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보면 공감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입니다. 평범한 시민 윌이 FBI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스퀘어즈는 상식의 선을 넘어선 슈퍼맨이자 만병통치약입니다. 수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적시에 물어오는 것은 물론 어떤 상황에서든 윌에게 필요한 인물들까지 찾아내는 인맥의 제왕입니다.

 

예전에 코벤의 작품을 읽고 작성한 서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뜯어도 뜯어도 포장지만 계속 나오고 정작 선물은 보이지 않는..”(아들의 방), “이렇게까지 책이 두꺼울 필요는 없었다. (중략) ‘-----로 펼쳐진 느낌. 사족 또는 과다 설명된 부연 이야기가 좀 많았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아쉬움들은 영원히 사라지다에서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여기저기서 인물과 사건은 쏟아지는데 중심 내용과의 연관성은 너무 부족하고, 쌓여가던 포장지에 지칠 때쯤이면 이미 책은 3/4 정도의 분량이 지나간 상태이고, 그러다가 전광석화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엔딩부가 시작되는 듯 하더니 이야기는 곧 끝이 나고 맙니다.

 

말하자면, 코벤의 뛰어난 필력이 엉뚱한 곳에서 에너지를 소진하느라 정작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 느낌입니다. 또한, 급격한 반전을 염두에 둔 나머지 (독자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초중반에 불필요한 포석들을 지나치게 많이 깔아놓았는데, 문제는 깔아놓기만 하고 금세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다른 이야기를 전개시키다 보니 그 포석들의 의미가 제대로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고 휘발될 수밖에 없었고, 몇 챕터가 지나 그 포석이 다시 등장했을 때는 , 그게 복선이었군~”이라는 쾌감 대신 앞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야만 하는 피곤한 독서의 반복을 야기했습니다. 결국, 반전을 위한 애매한 포석들이 책읽기를 지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됐던 것입니다.

 

엔딩부에 가면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포석들이 한자리로 모이고, 그를 바탕으로 몇 차례에 걸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몰아치지만, 이미 포석들에 지친 나머지 연이은 반전은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기만 했습니다. 캐릭터를 만드는 힘도, 상황을 묘사하는 힘도 여느 작품에 뒤지지 않지만 반전만을 위한 지루하고 피곤한 구성 덕분에 할런 코벤의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이번에도 지워내지 못한, 그런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닮고 싶지 않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인물들, 참혹하거나 안타깝게 벌어지는 사건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극적인 반전 등 재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코벤의 설계도 위에 잘 정렬돼있었지만, 그것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전개시켰어야 할 구성이 산만하고 일관되지 못했던 탓에 결국 불편하고 몰입하기 힘든 책읽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호감을 갖고 있던 할런 코벤의 작품에 대해 대다수 독자들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대다수 독자들이 적잖은 서평을 통해 호평을 남긴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내가 잘못 읽었나? 짬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다보니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인가?”라고 자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끄적거려놓은 몇 장의 메모에 꽤 많은 ‘?’표시가 남겨져 있는 걸 보면 호의적이지 못한 장문의 독후감이 그저 오독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더 아쉽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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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량스푼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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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계량스푼은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독특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츠나구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다면, ‘나의 계량스푼에는 말을 통해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즉 내 뜻대로 상대의 행동을 좌우할 수 있는 판타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주인공 2년 전 우연히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나를 사랑해줘. 그렇지 않으면 넌 내일 죽게 돼.” 식입니다. 물론 그 주문은 상대방을 속박하여 조건을 따르든(나를 사랑하든), 그러지 않을 경우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내일 죽게 되는) 상황을 야기합니다. ‘의 특별한 능력은 가문의 내력이기도 한데, 현존하는 유일한 능력자는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입니다.

 

의 특별한 능력은 절친인 후미와 관련이 깊습니다. 2년 전, 후미로 인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고, 지금은 후미를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꺼운 안경, 입 안의 교정기, 평범함에 조금 못 미치는 미모를 가진 후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친화력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면 모두로부터 따돌려지는 캐릭터입니다.

그런 후미를 늘 곁에서 지켜주던 는 어느 날 찾아온 비극 - 후미가 아끼던 토끼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사건 - 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자폐적으로 살아가게 된 후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토끼살해범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학생들을 대표하여 토끼살해범에게 사과를 받기로 한 는 어떤 조건과 벌, ‘~하지 않으면, ~하게 될 것이다를 부과함으로써 토끼살해범에게 응징 또는 복수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능력이 무섭고 저주받은 것이라 믿는 엄마는 에게 같은 능력을 가진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목적은 아키야마를 통해 의 능력발휘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끼살해범과의 만남을 앞두고 와 아키야마 교수가 만나서 나누는 7일 간의 대화록이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고, 그들의 대화는 앞서 언급한대로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그에 합당하는 벌은 무엇인가? 복수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인간의 악의는 벌과 복수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인가? ‘와 아키야마의 논쟁은 한없이 깊고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독자들은 의 마지막 선택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부과할 것인가? - 에 관심을 집중한 채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진범 찾기라는 일반적인 미스터리와 달리 독자로 하여금 죄와 벌, 복수와 악의에 관한 여러 인물의 가치관적 판단 가운데 자신이 공감하는 부분을 찾게 만드는 구조를 띄게 됩니다.

 

- 남의 불행을 우스갯소리로 조롱하고 희롱하는 인간의 악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 토끼살해범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상처받은 후미가 예전의 후미로 돌아올 수 있을까?

-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은 그를 애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잃은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 아닌가?

- 그런 맥락에서, 실은 후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미가 마음을 닫은 것이 때문이기에 그것을 견딜 수 없어서 토끼살해범에게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 아닌가?

 

다소 어렵고 골치 아픈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이런 주제를 다룬 철학서나 인문학 저서가 현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반면 나의 계량스푼은 픽션을 통해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주제의식을 던져줍니다. 내가 라면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내걸 것인가? 평생 자신이 토막 낸 토끼들의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들까? 후회와 반성을 이끌어냄으로써 그에게 제2의 삶을 살 기회를 줘볼까?

이런 복잡한 고민 끝에 도착한 엔딩에는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선택은 50세의 교수 아키야마조차 전혀 예상 못한 것이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다시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키야마로 하여금 또다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무겁고 칙칙한 고전적 소재를 픽션 속에서 딱딱하지 않게 풀어낸 필력, 흥미와 재미를 외면한 채 작정하고 써내려간 듯한 비상업적 구성,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 등 나의 계량스푼은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적인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초등학교 4학년으로 설정된 의 캐릭터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중학생들의 모의재판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비현실적이라는 서평을 적잖이 들었던 것처럼, ‘나의 계량스푼역시 10살이라는 나이가 자꾸만 책읽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아키야마 교수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라고 했을 때, 독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두세 번은 되읽어야 하는 상황을 10살의 는 이해는 물론 응용까지 해내고 있습니다. 딱히 문제 삼을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 이건 소설이지라는 생각이 끼어들어 몰입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또 한 가지, ‘비상업적 구성이라고 언급한 부분인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와 아키야마 교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다 보니, 그것도 동어반복의 느낌이 들거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보니 지루함과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와 아키야마 교수의 3일 째 만남을 읽던 즈음에는 다 건너뛰고 엔딩만 읽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이 작품의 소중한 부분을 놓쳤겠지만 말입니다.

 

생각보다 긴 서평이 됐는데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평탄한 진범 찾기가 아닌 탓에 이런저런 사감을 많이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은 아직 많이 만나보진 못 했지만, 독특하면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그녀의 대표작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가 출간됐는데, 과연 어떤 모양의 책읽기가 될지 기대반 우려반으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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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의 여름
미쓰하라 유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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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가는 차안에서 읽을 생각으로 책꽂이에서 단편집을 고르던 중 3년 전쯤 읽었던 열여덟의 여름이라는 제목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목차를 보니 내용도 대략 생각이 났지만, 좋은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나서 주저 없이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각 작품마다 나팔꽃-금목서-헬리오트로프-협죽도 등 꽃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서 마치 꽃을 모티브로 한 연작의 느낌을 줍니다.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꽃을 모티브로 한 연작 단편은 잘 안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네 편 가운데 일반적인 미스터리의 느낌을 주는 작품은 이노센트 데이즈뿐입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대체로 가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따뜻하거나 애틋한 주조로 다루고 있어서 일반적인 미스터리 범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이유는 나머지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작지만 독특한 미스터리적 요소, 즉 엔딩에 이르러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거나 빙긋 웃음 나게 하거나 또는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일상 속의 작고 소중한 비밀들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통해 잘 버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18살 청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인연 때문에 첫사랑 이야기처럼 읽히는 열여덟의 여름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나팔꽃의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성장기의 첫사랑+이뤄질 수 없는 사랑+지독한 살의가 소년과 여인의 사이에서 교묘하고 자연스레 흘러가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전해줍니다.

자그마한 기적형의 순정은 소소한 미스터리 장치를 통해 마음이 푸근해지거나 빙긋 웃음이 나는 엔딩을 선사합니다. ‘자그마한~’이 아내를 잃고 아들과 함께 살던 미즈시마의 새로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라면, ‘형의~’는 연극에 미친 형의 사랑 이야기로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유머 미스터리 장르입니다.

이노센트 데이즈는 반전이 주는 서늘함과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매가 겪어야 했던 비극을 주의, 위험이라는 꽃말을 가진 협죽도를 매개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작품마다 온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가족을 배치했고, 엔딩에 희망을 남겨놓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쉽고 평이하지만 깊이와 따뜻함이 배어있는 문장들과 수채화처럼 묘사된 꽃과 주변 정경들 역시 네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입니다. 가장 어둡고 무거운 이노센트 데이즈조차 날선 미스터리의 느낌이라기보다 안쓰럽거나 서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작가 미쓰하라 유리가 네 작품의 모티브로 을 설정한 것은 아마도 이런 정서를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그 의도는 기대 이상으로 전달됐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정서에 비호감인 미스터리 독자들은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3년만이긴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은 열여덟의 여름은 결과를 알고 읽었음에도 여전히 예전과 비슷한 따뜻한 느낌을 남겨줬습니다. 단편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정서는 단편이 아니라면 표현하기도, 느껴보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가끔씩 호평을 받은 단편집은 일부러 찾아 읽기도 합니다.

미쓰하라 유리가 이 작품으로 상을 받은 것이 2002년인데도 국내에서 더 이상 출간된 후속작품이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쉽게 느껴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는 일본에서는 다음 작품을 꼭 읽고 싶은 작가로 주목받았다라고 돼있는데 일본 출간작이 있다면 국내에도 좀더 소개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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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몸값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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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그레인저 제화의 회장 자리를 목전에 둔 더글러스 킹은 어느 날 자신의 아들 바비를 납치했다는 유괴범의 전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 유괴된 것은 운전기사의 아들 제프였고, 유괴범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에게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회사 주식 확보를 위해 거금을 준비해야 했던 킹은 몸값 지불을 거부하고,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한 87분서 형사들은 유괴범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에디는 아내 캐시의 만류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주범인 바너드의 포악한 성정을 이겨내지 못하기도 했고, 더 이상 구질구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떠밀려 끔찍한 범행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원제가 ‘King's Ransom’인 이 작품의 출간년도는 1959년으로, (에드 맥베인 홈페이지에 따르면) ‘87분서 시리즈가운데 10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36번째 작품이자 1983년에 출간된 아이스이후 두 번째 읽은 작품인데, 무려 24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주연들의 캐릭터나 87분서의 분위기는 한결같았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사족과 설명이 조금 많았다고 느꼈던 아이스와는 달리 선명하고 깔끔한 문장,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의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카렐라 등 87분서 형사들의 활약보다는 본인의 자식이 아닌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킹과 여러 캐릭터들 사이의 가치관의 대결이 메인 스토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의 끈질긴 탐문과 단서를 이용한 묵직한 추리를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2014년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건 해결 과정이 간결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몸값을 둘러싼 킹과 주변인들의 갈등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 덕분이었습니다.

 

사업과 아이의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는 더글러스 킹, 아이의 몸값을 지불하라며 킹과 충돌하는 아내 다이앤, 몸값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주식 확보 대결에서 킹을 무너뜨리려는 회사의 라이벌들, 몸값을 받아내 지금껏 한 번도 누린 적 없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에디, 은행털이는 용인해도 유괴는 안 된다는 에디의 아내 캐시 등 등장하는 캐릭터들 모두 윤리적 갈등을 빚으며 격렬하게 대치합니다. 심지어 87분서의 형사 스티브 카렐라까지 이 갈등에 가세하는데, 이들의 충돌 장면 하나하나가 작가의 맛깔난 문장을 통해 현실감과 공감을 획득한 덕분에 수사물로서의 미덕은 조금 흐릿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속도감은 오히려 배가됐습니다.

 

킹의 몸값의 재미를 더해준 것은 홍지로의 번역입니다. 후기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어보면 평범한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번역가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애매하게 비꼬는 표현이라든가,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런 문장들, 캐릭터의 특징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드러내주는 문장들 속에서 꼼꼼하고 적절한 번역의 맛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하여 맛없는 커피로 유명한 서무과의 미스콜로, 아버지의 장난에 가까운 작명 덕분에 평생 수난을 겪어온 마이어 마이어 등 아이스에서 만났던 친숙한 캐릭터들을 만난 일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87분서 시리즈는 1956경찰혐오자로 시작하여 2005‘Fiddlers’까지 거의 50년에 걸쳐 55편이 출간됐는데, 절판된 책을 제외하고 현재 국내에는 여섯 편만 만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경찰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기도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스티브 카렐라와 진짜 형사같은 87분서 멤버들의 활약 때문에라도 이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이 국내에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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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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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단편집을 만났습니다. ‘여름 빛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들은 형식적으로는 호러물로 분류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섬뜩한 느낌을 남기는 극단적인 호러물에서부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애틋하고 따뜻한 호러물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독특한 색깔과 느낌을 지니고 있어 정통 호러물에 비호감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소구할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데, 1부에 실린 세 편은 각각 1945, 1922, 192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2부의 세 편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 이누이 루카가 훗카이도 삿포로 출신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지역들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다카시(여름 빛), 죽은 자의 영혼과 만나게 되는 이시쿠로(쏙독새의 아침), 열등감에 휩싸여 동생을 향한 저주의 의식을 치르는 기미(백 개의 불꽃), 마술 뿐 아니라 공중부양의 능력을 지닌 소년 다쿠(Out of this world), 타인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아야코(바람, 레몬, 겨울의 끝) 등 현실을 뛰어넘는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비현실적이라거나 허황된 느낌은 거의 받지 못 했습니다.

 

인물 뿐 아니라 독특한 설정들도 눈에 띄는데, 저주를 불러온다는 돌고래를 닮은 물고기인 상괭이, 불길한 기운을 한가득 담아뒀다가 동트기 전에 울음소리와 함께 온갖 곳에 뱉는다는 쏙독새, 동족인 금붕어는 물론 자신보다 큰 생물까지 뭐든지 먹어치우는 괴물 금붕어 등 호러물로서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유무형의 설정들이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인 여름 빛바람, 레몬, 겨울의 끝이 마음에 들었고, 2부 첫 작품인 는 정통 호러물의 서늘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홍보 문구가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데, 아주 조금 과장된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녀의 호러 단편집이 새로 출간된다면 주저 없이 집어 들게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간간이 눈에 띈 오타였습니다. 목차의 소제목 중 백 개의 불꽃이 내용에서는 백 개의 꽃으로 되어 있고, ‘다니카와다키자와(p46), ‘마코토마쿠토(p206) 등 인물 이름도 잘못 인쇄됐고, 그 외 부분적인 오타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난 점, 특히 마지막 작품 바람, 레몬, 겨울의 끝에서는 여러 차례 발견된 점이었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 됐다면 좋았을 텐데 옥의 티처럼 아쉬움을 남긴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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