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인간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2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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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9511, 자택에서 열린 정례 식사모임 중 급사한 막달론 셸데룹은 2차 대전 당시 저항군으로 활약했고, 종전 후 기업을 일으켜 억만 장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줘왔습니다. 그는 평생을 거만한 행성처럼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성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막달론 셸데룹의 떡고물을 바라고 스스로 위성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폭압적인 권위와 독재 때문에 무력하고 속박된 삶을 강요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급사한 현장에는 10명의 위성인간들이 함께 있었는데, 유산 문제에 예민한 두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자식, 저항군 시절의 인연으로 식사모임에 참석했던 벤델뵈 부부와 한스 헤를로프센, 그리고 여동생 막달레나 셸데룹과 젊은 여비서 쉬노베 옌센 등이 그들이고, 이들은 모두 유력한 용의자이자 증인 자격으로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심문을 받게 됩니다.

 

파리인간의 뒤를 잇는 한스 올라브 랄룸의 크리스티안센-파트리시아 시리즈’ 2편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경찰서의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천재적인 장애소녀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전편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이 남긴 씻을 수 없는 상흔과 그로부터 비롯된 굴절된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쇄살인 심리 스릴러입니다. 전작의 제목인 파리인간이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했다면, ‘위성인간은 어떤 이유로 한 사람의 주변을 평생 맴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표지에 그려진 막달론 셸데룹의 초상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고도비만인 아랫배를 불쑥 내민 그는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세상을 하찮게 여기듯 내려다봅니다. 왜 하필 이 인물의 기분 나쁜 초상화를 표지로 삼았을까, 궁금했는데, 작품의 엔딩에 이르러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표지를 바라보니 이만큼 적절한 표지도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은 적어도 자신이 관여하는 세상에서는 이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 배려심 없는 횡포를 무기삼아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며, 언제나 자신을 드라마틱한 존재로 빛나게 만들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종국엔 그런 타인들의 상처들을 발판삼아 부와 명예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죽던 날, 함께 식사 자리에 있던 10명 대부분 오래 전부터 그에게 살의를 느껴왔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그로부터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돌아야 하는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으면서도 이탈한 이후에 맞닥뜨려야 할 불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이고 모순에 가까운 인물들의 심리를 작가는 탁월하게 묘사해냅니다. 무한한 이기심, 빗나간 애정, 들끓는 물욕, 제어되지 않는 복수심 등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살인 동기를 지닌 다수의 용의자를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단순한 사건 해결 스토리를 넘어 긴장감 넘치는 심리 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반전을 거쳐 도달한 엔딩 장면은 파트리시아가 예상한대로 인간이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가 진범을 밝혀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악의와 욕망이 자아낸 추악함의 바닥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치밀한 심리 스릴러로서 여러 가지 장점을 지녔지만 동시에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는데, 우선 구성 면에서 파리인간에 비해 입체감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추리보다는 10명의 용의자를 상대로 한 반복되는 심문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파리인간보다 위성인간을 먼저 읽게 된 독자에게는 의아함이 남을 소지가 많습니다. 본문 속에서 파리인간의 내용을 자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캐릭터라든가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와의 관계 등은 파리인간의 사전 지식 없이는 납득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파리인간에서 아쉽게 느꼈던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관계는 위성인간에서도 여전했는데,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독자적인 탐문이나 추리는 전작에 비해 후퇴한 느낌이었고, 오히려 파트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진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면박에 가까울 정도로 독설을 날리는 파트리시아를 보면서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왜소하고 무능한 캐릭터처럼 그려진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초중반의 반복되는 심문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10명의 용의자와 과거-현재에 걸쳐있는 복잡한 살의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사전 포석은 독자 입장에선 감내할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루함을 견뎌내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급상승하는 중후반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파리인간의 서평 마지막에서도 언급했듯이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수사를 펼치는 멋진 주인공 캐릭터로 컴백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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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 유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22
루이즈 보스.마크 에드워즈 지음, 김창규 옮김 / 북로드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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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불의의 사고로 연인을 잃고 단기간의 기억마저 상실했던 케이트. 이후 미국으로 떠나 바이러스 학자로서, 잭의 엄마로서 살아가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16년 만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날 거리에서 16년 전 죽은 연인의 쌍둥이 형 폴을 만납니다. 그를 통해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아든 케이트는 16년 전의 사고 뒤에 뭔가 감춰진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잃어버린 당시의 몇 달 간의 기억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폴 역시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케이트를 도와 위험한 여정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 시간,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건트 박사는 수하인 존 샘슨에게 케이트와 폴의 제거를 지시합니다.

 

세상의 위기와 주인공들의 로맨스와 무자비한 킬러와 기억상실증이 잘 조합된 결과

 

역자 후기에 실린 문구인데, 이 작품을 한 줄로 깔끔하게 잘 요약한 표현입니다. 골치 아픈 트릭 대신 쉴 새 없는 긴장과 흥분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즉 전형적인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캐릭터와 설정들로 가득 찬 스피디한 스릴러이며, 단숨에 500여 페이지를 완주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안전, 인류를 위협하는 최첨단 무기, 살인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킬러, 끊임없는 재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로맨스 등 예측불허의 롤러코스터 같은 설정들로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설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작가의 필력 역시 기성 작가 못잖은 힘을 갖고 있어서 신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줍니다. 16년 전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위기를 교차하며 잘 직조해낸 점도 뛰어났고, 현란한 표현 없이도 긴장감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렇듯 페이지 터너로서 빠짐없는 미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치 유어 데스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안고 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점은 주인공 케이트와 폴이 평범한 민간인이다 보니 결국 사건의 물리적 해결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16년 전의 진실을 찾아가는 모든 수고는 주인공들의 몫이었고, 목숨을 건 물리적 충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며 위기를 극복해내긴 했지만, 역시 이 명백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케이트를 위협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에 대한 것인데, 우선 건트 박사의 동기나 궁극적 목표가 조금은 현실감이 떨어져 보인 점입니다. 바이러스의 개발 이유에 대해 건트 박사가 나름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좀 엉뚱해 보이기도, 추상적으로 보이기도, 의지에 비해 논거가 부족해 보이기도 해서 악당의 자세치고는 좀 어수룩해 보였습니다. 좀더 설득력 있는 동기나 목표가 제시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또 한 가지는 케이트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원했고, 그래서 죽이고 싶어 하는킬러 존 샘슨의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할 수 없지만 악당의 캐릭터가 흔들리다 보니 살짝 맥이 빠졌던 게 사실입니다.

 

댄 브라운과 스티그 라르손, 마이클 크라이튼의 합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 글이 약간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근거 없는 홍보용 멘트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미덕을 여럿 지닌 만큼 다양한 독자층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두 작가의 합작이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시작됐으니 후속작 소식도 곧 들려올 것 같고, 무엇보다 첫 합작품인 킬링 큐피드의 출간도 기대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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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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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람둥이, 건달, 사기꾼, 칼잡이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데다 남미의 꽃을 단춧구멍에 꼽고 다녀 흑란이라는 별명을 지닌 피에트로는 베네치아를 강타한 잔혹한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사면을 받고 감옥을 나옵니다. 그리고 수사 시작 직후 그동안 벌어진 연쇄살인이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을 본떠 자행됐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배교, 육욕, 식탐, 낭비, 분노, 이단, 폭력, 분열, 배반 등 9()의 테마에 따라 희생자들이 속출하는데, 고급 창녀에서부터 베네치아의 핵심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걸쳐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준 유력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벌이던 피에트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형사 사건도, 신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 집단의 소행도 아닌 베네치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역의 일환임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로 지칭되는 적의 수장을 쫓던 중 피에트로는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기도 하고, 심지어 연쇄살인범으로 오인받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거나 단테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은근히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단테 혹은 단테의 신곡이 가진 힘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나 유산을 픽션으로 풀어내는 기법 자체의 힘일 수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살인은 분량 자체가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데다 일단 손에 쥐자마자 적잖은 부담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하드커버 제본이고, (1756년 베네치아를 무대로 설정했고,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은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어휘나 문장이 무척 예스럽고 고전적이어서 완독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의외로 심플한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과 그에 맞선 주인공 피에트로의 대결입니다.

 

쉽고 가벼운 현대의 문장들에 익숙해진 탓인지 고전적인 문장이 주는 생경함이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다 보니 어느 새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녀는 쾌락의 수식을 빌려 희극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번민을 안전한 곳으로 감춘 뒤, 그 번민에 권태와 도피의 옷을 입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두 세 번은 되읽어야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고전의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여 벌어진 끔찍한 사건 현장의 묘사, 1756년 베네치아의 화려한 풍광과 곤돌라를 비롯한 수로와 뒷골목의 풍경 묘사, 그리고 자유분방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 당시의 풍습이나 주인공 피에트로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남녀 캐릭터들의 묘사는 현대물에서는 보기 힘든 현란한 어휘들과 리듬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야기 전개와 관계없이 흥미로운 책읽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 살인은 방대한 서사와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우선은 나무는 많은데, 정작 숲이 허술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쇄살인, 애절한 멜로, 비밀과 거짓말, 피아가 구분 안 되는 은밀한 캐릭터 등 개별적인 요소들은 매력적으로 포진되어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뼈대 악당들의 목표, 주인공과의 대결 과정 등은 읽는 도중 몇 번씩 맥을 빠지게 할 만큼 허술하게 진행됩니다.

이 부분을 상세하게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단테의 신곡으로 시작해서 헐리우드 액션영화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결국 선과 악의 대결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면 단테의 신곡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부에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연쇄살인은 존재감을 잃었습니다.

 

더불어, 피에트로의 수사는 몇 번의 결정적 계기를 통해 악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데, 그 과정이 안이하고 쉽게 처리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목격자와 증인은 필요에 따라 적재적시에 나타나주고, 악당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 역시 친절하게피에트로의 손에 전달됩니다.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준 훌륭한 번역 덕분에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했지만, 미스터리의 완성도 면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공식이나 스케일 대신 차라리 18세기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얼음장 같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한 영화 세븐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 작품에도 단테의 신곡과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시가 연쇄살인의 모티브로 등장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피에트로가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를 쫓는 이야기였다면 좀더 흥미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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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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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대 소녀 아오이의 유일한 불행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엄마와 주정뱅이 폭력꾼 새아빠입니다. 부딪히고 저항하기 보다는 눈치껏 피해가며 살아가는 법을 택했던 아오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끼어든 시즈카 덕분에 그녀의 삶은 파란 속으로 휩쓸립니다. 투명인간처럼 지내던 학기 중과는 정반대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검은 드레스와 특이한 목걸이 등 고딕 롤리타풍으로 치장한 시즈카는 의식적으로 아오이의 곁을 맴돌며 그녀 마음속에 농축되어 있던 분노를 이끌어냅니다. “절대로 안 들키는 살인 방법, 가르쳐줄까?”

 

3년 전쯤 읽은 내 남자의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가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과 잘 매치됐을 뿐 아니라 제가 나름 명명해본 서정적인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와 설정 등에서 오츠이치의 몇몇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오츠이치의 작품들이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사쿠라바 가즈키는 가볍고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10대의 정서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주인공 오니시 아오이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10대 소녀이고, 그녀의 친구들 역시 수다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모노세키 인근의 섬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게임센터와 맥도널드를 즐겨 찾기도 하지만 동시에 버려진 구 일본군 요새와 등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는 10대 소녀의 삶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오이의 평범했던 삶은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시즈카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통제 불능에 빠진 10대들의 살인극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현실 반영물 또는 사회물로 여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만약 사쿠라바 가즈키가 어떤 주장을 강요했다면, 10대들의 삶을 망쳐놓은 기성세대를 비판하거나 반대로 철없고 과격한 10대들의 범법 행위를 비판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평범하고 상투적인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딱 그런 이야기 아닌가?”라고 평가할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등 떠밀리듯 불행한 삶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두 소녀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공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영화 델마와 루이스소녀 버전이랄까요?

아오이와 시즈카의 관계는 거래라고도 할 수 있고 연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교차살인 내지는 알리바이 조작 등의 거래적 요소가 강하지만 두 소녀의 보이지 않는 감정적 교류에 주목하면 연대의 의미가 더 크게 보입니다.

 

한편, 물과 기름 같은 두 소녀의 연대를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원시인의 슬픔이라는 옛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원시인은 슬플 때는 가만히 있는대. 동굴 밖은 소중한 사람을 죽여 버린 커다란 곰이 있으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숨죽인 채,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그저 눈에 띄지 않도록 사는 거야.”

아오이에게는 철없는 엄마와 주정뱅이 새아빠가 동굴 밖의 곰이었고, 시즈카에게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사촌오빠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른들에게 속박당해야 하는 1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두 소녀가 숨어 사는 소극적인 삶 대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오이는 살인 이후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 그날부터 (중략) 나는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 있으면 위험한 놀이를 하는 기분... 그러면서도 맛들이면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딱히 어렵거나 현학적인 표현 없이도 아오이의 현실이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집니다. 맥락 없이 뚝 떼어놓은 문장들이라 잘 이해 안 될 수도 있지만,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에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본인은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 남을 웃기는 개그맨의 연기가 최고의 웃음을 유발하듯, 간결하고 맑아 보이는 문장들로 표현된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의와 그것의 실천은 작심하고 동원한 잔혹한 단어와 문장들보다 훨씬 더 깊게 각인됩니다.

 

급작스런 (그리고 조금은 안이해보였던) 엔딩이 무척 아쉬웠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런 내상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사족으로, 짧고 읽기 쉬운 문장들이라 성급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인데, 혹시 이 작품을 읽을 독자라면 꼭꼭 씹어가며 찬찬히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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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고백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복창교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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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기가 사라진 채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신장 이식이 필요한 어린 딸을 둔 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는 관할서 파트너 고테가와와 함께 범행 동기조차 파악하기 힘든 이 연쇄살인 수사에 뛰어듭니다. 끈질긴 탐문으로 두 희생자의 공통점을 알아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누카이의 수사가 장벽에 막혀있는 사이 결국 세 번째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얼마 후 다음 희생자로 예상된 자에게 진범의 전화가 걸려오자 이누카이와 담당 형사들이 총출동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충격적인 엔딩이었습니다.

 

“‘반전의 제왕이라 불릴 정도로 매 작품마다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아직은 낯선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출판사의 격찬, 아직 못 읽었지만 그의 한국 첫 출간작 안녕, 드뷔시가 제8'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이란 점, 또 이 작품이 전설의 살인마 잭을 제목으로 차용할 만큼 잔혹한 연쇄살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늘 관심을 갖고 있는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점 등 작가의 이력과 장르의 성격 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비춰볼 때 안 읽고는 못 넘어갈 정도의 화려한 유혹이 난무했던 작품입니다.

 

참혹한 연쇄살인과 그 진범 찾기가 주된 내용인 군더더기 없는 정통 미스터리지만 이 작품이 사회파+메디컬 미스터리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혹한 연쇄살인이 쾌락을 즐기는 소시오패스의 만행이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개인의 무자비한 살인극이 아니라 뇌사자의 장기 기증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장기 이식에 관련된 여러 주체들(기증자, 수혜자, 의료관계자 등)의 딜레마 혹은 탐욕과 함께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경직된 경찰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가미된 덕분에 장기 적출 연쇄살인이라는 다분히 자극적인 사건은 기대 이상의 볼륨감을 갖추게 됩니다. 거기에다 주인공인 이누카이 하야토에게 신장 이식이 필요한 딸이 있다는 설정까지 곁들여지면서 독자는 장기 이식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좀더 깊은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됩니다.

 

뇌사자는 뇌는 죽어 있지만 피가 흐르고 살도 따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며 살아남을 자격은 누구한테 있는 거야?” 등 본문 곳곳에서 뇌사와 장기 이식에 관한 무거운 논쟁이 벌어집니다. 또 일반인이 뉴스를 통해 접하는 장기 이식의 전후 사정은 대부분 미담으로 포장돼있지만 실상 기증자 가족에게 장기 적출이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름 아닌 일이란 점도 여러 차례 강조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장기가 뿔뿔이 흩어진 채 누군가의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잊을 수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흔히 미화되듯 기증자의 가족은 자신의 혈육이 누군가를 살리고 떠났다는 보람과 행복감만으로 남은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런 극렬한 갈등과 고통을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그것들이 끔찍한 연쇄살인의 기폭제로 작동하게 된 과정을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묘사합니다.

 

반전을 위해 다소 뜬금없이 급선회한 엔딩의 위화감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저 훈훈한 미담으로만 여겨졌던 장기 이식의 이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점이나 그 이면의 문제들을 연쇄살인 미스터리와 엮어낸 작가의 필력은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더불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누카이와 (관할서 형사) 고테가와 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전혀 극단적이지도, 억지스럽게 포장되지도 않은 캐릭터들이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적절한 긴장과 휴식을 제공하며 묘한 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기대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왠지 앞으로 꽤 주목하게 될 것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후속작이 이누카이&고테가와 시리즈라면 더욱 반가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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