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자들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김성훈 옮김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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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결사건 전담반 칼 뫼르크와 아사드는 20년도 훌쩍 넘은, 그것도 이미 범인이 자수한 사건을 배당받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누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 주목합니다. 과거 홀로 자수했던 범인 외에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은 물론 현재 덴마크 최상류층인 인물들이 이 사건에 깊이 연관됐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숙학교 시절, ‘51녀 패거리로 불리며 온갖 범죄를 일삼았던 일당에 주목한 칼과 아사드는 그중 홍일점인 키미의 행방을 쫓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냄으로써 키미와 기숙학교 패거리가 오누이 살해사건 외에 다수의 폭행, 실종, 살인에 연루됐음을 확신합니다. 또한 최근 나머지 패거리가 자취를 감춘 키미를 찾는 데 혈안이 돼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한편으론 키미의 행방을 쫓고, 다른 한편으론 기숙학교 패거리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칼과 아사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이은 특별수사반 Q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경찰청 지하의 미결사건 전담반 사무실에 쳐박힌 채 쾌락살인과 폭행을 즐기는 도살자들의 과거 만행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는 칼 뫼르크와 아사드 콤비의 끈질긴 탐문과 수사가 600페이지 가까이 펼쳐집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칼과 아사드가 쫓아야 할 악당들이 공개되고, 악당들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까지 죄다 언급돼서 문득 남은 몇 백 페이지를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총평하자면 중반 정도까지는 약간의 지루함과 함께 곳곳에서 불필요한 사족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후부터는 오히려 속절없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까울 만큼 이야기가 빠르고 팽팽하게 전개됐습니다.

 

키미를 포함한 기숙학교 패거리는 말하자면 쾌락을 추구하는 묻지마 폭력단입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고, 아무 거리낌 없이 생명을 앗아간 뒤 술과 마약에 찌든 환락의 자축 파티를 여는 인물들입니다. 거기에다 부모까지 잘 만난 덕에 덴마크의 최상류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이란 개념은 개나 줘버릴 정도로 하찮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의 행각을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는 전혀 주저하지도, 돌려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때론 과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있지만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유일한 여자 멤버였던 키미는 현재 경찰과 패거리 양쪽 모두에게 쫓기는 인물이라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쾌감을 느끼고,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르며 욕정을 느끼곤 했던 젊은 날의 키미는 이제껏 만나본 어떤 악당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마지막까지 양파껍질처럼 하나둘씩 드러나는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독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살자들에서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끄는 부분은 칼과 아사드 콤비의 활약이 아니라 키미와 패거리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20년 전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키미가 패거리와 결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 패거리가 혈안이 되어 키미를 찾는 목적은 무엇인지 등 중반 이후에 속속 밝혀지는 그들의 추악하거나 불행했던 과거사는 숨 돌릴 틈 없기 가쁘게 전개됩니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인 칼과 아사드 콤비의 비중은 조연 정도로 많이 축소됐습니다. 물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되긴 했지만, 엔딩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약이 수동적으로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비중도 비중이지만 메인 주인공인 칼 뫼르크에게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1편인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등장했던 칼과 2편인 도살자들의 칼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1편의 칼이 조금은 진지하고 이런저런 내상을 가진 묵직한 캐릭터였다면, ‘도살자들의 칼은 180도 다른, 어딘가 가볍고 수다스러운 캐릭터였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리즈물임에도 번역자가 달라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는 칼 때문에 읽는 내내 혼란스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거슬린 건 도살자들의 칼이 구사하는 천박한 말투와 경박한 행동입니다. 지랄, 개뿔, 미친놈, 빌어먹을, 싸가지 등 1편의 칼이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단어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독백의 경우는 더 심해서, ‘이 인간이 내가 무슨 치매라도 걸린 줄 아나?’, ‘저 주둥이를 저대로 두었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이러고도 형사라고, 쪽팔린 줄 알아야지.’ 등 캐릭터를 한없이 저급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칼이 원작에 가까운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1편에서 총격전 끝에 동료가 죽거나 반신불수가 된 모습을 지켜본 인물이라면, 또 좌천당하듯 경찰청 지하실로 내쫓긴 반골 캐릭터라면 이런 건달 수준의 칼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칼 뫼르크에 대한 아쉬움만 제외하면 도살자들은 별 다섯 개도 너끈한 작품입니다. 스스로 자초하긴 했지만 참혹 그 자체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키미의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도살자들600여 페이지를 단숨에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간혹 이해 안 되는 상황들도 눈에 띄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중반까지의 약간의 지루함만 견뎌낸다면 그 뒤를 지배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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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나무 1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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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주 포드 카운티의 자산가 세스 후버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에게 자필 유언장을 남겼는데, 문제는 1년 전 작성했던 유언장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인데다 유족에겐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은 반면, 가난한 흑인 가정부 레티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힌 점이었습니다.

개망나니 같은 세스의 아들과 딸은 물론 주정뱅이에 사고뭉치인 레티의 남편까지 하이에나를 닮은 변호사들을 앞세워 이전투구 같은 유산 상속전에 뛰어들지만 정작 큰 유산을 받게 된 레티는 왜 세스가 그런 유언장을 남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이크는 과거 상관이었던 루시엔, 이혼전문 변호사 해리 렉스, 그리고 레티의 딸이자 변호사 지망생인 포티아와 함께 세스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합의를 종용하는 상대 변호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배심재판에 이른 제이크는 뜻밖의 증인들 때문에 패소 위기에 몰리는 한편, 세스의 새 유언장을 낳게 한 오래된 과거사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초창기 작품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의뢰인’, ‘펠리컨 브리프등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면서 법정물에 관한 한 존 그리샴을 능가할 작가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러하듯 존 그리샴은 뛰어난 필력을 통해 독자를 짜릿한 롤러코스터에 탄 듯 흥분시킨 것은 물론 분노와 쾌감의 게이지를 극단적으로 지휘하며 마지막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들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작품들은 과거의 명성에 못 미친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웠는데, 그래선지 속죄나무에 기대가 남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속죄나무의 전편에 해당하는 타임 투 킬은 책으로도 영화로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주인공 제이크 브리건스의 당시 활약을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이 작품 곳곳에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임 투 킬에서 딸을 강간한 백인남성들을 살해한 흑인을 변호했던 제이크는 세스 후버드의 유언장을 둘러싼 사건을 맡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흑백 인종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미시시피를 무대로 법의 전쟁을 치릅니다.

 

1~2권 합쳐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수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합니다. 특히 제이크를 포함하여 10여 명의 다양한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변호사라는 직업의 대표 캐릭터를 총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격과 스타일 모두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줍니다. 또한 유언장과 연관 있는 인물들 역시 탐욕, 증오, 연민, 용서, 화해 등 다양한 감정들을 품고 있어서 변호사들 못잖게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이런 인물들을 앞세운 존 그리샴은 못된 백인 vs 착한 흑인또는 탐욕스런 흑인 vs 정의를 수호하는 백인등 다양한 갈등 관계를 포진시켜 독자들의 감정 이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냅니다.

 

이야기의 뿌리는 미국 남부의 오랜 흑백 갈등이지만, 존 그리샴은 이 갈등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습니다.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깔아놓은 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툭툭 던지곤 합니다. , ‘인간의 탐욕이라는 핵심 주제를 위해 달려가면서 간간이 극성 강화용 양념으로 흑백 갈등을 활용하곤 하는데, 말하자면, 탐욕에 관한 이야기가 살짝 지루해질 무렵 독자의 입맛을 당기는 양념(흑백 갈등을 환기시키는 사건들)을 뿌려댐으로써 재미와 긴장감을 되살아나게 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힘을 재가동시킨다는 뜻입니다.

물론 엔딩에서 밝혀지는 세스의 유언장의 진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온 흑백 갈등과 탐욕이라는 두 코드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존 그리샴은 800여 페이지의 분량 내내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두 코드의 균형을 잘 유지했고, 덕분에 도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넘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대서사에 가까운 법정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미덕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줄 수 없었던 아쉬움도 꽤 컸는데, 우선은 스토리 대비 분량의 문제입니다. 사족에 가까운 캐릭터와 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았고, 그 부분들은 예외 없이 지루함을 선사하곤 했습니다. 알맹이만으로 꽉 차게 압축해서 5~600 페이지 분량의 한 권으로 압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엔딩의 허망함(?)입니다. 배심원 최종 심의 가운데 불쑥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갑자기 수십 년 전의 역사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제이크가 800여 페이지에 걸쳐 들였던 모든 수고를 한순간에 허망하게 만듭니다. 즉 느닷없이 튀어나온 과거의 사건 하나 때문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면서 종결된다는 뜻입니다. 존 그리샴이 초반부터 떡밥처럼 몇 차례 언급하긴 했지만, 설마 그것이 마지막 반전으로 활용되진 않겠지,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엔딩에서 튀어나온 수십 년 전의 역사 이야기는 아쉽고 또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이 소송사냥꾼이었는데, 그때 쓴 서평을 찾아 읽어보니 꽤나 혹평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전성기의 존 그리샴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도 서평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속죄나무가 일정 부분 그 그리움과 갈증을 해소시켜주긴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아쉬움 때문에 전성기의 존 그리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들과 사실감 넘치는 캐릭터 등 존 그리샴의 내공은 여러 번 감탄할 정도로 뛰어났고, 방대한 분량임에도 거의 오타가 없었던 완벽한 번역 덕분에 즐거운 책읽기의 시간이 됐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남은 아쉬움들은 존 그리샴의 초창기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달래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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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
정해연 지음 / 사막여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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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무척 빠른 작품입니다. ‘두 개의 시체, 두 명의 살인자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한 명의 살인자는 초반에 공개되고, 나머지 한 명 역시 달리 눈 돌릴 필요 없이 금세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심플한 구조지만, 이 작품은 누가 살인자?’라는 것보다는 ?’ 또는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재미를 전해줍니다.

 

더블의 외양은 형사 대 범인이라는 진범 찾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메인 스토리는 두 명의 살인자 간의 두뇌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두 살인자는 스타일은 달라도 그 뿌리는 비슷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됐는데, A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B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BA의 계획을 깨달은 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추격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이코패스의 살인 행각 지켜보기이상의 어떤 느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엔딩도 단순히 보여주기를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불쾌한 느낌마저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블의 경우,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연쇄살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이코패스의 본질에 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고, ‘진실은 무엇이고, 누가 범인인가?’라는 도식적인 결론 대신 잔혹하면서도 독특한 엔딩을 선택함으로써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문장이나 구성, 캐릭터 설정 등에서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 보이는 아마추어적 인상을 자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아쉬운 점을 두어 가지만 꼽아보면, 우선 안이한 구성 때문에 곳곳에서 긴장감을 떨어뜨린 점입니다. 후반에 반전의 맛을 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설정이 한 가지 있는데, 웬만한 독자라면 이 설정을 진작 눈치 챌 수 있게끔 이야기가 구성돼있습니다. 말하자면 셀프 스포일러라고 할까요?

캐릭터 설정도 쉽고 편하게 간 듯 보였는데, 가령 강남에 살면서 세련된 헤어와 의상은 물론 클래식을 즐겨듣는 사이코패스의 설정은 클리셰를 넘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또 아직 사이코패스로서 대단한 이력을 쌓은 것도 아닌 인물이 낯선 곳에서 발견한 시신을 보고 놀람이나 충격보다 살인범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미드 덱스터의 주인공이 아닌 다음에야 솔직히 오버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실제 덱스터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꽤 똑똑하고 철저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조차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상황만으로 상대방을 용의자로 몰아가는 장면도 있는데, 좀더 꼼꼼한 구성과 디테일한 설정으로 무장했다면 훨씬 더 고급스런 질감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을 보니 정해연의 전공이 로맨스였다고 하는데 더블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후속작(몇 년 후의 이야기든 프리퀄이나 비기닝이든)도 좋고 전혀 다른 소재의 이야기라도 괜찮으니 장르물 쪽에서 제대로 필력을 발휘한다면 아마 많은 독자들의 기대를 모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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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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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답게 애늙은이 같은 무심한 캐릭터인 오레키 호타로, 명가의 딸이며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신비함을 지닌 소녀 지탄다 에루, 호타로의 친구이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박학다식 정보창고 후쿠베 사토시, 후쿠베를 좋아하는 조금은 다혈질인 도서위원 여학생 이바라 마야카 등 이런저런 사연으로 폐부(閉部) 직전의 고전부에 모인 된 4명의 가미야마 고교 1년생들.

빙과33년 전인 1967, 가미야마 고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는 고전부 4인방의 활약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런저런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본능에 가까운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오레키는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외삼촌의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 지탄다에게 부탁을 받곤 나머지 고전부 멤버들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학원 청춘 미스터리는 가볍거나 치기 어린 애들 이야기라는 편견은 버린 지 오래지만, 매번 새로운 학원 청춘 미스터리 작품을 집어들 때마다 여전히 주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빙과역시 서너 번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던 작품인데,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피비린내라도 진동하거나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그녀가 죽은 밤처럼 맥주를 즐기는 대학생이라도 등장한다면 모를까, 왠지 달달하긴 해도 미성숙해 보이는 고1들의 고전부 시리즈는 정말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책꽂이에 꽂힌 빙과를 보며 늘 숙제처럼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긴 연휴 덕분에 작심하고 밀린 숙제 하듯 빙과를 꺼내 읽었습니다.

 

고백하자면,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탓인지 의외로 재미있고 유쾌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오레키의 시니컬한 태도는 기분 나쁘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고, (해설을 보고 동감한 부분이지만)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셜록 홈즈의 천재성까지 엿보여 고전부 멤버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폼 나는 주인공입니다. 그런 오레키에게 의지하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지탄다의 청초함도, 투닥거리면서도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후쿠베와 이바라의 통통 튀는 건강함도 모두 고전부 이야기가 시리즈로 이어지게끔 만들어준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4인방이 고전부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 초반 에피소드들은 평범한 일상 미스터리에 불과하고, 메인 사건이라는 것도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1’다운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웃음과 호기심, 적절한 긴장감을 끌어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런 평범함과 1’다운 메인 사건 때문에 실망감을 느낀 서평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제 경우는 오히려 그 또래에 걸맞는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겨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또래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던 것에 비하면 빙과는 캐릭터와 에피소드 모두 현실감 있게 설정됐다는 뜻입니다.

 

빙과는 그 또래에 어울리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파릇파릇한 성장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 때문에 후쿠베에게 회색이라 불리던 오레키는 고전부에서 만난 의외의 친구들 덕분에 이런저런 일에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 장밋빛으로 삶의 색을 변화시키며 성장합니다. 다른 멤버들 역시 고전부 활동을 통해 조금씩 변화를 도모하곤 하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어떤 성장과 변화를 겪을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33년 전의 진실 찾기 미스터리는 뭐랄까... 좀 부풀려 이야기하자면 억지스럽지 않은 경쾌한 서술트릭? 또는 해설에 언급된 것처럼, 문헌에 얽힌 비밀을 푸는 비블리오 미스터리? 아무튼,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추론을 거듭하면서 적잖은 즐거움과 의외성, 때론 독자들에게 같이 한번 풀어보시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만족감을 느낀 작품이었고, 당연히 이후의 고전부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빙과를 포함하여 다섯 편이 일본에서 출간됐고 그중 세 편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의 말대로라면 오레키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니 앞으로 이어질 고전부의 유쾌한 이야기들을 계속 기대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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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흩날리는 밤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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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3) 3월에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읽으면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록된 여섯 개의 단편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표제작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수록작 물고기의 교제는 제목만큼이나 애틋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수작이었습니다.

더불어 가나리야라는 아담한 맥주 바와 그곳의 주인장 구도 데쓰야의 캐릭터 덕분에 , 나에게도 그런 아늑한 아지트 같은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 좋은 기억이 아직도 잔잔히 남아있는데, 1년 만에 벚꽃 흩날리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후속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그때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을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몰려왔고, 괜히 마음이 들뜨고 기분 좋을 만큼의 미열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의 표지를 좌우로 반전시킨 듯한 디자인과 수록된 다섯 편의 소제목을 보면서 마치 너무나 먹고 싶지만 그 예쁜 모양을 무너뜨리기 싫은 케이크를 눈앞에 둔 듯 설렌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첫 작품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1년 만에 다시 만난 맥주 바 가나리야와 주인장 구도 데쓰야는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조금은 속세에 물든 느낌이랄까? 아니면 은밀하게 숨겨놓고 혼자 즐기고 싶었던 단골집이 사람들의 입을 탄 덕분에 고유의 향을 잃고 북적거리는 맛집으로 전락한 느낌이랄까? 딱히 정리하긴 힘들지만, 분명 예전의 묘한 고요함과 아스라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수록작마다 낯선(?) 손님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대화는 왠지 수다스럽게 들렸으며,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에피소드들은 어딘가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겼습니다. 사람의 인연을 억지로 맺어주는 듯한 ‘15주년’, 지나친 비약 때문에 작가가 의도했던 애틋한 정서가 제대로 살지 못한 벚꽃 흩날리는 밤’, 풍자인지 판타지인지 구분할 수 없던 개의 통보등 앞의 세 편은 구도 데쓰야의 맥주 맛과 요리 솜씨 외에는 대체로 아쉬움과 실망만 남겨줬습니다.

 

그나마 뒤의 두 편인 나그네의 진실약속이 다소 기타모리 고의 정서를 대변한 듯한 작품들이었는데, ‘꽃 아래 봄에 죽기를에 실린 작품들이 미스터리가 전개되는 와중에 불쑥 눈가를 붉게 만드는 이야기였다면, 이 두 작품은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말하자면 건조한 느낌이 훨씬 더 강했습니다. 물론 독특한 전개와 예상치 못한 반전 덕분에 흥미롭게 읽히긴 했지만, 적어도 어딘가 한 곳쯤에서 진한 애틋함이 솟아나 눈가를 붉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던 바람은 끝내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단편집의 특성 상 모든 수록작에게 호평을 줄 수는 없지만, 전작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한두 편이라도 마음을 움직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랬다면, 이제 봄은 다 가버렸고 벚꽃 역시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지만, 짧지만 화려하고, 화려하지만 애틋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을 잠시나마 조용히 음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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