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eleven 일레븐
쓰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11편의 수록작을 다 읽고도, 딱히 어떤 장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특이한 단편집입니다. 쓰하라 야스미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워낙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작가인데, 이 단편집 역시 기담이나 SF에서 평범한 수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에 가깝습니다. 몇 편만 골라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면...

 

오색 배

팔 없는 청각장애인 가즈오, 무릎 관절이 거꾸로 달린 기요코, 분리된 샴쌍둥이 사쿠라, 다리가 없는 아버지 유키노스케 등은 배에 거주하며, 기형의 몸으로 흥행을 벌여 살아갑니다. 어느 날, 소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구단이 나타나면서 이들의 삶에 격변이 시작됩니다.

 

미소 짓는 얼굴,

어느 날인가부터 안구에 낀 이물질마냥 시야 한쪽에 등장했던 형체가 점차 오래 전 헤어진 기누코의 미소 짓는 얼굴로 변해갑니다. 두 사람은 조각가와 모델로 만나 연인이 됐으나 끔직한 사건으로 결별한 바 있습니다. 안구 속의 기누코의 얼굴은 점점 커지고, 급기야 의 얼굴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호기심으로 인해 우물에 빠져죽은 할머니 때문에 어머니는 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원천봉쇄 해왔습니다. 어느 날, 친구 미와의 유혹으로 소설가가 자살한 까마귀 저택으로의 가출을 감행하는데, 그곳에서 소설가의 망령인 을 목격합니다.

 

테레민 양

음악을 통한 신경증 치료의 일환으로 마이크로칩 미진코를 뇌에 삽입한 마리코는 어느 날 유리오와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리아를 부릅니다. 유리오가 내뿜은 특유의 파동에 마리코 뇌 속의 칩 미진코가 반응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연으로 유리오와 결혼하게 되지만 마리코의 삶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기리노 나쓰오 특집에 게재됐던 엽편 소설 기리노’, 남편과 결별 후 15년 간 대형견 크라켄만 4마리를 키워온 여인의 이야기 크라켄’,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불륜 미스터리 ‘YY와 그의 주검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오색배미소 짓는 얼굴, 였는데, 특히 미소 짓는 얼굴, 는 영상물로 만들면 오싹한 기담공포물이 될 만한 작품입니다.

 

단편집은 장르를 불문하고 비교적 빨리 읽히는 형식이지만, ‘일레븐은 꼬박 이틀 반이 걸릴 정도로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읽으면서 번역자가 꽤 고생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려운 문장들이었겠다 싶은 작품도 꽤 있었고, 캐릭터나 설정이 너무 특이해서 한 번 읽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갈피를 끼워놓았다가 반나절 쯤 후에 다시 읽으려고 하면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결국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권영주의 매끄러운 번역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단편집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담이나 SF, 환상물의 경우 상황을 특이하게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레븐은 상황보다 캐릭터 설정에 주력한 작품이 많습니다.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어디에나 존재할 법한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명백한 기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감을 상승시키고 공포감이나 긴장감도 더욱 밀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기담집은 마니아 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중성을 얻기 쉽지 않은데 일레븐의 경우 11편의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어서 취향에 따라 깊이 꽂힐만한 작품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일부 인상적인 작품들 때문에 쓰하라 야스미에 대해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전작들을 전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아닙니다. 비교적 대중적이라는 평을 들은 작품들부터 하나씩 읽으면서 쓰하라 야스미를 머스트 리드목록에 올려도 될지 찬찬히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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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
손선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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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은 옆방에 사는 수상한 두 남자, 손선영-오현리와 벽간 소음을 통해 인연을 맺습니다.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고양이 연쇄살해 사건을 계기로 운명적인(!) 인연으로 발전합니다. 함께 살묘범(殺猫犯)을 뒤쫓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극물의 존재를 발견하고, 일련의 고양이 연쇄살해가 살인을 위한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는 추론에 다다른 세 사람은 용인경찰서 장하나 경사의 도움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어 우려했던 독극물 살인이 실제로 벌어진 현장에서 송파경찰서 백용준 형사와 맞닥뜨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민간인 신분으로 수사에 참여하게 된 일행은 사건의 이면에 숨어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편, 잠실희망병원에는 17살 아들 지유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정상우-양영자 부부와 어머니에게 이식할 심장을 기다리는 박성호 등 두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꺼져가는 가족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였고, 불법적인 장기매매는 물론 이식의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생각까지 품고 있습니다.

 

블랙 코미디 풍의 제목과 표지 때문에 유쾌 발랄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예단할 독자도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수준 높은 한국 장르물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웃집~’은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색깔을 지닌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코지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쾌함과 긴장감을 쉴 새 없이 교차시킨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한없이 무겁고 음울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식을 기다리는 두 가족의 초조함과 극단적인 선택, 그리고 고양이 연쇄살해와 독극물 살인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목은 당연히 그런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28살의 좌충우돌 일러스트레이터 장수정과 10년 연상의 배 나온 추리소설가 손선영, 아버지 연배인 오현리의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소동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럭비공처럼 통통 튀어다닙니다. 특히 사랑싸움 하는 연인 같기도 하고,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파트너 같기도 한 장수정과 손선영의 위태위태하면서도 쿵짝이 잘 맞는 콤비플레이를 읽다 보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오현리, 장하나, 백용준 등 두 사람을 지원사격하는 조연들 역시 뚜렷한 개성과 적절한 분량을 통해 이야기를 탄탄히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몰입감과 긴장감을 살리는 결정적 역할은 사건의 몫입니다. 작가는 2011년을 뒤흔든 구제역 사건과 음지에서 자행되는 불법적인 장기매매라는, 어찌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테마를 한 이야기 속에 잘 엮어 넣었습니다. 특히 범행도구인 치명적인 독극물을 두 테마의 연결끈으로 설정한 덕분에 사실감은 물론 지금이라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공포심도 살려냈습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작품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방대한 영역에 걸친 꼼꼼한 자료조사, 또는 풍부한 직간접 경험들의 흔적입니다. 장수정을 당황하게 만드는 손선영-오현리의 현란하고 빈틈없는 말빨은 말할 것도 없고, 사건 관련 데이터, 다양한 캐릭터들의 인구사회학적 묘사를 세세히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집필에 임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대목도 여럿 있었는데, 가장 큰 건 리얼리티에 관한 것입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 새 민간인 신분인 세 남녀가 경찰 수사에 합류한 상황이 됐는데, 약간 얼렁뚱땅 넘어간 듯한 느낌이랄까,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할 때 읽는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손선영과 장수정의 추리과정이 별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간 점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조언이 주어지긴 하지만 치명적 독극물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나 구제역과의 연관성, 그리고 살인범이 노리는 이익을 추리하는 과정은 두 주인공이 별 고생 없이 작가가 안내한 대로만 따라간 느낌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미스터리 독자라면 뭔가 뒤집어지는엔딩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거의 정공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딱 기대한 만큼의 엔딩을 만났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봉인된 추리 대담에서 작가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하나쯤 빵 터지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탓에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작가가 직업은 물론 이름까지 본인과 같은 주인공을 내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선영은 미드 캐슬에서 여형사를 돕는 추리소설가 나단 필리온을 연상시킬 만큼 여러 가지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였습니다. 손선영-장수정 콤비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현실만 잘 극복한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시리즈의 탄생도 기대해 볼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용인서의 장하나 경사와 송파서의 백용준 형사가 이들의 지원군이 됐으니, 어쩌면 그런 약점은 차기작부터는 염려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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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불야성 시리즈 1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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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의 대표적 환락가이자 중국계 마피아들이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신주쿠 가부키초. 일본인과 대만인의 피가 섞인 반반(半半)으로 태어난 탓에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장물아비 류젠이(일본명 타카하시 켄이치)는 신주쿠 일대 마피아 간의 알력에 휘말려 과거 자신의 단짝이었던 우푸춘을 사살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나츠미가 등장하고, 그녀가 우푸춘과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확인한 류젠이는 우푸춘의 행방을 쫓기 위해 도리 없이 그녀와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션이 성공해도 살아남을 공산이 적다고 생각한 류젠이는 빈틈없는 전략으로 상대방을 속이며 이중삼중의 보험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피아들의 위협은 갈수록 살벌해집니다.

류젠이의 계획대로라면 신주쿠 일대가 총성과 피바람으로 뒤덮이게 될 거사 당일 아침. 나츠미의 도움 속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싹쓸이하고 자유로운 삶과 조우할 것을 기대하던 류젠이는 예상치 못한 제보를 통해 나츠미의 정체를 파악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거사의 순간, 류젠이의 각본에 없던 상황이 벌어지면서 신주쿠 일대는 대혼란에 빠지고, 류젠이와 나츠미, 우푸춘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계 마피아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장한가를 뒤늦게 구한 뒤 문득 시리즈 첫 편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불야성을 꺼내들었습니다. 최근 읽은 작품 대부분이 비교적 소프트한 이야기들이라 머릿속 어디선가 독하고 쎈 이야기가 그리웠던 탓인지 2년여 만에 다시 읽은 불야성은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전해줬습니다.

 

피와 살이 튀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불야성은 잘 짜인 대중적 액션 스릴러이면서 동시에 조금은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선정적이고 잔인한 하드코어 물입니다. 폭력과 성()의 묘사는 눈앞에서 지켜보듯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고,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듯 그야말로 막장에 가까운 상황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불야성을 비롯한 시리즈 전편이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은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호응을 이끌어낸 매력들 가운데 딱 한 가지만 꼽아보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캐릭터들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류젠이를 어린 시절부터 키웠으며 가부키초를 손안에 틀어쥔 노회한 대만인 양웨이민, 가부키초의 이권을 나눠가진 상하이 출신의 위안청구이와 베이징 출신의 추이후, 그리고 폭주하는 다혈질 건달 우푸춘과 양파껍질처럼 비밀투성이인 여인 나츠미, 그 외에도 등장하는 크고 작은 캐릭터들 모두 뚜렷한 존재감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생존을 위한 최고의 방편으로 거짓말과 배신을 일삼는다는 점입니다. 진실과 진심은 마지막 베일이 벗겨질 때까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상대의 거짓말과 배신을 당연하게 여겨 그것을 뒤엎을 또 다른 거짓말과 배신을 준비합니다. 또한 자신을 키워주거나 자신이 키운 존재, 평생의 우정을 나눈 친구나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연인은 물론 피를 나눈 형제자매조차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배신을 통해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 어느 캐릭터도 아군이나 적군이라 확신할 수 없고, 거짓말을 뛰어넘는 거짓말, 배신을 뛰어넘는 배신을 감행하는 캐릭터들을 보면서 한 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캐릭터들을 현실감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가부키초의 잔혹한 역학관계입니다. 복수가 결정되면 전멸을 불사하고 전면전을 펼치지만, 장래의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보스가 피살당하더라도 기꺼이 적과 협상하여 이권을 나눠 갖는 탁월한 정치적 촉각과 중재력을 가진 것이 중국계 마피아입니다. 그렇기에 수십 년 간 피비린내를 진동하며 이어온 권력 투쟁 속에서도 어느 한 쪽이 절대적 우위에 서지 못하게끔 합의와 거래를 반복해왔습니다.

늘 전운이 감도는 공간적 배경과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캐릭터들 덕분에 불야성은 단 한 페이지도 마음 편하게 쉬어가는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독자에 따라 초중반부의 상황 설명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들조차 면밀한 계획에 따라 깔린 일종의 복선이라는 점을 오래지않아 확인하게 됩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류젠이와 나츠미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하게 됐는데, 두 사람을 규정하는 공통점은 반반(半半)이라 불리는 불행한 태생입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혼혈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물론 가부키초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류젠이가 어린 시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첫 살인을 하게 된 계기도, 나츠미가 겪은(혹은 자초한) 지옥 같은 소녀 시절의 기억도 그 단초는 반반으로 태어난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업보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류젠이는 싸움에 능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빛나는 카리스마를 지닌 히어로도 아닌 겁 많고 소심한 뒷골목 건달 가운데 하나로, 터프한 천하무적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독하고 영리하며, 타협할 줄 모르는 반골기질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나는 혼자인 게 좋다. 혼자 살다 혼자 뒈진다. 일주일 앞일을 고민해본 적이 없어. 그런 짓은 무의미하니까. 일단 오늘 살아남는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그러니까 난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아.”

 

그런 류젠이가 지상 최악의 팜므 파탈 나츠미를 만나면서 위태로운 행보를 걷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 속에 감춰진 비밀이 결국 자신을 향한 비수가 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류젠이는 나츠미에 관한 한 자신의 모든 원칙을 무너뜨리고 파멸을 향해 폭주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츠미가 자신과 똑같은 종()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인물 중에서도 최악의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나는 나츠미를 떨쳐 낼 수가 없다. 나츠미는 나와 같은 장소에 태어난 생물인 것이다. 나이프로 나츠미의 몸을 난도질하여 모든 살을 내 위 안에 넣어두고 싶었다. 또는 반대로 나츠미가 나를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나츠미의 손으로 내 거지같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별 군말 없이 지옥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신주쿠를 피로 물들인 그날의 거사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밝혀진 그녀의 진실 때문에 류젠이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고, 엔딩은 비극을 향해 치닫습니다. 가부기초의 중국계 마피아 간의 폭력적인 하드코어 스토리는 실은 닮은꼴이면서도 공존할 수 없었던 두 남녀를 위한 일종의 병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파국을 향해 폭주하는 류젠이와 나츠미의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들은 파괴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선정적이면서도 애틋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불야성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읽은 불야성의 느낌은 엔딩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강렬하고 충격적입니다. 조만간 역시 두 번째로 읽게 될 진혼가도 크게 다르지 않을 느낌을 줄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장한가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을 마쳐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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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별장의 모험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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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쿠와 다카치, 보안 선배와 우사코 등 4총사는 R고원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기이한 별장과 마주합니다.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내부에는 세간은 물론 사람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싱글침대와 냉장고 속의 96개의 맥주캔이 전부였습니다. 4총사는 무단침입의 죄도 잊은 채 냉장고 속의 맥주를 마시며 별장의 정체와 용도에 대해 밤샘 논쟁을 벌입니다.

다음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4총사는 맥주와 수면부족으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보안 선배의 집에 모여 끝장 토론에 들어갑니다. 아무도 반박 못할 정도로 명쾌한 다카치의 추론 덕분에 4총사의 논쟁은 마무리 될 뻔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닷쿠는 모두의 가설을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맥주별장의 모험에 앞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국내 출간작 3편을 모두 읽었고, 매 작품마다 기발한 설정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작가의 뇌구조에 흥미를 느껴왔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정말이지 궁금합니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괜한 엄살(?)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공감할 정도로 맥주별장의 모험은 흔히 보기 어려운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에서도 엿볼 수 있듯 맥주별장의 모험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사건 현장엔 가보지도 않고 관계자의 진술도 듣지 않은 채 단지 추론만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장르를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 4총사에게 주어진 단서는 그저 맥주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괴한 별장이라는 공간뿐이고, 그러다 보니 논쟁은 사건의 진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100% 상상에 의해서만 전개됩니다.

불륜 남녀의 밀회 장소라는 주장부터 포르노 도촬을 위한 세팅, 아이를 유괴하거나 벌주기 위한 준비, 친구를 놀라게 할 깜짝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상상 가능한 모든 스토리가 만취한 안락의자 탐정들에 의해 제기됩니다. “진상 따위 아무래도 좋아.”,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같은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라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멘트들과 함께 말입니다.
말하자면, 무슨 사건인지, 사건이 맞긴 맞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4총사가 벌이는 일종의 극단적인 논리 대결이 메인스토리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취향 때문에 쉽게 몰입하긴 어려웠지만, 4총사가 돌아가며 내놓는 가설과 논리의 맹점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유의해가며 읽는 것은 색다른 재미이긴 했습니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난 후에도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쓸 생각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후반부의 작가의 말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안락의자 탐정소설은 현재 진행 중인 범죄사건을 다루는 것은 기술적으로 무리다.”라는 명제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스스로 무모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논리의 극한까지 달려보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실험성과 파격성은 독자들의 호불호를 극단적으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데, ‘맥주별장의 모험은 그 간극이 여느 작품보다 무척 클 것으로 보입니다. 끊임없이 가설을 제시하고 무너뜨리고 쌓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에게는 희귀한 수작이 되겠지만, 보편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에게는 조금은 곤혹스런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대중적인 면에서 전작들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할 수 있지만, ‘맥주별장의 모험은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왜 () 본격의 귀재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헨 본격=독특하거나 특이함을 뜻하는 헨()과 본격미스터리의 합성어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차기작 어린 양들의 성야4총사의 첫 만남과 당시 벌어진 충격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기닝에는 어떤 비밀과 충격이 실려 있을지, , 어떤 새로움과 독특함으로 그 무렵이 묘사됐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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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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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악천후로 뒤덮인 알프스의 지옥계곡 철제 다리에서 라우라 바이더가 추락사합니다. 추락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던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의 뇌리엔 라우라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악몽처럼 새겨져있습니다. 라우라의 절친이었던 마라 란다우를 통해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로만 예거는 라이텐바허 경감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라우라, 마라와 함께 등반을 즐기던 절친 그룹의 리키, 베른트, 아르민은 라우라의 죽음이 지난 여름 무리한 등반 도중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과 연관 있음을 눈치 채지만 그녀를 짝사랑했던 베른트를 제외하곤 애써 자신들의 죄책감을 부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그룹 모두를 위기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적잖은 희생자가 등장한 후에야 라우라의 죽음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사라진 소녀들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라진 소녀들은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설정은 호기심을 일으켰지만,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 모두 약간은 무리수를 둔 듯 보였기 때문인데, 그런 아쉬움들이 지옥계곡에서는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해소됐습니다.

 

마치 할리우드의 재난 블록버스터와 스릴러를 합쳐놓은 듯 이야기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갑니다. 악천후로 둘러싸인 지옥계곡을 오르내리는 장면과 후반부의 목숨을 건 추격 장면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서술한 것처럼 뛰어난 비주얼을 자랑하는데 마치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듯 리얼하게 묘사되어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이기심과 집착,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들에 대한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주요 인물들과 그 가족들 하나하나에게 부여된 불행한 과거사와 피치 못할 사연들은 그들이 겪고 있거나 곧 겪게 될 비극적 운명의 예고편처럼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마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연이어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은 비교적 노골적이고 상세하게 그려지는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반응만을 노린 꼼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증오심과 희생자의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절하게 구사된 묘사들이었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빙켈만의 전작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적잖이 해소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슷한 종류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큰 점은 범인의 캐릭터와 범행 동기입니다.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초반부터 독자에게 노출됩니다. 현재 이야기와 교차로 편집된 챕터 속에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어떻게 라우라의 삶에 끼어들게 됐고, 왜 살인마가 됐는지 조금씩 드러나게 되지만, 그 부분에서 설득력과 개연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마치 그 안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임이 분명한 밀실살인사건으로 설정해놓곤 나중에 가서 실은 범인은 밖에 있었다라는 고백을 들은 느낌이랄까요? 또는, 나름 범인과 범행동기에 대해 열심히 단서를 모아가며 쫓아갔더니 애초 그런 노력이 필요 없었을 만큼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를 발견한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가 누가 범인이냐?’보다는 ?’ 쪽에 더 주력했다는 점은 읽는 내내 이해됐지만, 그러기엔 잘 깔아놓은 설정들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느낌은 사라진 소녀들에서도 비슷하게 받았었기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훌륭한 설정과 뛰어난 심리 묘사, 재미와 긴장을 극대화시킨 이야기 등 페이지 터너로서의 장점이 많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런 장점을 가려버린 결정적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작품입니다.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인 만큼 그의 신간이라면 안 읽고는 못 지나갈 것 같고, 이왕이면 다음 작품에서는 독자들의 뒤통수를 칠만한 범인과 범행동기, 누가 범인이냐?’?’를 함께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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