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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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틀린 인연으로 맺어진 후 갈등과 불화 속에 살다가 기어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잃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3대의 이야기가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벽돌 외관의 양옥집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조부모 대에 일어났던 광기 서린 부부간의 살인사건에 이어 부모 대에 이르러서는 강도의 행각으로 추정되는 참사가 일어났고, 이제 비극은 자식 대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제도권의 법 집행에 환멸을 느껴 판사를 그만두고 어둠의 변호사를 자청한 고진은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이유현과 함께 붉은 벽돌집의 비밀을 풀기 위해 뛰어듭니다. 하지만 수사는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철벽같고 범행 동기는 그저 모호할 뿐입니다. 더구나 수사가 진행되던 중 연이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고진은 그때까지 당연한 사실로 여겨온 모든 단서와 전제들을 뒤집기에 이릅니다.

 

신간 유다의 별’(‘고진 시리즈네 번째 작품)을 계기로 그동안 소문만 들어왔던 도진기의 작품을 접하게 됐습니다. ‘유다의 별을 읽기 전에 시리즈 전부를 읽기는 어렵더라도 주인공 고진의 데뷔만큼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을 펼쳐들었습니다.

 

범인과 피해자 모두 일가족 중에 있다는 설정 하에 진실을 찾는 내용이다 보니 밀도와 긴장감은 높은 반면 이야기의 폭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붉은 집 가족들의 캐릭터를 있는 대로 비틀어 설정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합니다. 재혼으로 인한 두 가정의 합체, 입양 이후 태어난 친자식, 이해가 엇갈리는 유산상속 외에 불륜, 별거, 시기, 질투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마약, 광기, 살인이라는 참극과 버무려냅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고 진범이 잡히더라도 통쾌함보다는 불편한 여운만 남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도 고진은 정의가 실현됐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와 탐욕에 대한 진절머리 끝에 남는 덧없음과 허허로움만을 느낀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는 독자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마지막 반전 카드를 마련해놓았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진범과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두어 차례 반전이 이어지지만, 가장 매력적인 반전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가 왜 판사라는 제도권의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 죄와 벌에 대한 그만의 철학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암시해주는 순간인데, 덕분에 덧없음과 허허로움은 어느 새 사라지고 오히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의 고진의 활약을 무척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실 읽는 동안 고진의 캐릭터 때문에 조금 오락가락한 적도 있긴 합니다. 주로 함께 수사하는 이유현의 입을 통해 묘사되곤 하는데, 고진은 무척 게으르고 매사에 무심한 편이며 30대지만 50대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연루된 20대 여성에게 빠진 나머지 평소 고진답지 않은 열정 넘치는 수사를 펼치기도 합니다. 또 고전적인 탐문과 알리바이 조사에만 주력하다 보니 중반부까지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결국 후반에 이르러 고진만의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휘되고, 왓슨 앞의 홈즈처럼 조금은 거만한 자세로 진실을 밝히면서 그의 진짜 매력이 드러나지만 아무튼 초중반까지는 기대가 너무 컸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고진의 캐릭터라든가 동어반복식으로 전개되는 알리바이와 탐문, 또 일부 캐릭터의 무리한 설정 등 아쉬운 점들은 있었지만,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엔 모자람이 없는 데뷔작이었습니다. 신간 유다의 별을 먼저 읽어야 하는 상황이라 시리즈 2~3편인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정신자살은 건너뛰게 됐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도진기의 나머지 작품들도 Must-Read 아이템에 넣어놓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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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슬립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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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때 오버룩 호텔에서 겪은 악몽 같은 기억들(전편인 샤이닝의 내용)은 댄(대니) 토런스를 아버지 잭 못잖은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습니다. 허접한 일자리나마 매번 알코올 때문에 날려버렸던 댄은 뉴햄프셔의 프레이저에 이르러 빌리 프리먼과 존 돌턴을 만난 뒤 고통스러운 금주(禁酒)의 시간과 함께 호스피스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닥터 슬립은 죽음을 앞둔 자에게 마법처럼 평안한 임종을 맞이하게 해주는 댄의 별명입니다.

댄이 새 삶을 시작할 즈음, 인근 마을 애니스턴에서 어마어마한 샤이닝의 소유자인 아브라 스톤이라는 여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꿈을 통해 9.11 테러를 암시할 정도로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인 아브라는 3살이 되자 댄에게 ‘hEll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한편 로즈 오하라가 이끄는 트루 낫(True Knot)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입니다. 그들은 14대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방랑하며 살아갑니다. 이유는 나이를 먹지 않는 그들에게 쏠릴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남북전쟁이나 스페인전쟁 때부터 살아오던 자도 있는데, 그런 영생의 힘은 스팀이라 불리는 정기(精氣) 덕분이고, 그 정기는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추출할 수 있습니다. 댄과 아브라가 트루 낫의 레이더에 걸려든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3살이 된 아브라는 댄과 함께 트루 낫 일당에 맞서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1~2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도 그만큼 길어졌지만, 짧게 요약하면 샤이닝의 능력자 댄과 아브라가 뱀파이어와 유사한 트루 낫 종족과 벌이는 숨 막히는 대결 이야기입니다. 공포물로서의 매력은 샤이닝에 비해 떨어지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오락물로서는 제격인 작품입니다.

 

샤이닝의 독자라면 오버룩 호텔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5살 소년 댄의 삶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다들 댄이 악몽을 딛고 평범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버룩 호텔의 망령들은 쉴 새 없이 댄 앞에 나타났고, 댄은 그 망령들을 떨치기 위해 술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호스피스로서 새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초반부는 오버룩과 알코올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하지만 애처롭기까지 한 댄의 인간극장같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 반해 뛰어난 샤이닝 능력자 아브라 스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댄과 그녀의 관계는 샤이닝에서 능력자이자 요리사였던 딕 할로런과 어린 대니의 그것과 마찬가지인데, “언젠가는 네가 선생님이 될 차례가 찾아올 거다. 학생이 나타날 거야.”라는 딕 할로런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진 것입니다. 댄과 아브라는 텔레파시를 통한 소통은 물론 심지어 바꿔치기라 불리는 일종의 유체 이탈, , 두 사람의 영혼이 상대방의 몸으로 바꿔 들어가는 것까지 가능한 관계가 됩니다.

 

중년의 댄과 10대 소녀 아브라는 치유성장통이라는 교집합을 지닙니다. 샤이닝이라는 능력 때문에 운명처럼 감내해야 했던 댄의 통과의례들, 그리고 아브라 앞에 놓인 이제부터 하나씩 겪어나가야 하는 통과의례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하며, 각자의 성장통을 잘 견뎌냅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개입하지만, 아브라에게 있어 댄은 훌륭한 선생님이자 에어백처럼 든든한 보호막으로, 댄에게 있어 아브라는 지켜줘야 할 소중한 존재로 애틋하고 끈끈한 인연을 이어갑니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 덕분에 공포물로서의 미덕은 많이 감소됐지만, 스티븐 킹은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을 통해 감소된 미덕을 보충시킵니다.

 

줄거리에서 설명한대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은 샤이닝 능력자의 목숨을 통해 얻은 스팀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정기를 보충합니다. 때론 터닝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일반인을 트루 낫으로 변신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이 샤이닝 능력자에게서 스팀을 얻는 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순수하고 풍성한 샤이닝을 얻기 위해 어른보다는 아이를 선호하는 것은 물론 테러나 자연재해나 전쟁이 야기한 대참사를 다량의 스팀을 얻을 수 있는 호기로 삼습니다.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극단적인 악마성은 기상천외한 설정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닥터 슬립의 아쉬운 점 중 역시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 때문이었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그들이 좀더 강력한 존재였다면..’이란 아쉬움입니다. 일부를 제외하면 트루 낫의 멤버들은 예상 외로 유순했고, 그들이 스팀을 얻기 위해 벌이는 잔혹한 행각들 역시 기대만큼 많이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결코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지만, 댄과 아브라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기엔 로즈 오하라와 트루 낫의 스펙은 처음부터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닥터 슬립전에 일부러 샤이닝을 구매해서 읽었는데, 그러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샤이닝을 건너뛰고 닥터 슬립을 읽어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오버룩 호텔의 끔찍한 유산들이 닥터 슬립곳곳에서 재차 그려지는데다, 무엇보다 댄 토런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샤이닝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관한 한 초보 또는 무관심 상태였지만, ‘샤이닝닥터 슬립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첫 장편인 캐리살렘스 롯’, ‘애완동물 공동묘지등 초기작과 대표작을 기회가 될 때마다 한 권씩 마스터할 생각입니다.

좀 무리한 발상이지만, 언젠가 중년에 이른 아브라 스톤이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필로그 격인 아브라 스톤의 15번 째 생일 장면을 읽으면서 문득 오버룩 호텔 3편 격인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이게 샤이닝인지 막연한 기대감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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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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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역사를 가진 오버룩 호텔은 혹독한 기후 탓에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문을 닫습니다. 그 기간 동안 관리자로 취업한 잭 토런스는 가족과 함께 아무도 없는 호텔에 머물게 됩니다. 잭은 단편소설과 희곡을 쓰며 교사로 재직했지만, 치명적인 알코올중독과 학생 폭행으로 인해 해직됐고, 그의 폭력은 가족을 향한 적도 있습니다.

한편 아들 대니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5살 소년입니다. 같은 능력을 지닌 오버룩 호텔의 요리사 딕 할로런에 따르면 그것은 빛(샤이닝), 환상, 예견이라 부르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오버룩 호텔에서의 생활이 결정되자마자 대니는 그곳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 잭과 아내 웬디, 대니 앞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생물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오버룩 호텔이 내뿜는 광기는 세 사람을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은 물론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붙입니다.

 

스티븐 킹의 닥터 슬립서평단에 뽑혀 책 배송을 기다리는 동안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샤이닝을 읽기로 했습니다. “36년 만에 출간된 샤이닝의 속편이라는 홍보문구처럼 닥터 슬립샤이닝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이제는 중년이 된 대니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36년 전 5살 소년이던 대니가 겪은 참극을 읽어야 닥터 슬립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스티븐 킹의 대표작 샤이닝을 뒤늦게나마 읽게 됐습니다.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호러물이나 스티븐 킹의 마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닙니다.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기 힘든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오버룩 호텔의 카리스마는 때론 난해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 내용을 복기하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오버룩 호텔 곳곳에 배치된 여러 가지 소품들입니다. 잭이 수시로 씹어 먹는 아스피린 계열의 엑세드린은 그의 광기를 부추기는 촉매제 같았고, 호텔 곳곳의 크고 작은 소품들은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 상세하게, 또 곧이어 벌어질 어떤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긴장감 있게 묘사됐습니다. 잭에게 창작욕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스크랩북, 스스로 움직이는 낡은 엘리베이터, 살아 움직이는 동물 전정나무, 그리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보일러 등은 초반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언급되다가 사건과 함께 그 의미를 증폭시키면서 오버룩 호텔이 내뿜는 악마적 기운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소품못잖게 인상적이었던 건 오버룩 호텔 곳곳에서 수시로 들리는 환청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입니다. ‘또 이성을 잃었군, .’, ‘그곳 가까이 가지 마라... 절대로.’, ‘이리 나와, 이 새끼! 이리 나와서 남자답게 벌을 받아!’ 등 주로 잭과 대니가 듣곤 하는 이 기괴한 목소리는 내용도 섬뜩하지만 특이한 방식으로 서술돼서 더 눈길을 끌었습니다. 즉 따옴표나 괄호로 표시된 채 문장의 한 가운데 툭툭 삽입되거나 맥락 없이 끼어들곤 하는데, 처음엔 이런 방식이 너무나 낯설기도 하고 그 의미조차 알 수 없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여러 차례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 들리는 듯한, 즉 오버룩 호텔의 환청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스티븐 킹의 작품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그의 세계관이나 독특한 서술방식이 낯설 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다 읽은 뒤 몸과 머리가 얼얼한 상태에서 읽은 해설 : 스티븐 킹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덕분에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샤이닝을 읽으면서 이건 뭐지?”라고 의문을 품었던 부분들이 적잖이 해소되기도 했습니다. 본편의 줄거리가 공개돼있어서 해설을 먼저 읽어선 안 되겠지만, 스티븐 킹의 초심자라면 한번쯤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입니다.

 

(해설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스티븐 킹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 고립된 공간과 고립된 인간(가족), 또 거기에서 비롯되는 끔찍하고 기이한 비극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연상시켰습니다. 토속적인 느낌이 강조된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서도 비극은 고립과 밀접하게 연관돼있습니다. 또한 가족염력이라는 개념 역시 두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코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선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샤이닝에서 감지된 것은 미국식 호러는 왠지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인 현상일 거라는 문화적 선입견 때문인 듯 보입니다. 어쨌든 스타일이나 화법 자체가 전혀 다른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호러물을 위해 비슷한 코드를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워 보인 건 사실입니다.

 

책이 배송 되는대로 닥터 슬립을 읽을 예정인데, 아마 샤이닝을 읽지 않았다면 작품에 대한 이해나 몰입감이 훨씬 떨어졌을 거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의 호러물을 연이어 읽는 것이 정신건강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36년이 지난 후 대니 토런스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또 이번에는 무슨 기막힌 상황과 마주칠지 궁금하다 보니 닥터 슬립이 배송되는 즉시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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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량 - 마지막 15분의 비밀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김인순 옮김 / 예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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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 섹스는 물론 술과 담배까지 금지할 정도로 엄격한 교리를 표방해온 엘로힘 교회에서 지역목자와 상담역이라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던 남자들이 연이어 독살당합니다. 율리아 뒤랑은 프랑크푸르트 경찰청의 동료 형사들과 탐문을 이어가던 중 피살자들이 실은 추악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범인은 피살자들과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뒤랑의 탐문과 추리는 사소한 단서들 외에는 계속 헛발질만 날릴 뿐입니다.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피살자들의 난잡한 과거사가 수사의 핵심으로 떠오르지만, 대부분 엘로힘 교회 신도인 사건 관련자들과 유족들은 굳게 입을 다뭅니다. 그 사이 교회와는 연관 없는 희생자가 나타나자 뒤랑은 패닉에 빠집니다.

 

율리아 뒤랑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두 전작 - ‘영 블론드 데드’, ‘12송이 백합과 13일 간의 살인’ - 때보다 뒤랑은 더 많은 맥주를 즐겨 마시고, 더 많은 담배를 입에 달고 삽니다. 이번에 그녀가 맡은 사건은 피살자들의 훼손 상태만 놓고 보면 전작들보다 덜 잔혹하지만, 사건의 배경과 동기는 역시 가족이 연루된 끔찍한 과거사를 중심으로 설정돼있습니다.

 

피살자들의 가족은 하나 같이 폭압적이고 경직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피살된 가장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종교에 결부시켜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집밖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탐욕과 욕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삶과 그 가족을 붕괴시키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막장에 콩가루까지 버무린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전형들입니다. ‘가족이 안식처이자 보호벽이 아닌 상처를 내는 흉기로 존재할 때 그것은 타인보다 더 지독하고 무자비하게 작동할 따름입니다.

 

범인을 잡아야 하는 입장임에도 피살자들의 추악한 단면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뒤랑은 욕지기와 함께 지금 자신이 꿈꾸고 있는 행복한 가족에 대해 회의를 느낍니다. 그녀가 만나고 있는 베르너 페트롤은 유부남입니다. 불화 중인 아내와 곧 이혼할 거라며 뒤랑과의 행복한 미래를 몇 번씩 맹세하지만, 뒤랑은 그의 말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한편에선 수사가 진척되면서 베일에 싸여있던 끔찍한 가족사가 한 꺼풀씩 벗겨지지만, 다른 한편에선 동료 형사 프랑크가 아내의 임신 소식에 마냥 행복해합니다. 뒤랑은 진척 없는 수사와 가족의 극단적인 양면을 지켜보느라 온종일 진이 빠집니다. 이렇듯 가족이라는 코드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니 치사량은 자극적인 느낌이 강했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무겁고 비극적인 인상을 풍깁니다.

 

1년 간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세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일정한 패턴의 전개와 엇비슷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범인 또는 피살자에게 불행한 가족사를 부여함으로써 무게감과 진정성을 어필합니다. 동시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합니다. 대중성이 우선되는 장르에서 이런 포장은 당연히 선호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에 수반되어야 할 복잡하고 치밀한 이야기 구성이 늘 부족하다 보니 왠지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좀 풀어서 설명하면, 뒤랑과 동료들은 같은 인물, 같은 장소를 며칠씩 연이어 탐문하고 뒤지고 다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적인 진척을 이뤄내진 못합니다. 간혹 촘촘한 눈썰미나 번득이는 추리가 빛나기도 하지만 기대하지 않은 제보나 예상치 못한 상황 덕분에 수사가 일보 전진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범인을 특정하게 되는 계기는 우연하고 엉뚱한 곳에서 발견됩니다. 등장인물은 많고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 자주 벌어지지만 단선적인 구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범인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고, 범행 동기는 알고 보면 조금은 맥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건 먹고, 마시고, 씻고, 갈아입는 뒤랑의 사생활은 과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미루어보아 이런 아쉬운 점들은 후속작에서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스릴러는 중독성이 무척 강합니다. 율리아 뒤랑 역시 희소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여형사로서의 중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단선적이고 이런저런 비슷한 아쉬움이 눈에 빤히 보이더라도 작가와 주인공이 쳐놓은 잔혹하고 끔찍하면서 다분히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레임은 쉽사리 외면하기 어려울 만큼 독자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뒤랑과의 만남에서는 이왕이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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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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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쿠보의 투고 때문에 오카야 맨션의 괴담을 조사하기 시작한 는 맨션과 인근 주택단지에 살고 있거나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거나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목을 맨 기모노 차림의 여자 형체, 그 여자의 허리띠가 사악사악 다다미를 쓰는 소리, 벽을 기어 나오는 아기의 형상, 찰싹찰싹 뺨을 만지는 차가운 촉감 등이 그것입니다.

와 쿠보의 탐문은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의 과거 속으로 향하고, 그곳에 오래 살았던 인물이나 절 관계자 등을 통해 거의 1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끔찍한 괴담의 실체와 근원을 조금씩 파악합니다. 오카야 맨션이 자리 잡은 터에서 오래 전부터 참혹한 사고, 방화와 살인, 자살 혹은 강제 동반자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알게 된 는 그 시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웬만한 괴담수집가도 다루기를 꺼려한다는 오쿠야마 괴담에 도달합니다.

 

오노 후유미 스스로 라는 작가로 등장하여 괴담의 근원을 쫓는 이야기로,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에 가까운, 그래서 독특한 공포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A 집안의 흉사를 조사하다 보니 B 집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B 집안을 조사하다 보니 그 선대에서 C 집안과 연루된 사건이 있었고...

결국 오카야 맨션과 주택단지에 현재 거주 중인 인물들에서부터 시작된 의 취재는 금세기 - 지난 세기 - 고도성장기 - 전쟁 후 - 전쟁 전 - 메이지&다이쇼 시대까지 이릅니다. 자연히 수많은 인물과 가계(家系)가 등장하고, 또 그만큼의 괴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합니다. (등장인물과 가문 이름 때문에 읽는 내내 꽤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이야기 구조 상 불가피한 설정이라 여기저기 메모를 남겨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잔예라는 제목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는데, 엔딩에 이르러서야 그 뜻을 미리 알고 읽었다면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두면 유용한 팁이라서 본문에서 잔예의 뜻을 소개한 문장들을 발췌, 편집해봤습니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촉예(触穢)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더러움에 접촉하면 전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특히 죽음에 의한 더러움은 사예(死穢)라고 해서 중시했다. 죽음은 모종의 더러움을 낳는지도 모른다. 더러움에 닿은 우리도 주술적으로 방어한다. 죽은 이를 공양하고 땅을 정화한다. 하지만 너무 강한 탓에 그러고 나서도 남는 무엇이 있다면? 그곳에는 더러움의 잔여물인 잔예(殘穢)가 남았다.”

 

즉 메이지와 다이쇼의 교체기에 일어난 끔찍한 죽음이 탄생시킨 더러움(사예)이 시간의 흐름과 주술적인 정화의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잔여물(잔예)로 살아남아 끊임없는 전염(촉예)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오염된 땅과 집이 그곳을 찾는 사람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오염된 자가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가 오염된 자를 방문할 때 전염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림이나 칼, 가구나 건축 자재 등이 매개체가 돼서 전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설 중 하나인 사또와 처녀귀신(부임하는 사또마다 첫날밤에 처녀귀신을 보고 죽어나간다는 이야기)처럼 붙박이 더러움이 아니라, 강력한 전염력을 지닌 탓에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무차별로 퍼져나가는 잔예라는 개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르포에 가까운 의 탐문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무섭다라거나 손닿는 곳에 책을 놓기조차 두렵다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늦은 밤, 혼자 책상에 앉아 읽다보면 자꾸 등 뒤가 서늘해지거나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문득문득 천장을 올려보거나 멀쩡한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막판에 진실이 밝혀지는 미스터리보다는 이런 종류의 무서움이 있다는 식의 평면적인 르포에 가깝기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흑사의 섬을 통해 호감을 갖게 된 오노 후유미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에 그치게 만든,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완독하는데 사흘씩이나 걸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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