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독 소사이어티 - 82명의 살인 사건 전문가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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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독 소사이어티는 장르가 참 모호한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대체로 사회 분야(사회과학, 사회문화, 사회문제 등)로 구분해놓았는데, 실은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집이면서 동시에 미스터리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기록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픽션에 못잖은 캐릭터와 참혹한 사건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미스터리보다 더 재미있게 짜여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 필라델피아에서 출범한 비독 소사이어티는 미제 사건 전문 명탐정 드림팀입니다. 유능한 현장 경찰에서부터 FBI, 세관, 마약단속국 등 다양한 기관의 인재들이 모여 경찰로부터 요청 받은 미제 사건을 함께 수사하고 해결합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라는 명칭은 1811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국립수사기관 쉬르테를 설립했으며 아르센 뤼펭, 셜록 홈스, 오귀스트 뒤팽 등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프랑수아 비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는 악명 높은 살인자, 바람둥이, 사기꾼, 노상강도, 탈옥자였지만 결국엔 위대한 탐정이자 파리 최고의 경찰이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경찰로서의 그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는 친구였다는 점, 그리고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친 사람에겐 관대했다는 점입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는 그런 미덕을 이어받아 미제 사건의 살인자들을 추적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피해자의 가족들을 보호하는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살인에 관한 한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활약은 짧게는 2년 전, 길게는 40여년이 지난 사건에까지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은 관할 경찰에 넘기고 자신들은 무대 뒤의 자리에 만족했는데, 언론은 자원 봉사로 일하는 일류 탐정들’,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카우보이들이라 불렀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은 적어도 이 작품이 커버하고 있는 2009년까지 계속 됩니다.

 

비독 소사이어티는 82명의 회원으로 구성됐지만 이 작품은 모임을 주도한 3명의 명탐정과 그들이 해결한 10여 건의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화려한 현장 경력을 자랑하는 전직 FBI 수사관이자 모임의 창시자인 윌리엄 플라이셔, 명석하지만 오만하기까지 한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 낭만적인 바람둥이에 직감과 본능에 의존하는 법의학 예술가 프랭크 벤더가 그들인데, 특히 이성적인 리처드와 감성적인 프랭크의 콤비 플레이는 비독 소사이어티의 백미입니다.

 

교도소에서 프로파일러의 이력을 쌓았고 현장 사진만으로도 범죄자의 성향을 정확하게 지목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리처드에 반해 프랭크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남들은 갖지 못한 3의 눈덕분에 영매에 가까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여 난제로 꼽히던 미제 사건을 거뜬히 해결합니다. 프랭크는 20년 전의 사진만으로도 현재 그 인물의 생김새를 유추할 수 있고, 피부 하나 없는 두개골만으로도 당시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극과 극을 달리는 성향 때문에 리처드와 프랭크는 내내 티격태격 으르렁대지만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서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들이 다룬 사건은 하나같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범인은 어지간한 픽션 속의 연쇄살인범보다 더 잔인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디스트들이고, 희생자들의 끔찍한 최후는 충격적이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묘사됐습니다. 특히 이 작품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읽으면서 느끼는 체감 충격은 훨씬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뉴욕 범죄조직의 두목, 자신의 가족이나 약혼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마, 소년소녀들을 성폭행하거나 살해한 신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희대의 사디스트들이 저지른 미제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3명의 조촐한 점심 모임에서 출발하여 산 자의 동료이자 죽은 자의 영웅으로 진화한 비독 소사이어티와 그 멤버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그런 조직의 탄생과 활동이 가능했던 사회적 환경에 대한 부러움까지 갖게 됩니다.

 

작품 후반부에 소개된 천재적인 프로파일러 리처드의 헬릭스 이론은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나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대목입니다. 헬릭스는 사디스트 유형을 단계적으로 나누고 각 단계의 특징을 설명한 그림이자 도표인데, 페티쉬나 관음증에서 시작된 범죄가 접촉도착증과 상대를 구속하려는 증상을 거쳐 신체의 일부 등을 기념품으로 수집하는 가학적 살인자의 단계를 지나 시간(屍姦), 흡혈, 식인이라는 사디스트의 최종적인 경지까지 진화하는 과정을 8단계로 나눈 후 실제 범죄 사례를 들어 자세히 묘사합니다. 새삼 그동안 읽은 픽션 속의 연쇄살인범들이 어느 단계쯤이었는지 떠오르기도 했고, 앞으로 만날 연쇄살인범들에 대해서도 나름 사전 지식을 갖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역자 후기에 보면 비독 소사이어티는 스릴러 소설의 쾌감,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인 미드의 흥미, 인간극장의 감동이 버무려진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작품이 인터넷서점에서 사회 분야로 분류된 탓에 많은 장르물 독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까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저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쓴 소리를 한 가지만 하자면, 요즘 출간되는 책들이 당연하다는 듯 오타를 남발하고 있다 보니 중반 정도까지 발견된 평균치 수준의 오타는 어떻게든 참아내고 읽었지만, 그 이후부터 점점 빈도도 높아지고 납득하기 어려운 오타까지 등장한 탓에 내용보다 오타에 더 신경이 쓰이면서 책읽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별 다섯 개도 부족한 작품이지만 오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옥의 티였습니다. 수많은 띄어쓰기 오류는 지적하기도 무안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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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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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관심은 있었지만 계속 미뤄두고 있던 편혜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첫 단편집 아오이 가든부터 최신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읽을 생각이지만, 아마 연이은 편혜영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한 달에 한 권 정도? 그 이상은 뇌나 마음이 소화하기 힘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먼저 읽은 작품의 뒷맛을 어느 정도 만끽한 후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된 편혜영 읽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감사한다라는 글이 들어가는 책의 첫 머리에 편혜영은 안녕 시체들이라는, 간결하지만 임팩트 있는 다섯 글자를 남겼습니다. 수록된 아홉 편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미 죽었든 곧 죽을 예정이든 여러 시체가 등장합니다. 한 번에 한두 편씩만 읽느라 미처 발견 못한 부분이지만, 후반부의 해설을 통해 수록작 대부분의 처음 또는 마지막 문장이 시체에 관한, 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묘사로 이뤄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저수지)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맨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문득,)

 

시체 또는 예비 시체들의 상태가 양호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에 잠겨 퉁퉁 불었거나 여러 조각으로 해체됐거나 단백질 결핍과 천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작품 첫 머리에 인쇄된 안녕 시체들이라는 다섯 글자가 수시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수록작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코드를 담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였습니다. 역병과 쓰레기가 발산하는 악취로 가득 찬 거리(아오이 가든), 왕피천에 떠오른 여자 시체와 쥐의 사체가 풍기는 시취(문득,), 개를 두들겨 잡던 삼촌의 온몸에 배어있던 개 냄새(만국박람회), 아내가 즐겨먹던 생선 눈알이 작동을 멈춘 냉장고 안에서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시체들), 고양이 삶은 냄새와 여자의 오줌 냄새가 뒤섞인 약국의 노린내(서쪽 끝) 등 실제 후각으로 느껴지듯 생생한 냄새의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냄새못잖게 시각적인 자극 역시 강렬했는데, ‘검은 물붉은 피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세기말적 풍경을 묘사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썩은 저수지를 가득 채운 검은 물(저수지), 음산한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아오이 가든), 왕피천 동굴을 흐르는 물줄기와 그것을 감싼 어둠(문득,), 기록적인 폭우로 토사와 하수와 분뇨에 삼켜진 소도시(만국박람회), 아내를 삼킨 뒤 사지를 토막내버린 U시의 깊고 거친 계곡물(시체들), 자궁을 찢고 태어난 붉은 피로 범벅된 아이 또는 개구리(마술피리, 아오이 가든), 폐경과 월경을 반복하며 피를 쏟아내는 엄마(아오이 가든)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독자의 시각과 후각을 점령한 채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 불편하고 거북하며 심지어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극단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사라지고, 엽기적인 공포와 괴담으로 가득 찬 무대가 펼쳐집니다. ‘해설은 이런 편혜영의 작품 세계를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녀만의 표현방식을 단테적 상상력, 카프카적 상상력과 결부시킵니다. 특히 주류 리얼리즘으로부터 폄하되어 온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서사를 적극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평범한 독자들이 이러한 변호를 , 그렇구나하고 끄덕끄덕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건 뭐지?’가 보편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저 역시 편혜영 읽기의 출발점에서 적잖은 충격과 암담함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설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여전히 동굴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지금은 이해 불가능한 그녀만의 세계를 어설프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 건 해설말미의 몇 줄 덕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들 속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소설 미학의 낯선 차원을 만나는 두근거리는 모험이 될 것이다.“

 

이 몇 줄을 의지 삼는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중단 없이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2007년에 나온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입니다.

 

사족으로.. 거의 동시에 또 한 명의 관심작가인 한강의 작품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읽을 계획입니다. ‘여수의 사랑이 그 시작점이 되는데, 늦어도 1년 안에 두 작가의 작품을 완독하려고 합니다. 편하게 읽히는 작가들은 아니지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정작 그 불편함때문이었기에 모난 돌 같으면서도 고유의 색깔을 품고 있는 두 작가의 세계를 만끽하는 책읽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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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동서 미스터리 북스 9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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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 년은 더 책장 신세를 면치 못했을 작품입니다. ‘도착의 론도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주인공의 추리소설 제목이 환상의 여인인데다 그것이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출판사에 따라 제목을 환상의 여자또는 환상의 여인으로 붙였습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1942년 작 ‘Phantom Lady’는 세 가지 버전으로 국내에 출간됐는데, 제가 읽은 것은 2008년에 27(초판 1977)를 찍은 동서문화사의 환상의 여자입니다. 초판이 워낙 오래돼서 그런지 등장인물의 이름도 최근 출간된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기됐습니다. 존 롬바드(엘릭시르)와 잭 론버드(동서), 버지스(엘릭시르)와 바제스(동서)가 대표적 경우인데, 이 서평에서는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 표기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홍보카피에 따르면 세계 3대 미스터리이며, 미스터리 팬이라면 읽지 않았어도 줄거리는 다 아는작품이라지만, 3대 미스터리라는 것이 일본에서 근거도 없이 갖다 붙인 타이틀이란 점은 진작 알고 있었고, 제 경우 나름 미스터리 팬을 자처하는 편이지만 무슨 이야기인지조차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고, 아직 못 읽은 고전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은 숙제나 의무감 같은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스콧 헨더슨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아내와 다툰 후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가 오렌지색 모자를 쓴 환상의 여자를 만나 늦은 밤까지 바, 극장, 레스토랑 등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사이 아내가 살해된 것입니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만 찾으면 무죄입증은 간단해지는데, 문제는 그녀의 이름이나 주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외모까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바, 극장, 레스토랑은 물론 마주쳤던 택시기사, 거지 등 모두가 스콧 헨더슨은 기억하지만 곁에 있던 여자는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형일자가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그의 무죄를 믿는 형사 바제스의 권유로 스콧 헨더슨은 절친인 잭 론버드에게 환상의 여자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론버드의 끈질긴 탐문에도 환상의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목격자들이 한 명씩 기이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942년 작임을 감안하더라도 요즘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내용, 구성, 전개 모두 올드함이 과합니다. CCTV만 있었다면 금세 해결될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설정, 수사(탐문)의 과정, 반전의 구조 등 미스터리의 뼈대 자체가 너무 허술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나머지 공감을 얻지 못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밤이었고, 나란히 앉은 시간이 많았으며,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스콧 헨더슨이 환상의 여자의 외모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한다는 설정, 또 사건과 무관한, 더구나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가 중남미에서 날아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처럼 탐문을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과 진범의 범행 동기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실은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서평을 쓰고 있는 중인데, 그건 작품 자체보다 제가 읽은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에 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명백히 직역이거나 일본식 번역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문장들 때문에 맥락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몇 번씩 다시 읽어도 그 의미가 모호한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드물지 않게 보이는 오타가 1977년 초판 이후 무려 30여년이 흘러 27쇄가 되도록 고쳐지지 않은 건 이해할 수가 없었고, “있었소.”, “아닐세.”, “생각나오?” 등 사극 대사와 꼭 닮은 문장들 역시 초판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물론 오류투성이의 낡은 번역 때문에 작품 자체를 비난해선 안 되겠지만, 어쨌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가 가진 약점이 더 도드라져 보였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분명 인정할 부분이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미덕마저 온전치 못하게 만든 것은 명백히 불량한 번역과 30년 넘게 수정 한 번 하지 않고 재쇄만 남발한 출판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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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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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 세 편이 출간된 도착 시리즈는 서술트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술트릭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계속 손을 댈까, 말까 고민했던 게 사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8:2 정도로 재미보다는 실망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권일영이 후기를 통해 서술트릭은 대성공과 대실패, 두 가지 결과만 얻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결과를 알고도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이 무슨 말장난?”이라는 불쾌감만 남게 됩니다. (이해 못할 분들이 더 많겠지만) 서술트릭의 국대급인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제겐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호기심에, 또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마음에 시리즈의 첫 편인 도착의 론도를 집어 들었습니다.

 

고생 끝에 완성한 작품을 월간추리 신인상에 응모하려던 야마모토 야스오는 친구 아키라의 어이없는 실수로 응모작을 도둑맞습니다. 다시 집필을 시작해 마감일 직전 원고를 완성하지만, 이번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그해 신인상은 시라토리 쇼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는데, 문제는 당선작이 자신이 썼던 원고와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똑같다는 점입니다.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야마모토는 도작(盜作)’의 원흉인 시라토리 쇼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획득한 고급아파트와 여자까지 빼앗을 작정입니다. 뜻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갈 무렵 그는 두 번째 습격을 당하지만 이번엔 범인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 역시 해결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밝혀진 진실은 앞서 서술됐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뒤엎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이 도착(倒錯)의 론도였음이 드러납니다.

 

-도착(倒錯)

1. 뒤바뀌어 거꾸로 됨.

2.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론도(rondo)

1. 원무곡을 가리키며, 원무 또는 그 노래를 이르는 말.

2. 주제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되풀이되면서 나타나는 음악의 한 형식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도착론도두 단어를 조합하여 해석하면, ‘뒤바뀌고 거꾸로 된, 그것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 원을 그리듯 되풀이 됨입니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이만큼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대변한 경우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인물도, 사건도, 이야기도 모두 도착과 론도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어서 독자로서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올바른 상태, 즉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목차만 봐도 뭔가 뒤바뀌거나 잘못된, 그리고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도작의 발견 (프롤로그)

-도작의 진행 (1)

-도착의 진행 (2)

-도착의 도작 (3)

-도작과 도착 (에필로그)

(참고로, 도작(盜作)과 도착(倒錯)은 도사쿠(とうさく)라는 같은 발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번역자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작가와 한바탕 숨바꼭질을 하며 즐긴다면 - 번역자는 이를 작가가 작품의 바탕에 깔아놓은 유희정신이라고 표현했는데 - ‘도착 시리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리하라 이치가 열심히 뒤바꿔놓고, 거꾸로 놓고, 되풀이 시켜놓은 것을 숨바꼭질 하듯 열심히, 단 즐기면서 찾아내거나 발견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문장은 참 쉽습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도 불필요하게 꼬아놓지 않아서 몇 시간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하면서도 연이어 변곡점을 품고 있어서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도착의 론도의 진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감탄할 수도,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론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의 횟수와 속도가 빨라서 오히려 제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얻어맞긴 맞았는데 어디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파악하느라 얻어맞은 충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라고 할까요?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은 우려했던 만큼 실망감을 주진 않았지만, 기대만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착의 의미도 대략 이해가 됐고, 어느 정도 패턴을 읽어냈다고 생각하니 후속작인 도착의 사각이나 도착의 귀결에서는 왠지 작가의 함정과 트릭을 미리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99%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볼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어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인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을 생각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도 아직 읽지 못 했는데 도착의 론도덕분에 먼지 쌓인 책장에서 구해줄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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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가족에게 상처받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틀에 박힌 여자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3살에 겪은 끔찍한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경찰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아사야마 후키, 음악을 하고 싶어 학교는 물론 가족과도 절연한 채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며 고독의 노랫소리에 파묻혀 사는 요시카와 준페이, 그리고 불행한 가족사와 억압당한 성장기 탓에 완벽한 사랑으로 이뤄진 완벽한 가족을 갈망하며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돼버린 마쓰다 다카시가 그들입니다.

 

절도 수사팀의 후키는 편의점 연쇄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준페이를 만납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조차 없는 혼자라는 공통점, 그리고 고독한 삶을 원하지만 바로 그 고독한 삶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흐르게 만듭니다.

한편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독한 삶을 강요당한 다카시는 완벽한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나섭니다. 납치된 여자들에게 자신의 가족사가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며 고문과 세뇌를 가하지만 모두 그가 꿈꾸는 완벽한 가족의 마지막 퍼즐이 되기를 거부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점찍은 최상의 가족 후보는 바로 여경 아사야마 후키였습니다.

 

캐릭터와 줄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무척 무겁고 어두운 작품입니다. “가족은 인간의 안식처지만, 모든 욕망과 억압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하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작품 속 가족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지고 굴절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폭압적이거나 기성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는 불행의 순도가 너무 높아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입니다. 또한 피해자의 신체를 고깃덩어리처럼 훼손하는 다카시의 범행은 잔혹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것은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습니다. 그들의 고독이 드리운 그늘은 너무 짙었고, 때론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보기 불편했습니다. 더구나 그 묘사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하다 보니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현실감은 떨어지고 작위적인 느낌만 남았습니다. 물론 이들의 고독이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트라우마라는 점, 또 고독한 삶으로 인해 서로 악연 또는 인연을 맺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 묘사가 지나친 나머지 이 사람들, 그저 철없는 어른들일 뿐이네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듭니다.

다만 후키의 집요한 탐문과 준페이의 활약에 힘입은 사건 해결과정이라든가 후반부에 밝혀지는 몇 가지 진실들 - 후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유년의 악몽이라든가 다카시가 희생자들에게 보여준 비디오 속의 비밀, 그리고 다카시의 어머니가 그의 뇌리에 박아 넣은 괴물 같은 유산 등은 이 작품이 추리서스펜스 대상수상작임을 보여주는 반증이자 미덕들이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된 고독만 아니었다면 수작으로 기억될 작품일 텐데, 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애도하는 사람이후 두 번째로 읽은 텐도 아라타의 작품인데, ‘가족사냥이나 영원의 아이같은 그의 대표작이 초기작인 고독의 노랫소리의 아쉬움을 덜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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