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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 여신의 영원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홍보 카피를 보면서 호기심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이 두 코드를 버무렸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10년차 경부보인 무라카미 리코가 이끄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경찰소설의 근간인 ‘사건’은 들어본 적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성애소설의 근간인 ‘연애’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진행됐으며, 그 수위는 꽤 높은 편이라 읽는 내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성에 의한 남성 윤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사건을 수사하던 신주쿠경찰서의 리코는 안도 아키히코와 다카스 요시히사가 이끄는 본청 5계와의 합동수사를 지시받곤 그들과 얽혔던 2년 전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립니다. 뛰어난 본청 여경이었지만 상사와의 불륜 스캔들에 이어 동료들로부터 끔찍한 집단폭행을 당한 리코는 창녀라는 비난까지 받은 끝에 신주쿠경찰서로 자리를 옮긴 바 있습니다.
그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지만 비디오테이프 사건이 점점 심상치 않은 사태로 악화되자 리코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공조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2년 전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리코’로 기억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리코는 그녀만의 방식, 즉 그들을 ‘정복’하고 ‘강간’하는 것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출발점이 된 사건은 무척 충격적이지만 진범 찾기의 과정만 놓고 보면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주인공 리코의 추리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긴 하지만, 정체된 수사를 급진전 시킨 것은 대부분 의외의 제보들이었고, 그래선지 조금 이른 타이밍에 대부분의 독자가 진범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리코라는 한 여자의 기구한 삶, 즉 그녀의 성애와 성장을 경찰소설이라는 이질적인 코드와 잘 버무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리코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명의 연인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여자입니다.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은 본청 상사이자 유부남이었지만 스캔들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쳤고, 또 한 명은 청혼까지 했던 본청 동료지만 리코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만 남겼습니다. 현재의 남자 연인은 거칠지만 귀엽고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5살 연하인 동료 경찰입니다. 현재의 여자 연인 역시 동료 경찰이지만 양성애자인 그녀는 리코에게 푸근한 의지처입니다.
유년시절, 리코는 고지식한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육체적 훈련과 함께 순종하는 여성성을 강요당하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주의자인 과거의 두 연인은 리코를 전혀 다른 여자로 성장시켰습니다. 사랑과 결혼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들었고, 남자란 몸을 ‘줘야 할’ 상대가 아니라 대등하게 쾌락을 나누는 파트너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는 동성애까지 받아들이게 변화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재의 동성 연인인 마리의 남성관 역시 리코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에게 남자란 편리한 서바이벌 나이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꺼내 필요한 부분만 쓴다.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접어두면 그뿐. 그것이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논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룬 그녀 앞에 2년 전의 악연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리코는 또 한 단계 비약적인 행보를 걷기로 결심합니다. 과거의 연인들은 그들의 악행은 다 잊은 듯 또다시 리코의 몸과 마음을 탐합니다. 그리고 리코는 조금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리코만의 복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리코는 그때의 리코를 경멸한다. 사랑한다는 뻔한 말에 휘둘려 남자의 성욕을 순순히 채워주는 ‘편한 여자’였던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난 2년 전의 내가 아냐. 그는 오늘 밤 내 소유물이 됐어.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는 열심히 봉사해야 돼.” 리코는 웃고 싶어졌다. “나도 할 수 있지? 당신을 강간하는 것쯤!”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쾌한 복수를 퍼붓는다면 모를까, 쉽게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심리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자신을 버렸던, 또 끔찍한 기억만 남겼던 남자들과 다시 몸을 섞으면서도 그 행위를 통해 그들을 ‘강간’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각오인데, 사실 중반까지는 “뭐지?”라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그녀만의 여정에 조금은 동조하게 됐지만, 왠지 리코가 자학하듯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나약하고 갈대 같던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함으로써 복수와 쾌락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던 리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리코, 여신의 영원’입니다. 만일 한 페미니스트에 의한 단순하고 통쾌한 복수 이야기였다면 아마 재미있게 읽히긴 했어도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작품이 됐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어쨌든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눈길을 끄는 홍보 카피는 제몫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일본에서 ‘성모의 심연’, ‘월신의 얕은 꿈’ 등 ‘리코 시리즈’가 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서 나머지 ‘리코 시리즈’도 읽어볼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