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 여신의 영원
시바타 요시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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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홍보 카피를 보면서 호기심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이 두 코드를 버무렸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10년차 경부보인 무라카미 리코가 이끄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경찰소설의 근간인 사건은 들어본 적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성애소설의 근간인 연애는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진행됐으며, 그 수위는 꽤 높은 편이라 읽는 내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성에 의한 남성 윤간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사건을 수사하던 신주쿠경찰서의 리코는 안도 아키히코와 다카스 요시히사가 이끄는 본청 5계와의 합동수사를 지시받곤 그들과 얽혔던 2년 전의 끔찍한 악몽을 떠올립니다. 뛰어난 본청 여경이었지만 상사와의 불륜 스캔들에 이어 동료들로부터 끔찍한 집단폭행을 당한 리코는 창녀라는 비난까지 받은 끝에 신주쿠경찰서로 자리를 옮긴 바 있습니다.

그들과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지만 비디오테이프 사건이 점점 심상치 않은 사태로 악화되자 리코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의 공조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2년 전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리코로 기억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리코는 그녀만의 방식, 즉 그들을 정복하고 강간하는 것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출발점이 된 사건은 무척 충격적이지만 진범 찾기의 과정만 놓고 보면 조금은 평면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 주인공 리코의 추리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긴 하지만, 정체된 수사를 급진전 시킨 것은 대부분 의외의 제보들이었고, 그래선지 조금 이른 타이밍에 대부분의 독자가 진범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리코라는 한 여자의 기구한 삶, 즉 그녀의 성애와 성장을 경찰소설이라는 이질적인 코드와 잘 버무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리코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네 명의 연인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여자입니다.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은 본청 상사이자 유부남이었지만 스캔들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쳤고, 또 한 명은 청혼까지 했던 본청 동료지만 리코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만 남겼습니다. 현재의 남자 연인은 거칠지만 귀엽고 쿨한 관계를 유지하는 5살 연하인 동료 경찰입니다. 현재의 여자 연인 역시 동료 경찰이지만 양성애자인 그녀는 리코에게 푸근한 의지처입니다.

유년시절, 리코는 고지식한 경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육체적 훈련과 함께 순종하는 여성성을 강요당하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주의자인 과거의 두 연인은 리코를 전혀 다른 여자로 성장시켰습니다. 사랑과 결혼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들었고, 남자란 몸을 줘야 할상대가 아니라 대등하게 쾌락을 나누는 파트너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는 동성애까지 받아들이게 변화시켰습니다. 아울러 현재의 동성 연인인 마리의 남성관 역시 리코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에게 남자란 편리한 서바이벌 나이프 같은 존재다. 필요할 때 꺼내 필요한 부분만 쓴다.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접어두면 그뿐. 그것이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고 논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이룬 그녀 앞에 2년 전의 악연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리코는 또 한 단계 비약적인 행보를 걷기로 결심합니다. 과거의 연인들은 그들의 악행은 다 잊은 듯 또다시 리코의 몸과 마음을 탐합니다. 그리고 리코는 조금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리코만의 복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리코는 그때의 리코를 경멸한다. 사랑한다는 뻔한 말에 휘둘려 남자의 성욕을 순순히 채워주는 편한 여자였던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2년 전의 내가 아냐. 그는 오늘 밤 내 소유물이 됐어. 나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는 열심히 봉사해야 돼.” 리코는 웃고 싶어졌다. “나도 할 수 있지? 당신을 강간하는 것쯤!”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쾌한 복수를 퍼붓는다면 모를까, 쉽게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심리입니다. 혼자만 살겠다고 자신을 버렸던, 또 끔찍한 기억만 남겼던 남자들과 다시 몸을 섞으면서도 그 행위를 통해 그들을 강간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겠다는 각오인데, 사실 중반까지는 뭐지?”라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승리감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싶으면서도 동시에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그녀만의 여정에 조금은 동조하게 됐지만, 왠지 리코가 자학하듯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아 끝까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나약하고 갈대 같던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함으로써 복수와 쾌락을 동시에 성취하려 했던 리코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리코, 여신의 영원입니다. 만일 한 페미니스트에 의한 단순하고 통쾌한 복수 이야기였다면 아마 재미있게 읽히긴 했어도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작품이 됐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의견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어쨌든 성애소설과 경찰소설의 조합이라는 눈길을 끄는 홍보 카피는 제몫을 충분히 해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일본에서 성모의 심연’, ‘월신의 얕은 꿈리코 시리즈가 꽤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호응을 얻어서 나머지 리코 시리즈도 읽어볼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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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도둑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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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앤드루 말로우는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칼로 공격하려던 로버트 올리버라는 남성을 맡지만, 그가 전혀 입을 열지 않는 탓에 왜 그림을 공격했는지, 그의 증상을 무엇이라 진단해야할 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올리버가 공격했던 그림은 질베르 토마의 작품 레다였는데,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올리버는 그림을 공격한 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한 일이고, 그 여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생각하시오라는 대답만 할 뿐입니다. 정신과 의사지만 미술에 조예가 깊은 말로우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올리버의 사건에 몰입합니다.

말로우는 올리버의 전처 케이트, 그의 새 연인 메리 버티슨을 만나면서 올리버의 특이한 과거를 알게 됩니다. 그는 광적인 미술가였고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데만 몰두해왔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676페이지의 <>자를 보는 순간, 중후한 고전 한 권을 끝낸 듯한 뿌듯함과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작가의 전작 히스토리언이 지적 미스터리라는 별칭을 얻은 바 있고, ‘백조도둑역시 예술 미스터리로 분류된 탓에 읽기 전부터 딱 떨어지는 장르물이 아니라 조금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필요한, 즉 예술과 예술가의 세계를 그린 묵직한 작품이란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10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과 미술에 관한 대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물은 사랑과 미술로 인해 행복과 불행을 겪는 것은 물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삶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때론 비극으로 마무리되기도 하고 때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지배하는 기본 정서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에 가깝습니다.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는 구성인데, 정신과 의사 말로우, 올리버의 전처 케이트, 그의 새 연인 메리가 번갈아 이야기를 이끌고, 1870년대 후반을 살았던 베아트리스와 올리비에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삽화처럼 등장합니다.

말로우의 챕터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향타 역할이라면, 1870년대의 편지는 수십 년의 나이를 건너 뛴 두 남녀, 그것도 근친에 가까운 금단의 사랑을 담고 있어서 호기심과 긴장감을 이끌어냅니다. 반면 케이트와 메리의 챕터는 주로 올리버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그림을 그렸으며 한 여인에 대한 그의 집착이 자신들이 남긴 상처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작품에서 중후하고 묵직한 고전의 향기가 풍기는 것은 누가?’, ‘?’라는 장르물적인 호기심을 능가하는,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작품 전체를 면면히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인 화자인 말로우의 시선을 통해 여러 인물의 희로애락이 묘사되는데, ‘한 여인에 대한 집착과 그림에 대한 광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채 정신병원에 갇힌 올리버, 그를 사랑했지만 깊은 상처만 받곤 등을 돌렸던 케이트와 메리, 그리고 100여 년 전 편지를 통해 사랑과 미술에 대해 논했던 베아트리스와 올리비에 등 평탄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야했던 여러 인물들의 사랑, 욕망, 배신, 절망을 작가는 차분하고 깊이 있는 문장을 통해 그려냅니다. 때론 차분함과 깊이가 실제 고전의 그것에 맞먹을 정도라서 지루함을 줄 때도 있지만, 그 진가는 대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발휘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고비를 넘겨야만 합니다.

 

곳곳에서 소개되는 프랑스 인상파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의 보너스이자 왜 이 작품이 예술 미스터리로 분류되는지를 입증해주는 대목입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검색창을 열어 당대의 화가나 작품들을 직접 찾아보게 만들 정도로 흥미롭게 설명됩니다. 특히 작품 속 주요 공간인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해안마을 에트르타와 그곳에서 그려진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의 걸작들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장르물로서의 매력은 한 여인과 그림의 실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극대화되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중반부까지의 고전적 서사를 견디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미스터리가 조합된 21세기 판 영국식 고전을 기대한다면, 또 너무 급하게 달리려 하지 말고 천천히 인물 하나, 문장 하나를 음미해가며 읽는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책읽기와 함께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인상파 소설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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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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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을 비롯하여 한국에 네 작품이 소개된 작가지만 다카기 아키미쓰와는 첫 만남입니다. 제목도 뭔가 파격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 같고,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고 해서 굉장히 잔혹한 사건을 다루거나 아니면 예상외의 법정물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두 가지 기대 모두 빗나갔거나 모두 맞았을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잔혹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주인공의 삶은 끔찍한 악연과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고, 일부 장면 외에는 이야기 전체가 법정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예상외의 법정물이라는 기대 역시 전혀 어긋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라타 가즈히코는 두 건의 살인과 두 건의 사체유기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섭니다. 불륜관계에 있던 야스코의 남편 겐지를 살해 후 유기한 혐의와 그로부터 한 달 후 연인인 야스코마저 살해 후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타는 겐지의 사체유기만 인정할 뿐 나머지 세 건의 혐의는 모두 부인합니다. 그는 야스코의 부탁을 받아 그녀가 죽인 남편 겐지의 사체를 유기한 게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야스코마저 죽은 상황에서 그의 말은 신빙성을 얻지 못합니다. 더구나 경찰과 아마노 검사는 공금유용과 사기를 비롯하여 꽤나 불온하고 음침한 과거를 갖고 있는 무라타의 주장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정황이 무라타를 연쇄살인과 사체유기의 흉악범으로 지목하는 가운데 젊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와의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무죄를 확신했고, 그가 시인한 한 건의 사체유기 외의 나머지 사건들의 진실을 캐기 시작합니다.

 

햐쿠타니의 끈질긴 탐문과 자료수집, 멋진 변론과 심문은 물론 그의 슈퍼 와이프(?) 아키코의 탐정을 방불케 하는 자료조사는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구축합니다. 하나같이 일그러진 욕망과 끝없는 탐욕을 앞세워 무라타의 삶에 끼어든 뒤 그를 흔들고 괴롭히고 왜곡한 끝에 흉악범임에 틀림없어!”라고 단정하게 만든 주변 인물들 역시 적절하게 잘 배치되어 있어서 법정물을 읽을 때의 재미 -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악당들에 대한 분노의 게이지가 쉴 새 없이 솟구치고, 누명쓴 주인공에 대한 조바심과 안쓰러움이 요동치는 - 를 배가시킵니다.

 

하지만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다양한 법정물을 경험한 독자 입장에서 1961년에 집필된 이 작품의 개성이나 반전은 예상외의 법정물이라고 극찬하기엔 조금은 단선적이고 심플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뭐랄까, 정직한 돌직구 같은 느낌? 또한 일본인, 그것도 패전 전후를 살아온 세대가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설정이 자주 등장하는데 문제는 이 설정이 재판의 기류를 크게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다,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라는 부제의 숨은 뜻을 가리킬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초반에 얼핏 언급되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조금은 형이상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인 논리처럼 보이는 이 설정 덕분에 공감도는 갑자기 훅이 떨어지고, 그 지점부터는 쉽게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작가는 나름 그 설정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연설명을 하지만, 역시 외국 독자나 요즘 세대 독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느낌이었습니다.

 

분류상 100% 법정물이긴 하지만, ‘파계 재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날 때부터 일그러진 삶을 부여받았고 그로 인해 예정된 불행한 인생경로를 살아온 한 남자의 휴먼스토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의 선의는 타인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왜곡당했고, 그가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맞이한 위기는 평생 그를 외면하다가 딱 한번 찾아온 행운 덕분에 극복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누명을 벗은 승리의 기쁨만은 아닙니다. 그래선지 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는 오히려 부차적인 서사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돌직구 같은 고전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이고, 이리저리 꼬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복잡한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양념이 덜 들어간 심심한 여운을 남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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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모중석 스릴러 클럽 7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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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망상과 환청에 시달려온 페트럴 프랜시스는 23살이 된 1979년 이른 봄, 가족들에 의해 웨스턴 스테이트 정신병원에 갇힙니다. 이름보다 별명이 통용되던 그곳에서 프랜시스는 바닷새로 불리게 되고, 교회에 불을 질러 사상자를 내고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입원한 소방수피터를 만납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짧은 금발의 간호사가 참혹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합니다. 한편 훼손된 사체에서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발견한 여검사 루시 존스는 관료적인 원장 걸프틸리 박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체류하며 프랜시스와 피터를 조수로 삼아 환자 가운데 숨어있는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방대한 탐문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정신병자들로 가득 찬 병원에서의 생활은 세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 와중에 동일범에 의한 살인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지만 걸프틸리 박사는 정신병자의 단순 자살 또는 병사로 단정지으며 루시의 수사를 방해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정신병원에서 벌어진 스릴 넘치는 연쇄살인범과의 대결인 듯 보이지만, 사실 다 읽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한없는 암울함과 지독한 중압감입니다. “이 병원은 사방에 위험이 도사린 곳이며, 불화와 분노와 광기가 뒤섞여 항상 부글거리는 가마솥이었다.”는 묘사대로 존 카첸바크가 그린 웨스턴 스테이트 정신병원의 낮과 밤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이면서도 약에 취한 환자들의 눈에 비친 몽환적 분위기까지 잘 살아있어서 마치 실제로 그곳에 갇혀있는 듯한 불쾌함을 생생히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세 주인공의 캐릭터 역시 불행과 비극을 테마로 설정돼있습니다. ‘바닷새프랜시스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그의 귓가를 점령한 목소리들이 쉴 새 없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평범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빼앗아갔으며, 결국에는 그를 정신병원이라는 곳까지 몰아세웠습니다.

소방수피터는 원래 유능한 방화조사관이었지만, 조카를 성추행한 신부를 증오하여 그의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정신이상이 입증되면 정신병원에 갇혀 평생을 보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교도소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여검사 루시 존스는 대학 1학년 때 성폭행 당한 후 칼에 맞아 눈 위에서 턱에 이르는 길고 흉한 자상이 남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과 사랑을 잃은 채 성범죄를 전담하는 검사의 길을 걷게 됐는데, 젊은 날 겪은 끔찍한 사건이 자신을 성공한 여검사로 이끌었다고 자위해보지만, 그날의 악몽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 기구한 이력을 지닌 세 명의 주인공과 연쇄살인범이 배치된 만큼 수사는 정상적으로전개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연쇄살인범은 어디선가 이들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공포심을 자극하고, 살인사건마저 자살이나 병사로 위장하려는 원장은 악의적인 탐욕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탓에 바깥세상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시작한 수사는 벽에 부딪히고 결국 미친 세상의 룰에 맞춘, 즉 가장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용의자를 찾기에 이릅니다. 일부러 환자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혼란을 야기하여 연쇄살인범의 이상행동을 유도하거나 주인공 스스로 미끼가 되고 함정을 파는 등 미친 세상에 어울리는 전략을 짜내기에 골몰합니다.

 

장소, 사건, 인물 모두 일그러지고 비틀린 설정으로 이뤄졌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조합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독특한 분위기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데,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암울한 정서가 워낙 강한데다 주인공들의 불안정한 심리나 정신병원 환자들의 막장 같은 삶에 대한 묘사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다 보니 정작 사건 자체나 수사과정은 관심 밖으로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분량 상으로도 600여 페이지 가운데 사건과 수사에 할애된 것은 절반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번역자는 인간의 심리를 한 올 한 올 파고들어가는 치밀한 관찰력을 이 작품의 미덕 가운데 한가지로 꼽았는데, 분명 일리 있고 공감되는 이야기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이 치밀한 관찰력이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문학을 연상시키는 깊이 있는 문장과 다채롭고 화려한 비유는 존 카첸바크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지만 느슨한 만연체를 즐기지 않는 독자에게는 넘기 힘든 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존 카첸바크의 작품 가운데 중고로 구입한 애널리스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분량도 비슷하고(646p), 꽤나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 내용인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고 넘기 힘든 산이지만, 똑같은 이유로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걸 보면 존 카첸바크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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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엔젤 - 라루스가 살인 사건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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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평론가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정보 때문에 최신작으로 알고 읽었는데, 1974년에 집필된 작품인데다 탄생의 배경이 무척 독특하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좌익학생운동 도중 동지 12명을 집단 구타해 죽인 연합적군사건을 접한 작가 가사이 기요시는 1974년 파리로 건너가 혁명을 꿈꾸던 인간이 왜 학살을 저지르는가?’라는 문제를 추적하며 테러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거의 동시에 바이바이 엔젤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사체, 호텔방에서 폭사한 남자, 숲속의 여자 변사체 등 라루스 가문과 관련된 참혹한 연쇄살인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 탐정물이지만,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이야기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 때문에 바이바이 엔젤은 조금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라루스 가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모가르 경정과 바르베스 경감이 나섭니다. 그리고 모가르 경정의 딸인 나디아 역시 탐정 못잖은 의욕과 호기심으로 사건에 뛰어드는데, 나디아는 같은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에게 묘한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살인사건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증거와 추론을 바탕으로 한 나디아의 정석 수사와 달리 가케루는 현상학적 본질직관이라는 독특한 수사기법을 구사합니다. 목이 잘린 여인의 변사체 이후 새로운 희생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나디아는 그동안의 추리를 바탕으로 자신 있게 진범을 지목하지만 가케루의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곤 자신의 논리와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곳곳에서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바이바이, 엔젤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어딘가 4차원스러운 탐정 역할을 맡은 일본인 유학생 야부키 가케루의 캐릭터입니다. 그를 묘사한 내용을 대략 편집해보면 음악, 미술, 철학, 역사 등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심문자의 화술, 미행을 따돌리는 기술, 마술사를 능가하는 손놀림 등 어딘가 수상쩍은 기질도 지닌 인물입니다. 매일 밤 권총을 관자놀이에 댄 채 명상에 잠기는 그는 현상학의 실천을 위해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과 하루 한 끼의 식사, 그리고 독서와 산책만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자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고,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무척 흥미롭고 신선해 보이지만, 가케루의 철학적 스탠스이자 수사 기법인 현상학 때문에 읽는 내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쉽고 친절하게 현상학에 대해 누차 설명하고 있지만, 대학 1학년 때 끝없는 두통과 함께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철학 개론처럼 현상학 관련 내용은 몇 번씩 되읽어가며 노력했음에도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고, 그를 기반으로 한 가케루의 수사는 어딘가 신비주의 또는 예지자의 그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상학은 난해한 기존 철학과 달리 본질직관을 통해서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의 정의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그게 원이라는 걸 본질직관을 통해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케루는 탐정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게 아니라 직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나디아의 추리 방법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개별적인 요소로 분해한 다음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보면서 그 안에서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정리한다고 했지만 역시 어렵고 난해합니다. 번역자도 가케루는 현상학을 이용하여 사건을 추리하고 철학적인 주장을 펴는데 여기에서 독자의 호불호가 갈린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 방식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가더라도 연쇄살인을 풀어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다만, 후반부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와 진범의 실체는 꽤 커다란 위화감을 자아냈습니다. 자세한 언급은 어렵지만 사건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던 외적 요소들이 중요한 범행 동기로 밝혀지는데, 제가 느낀 위화감의 실체는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또 작가의 사상적-철학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무리하게 이야기를 짜맞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론을 위해 과정을 작위적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이랄까요? “추리소설이지만 범죄를 그린다기 보다는 사상을 그리기 위해 쓰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철학적인 문장들이 번거로운 분들은 좀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싶으면 과감하게 패스하고 사건 해결의 과정에만 집중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자 미덕이 가케루와 현상학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보면 오히려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는 서머 아포칼립스’(1981)가 곧 출간된다는데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가 독자들의 흥미를 계속 이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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