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6
장은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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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튼실한 돼지 한 마리와 조금은 과장된 크기의 제목을 둘러싼 음산한 붉은 색조의 표지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공포물, 특히 영상으로 만들어진 공포물은 거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솔직히 무섭고, 기억 속에 남아 수시로 떠오르는 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상보다 활자로 기록된 공포 이야기가 더 오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지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책으로 된 공포물에는 자꾸 관심이 가곤 합니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오랜만에 만난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단편들이라 더 호기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표제작 돼지가면 놀이를 비롯해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광기와 식인, 꿈과 환각, 육체를 지닌 귀신,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존재들, 시공간의 점프, 소시오패스, 구원(舊怨)과 복수 등 각각의 작품마다 독특한 설정과 기괴한 엔딩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돼지가면 놀이’(유재중), ‘숫자꿈’(김재은), ‘구토’(김유라)가 좋았는데, 세 작품 모두 뛰어난 비주얼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지면 원작의 섬뜩한 느낌이 더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무섭다기보다는 안쓰럽고 애틋함까지 불러일으키는 여자 귀신(여관바리), 평범한 인물에게 닥친 끔찍하고 비현실적인 상황들(며느리의 관문, 파리지옥), 공포 분위기와 복수극을 잘 접목시킨 이야기(무당아들, 고양이를 찾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과 종교 혹은 환상에 관한 이야기(낚시터, 헤븐)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맛볼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다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공포감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심심함과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공포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저마저도 두세 작품 외에는 정말 무섭다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읽을 때는 잘 몰랐던 기괴함이 뒤늦게 스멀스멀 기어올라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었던 작품도 있었지만, 짜릿한 공포를 즐기는 마니아들에게는 2% 정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 좋았고, 저 같은 독자가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공포물이라 더 좋았습니다. 이 작품이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의 여섯 번째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딱히 관심을 갖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눈여겨 본 몇몇 작가의 작품이 실린 여타 단편선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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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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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24살 웬디 해니포드가 난자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웬디의 동거남 리처드 밴더폴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체포됐지만 얼마 안 돼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웬디의 아버지 케일은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에게 최근 3년간 연락 한 번 없던 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언론에서는 웬디를 창녀로 짐작했지만 아버지 케일의 기억 속에 웬디는 순수하고 모범적인 외동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던 스커더는 웬디와 리처드의 기이한 인생에 적잖이 놀랍니다. 특히 학생 때부터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빠져들곤 했던 웬디가 목사 집안 출신의 동성애자 리처드와 동거하게 된 계기에 집중합니다.

 

2013년 겨울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죽음의 한가운데를 먼저 읽었고, 9개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매튜 스커더의 원점인 시리즈 첫 편 아버지들의 죄를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달(20149) 들어 두 편의 작품(‘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이 한꺼번에 출간된 덕분에 그동안 깜빡하고 있던 이 시리즈가 생각난 것입니다. ‘진실 찾기라는 탐정물의 공식에 충실하지만 아버지들의 죄는 가치관의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중산층에서 일어났을 법한 극단적인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 사회 소설이기도 합니다.

 

웬디와 리처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 혹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족들과 불행하거나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악연을 맺어왔습니다. 웬디의 생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했고, 계부인 케일은 뜻하지 않은 사건때문에 웬디에게 어정쩡한 거리를 둔 채 지내왔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리처드에게 있어 목사인 아버지는 그저 권위적이고 차갑고 보수적인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웬디는 또래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리처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웬디는 정서적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순수함을 지닌 반면 남자들과의 관계만큼은 매춘으로 오해받을 만큼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고, 리처드는 수줍고 얌전한 성격과 달리 게이 바에서는 매일 같이 섹스파트너를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결코 평범하거나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생 경로를 택했던 웬디와 리처드의 삶은 적잖은 부분에 있어 아버지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들입니다. 그 영향들을 전부 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아버지들의 죄로 명명함으로써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삶과 최후가 아버지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껏 멋을 부렸으면서도 냉혹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마초적인 문장들도 그렇지만, 역시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매력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2편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랬지만 아버지들의 죄역시 매튜 스커더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계기나 이후 그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 몇 줄, 그것도 감정 같은 건 아예 실리지 않은 평범한 대화 속에 잠시 언급될 뿐입니다.

 

다만 소소한 몇몇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에 대한 호기심이 좀더 부풀어 오른 게 사실인데, 가령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극도의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한없이 친절하다가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닥쳐!”라는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합니다. 반면 과할 정도로 성실하게 십일조를 내고 희생자들을 위해 초를 밝히는가 하면, 전처인 애니타나 아이들에게 이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딸린 별명 중 알코올 중독 탐정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에선 버번을 아주 맛있게 스트레이트 또는 커피에 타 마시는 장면이 나올 뿐 중독에 가깝다는 면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예상 못한 매튜 스커더의 진면목은 마지막 엔딩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두 파악했지만 수사권도, 사법권도 없는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가 아버지들의 죄에 내리는 마지막 판결은 요즘 작품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1976년에 출간됐고, 작품 속 시간적 배경은 1973년입니다. 요즘 작품들에 비해 분량도 짧고(238페이지) 사건의 규모도 크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나 비밀의 깊이와 무게, 캐릭터의 매력 등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현대물에 비해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짜임새는 더 촘촘하고 긴장감과 쫄깃함으로 꽉꽉 채워진 작품입니다. 또 짧은 분량이지만 한 줄 한 줄 작가가 흘려놓은 정보들이 지뢰밭처럼 흩어져 있어서 집중하지 않고 후루룩 읽어 넘겼다간 나중에 ?”하게 되는 상황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새삼 먼저 읽은 죽음의 한가운데에게 야박한 서평을 남긴 게 미안해집니다. 아무래도 매튜 스커더의 매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겼던 것 같고, 나중에라도 느리고 꼼꼼한 책읽기로 재도전한다면 처음엔 알아보지 못한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 출간된 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역시 각각 1976, 1981년 작품이지만, ‘아버지들의 죄만큼 요즘의 작품들을 능가하는 완성도와 재미를 줄 것으로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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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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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월에 출간된 새벽 거리에서이후로 공허한 십자가이전까지 최근 만 3년 간 국내에 소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16편입니다. 그 가운데 10편의 작품을 읽었고, 2편은 만족, 3편은 so-so,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읽곤 했지만, 이제는 신간이 나오더라도 서평이나 블로그의 반응을 보고 선택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올 들어서만 7편이 폭주하듯 쏟아져 나왔는데, 그나마 두 작품 - ‘한 여름의 방정식’, ‘몽환화’ - 이 그동안의 실망감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 준 덕분에 나름 기대감을 갖고 공허한 십자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공허한 십자가는 손에 꼽을만한 그의 몇몇 작품들의 미덕을 조금씩골고루 겸비한, 즉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열심히 살아가거나 맹렬히 싸우거나 또는 무력하게 침몰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복잡한 서사 속에 녹여냄으로써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방황하는 칼날), 소중한 인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악연으로 오랜 시간동안 엮였던 두 남녀(백야행, 환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붉은 손가락), 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성녀의 구제에서 보여준 비극 속의 애틋함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에서 인상 깊었던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져있습니다.


 

공허한 십자가는 살인과 속죄, 그리고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살인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죄이고, 그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하지만 그 벌로서의 사형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합니다.

사형반대론자인 범인의 변호사 : “(범인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유족에게)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사형판결은 그(범인)를 바꾸지 못했지요.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

가족을 살해한 범인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는 유족들 :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그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형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살인은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속죄해온 자를 변호하는 사람 :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세 가지 입장 모두 일정부분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이 난해한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습니다. 21년 전 아직 철없던 시절에 사랑과 비극을 동시에 잉태했던 후미야&사오리, 11년 전 딸 마나미를 강도의 손에 잃고 이혼을 택한 나카하라& 사요코. 이들은 피살자로, 피살자의 유족으로, 살인자로, 속죄자로 등장하여 살인-속죄-사형이라는 정답 없는 난제 속에 내던져집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고루하고 평면적인 사형제도 찬반론 대신 서로 입장이 엇갈리는 인물들의 사연을 복잡하게 직조함으로써 미스터리의 미덕과 사회성 짙은 화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립니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갖게 만드는데, 가령 주인공의 진실 찾기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실패하기를 바라게 만들고, 살해당한 자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진범이 꼭 잡혀야 할까, 조바심나게 만들기도 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살인자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엔 그냥 묻어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그 덕분에 다 읽은 뒤에도 독자는 개운한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누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할지, 죄와 벌이란 과연 인간의 영역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등 심난한 자문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열광했던 시절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허한 십자가는 부조리하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와 그로 인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개인의 문제를 잘 녹여냈고, 특히 인물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긴장감과 재미를 곁들여 직조해낸 덕분에 오랜만에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초중반부까지 눈에 거슬렸던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번역이 옥의 티였습니다. 초중등생의 눈높이에 맞춘 듯한 짧고 평이한 단문들과 직역의 느낌이 든 문장들 때문에 초보 번역자의 데뷔작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표지를 보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많이 번역한 이선희의 작품이라 좀 의외였습니다. 원작이 그렇게 쓰인 탓일 수도 있고, 처음 접한 전자책의 레이아웃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초중반부까지의 가볍고 쉽고 짧은 문장들이 아쉽게 읽힌 것은 사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엔터테이너 기질과 폭발적인 다작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사회적 문제를 픽션 속에 제대로 버무릴 줄 아는 그의 탁월한 필력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후의 차기작들이 그런 맥락을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신작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분간은 여전하겠지만, ‘공허한 십자가의 완성도와 만족감이 이어진다면 그 역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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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뽑은 '도쿄 기담집' 수록작 중 베스트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내러티브에 가까웠고,

'도쿄 기담집' 전체를 관통하는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기리에 같은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을 꿈꿉니다.

그 만남이 파티장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이뤄진다면,

또한 그 상대가 내가 찾던 '정말 의미 있는 여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그 로망은 완벽하게 실현되겠지요.

불행히도 그런 로망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루키는 준페이와 기리에의 만남과 짧은 연애를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대리만족감을 훨씬 더 고양시켰습니다.

 

준페이가 기리에를 '상실'하는 과정 역시 하루키답게 애틋하지만 깔끔했습니다.

그를 통해 준페이는 비록 31살의 나이지만 또한번 삶의 진화를 이루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세뇌당한(?) '세 명의 의미 있는 여자'의 참뜻도 깨닫게 되지요.

기리에가 고층 빌딩 위의 외줄 위에서 바람과 함께 서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괜히 가슴이 시큰해집니다.

신비하지만 어딘가 큰 상처를 감추고 있는 듯한 기리에의 삶이

한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아마 라디오로 기리에의 이야기를 듣던 준페이도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더불어 소설 속의 소설인 준페이의 동명 단편 역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콩팥 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완결된 단편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우연과 상실, 사랑과 로망, 그리고 아스라한 추억 등이

읽는 내내 그림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걸 보면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영상물로 만들어진다면

훌륭한 단편 영화 또는 단막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이 슌지나 고레에다 가즈히로 같은 명장들이 만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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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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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하루키의 팬이라 자칭할 만큼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은 책들 가운데 나만의 베스트에 올리고 싶은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의 작품에 손이 가고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애써 현학적이거나 과다한 수식을 동원하지 않고도 사람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겸손함도 좋고,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억지스러움 없이 편하게 넘나드는 상상력도 좋고, 때론 퇴폐미로 가득했다가 때론 이상주의자나 순수낭만파, 때론 블랙코믹파로 변신하는 그의 자유로운 운신도 좋습니다.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그의 겸손함과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기담이면서 기담 같지 않은 잔잔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입니다. 주변에서 이거, 하루키 맞아?”, “이게 무슨 기담?”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 역시 기담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하루키만의 기이함이나 쇼킹함을 기대했던 터라 다 읽고 난 후에 어딘가 양념 덜 된 심심함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오래 전 빵가게 재습격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수록작들의 줄거리를 요약하다 보니 읽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 했던 미묘한 정서나 분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들을 때는 잘 모르다가 나중에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워지거나 애틋해지는 이야기처럼 뒤늦게 깊은 맛을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일상적인 기담들이 실려 있습니다.

 

하루키는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을 위해 스무 개의 키워드를 꼽은 후, 세 개씩을 골라 각각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고 밝혔지만, 굳이 한두 개로 집약하자면 우연그리고 상실 또는 결락(缺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밍아웃 때문에 가족을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게이 피아노 조율사는 겹쳐진 우연으로 가까워진 한 여인 덕분에 절연했던 누나와 10여년 만에 연락이 닿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을 처지였고, 조율사는 오랫동안 가둬놓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그녀는 물론 매형, 조카들과도 화해합니다.(우연 여행자)

사치의 19살 아들은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상어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로 10년 넘게 아들의 기일을 전후하여 3주 간 하나레이 해변에 머물러 온 사치는 아름답지만 때론 치명적인 하나레이의 자연 속으로 돌아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나레이를 찾은 같은 또래의 일본인 서퍼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하나레이 해변)

 

그 외에도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20여일 만에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으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평생 의미 있는 여자는 셋뿐이라는 아버지의 논리에 세뇌되어 만나는 여자마다 어중간한 관계 이상을 맺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기리에와 신기루 같은 연애를 나누지만 어느 날 홀연히 그녀를 잃어버리고 마는 소설가 준페이(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1년 전부터 문득문득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된 탓에 구청 상담실의 카운슬러를 찾았다가 자신의 무미건조했던 삶과 이름에 얽힌 기이한 사연을 확인하는 미즈키(시나가와 원숭이)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우연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좋아하는 작품들이 제각각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최고와 최악으로 갈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담이라는 특징, 그것도 우연과 상실이라는 메인 코드 때문에 독자마다 공감을 느끼는 폭과 깊이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우연 여행자가 좋았는데, 이 두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서사에 가까웠고,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주변에서 정말 일어날 법한 사실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일본 영화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비극 앞에서의 담담함이라는 정서가 잘 살아있는 작품인데, 제가 좋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경향과도 잘 맞아떨어져서 그가 영상물로 만든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키는 작품 곳곳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입니다”, 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조금은 설명적이거나 테마를 강요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도쿄 기담집의 미덕을 이해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문장들이고, 또 제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문장들이라 이 자리에 소개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는 매우 흔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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