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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긋는 소녀 - 샤프 오브젝트
길리언 플린 지음, 문은실 옮김 / 푸른숲 / 2014년 8월
평점 :
‘나를 찾아줘’와 ‘다크 플레이스’ 단 두 작품을 통해 길리언 플린은 자신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뇌와 마음 모두 누군가에게 후벼 파이는 느낌을 자초한다는 뜻이고, 다 읽은 뒤에는 먹먹함과 후유증과 소화불량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목마저 ‘몸을 긋는 소녀’입니다. 주인공 카밀 프리커는 커터(cutter)입니다. 자신의 몸을 칼이나 가시 같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고 베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카밀은 단순히 긋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수많은 단어들을 칼끝으로 새겨 넣습니다. 그녀가 13살에 처음 자신의 음부 근처에 새긴 단어는 ‘사악한’이었고, 그 후로 ‘해로운’, ‘메스꺼운’, ‘분노’ 등 온통 어두운 뉘앙스의 단어들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29살에 이르러 ‘사라지다’를 끝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녀의 커터로서의 활동은 종료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고작 2,000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 최남단의 후미진 도시 윈드 갭입니다. 13살의 카밀이 동생 메리언을 잃었던 곳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난도질을 한 곳이며, 같은 해 한꺼번에 4명의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른 곳입니다. 카밀에 따르면 ‘너무도 숨 막히고 작은 마을, 싫어하는 사람과 매일 맞닥뜨리는 마을’입니다.
카밀은 ‘나를 찾아줘’에서 일기장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에이미, ‘다크 플레이스’에서 온 가족이 몰살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리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고향 윈드 갭은 ‘다크 플레이스’에 등장했던 캔자스의 후미진 마을을 연상시킵니다.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며 외로움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탐구하고 싶었다.”는 말대로 길리언 플린은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성 있게 불행과 고통의 서사를 그려온 것입니다.
시카고의 만년 꼴찌 일간지 ‘데일리 포스트’의 여기자 카밀 프리커가 윈드 갭에 파견됩니다. 9살 소녀가 이빨이 모두 뽑힌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10살 소녀가 실종되자 선정적인 대박 기사를 기대한 데스크가 마침 그곳이 고향인 카밀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카밀에게 있어 윈드 갭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은 곳이었고, 그 고통의 진앙지는 바로 어머니 아도라를 비롯한 가족들이었습니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카밀은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는 어머니 아도라의 냉기와 16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보존된 죽은 여동생 메리언의 방이 내뿜는 서글픔, 그리고 또 다른 여동생 13살 앰마의 극단적인 행동들을 감내하는 가운데 캔자스시티에서 파견된 리처드 윌리스 형사의 도움을 받아 취재에 나섭니다.

어린 소녀들을 참혹하게 죽인 뒤 이빨을 모두 뽑아간 괴물을 쫓는 이야기지만, 길리언 플린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여자들, 그리고 3대에 걸친 모녀간의 애증이 초래한 비극’입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등 뒤 한복판을 제외하고 온몸을 칼끝으로 난도질한 카밀, 섹스와 마약을 즐기며 “나도 살해당하고 싶어. 그럼 모두가 날 사랑할 테니까.”라는 앰마, 그리고 자신이 낳은 딸 카밀에게 “난 너를 사랑해본 적 없어.”라고 단호히 말하는 아도라 등 3대의 애증은 극단적이다 못해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병명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또 MBP(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Munchausen by Proxy)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거꾸로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3대에 걸친 모녀의 애증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거나 상대방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깊고 질긴 뿌리 역할을 합니다.
모녀 3대의 비극과 윈드 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의 조합이 매끄러운 황금비율로 이뤄지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사소한 언급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하도록 하고, 대신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몸을 긋는 소녀’는 ‘나를 찾아줘’나 ‘다크 플레이스’보다 앞선 길리언 플린의 데뷔작인데 그래선지 전작들에 비해 조금은 거칠고 관념적인 느낌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물들의 ‘행동과 동기’가 쉽게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밀이 자해를 저지르게 된 동기도, 앰마가 폭력적인 괴물과 고분고분한 딸(또는 동생)이라는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또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유전처럼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도라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비뚤어진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조연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소녀들이 실은 동물을 죽이고 동급생을 잔인하게 공격한 적이 있다거나 앰마를 추종하는 패거리가 장례식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추모비를 훼손한다는 설정은 단순히 불편함 이상의 작위적인 느낌을 줄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거칠다고 느낀 이유는 이런 부분에 대한 묘사들이 집요하고 과격하고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고, 관념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내 이웃에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감을 갖기 어려운, 즉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나갔거나 때론 추상적으로 보일 만큼 그 형체가 모호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앞서 읽은 ‘나를 찾아줘’와 ‘다크 플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몸을 긋는 소녀’ 역시 적잖은 중압감과 후유증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카밀과 그녀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이 그저 픽션에서만 존재하기를 바랄 정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의 당혹감은 꽤 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리언 플린의 매력은 매번 이런 지점에서 폭발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뛰어들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 읽은 뒤 새삼 책의 첫 머리에 실린 한 줄짜리 프롤로그가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그 한 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서늘하거나 한없이 애틋할 따름이었습니다.
“예쁜 여자아이는 잘만 행동하면 어떤 곤경도 피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