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일격 밀리언셀러 클럽 136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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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여자를 살해한 루이스 피넬이 9년 만에 체포됩니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바버라 에팅거만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녀가 살해됐을 당시 루이스 피넬의 알리바이는 완벽했고, 그녀의 아버지 찰스 런던은 매튜 스커더에게 딸의 죽음의 진실을 의뢰합니다. 하지만 천하의 매튜 스커더라도 9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버라 에팅거가 살던 아파트의 이웃들, 그녀의 전 남편과 여동생, 직장동료는 물론 같은 브루클린에서 루이스 피넬에게 살해된 희생자와 그 관련자들까지 탐문하지만 매튜 스커더의 손에 들어오는 명확한 증거나 목격담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의뢰인 찰스 런던이 수사 중단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매튜 스커더는 그와 무관하게 수사를 계속 진행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단서를 얻어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진범이 밝힌 바버라 에팅거 살해 동기는 그동안의 탐문을 무색하게 할 만큼 어처구니없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라 결과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원톱 주인공이 이끄는 시리즈의 경우 대략 4~5편쯤 이르면 작가들이 한번쯤 주인공의 숨겨진 개인사라든가 마음 깊이 끌어안고 있는 고뇌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둠 속의 일격은 사건 만큼이나 매튜 스커더의 평탄하지 않은 삶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가 경찰을 그만둔 사연이라든가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전작들에서도 조금씩 설명돼왔지만, 이번에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회한에 가득 찬 채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매튜 스커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매튜 스커더가 맡은 사건은 관련자들에게 9년 전의 기억을 되살릴 것을 요구하는, 따라서 당연히 벽에 부딪히거나 무리한 추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어쩔 수 없이 탐문과 자료조사는 방향성이나 계획성 없이 진행됩니다. 당연히 매튜는 몇 번씩이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자문하게 되고, 헛고생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또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라는 그의 자괴감은 그를 수없이 많은 바(bar)와 술집으로 몰고 가 버번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가 완전히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취한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둠 속의 일격에 등장하는 매튜 스커더는 짧지만 애틋한 로맨스를 나눈 재니스 킨과 함께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에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자주 엉망진창이 되곤 합니다. 오죽하면 인생에서 도망친 주정뱅이라는 묘사까지 동원될 정도입니다.

 

그의 빠지지 않는 버릇 중 하나인 길거리에서 시비 붙기역시 이번엔 완전히 상대를 잘못 골랐거나 명백히 오버한 상황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혼한 전처 애니타를 통해 함께 기르던 애완견 밴디가 죽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혼했지만 두 사람을 연결해주던 몇 안 되는 끈 중 하나였던 밴디의 죽음은 매튜 스커더의 자괴감을 더욱 깊고 쓰리게 만드는 에피소드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채 헤어날 수 없는 진창에 빠져들었고, 때로는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일부러 자해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면서 말 그대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들은 매튜 스커더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명백한 의도로 보이는데, 그런 탓인지 사건은 꽤 흥미롭고 궁금증을 유발하게끔 시작됐지만 해결 과정이나 진범 찾기는 우연이나 설정에 기대는 부분이 많아 보였고, 분량에 있어서도 사건보다는 매튜 스커더 수난사에 더 방점을 찍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기존의 매튜 스커더 팬들에겐 오늘도 어디에선가 버번 또는 버번을 넣은 커피를 마시고 있을 고독하고 불안정한 뉴요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롭게 읽히겠지만, 이 작품이 매튜 스커더와의 첫 만남인 독자라면 자칫 당혹감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리즈의 첫 작품인 아버지들의 죄부터 순서대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매튜 스커더의 하드보일드 또라이캐릭터를 제대로 맛보려면 전작들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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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과 창조의 시간 밀리언셀러 클럽 135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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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 하던 제이컵 자블런, 일명 스피너가 피살된 채 발견됩니다. 그는 죽기 전 매튜 스커더를 찾아와 봉인된 봉투를 맡기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열어볼 것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봉투에는 스피너가 모은 세 사람에 대한 협박용 자료가 잔뜩 들어있습니다. 굳이 죽은 스피너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지만 매튜는 살인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곤 스피너의 친구 겸 협박범으로 위장한 뒤 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미끼로 살인범을 끌어들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예상대로 그에게 위기가 찾아오고, 매튜는 세 사람 중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이면서 매튜는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요즘 장르물들에 비해 굉장히 짧은 분량인 240여 페이지에 불과한데, 그만큼 사족 없이 알찬 미스터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피너가 세 사람을 협박했던 것은 명백히 불법적인 일이지만, 그가 죽기 전에 알아낸 세 사람의 과거는 훨씬 더 무겁고 악의적인 것들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인맥과 돈의 힘으로 피해간 사람, 치명적인 과거를 감춘 채 버젓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사람, 죄악에 가까운 추잡한 짓을 벌이고도 권력의 핵심부에 앉아있는 사람 등 어떤 형태로든 법의 응징을 받게 만들고 싶은 자들뿐입니다.

 

스피너는 탐정인 매튜가 하찮은 잡범인 자신을 위해 복수해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죽을 경우 살인자를 못 본 척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매튜는 스피너의 친구이자 똑똑한 협박범으로 세 사람 앞에 나타납니다. 매튜가 대담하게 연락처와 거처까지 밝힌 채 자신을 미끼삼아 살인범을 유인하는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협박범으로 가장한 매튜의 거침없는 언사도 맛깔났고, 몇 차례 반복되는 화려하고 터프한 액션도 나름 재미를 선사합니다. 물론 뭘 믿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위험을 자처하는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픽션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곤 하지만, 그래도 저런 게 어딨어?”라는 과장된 허구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매튜가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는 장면인데, 독자의 눈에도 그렇게 확신할만한 근거나 증거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튜는 왠지 자신이 지목한 용의자 외엔 혐의 없음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더구나 그런 확신을 몇 번씩 거듭 강조합니다.

이럴 경우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나 남은 분량으로 보나 뒤집어질 것이 분명해 보이더라도 독자가 매튜의 확신에 동조하고 공감해야 뒤에 나올 반전이 의미를 갖게 되는데 단지 추측만으로 쉽게 용의자를 지목하다 보니 매튜가 왜 이러지?”라는 의문만 들 뿐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후속편이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어둠 속의 일격을 먼저 읽고 말았는데, ‘어둠 속의 일격이 매튜의 개인적인 고뇌와 불행한 삶에 좀더 초점을 맞췄다면, ‘살인과 창조의 시간은 선명하고 깔끔하게 사건 위주의 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매튜에 관한 이런저런 다양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 두 편을 연이어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매튜 스커더 시리즈가 책장에 두 편 남아있는데, 아끼면서 천천히 읽을 건지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 읽어버린 후에 신간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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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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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9년에 발표된 단편들이 실린 미쓰다 신조의 첫 호러 단편집입니다. 표제작 붉은 눈을 비롯하여 8편이 실려 있고, 4편의 엽편(葉篇) 호러가 중간중간 삽입된 구성입니다. 그의 작가 시리즈보다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더 열광했던 터라 기대감이 무척 컸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 대비 만족감은 조금 떨어졌고 별점도 4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수록작 중 여러 편이 딱 떨어지는 엔딩이 아니라 괴담에 어울리는 오픈된 결말로 마무리된 점, 그래서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도 , 끝났군.”이라는 깔끔한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좀 찜찜한 구석이 남았던 점이 이런저런 아쉬움을 남긴 큰 이유였습니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호러물을 대하는 개인적인 태도와 취향의 탓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괴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 ‘폐가’, ‘저택등 건축물이나 공간을 공포심과 괴이감의 출발점으로 사용하는데, ‘붉은 눈의 수록작들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쪽으로 기운 채 다 쓰러져가는 폐가(붉은 눈), 5년 전의 화재의 잔재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저택(괴기 사진작가), 벼랑 끝에 선 채 마치 거리를 내려다보듯 서있는 서양식 저택(내려다보는 집), 늪 앞에 출입구가 있어서 늪을 밟아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물(한밤중의 전화) 등 실제로 그 앞에 불빛 하나 없이 홀로 서있게 된다면 순식간에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축축하고 음습한 묘사를 통해 더욱 소름 돋게 그려집니다.

그 외에도 꿈, 거울, 착시를 통해 목격하는 끔찍하거나 기이한 환상, 애너그램을 이용한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 꾸미기, 곧 죽을 자의 신상을 꿰뚫어보는 초능력 등 다채로운 소재들 덕분에 8편의 수록작 모두 뚜렷한 개성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정말 무서운 괴담을 기대한 독자들, 특히 작자미상이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읽으면서 괜히 움찔했던 경험을 다시 한 번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읽는 순간 무섭거나 괴이한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자려고 이불 속에 누웠을 때 슬며시 기억 속에 떠올라 괜히 화장실에 가는 것마저 주저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은밀한 후유증을 자아내는 괴담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런 종류의 괴담이 더 파괴력이 강할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미스터리와 결합된 호러물을 좋아하다 보니 수록작들 가운데 수집된 괴담 들려주기식의 이야기는 제겐 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배경을 이용하든 도시 괴담류의 현대적 배경을 이용하든 미쓰다 신조의 글빨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감흥까지는 무리였지만 으스스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집중과 몰입을 즐긴 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록으로 실린 평론가의 해설 가운데 무시무시한 최상의 작품집이라든지 역대 공포소설집 중에서도 최상위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지금껏 출간된 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미쓰다 신조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란 표현은 이 단편집의 미덕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적절한 문구라고 생각됩니다. 미쓰다 신조에게 익숙한 독자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붉은 눈은 아주 괜찮은 텍스트가 돼줄 것 같습니다.

 

(호감도 순으로 뽑으면 붉은 눈’, ‘죽음이 으뜸이다’, ‘맞거울의 지옥입니다. 각각 첫 수록작과 마지막 수록작인 붉은 눈죽음이 으뜸이다는 두 눈의 홍채 색깔이 다른 여학생을 등장시킨 연작이라 흥미진진했고, ‘맞거울의 지옥은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 조합이 깔끔하게 이뤄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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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긋는 소녀 - 샤프 오브젝트
길리언 플린 지음, 문은실 옮김 / 푸른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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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단 두 작품을 통해 길리언 플린은 자신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뇌와 마음 모두 누군가에게 후벼 파이는 느낌을 자초한다는 뜻이고, 다 읽은 뒤에는 먹먹함과 후유증과 소화불량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목마저 몸을 긋는 소녀입니다. 주인공 카밀 프리커는 커터(cutter)입니다. 자신의 몸을 칼이나 가시 같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고 베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카밀은 단순히 긋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수많은 단어들을 칼끝으로 새겨 넣습니다. 그녀가 13살에 처음 자신의 음부 근처에 새긴 단어는 사악한이었고, 그 후로 해로운’, ‘메스꺼운’, ‘분노등 온통 어두운 뉘앙스의 단어들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29살에 이르러 사라지다를 끝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녀의 커터로서의 활동은 종료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고작 2,000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 최남단의 후미진 도시 윈드 갭입니다. 13살의 카밀이 동생 메리언을 잃었던 곳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난도질을 한 곳이며, 같은 해 한꺼번에 4명의 남자와 첫 경험을 치른 곳입니다. 카밀에 따르면 너무도 숨 막히고 작은 마을, 싫어하는 사람과 매일 맞닥뜨리는 마을입니다.

카밀은 나를 찾아줘에서 일기장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에이미, ‘다크 플레이스에서 온 가족이 몰살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리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고향 윈드 갭은 다크 플레이스에 등장했던 캔자스의 후미진 마을을 연상시킵니다.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며 외로움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탐구하고 싶었다.”는 말대로 길리언 플린은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성 있게 불행과 고통의 서사를 그려온 것입니다.

 

시카고의 만년 꼴찌 일간지 데일리 포스트의 여기자 카밀 프리커가 윈드 갭에 파견됩니다. 9살 소녀가 이빨이 모두 뽑힌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10살 소녀가 실종되자 선정적인 대박 기사를 기대한 데스크가 마침 그곳이 고향인 카밀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카밀에게 있어 윈드 갭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은 곳이었고, 그 고통의 진앙지는 바로 어머니 아도라를 비롯한 가족들이었습니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카밀은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는 어머니 아도라의 냉기와 16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보존된 죽은 여동생 메리언의 방이 내뿜는 서글픔, 그리고 또 다른 여동생 13살 앰마의 극단적인 행동들을 감내하는 가운데 캔자스시티에서 파견된 리처드 윌리스 형사의 도움을 받아 취재에 나섭니다.


 

어린 소녀들을 참혹하게 죽인 뒤 이빨을 모두 뽑아간 괴물을 쫓는 이야기지만, 길리언 플린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여자들, 그리고 3대에 걸친 모녀간의 애증이 초래한 비극입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등 뒤 한복판을 제외하고 온몸을 칼끝으로 난도질한 카밀, 섹스와 마약을 즐기며 나도 살해당하고 싶어. 그럼 모두가 날 사랑할 테니까.”라는 앰마, 그리고 자신이 낳은 딸 카밀에게 난 너를 사랑해본 적 없어.”라고 단호히 말하는 아도라 등 3대의 애증은 극단적이다 못해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뮌하우젠 증후군이란 병명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MBP(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Munchausen by Proxy)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거꾸로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3대에 걸친 모녀의 애증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거나 상대방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깊고 질긴 뿌리 역할을 합니다.

 

모녀 3대의 비극과 윈드 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의 조합이 매끄러운 황금비율로 이뤄지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는데, 이 부분은 사소한 언급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하도록 하고, 대신 전체적인 인상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몸을 긋는 소녀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보다 앞선 길리언 플린의 데뷔작인데 그래선지 전작들에 비해 조금은 거칠고 관념적인 느낌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물들의 행동과 동기가 쉽게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밀이 자해를 저지르게 된 동기도, 앰마가 폭력적인 괴물과 고분고분한 딸(또는 동생)이라는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또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유전처럼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도라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비뚤어진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조연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소녀들이 실은 동물을 죽이고 동급생을 잔인하게 공격한 적이 있다거나 앰마를 추종하는 패거리가 장례식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추모비를 훼손한다는 설정은 단순히 불편함 이상의 작위적인 느낌을 줄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거칠다고 느낀 이유는 이런 부분에 대한 묘사들이 집요하고 과격하고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고, 관념적이라고 느낀 이유는 내 이웃에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감을 갖기 어려운, 즉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나갔거나 때론 추상적으로 보일 만큼 그 형체가 모호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앞서 읽은 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몸을 긋는 소녀역시 적잖은 중압감과 후유증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카밀과 그녀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이 그저 픽션에서만 존재하기를 바랄 정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의 당혹감은 꽤 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리언 플린의 매력은 매번 이런 지점에서 폭발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뛰어들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 읽은 뒤 새삼 책의 첫 머리에 실린 한 줄짜리 프롤로그가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그 한 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서늘하거나 한없이 애틋할 따름이었습니다.

 

예쁜 여자아이는 잘만 행동하면 어떤 곤경도 피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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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손톱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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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최근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자주 접하게 됐습니다. ‘이와 손톱역시 빌 밸린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5년에 출간된 대표작입니다. 왜 하필 제목을 이와 손톱이라고 지었을까 궁금했는데, 본문 뒤에 실린 번역 후기를 보곤 ~!”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서평을 마무리한 후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건너뛰겠습니다.

이와 손톱은 두 가지 이야기가 한 챕터씩 교차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검사 프랭클린 캐넌과 변호사 찰스 덴먼이 벌이는 법정 공방전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 루 마운틴이 벌이는 치밀한 복수극입니다.

 

마술사 루 마운틴은 곤경에 빠진 탤리 쇼를 구해준 뒤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결혼을 거쳐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한 통의 협박전화로 인해 그들의 행복은 균열을 맞이했고, 끝내 루는 소중한 탤리를 잃고 맙니다. 경찰의 사고사 단정에도 불구하고 루는 탤리가 지니고 있던 물건때문에 정확한 진상을 밝힐 수 없었고 결국 사적인 복수를 다짐합니다. 마술뿐 아니라 뛰어난 추리력까지 동원하여 성공을 코앞에 뒀던 루의 복수극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뒤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한편, 법정에서는 기이한 살인사건에 관한 재판이 벌어집니다. 피해자는 아이샴 레딕이라는 남자로 보이는데, 문제는 사건현장에 이와 손톱, 뼈와 혈흔 같은 애매한 흔적만 남아있었을 뿐 정작 시체도 없고, 목격자 역시 하나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검사는 현장 증거에 따르면 피고는 유죄라고 주장하는 반면, 변호사는 발견된 것이라곤 단지 정황 증거 뿐이므로 피고는 무죄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검사는 도무지 범행동기를 알 수 없어 기소를 확신하지 못했고, 변호사는 증언이 거듭될수록 의뢰인인 피고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줄거리만 보면 두 이야기의 접점이 어디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지만, 평행선을 달리듯 나란히 전개되던 두 이야기는 후반부에 이르러 정교하게 합쳐집니다.

루 마운틴의 복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합니다. 복수 상대의 얼굴도 본 적 없고, 목소리조차 직접 들은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오직 연상과 추리만으로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아내듯복수 상대를 찾아낸 것은 다소 무리수가 느껴졌지만, 마술 같은 트릭과 치밀한 사전 포석을 통해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완벽한 신의 한수로 복수극을 마무리하는 과정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법정 공방전의 경우 새로울 것 없는 전형적인 증인 심문과 반대 심문이 이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증인을 향해 전혀 다른 시각과 논조를 펼치며 배심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두뇌 대결은 마치 법정 현장을 생중계 하듯 긴장감과 사실감이 넘칩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피고가 계속 피고인으로만 명명될 뿐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인데, 중반쯤 되면 어렵지 않게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지만 루 마운틴의 복수극이 어떻게 진행됐기에 이 법정 장면과 연결된 것인지, 또 작가가 설정한 트릭은 무엇이며 어떻게 풀릴 것인지는 그리 쉽게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Tooth and the Nail’입니다. 번역 제목인 이와 손톱그대로입니다. 언뜻 보면 아이샴 레딕이 살해된 현장에서 발견된 이와 손톱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정관사 The를 뺀 ‘tooth and nail’맹렬하게, 필사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숙어라는 점에서 작가 빌 밸린저가 중의적인 차원에서 정한 제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깊은 뜻까지 반영한 번역 제목을 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번역자의 후기를 통해서라도 그 뜻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스마트폰도, 유전자 감식도, CCTV도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스토리지만, ‘이와 손톱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빛나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기발한 발상과 정교한 트릭, 두 갈래의 이야기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교차되는 구성미 등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못 읽은 빌 밸린저의 연기로 그린 초상역시 이런 고전의 맛을 전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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