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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빨간 심장을 둘로 잘라버린 ㅣ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지음, 서지희 옮김 / 예문 / 2014년 6월
평점 :
유부녀 에리카 뮐러의 시신이 공원에 유기된 채 발견됩니다. 율리아 뒤랑은 시신의 상태를 보자마자 1년 전에 벌어졌으나 미제 상태로 남아있는 두 건의 살인사건과 동일한 수법임을 알아봅니다. 무수한 폭행과 바늘 자국이 남아있고, 신체는 잔혹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여 동안 하루에 한 명꼴로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된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뒤랑은 희생자 중 한 명인 고급 매춘부의 고객 명단에 들어있던 프랑크푸르트의 유력인사들을 탐문하지만 혐의를 특정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일부 희생자들과 용의자들이 파티와 점성술을 통해 인연을 맺은 것을 알게 된 뒤랑은 그들 간의 내밀한 관계를 추궁하는 한편 점성술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정신과 의사를 통해 범인의 프로파일을 작성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사건은 쉴 새 없이 계속 발생합니다.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작품을 짧은 시간 안에 연이어 읽어서 그런지 특히 이번 작품은 앞서 읽은 작품들과 비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서평 대신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한국 출간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아쉬운 점, 궁금한 점들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서평을 써볼까 합니다. (‘신데렐라 카니발’은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 내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1.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잔혹함과 선정성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요? ‘율리아 뒤랑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곤 했지만, 이번만큼 범행 수법이 잔혹하고 선정적이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잔혹함과 선정성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진 않지만, 밀도 있는 구성이나 사실적인 캐릭터 등 작품의 완성도가 받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말초적인 호기심만 자극하는 잔혹함과 선정성은 결코 매력적일 수 없습니다. ‘예쁘고~’의 경우 완성도를 논할 정도로 부족한 작품은 절대 아니지만, 어쩐지 독자들에게 소구하는 포인트가 ‘여성 신체의 엽기적인 훼손’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혹함과 선정성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2.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불륜의 사슬, 부모 또는 가족으로 인해 각인된 폭력과 성에 관련된 트라우마 등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자기복제는 앞으로도 계속 될까요? ‘예쁘고~’는 안드레아스 프란츠가 즐겨 설정하는 갖가지 트라우마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과거의 상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각인시킨 주범으로는 어머니가 으뜸으로 가장 많았고, 아버지의 경우 권위적이고 묵시적인 폭력으로 가족들을 굴복시키곤 합니다. 또한 이웃이나 친구 또는 가까운 지인의 배우자와 거침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도 예외 없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이런 설정들이 매 작품마다 반복되면서 자기복제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외부’의 제보나 우연한 계기 없이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못하는 뒤랑의 형사로서의 능력은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할까요? ‘영 블론드 데드’에서는 우연히 발견한 단서 하나가, ‘12송이 백합~’에서는 우연한 기회에 조사하게 된 참고인들이, ‘치사량’에서는 난데없이 날아든 제보가 각각 사건 해결의 열쇠로 설정됐습니다. ‘예쁘고~’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남자의 제보가 없었다면 여러 희생자를 낸 연쇄살인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뒤랑의 탐문은 집요하고 빈틈없지만 결국 제보나 우연한 행운 없이는 성과를 못 내온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뒤랑은 뛰어난 형사가 맞을까요?
4. 이건 좀 사족인데, 원제와는 무관한 번역 제목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예쁘고~’의 경우는 왜 이렇게 원제와 거리가 먼 번역 제목을 붙였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예쁘고~’의 원제는 심플한 한 단어 ‘Der Jager’, 즉 쫓는 사람, 사냥꾼이란 뜻입니다. (네이버로 검색해보니 ‘Jäger’로만 나왔는데, 혹시 오류라면 정정 부탁드립니다) 내용과 직접 연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 길고 뜬금없는 번역 제목의 출처는 도대체 어딜까요? 원제가 조금 밋밋한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작품의 완성도보다 잔혹하고 선정적인 제목으로 관심을 끌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예쁘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못했는데, 인물과 사건만 바뀌었을 뿐 전작들에서 보인 전형적인 틀을 복제한 느낌이 강했던 탓에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한국 출간작에 대한 거시저인 리뷰가 되고 말았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일단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엽기적인 사건, 극단적인 트라우마, 흥미진진한 불륜 등 다소 막장에 가깝고 자극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점성술 이야기도 의외로 흥미롭고, 중반쯤에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을지 모르지만 진범의 정체도 꽤 충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공격적인 서평을 쓰게 된 것은 최근 1년여 동안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네 작품을 연이어 읽은 피로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로는 손색없지만 그의 작품을 연이어 읽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띄엄띄엄, 조금은 기억에서 잊힐 만 할 때쯤 한 편씩 읽어보는 것이 안드레아스 프란츠와 율리아 뒤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