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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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짧게는 2, 길게는 20년 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돌연 나타나 살인을 저지릅니다. 처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한 뒤 다음에 벌어질 살인사건의 단서를 현장에 남겨놓고 사라집니다.

7년 전 속삭이는 자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에 실종전담반에 머물며 사건현장과 담을 쌓고 살아온 밀라 바스케스는 처음엔 상부의 수사참여 지시를 거부하지만 범인=실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어쩔 수 없이 7년 만에 피로 범벅이 된 사건현장을 찾습니다.

인류학에 빠져 현장형사 대신 취조전문가가 된 사이먼 베리쉬와 콤비플레이를 펼치며 밀라는 실종자들이 나타나 벌이는 기이한 살인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고 특정한 약을 복용했으며 납치나 유괴가 아닌 명백히 자발적인 형태로 종적을 감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밀라는 잊고 싶은 7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속삭이는 자가 남긴 공포가 또다시 그녀의 삶 속에 침투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결국 밀라와 베리쉬가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그녀의 불길한 예감을 한참 뛰어넘어 치명적이고 잔인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나타나 돌연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실종된 소녀들의 신체 일부가 발견된다는 속삭이는 자의 설정만큼이나 독특했고, 스스로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살인을 벌이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호기심을 자아내면서 초반부터 몰입도를 끌어올립니다.

 

사이먼 베리쉬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파트너가 다방면에서 적잖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존재감은 원톱 주인공 밀라 바스케스의 캐릭터 - 그녀의 상처와 트라우마, 그녀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녀의 연약한 가족과 암울한 미래 - 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7년 전 속삭이는 자사건의 파생물들입니다. 그것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감당 못할 만큼 크고 거대했고, 밀라의 몸과 마음에 너무 깊이 새겨진 탓에 이젠 화석처럼 굳어져 그녀의 일부가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 이후 밀라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공감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있어.”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밤낮으로 듣게 됐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기억을 통증으로라도 잊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칼을 대기 시작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이 전염이라도 될까 두려워 6살 된 딸 앨리스를 곁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속삭이는 자사건의 파생물들 가운데 밀라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둠입니다. 어둠과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어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것은 자만이나 만용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사를 헤매던 전쟁의 생존자가 또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당초 수사에 참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세 차례나 거부한 것은 피로 범벅된 현장은 결국 자신에게 치명적인 인력(引力)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밀라의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는 다양하게 갈릴 것입니다. 작위적인 냄새가 너무 강하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면 충분히 존재할 법한 캐릭터라는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밀라를 파괴한 주범이자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속삭이는 자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픽션이라도 그게 가능하냐?”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밀라에 대해서도, ‘속삭이는 자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반반 정도인데, 그래도 큰 거부감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도나토 카리시가 짜놓은 개연성 있는 사건들과 사실감 있는 조연들 덕분이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의 부제를 왜 밀라 바스케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니라 속삭이는 자 : 두 번째 이야기라고 붙였는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준 마지막 페이지의 단 몇 줄의 문장은 궁금함이 해소됐다는 시원함보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서늘함만 잔뜩 남겨줬습니다. 그래선지 다 읽은 후에 오히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실제 그런 문구는 없었지만 제 눈에는 ‘To be continued’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전작에 이어 또다시 전대미문의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공을 세우긴 했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트라우마 덩어리인 밀라의 불행은 이번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밀라와 그녀의 딸 앨리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빠르고 변화무쌍한데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게 설정돼서 자칫 잘못 언급했다간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더 이상 구체적인 소개는 어렵지만, 그런 만큼 가능하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서평은 작품을 먼저 읽은 후에 찾아볼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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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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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었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프릭스가 직설적이고 정직한 호러물이라면, ‘안구기담에 실린 7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공포, 탐미적인 기담, 꿈속의 호러 등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정서들이 한데 뒤섞여있어서 오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안구기담의 한자 표기를 ’(기이할 기)가 아니라 ’(비단 기)로 삼은 것도, 또 출판사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표지를 선정한 것도 아마 수록작들이 지닌 이런 특이한 뉘앙스를 반영한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훼손된 부분이 고스란히 재생되는 저주받은 육체를 소재로 한 재생’, 희귀한 물고기가 전혀 다른 종의 생물로 변태하는 이야기를 그린 요부코 연못의 괴어’, 온갖 혐오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끔찍한 음식 이야기 특별 요리’,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살해와 피살의 기억을 다룬 몽환적 이야기 생일 선물’,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면서도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철교’, 우연히 주운 인형 때문에 존재 자체를 위협당하는 소설가의 이야기 인형’, 그리고 피살자의 안구를 파간 기이한 연쇄살인범의 사연과 오묘한 빛깔의 안구를 지닌 여자들의 이야기가 혼재된 안구기담등 평범한 상상력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 오컬트, 환상, 탐미, 광기라고 간결하게 정리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공감이 갔지만, 개인적으로는 미()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나 방화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악마파의 정서가 이 작품집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에 드러난 극단적인 공포심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아름다운 모델을 절벽 끝에 매달아놓곤 추락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하며 미친 듯이 손을 놀리던 화가의 광기랄까요? 특히 재생’, ‘특별 요리’, ‘생일 선물’, ‘안구기담은 악마파 화가의 광기를 능가하는, 아름답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아야츠지 유키토만의 스케치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든 작품마다 사키타니 유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훼손된 신체가 재생되는 저주받은 몸의 여대생(재생), 모든 메뉴가 혐오음식으로 가득 찬 특별 요리 전문점 ‘YUI’의 여주인(특별 요리), 페티나이프, 살인, 토막 난 시체의 판타지로 둘러싸인 여대생(생일 선물), 태어나면서 두 눈이 없었던 불행한 운명의 소녀(안구기담) 사키타니 유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 또는 조연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처음엔 그저 형식적인 재미를 위해서 이런 설정을 했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서늘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단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호러의 한복판에 놓인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할까요?

 

그에 반해 사키타니 유이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대학 조교수, 대학 비상근 강사, 대학 문학부 연구원, 요양이 필요한 소설가 등 대체로 얌전하거나 어딘가 무력해 보이지만 은밀한 일탈을 꿈꾸는 캐릭터로 포장돼있어서 사키타니 유이와 극적으로 대비되곤 합니다. 그들은 사키타니 유이가 제공하는 공포와 환상의 수혜자또는 피정복자이면서 동시에 1인칭 화자로 역할하고 있어서 마치 독자의 대리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안구기담은 단지 무서움이나 괴이함뿐 아니라 동정심, 공감, 따라해 보고 싶은 모방의 욕구 등 다양한 여운을 함께 전해줘서 프릭스와는 또 다른 종류의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상물로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들 정도로 시각적 재미도 갖추고 있어서 보는 내내 눈앞에서 장면들이 펼쳐지는 짜릿함을 기대해도 괜찮은 작품입니다. 가령, 성장과정이 고속 촬영된 식물처럼 훼손된 신체가 삐죽삐죽 자라나고, 튀기고 조린 바퀴벌레나 소의 고환과 음경이 탐식가의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연쇄살인범이 파낸 안구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라면 호러 마니아들에게는 군침이 돌 정도로 매력적인 영상이 아닐까요?

 

사족이지만, 수록작 가운데 특별 요리는 식사 전후에 읽으면 난감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비위가 약한 분은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하시거나 공복 상태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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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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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훗카이도 동부 구시로 외곽의 습지 일대에서 30년을 버텨온 호텔 로열의 일대기와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우고, 드나들고, 지키고, 끝내 문을 닫아야 했던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일곱 편의 연작 단편에 실려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진 않았지만, 첫 에피소드 셔터 찬스가 이미 오래 전 폐허가 된 호텔 로열을 무대로 삼고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 선물이 호텔 로열을 세우기로 결심한 창업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호텔 로열의 과거를 향해 조금씩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나이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여인과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운 다이키치, 제대로 된 부부 침실 하나 없는 가난한 삶 속에서 가족마저 해체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가 우연히 들른 호텔 로열에서 쾌락과 희망을 얻은 메구미-신이치 부부, 호텔 로열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난한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미코, 호텔 로열 창업자 다이키치의 딸이면서 자신의 손으로 호텔의 문을 닫게 된 마사요, 폐허가 된 호텔 로열에서 누드 사진을 찍는 연인 다카시와 미유키 등 일곱 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하나같이 눈물겹거나 애틋하거나 아니면 따뜻하거나 서늘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인적 드문 습지에 자리 잡은 러브호텔이라는 무대는 그곳을 세우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론 짧게는 2시간, 기껏해야 며칠 동안 그곳을 스쳐갔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공간입니다. 그곳은 공허한 원나잇 스탠드나 아슬아슬한 불륜 등 다양한 형태의 애증이 공존하는 곳이며, 밤낮으로 타인들의 정사의 잔재를 쓸고 닦아야 하는 고된 노동을 감수하는 사람부터 삶의 막장에 이르러 도피를 위해 숨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몰락 끝에 폐허에 이른 호텔 로열을 닮은, 즉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지금 겪고 있는 곤란에서 쉽게 헤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소외감, 그리고 결국 습지 같은 현실에 항복한 채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열패감 등입니다. 때로 꿈이나 희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밝은 미래를 담보하진 못합니다. 책 소개글에선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결핍이라고 칭했는데, 간결하지만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런 극적인 무대와 캐릭터들을 일곱 개의 이야기 속에 과장하지도, 억지로 꾸미지도 않은 채 잘 조합해냈고 그 결과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한숨을 자아내게 만들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담담함과 처연함이 149회 나오키상 수상의 동력이 됐으리라 여겨집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자신이 홋카이도 구시로에서 태어났으며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가 '호텔 로열'이란 러브호텔을 경영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성장한 것은 물론 객실청소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소녀 시절의 작가의 눈에 비쳤던 인물들을 모델로 삼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록된 작품마다 제각각 다채로운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딱히 어느 작품이 더 재미있거나 인상적이라고 꼽긴 어렵지만, 창업주의 딸 마사요가 호텔 로열의 문을 닫는 날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 쎅꾼과 호텔 로열에서의 거품 목욕을 잊지 못하는, 삶에 찌든 중년 여인의 사연을 담은 거품 목욕’, 그리고 호텔 로열 창업자의 유골 공양을 맡은 주지승 아내의 기구한 삶을 그린 금일 개업이 개인적으로 호감이 많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또 한 권의 연작 단편집을 만나 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사쿠라기 시노라는 빼어난 작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더욱 더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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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수호자 바스탄 3부작 1
돌로레스 레돈도 지음, 남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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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스페인 북부 소도시 엘리손도의 바스탄 숲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10대 소녀들이 발견됩니다. 아마이아 살라사르는 수사 책임자로 임명받곤 두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고향 엘리손도를 찾습니다. 아마이아는 과학수사팀의 도움과 탐문을 통해 범인의 동기를 어느 정도 추정하지만 더 이상 큰 진척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건 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아마이아의 심신은 갈수록 피폐해집니다. 늘 빈정대는 큰언니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작은언니와의 갈등, 그녀들로 인해 떠오르는 유년기의 끔찍한 트라우마, 연쇄살인사건을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고 믿는 엘리손도 주민들의 불온한 분위기, 그리고 여자 수사반장을 못마땅해 하는 남자 형사들의 노골적인 반기 등이 그 요인들입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사건의 진상이 그 윤곽을 드러내지만, 그 순간 아마이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인의 일그러진 욕망과 비뚤어진 신념 속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트라우마의 조각들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초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장난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과학과 이성, 신화와 전설, 역사와 인류사, 그리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참혹한 연쇄살인 등 한 그릇에 버무리기 힘든 코드들이 혼재해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신화와 전설이 여전히 일상 속에 잠재해있고 원시성이 살아있는 자연을 품고 있는 소도시 엘리손도는 이런 혼재된 코드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작가는 아마이아의 입을 빌어 엘리손도 구석구석을 문화유산 답사기만큼 상세히 묘사합니다. 더불어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엘리손도의 역사와 여성들의 수난사를 언급하는가 하면, 신화와 전설에 관해서도 장문에 걸쳐 전문서적 수준의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런 몽환적인 배경 속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인연쇄살인이 벌어졌을 때 전설 속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아마이아는 과학과 이성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녀 역시 엘리손도의 딸인지라 때로는 꿈과 환영을 통해 암시를 받기도 하고 타로 카드의 주술적 힘에 기대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극심한 갈등 상대인 언니들로 인해 유년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면서 수사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아마이아의 정신은 극도의 혼란에 빠집니다. 동료라기보다 마초라 불러 마땅한 남자들의 비열한 행태도 그 혼란에 한몫을 거듭니다. FBI와 함께 콴티코에서 교육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여형사지만 아마이아의 능력치는 여러 방해꾼들의 훼방으로 인해 바닥까지 추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자신을 방해했던 모든 요인들 - 사람, 자연, 신화, 전설 - 이 실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음을 깨닫자 그녀의 억눌렸던 잠재의식과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고 맙니다.

 

방대한 서사와 인물들, 그리고 독특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조합에 대해 유럽의 출판사들은 물론 많은 독자들이 서평을 통해 호감을 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적잖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들을 통해 거꾸로 설명해 보면...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소설 (출판사 리뷰)

-경찰 수사와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합시킨... (스페인 Erein 출판사)

-서스펜스와 신화, 가족사가 절묘하게 결합된 (스페인 Columna 출판사)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범죄는 부차적인 것... (저자 인터뷰)

 

장르문학, 순문학, 인류학적 상상력, 서스펜스, 신화, 가족사 등 섞이기 힘든 다양한 코드들의 조합이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적인 기품을 끌어올린 것이 사실이더라도 엘리손도의 역사와 인류학적 유산에 대한 과도한 설명은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 같았습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대목이란 점은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림잡아 1/3(혹은 그 이상) 정도의 분량을 할애한 탓에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수시로 들었습니다. 살라사르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자매들 간의 전쟁에 버금가는 갈등 역시 과유불급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지나쳤습니다.

물론 이 모든 코드들이 연쇄살인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긴 하지만, 제 경우엔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서 연쇄살인사건의 무게감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희석됐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의 존재감도 희미하게만 느꼈을 뿐입니다. 그래선지 아마이아를 놓고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에 비견된다.”는 표현은 적어도 이 한 작품만으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화제가 됐고 영화화까지 결정된 바스탄 3부작의 첫 편이라는 외형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되진 못했지만, 남은 두 편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욕심이 조금만 덜어진다면, 그리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가 활약하는 스릴러로서의 존재감을 되찾는다면 외형만큼이나 알차고 재미있는 책읽기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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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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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는 소문은 숱하게 들었지만 워낙 방대한 양(첫 출간 때 11권까지 나왔습니다)인데다 신화적인 요소를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아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 사전 서평단에 뽑혀 10여년 만에 나온 개정판 가운데 첫 편의 가제본을 읽게 됐습니다.

첫 출간 때 두 권으로 분권됐던 1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를 한 권으로 묶었는데, 거의 한 호흡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하면서 왜 십이국기가 화제의 작품이 되었는지,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수많은 오타쿠를 양산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16세 여고생 나카지마 요코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기이한 모습의 게이키에 의해 허해(虛海)를 건너는 식()을 통해 교국(巧國)이라는 낯선 세상으로 옮겨집니다. 흉사를 몰고 온 해객(海客)으로 낙인 찍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요코는 겨우 감금을 풀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신을 데리고 온 게이키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가진 것이라곤 그가 건네준 검 한 자루 뿐인 신세가 됩니다. 이후 밤마다 끔찍한 요마들의 습격을 받으며 게이키 찾기에 나선 요코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이곳이 십이국 중 한 나라인 교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쥐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 라쿠슌을 만나면서 요코의 여정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해객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안국(雁國)으로 함께 길을 가던 중 라쿠슌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은 요코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안국의 왕 연을 만나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을 확인한 요코는 오랜 고민 끝에 내전과 혼란으로 가득 찬 십이국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등장하는 장면은 물론 요코가 요마(妖魔), 선인(仙人), 환영(幻影), 반인반수(半人半獸) 등과 마주치는 장면들을 보곤 조금은 당혹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판타지 설정에 대한 이런저런 편견과 어색함은 요코가 점차 십이국이라는 새 세상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감에 따라 금세 잊을 수 있었고, 이내 과연 요코는 집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든가, ‘요코가 십이국의 세계로 끌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요코를 십이국으로 데려온 게이키와 요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대서사의 첫 편이다 보니 십이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가 쏟아집니다. 십이국의 탄생 신화에서부터 하늘과 각국의 왕, 그리고 왕을 보필하는 기린(麒麟), 또 이형의 짐승에서부터 빙의가 가능한 요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소개되고, 현재 십이국의 각각의 상황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세세한 정보까지 머릿속에 입력하다 보면 한없이 골치 아프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노 후유미가 이 복잡하고 방대한 설정들을 구상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공 들였을지 상상해보면 저절로 경외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건의 전개만 따지면 의외로 줄거리는 심플합니다. 십이국이라는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된 요코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 출발점까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공황에 가까운 심리적 갈등을 통해 요코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작품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어서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감을 높여줍니다. ‘저쪽 세상의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 무력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와 회한, 연이은 배신과 속임수를 통해 얻은 사람은 결국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서글픈 깨달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십이국의 미래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 등 낯선 세상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요코의 모습은 이 작품이 단순한 오락물 판타지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메시지가 담긴 의미 있는 서사임을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이것으로 요코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본편의 마지막 문장을 본 순간 두 번째 이야기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렜습니다.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서 여러 서평과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후속작들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진 십이국기에 대한 그 어떤 사소하고 작은 정보도 외면하기로 했습니다. 오노 후유미의 거대한 서사를 만끽하는 재미를 스포일러로 망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십이국기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검색해본 자료가 하나 있는데, 작품 속 묘사만으로는 잘 연상되지 않아 너무 궁금한 나머지 이리저리 검색하다 찾아낸 십이국의 지도입니다. (정식 출간본에는 이 지도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 가제본에는 없었습니다) 꽃잎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십이국의 지도를 끝으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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