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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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른 살의 나이에 뇌종양 4기를 선고받는다면? 그런 내 앞에 울긋불긋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유쾌 발랄한 악마가 나타나 세상에서 뭐든 한 가지를 없애면 생명을 하루 연장해주겠다고 제안해온다면? 그런데 악마가 선택한 없애야 할 그 무엇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라면?

 

시한부 선고, 유쾌한 악마, 생명 연장의 거래, 소중한 것의 소멸 등 꽤 독특한 판타지 소재들을 모아 삶과 죽음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그린 작품입니다. 시한부 환자의 클리셰나 상투적인 이야기로 도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억지 희망을 위해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동원하지도 않았지만, 이야기는 빛과 그늘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한 개인의 소소한 삶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생명 연장을 대가로 악마가 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대상들은 주인공에겐 나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이라 매번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편리함 대신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갔던 ‘OO’, 어릴 적부터 주인공의 삶을 지탱하고 형성시켜온 ‘OO’, 그리고 지나간 시간과 기억들을 상징하는 ‘OO’ 등이 그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생명 연장의 대가로 소중한 것들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던 주인공이 그제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 - 고양이 양배추와 동거하게 된 계기, 자신의 마지막 시간까지 가족들을 위해 내줬던 어머니와의 온천 여행, 틀어질 대로 틀어져 지금은 절연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가볍고 텅 빈 사랑만 나눴던 첫사랑 등 - 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얻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깨달음과 새삼 느끼게 된 회한 속에서 하루하루 연장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어느 날 생각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겠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린 그는 죽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뭔가를 소멸시켜가면서까지 살아가는 건 더 괴롭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악마가 다음 소멸대상으로 고양이를 지정하자 주인공은 타인보다 조금 짧게 주어진 수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반드시 마쳐야 할 한 가지 미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절박함과 애틋함이 메인 정서이긴 하지만, B급 코미디나 만담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캐릭터의 악마, 일시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고양이 양배추’, 그리고 첫사랑과 오래된 친구 등 주인공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조연들 덕분에 이야기는 시한부 환자의 참회록 같은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독자는 주인공과 조연들이 나눴던 소중한 시간들, 안타까운 순간들, 후회되는 상황들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주제로 삼았지만 결국엔 에 대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생명연장을 거래하는 유쾌한 악마말하는 고양이등 일부 판타지 설정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때가 되어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들에 대해 강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은 비슷한 주제의 논픽션이나 실화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해줬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면 다소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뜻한 햇살과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한가한 오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인공의 마지막 일주일이 좀더 독자들의 마음 깊이 공명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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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8
도쿠나가 케이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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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음흉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23글자에 달하는 긴 제목, 게다가 다분히 의도가 엿보이는 핑크빛 손 글씨 폰트와 일러스트 때문에 왠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빙긋 웃음이 나거나 유쾌한 기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숭숭한 일들도 많고, 무겁거나 잔혹하거나 괴이한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아마도 머리 좀 식히라고 적당한 타이밍에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나 봅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만화가를 지망하며 5년째 택배회사 콜센터 계약직으로 일하는 25살의 청춘 구에다 아야카가 새로 부임한 센터장이자 자칭 스파이인 46살의 기무라 이치로 덕분에 정신없이 보낸 약 한 달 동안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 모음집 같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속에 녹아있는 유쾌하고 찡한 청춘의 성장담에 있습니다. 20살도 아니고, 30살도 아닌 어중간한 25살의 나이, 프로 만화가도 아니고 콜센터의 정식 직원도 아닌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더구나 자신이 꿈꾸는 순정만화가에 대한 주위의 편견을 이겨낼 자신이 없는 소심함 등 25살 아야카의 청춘은 모든 것이 어정쩡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기무라로 인해 아야카는 롤러코스터 같은 한 달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자신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기억엔 남을만한 성장의 시간을 얻습니다. 20살 연상의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학창시절 이후 잊고 있던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악동노릇도 해보게 되고, 모처럼 자신감 있는 기분으로 만화를 그려 방문 투고까지 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기무라의 존재감은 아야카에게 기분 좋은 삶의 가이드가 돼주었고, 언젠가 한번쯤 우연히라도 그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기무라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만나고 싶은 판타지 속의 존재입니다. 별것 아닌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가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유발시켜 그래도 열심히!’라고 한번쯤 마음먹게 만들어 줍니다. 후줄근한 양복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백발, 매사에 허허실실로 일관하는 느긋함, 또 고등어와 배추를 함께 넣은 의문의 전골을 요리하는 중년의 남자로 포장돼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쩌면 내 주위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지도...’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생활감 넘치는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어딘가 진실을 감추고 있는 신비한 구석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가 벌일 스파이 역할이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작가는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킬 깔끔하고 기분 좋은 엔딩을 마련해놓았습니다.

 

두 주인공 외에도,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게 고객의 클레임을 응대하는 오카모토, 외모만 보면 화류계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한없이 착하고 순정파인 히로미, 콜센터를 회자하는 모든 소문의 진원지이자 공포의 독신녀인 다치바나 여사 등 함께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처럼 오피스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격언이지만 기무라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던 25살의 아야카에게 남긴 인상적인 한마디를 인용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하룻밤만 공연되는 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딱 한 번뿐이니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게다가 전력을 다하는데 있어서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고, 그게 제일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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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키메 스토리콜렉터 2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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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키메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도조 겐야 시리즈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다만 호러에 많이 가까운 작품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5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두 괴담이 차례로 소개되고, 소설가인 미쓰다 신조가 두 괴담의 연관성과 미스터리 풀기에 나섭니다.

 

첫 괴담 엿보는 저택의 괴이는 토쿠라 시게루 등 네 명의 남녀학생들이 1980년대 중반 임대 별장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겪은 무서운 체험담입니다. 그들은 별장지 관리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숲에 들어갔다가 인적 끊긴 폐촌을 발견합니다. 불길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폐촌에 다가간 일행은 그곳에서 기이한 풍경과 마주합니다. 더구나 자신들을 엿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 느껴지자 급히 마을을 떠나 돌아오지만, 그 뒤로 그들에겐 원인불명의 죽음, 환각, 환청 등이 닥쳐옵니다.

두 번째 괴담 종말 저택의 흉사는 재야 민속연구자 아이자와 소이치의 미공개 저작물로 1930년대 중반 그가 토모라이 촌에서 겪은 괴담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이자와는 민속학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사야오토시와 절친이 됐는데, 그는 자신의 고향 토모라이 촌과 저주받은 사야오토시 가문에 대해 아이자와에게 털어놓습니다. 특히 그가 언급한 엿보는 괴물 노조키메에 큰 관심을 품었던 아이자와는 사야오토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토모라이 촌을 직접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조키메의 시선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사야오토시 가문에 들이닥친 대참사를 목격합니다.


 

명백한 픽션이지만 토쿠라 시게루의 체험담과 아이자와의 기록이라는 설정 때문에 읽는 내내 마치 실화나 논픽션을 읽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화자인 미쓰다 신조는 프롤로그를 통해 독자에게 혹시 이 책을 읽는 중에 평소에는 느끼지 않을 시선을 빈번하게 느끼게 (된다면), 거기서 이 책을 덮기를 권합니다. 단순한 기분 탓이겠지만, 만일을 위해서입니다.”라는 진심어린(?) 경고를 하는데, 이제 막 본편의 첫 페이지를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섬뜩한 느낌을 주기엔 더없이 좋은 장치입니다. 어쩌면 그 경고처럼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은 뒤 등 뒤나 천정, 열린 문 사이에서 자신을 엿보는 시선을 느끼게 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앞서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도조 겐야 시리즈의 하이브리드,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다만 호러에 많이 가까운 작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불가해한 현상이 원인이 된 비극을 다루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미스터리 서사에 따라 논리적인 해결을 이끌어냄으로써 호러와 미스터리의 깔끔한 융합을 선보이는 반면, ‘노조키메작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해결에 도전은 하되 결국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논리적인 해결에의 도전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았는데, 미쓰다 신조는 본문 속 아이자와의 입을 통해서도 몇 번씩 그런 입장을 표명하곤 합니다.

 

노조키메 자체가 부조리한 존재인데도, 나는 그것이 초래하는 기괴한 현상을 논리적으로 다루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번역자 현정수의 해설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대략 요약해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 호러이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단서를 찾아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미스터리인데, 밸런스 좋게 두 가지를 융합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초현실적인 존재논리라는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어색하지 않게 엮어낸 것은 작가 미쓰다 신조의 능력이다.”

 

미쓰다 신조의 작자 미상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늦은 밤 조용한 방에서 혼자 읽기엔 조금은 불편한 작품입니다. 환한 대낮에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게 되고, 방문이든 서랍이든 약간만 열려있으면 괜히 찜찜해서 일부러 꼭꼭 닫았으며, 쉬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책을 덮어둘 때도 의식적으로 표지에 눈길을 주지 않게 됩니다. (표지에 그려진 노조키메를 빤히 보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으슬으슬해집니다.) 스스로 바보 같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느낀 것은 미쓰다 신조가 프롤로그에서 던진 경고가 효과를 발휘한 탓일 수도 있고, ‘결국 범인은 현실 속에 있다는 미스터리 식 엔딩이 아니라 그것은 결국 불가해한 현상이었다는 정통 호러의 엔딩이 남긴 후유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찜찜함만 남을 수도 있지만, 그 찜찜함이야말로 미쓰다 신조가 노조키메를 통해 겨냥했던 목표라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라고 위안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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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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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직장과 안정된 생활, 어쩐지 운명의 상대일 것 같은 남자와의 첫 데이트까지, 달콤했던 가브리엘라의 주말은 그녀의 딸을 유괴한 범인으로부터 거액의 몸값은 물론 비밀 문건 옥토버리스트를 찾아내라는 협박을 받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잘 생기고 친절한 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대니얼은 이제 막 만났을 뿐인 가브리엘라를 도와 유괴범과 협상을 벌이려 한다. 가브리엘라의 딸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 보내는 조셉, 뉴욕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의문의 남자, 그리고 결코 협조적이지 않은 경찰들. 소설은 그들의 사흘 동안의 동선을 역순으로 추적한다.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이야기라 줄거리 정리가 조심스러워서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요약했습니다)


 

이야기를 거꾸로 전개한다는 것, 그것도 반전이 거듭되는 스릴러를 마지막 챕터부터 첫 챕터의 순서로 집필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반전의 맛을 마지막에 배치된 첫 챕터에서 느끼라고? 그 역시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제프리 디버라 하더라도...

일단 이런 의구심과 미심쩍은 시선으로 첫 페이지를 열자 챕터 36’부터 챕터 1’을 향해 그려진 목차가 눈에 띄었습니다. 진짜구나, 하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첫 챕터를 마치자마자 또다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장면이라고? 긴장감도 반전의 향기도 느낄 수 없는 내용인데, 이걸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 시작을 했을까? 새삼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들어있던 번역자의 한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충분한 마음의 준비 없이 옥토버리스트를 펼쳐든 독자라면 한동안 고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사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한 챕터를 마칠 때마다 그 앞 챕터의 첫 문장을 다시 확인하곤 했습니다. , 이렇게 연결되는군,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중반쯤부터 앞에 깔아놓은 설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정체를 드러내면서 책읽기에 탄력이 붙기 시작합니다. 2/3쯤 되면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되고, 마지막 몇 챕터에서는 빙긋 웃음까지 나올 정도로 제프리 디버의 트릭에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사건과 인물의 실체를 시간의 역순에 따라 배열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서술에 비해 몇 배의 노력과 치밀한 구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 모든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지레 걱정했던 독자들은 그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짜릿함과 함께 제프리 디버의 진면목을 맛보게 됩니다.

 

작업실에 있는 모든 포스트잇을 이용하여 스토리를 완성했다.”는 제프리 디버의 고백을 보고 사방의 벽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워졌을 작업실이 연상됐습니다. 얼마나 많은 포스트잇을 떼었다, 붙였다 반복했을까? 휴지통을 꽉꽉 채울 만큼 버려진 포스트잇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몇 번씩이나 이리저리 옮겨 붙여지던 포스트잇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완벽하게 시간의 역순에 따라 배열됐음을 발견했을 때의 제프리 디버의 쾌감은 어땠을까? 등등 설계자제프리 디버의 고뇌로 가득 찬 모습까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번역자는 두 번째 읽을 때는 뒤부터, 즉 챕터 1부터 읽어볼 것을 권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옥토버 리스트는 몇 번을 읽더라도 챕터 36부터 거꾸로 읽어야 깊은 맛과 지적 쾌감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웬만해선 출판사의 소개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까칠한 독자지만, 이번만큼은 눈에 띄는 두 줄의 홍보 카피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을 믿지 마라, 정보를 속단하지 마라, 인물에 공감하지 마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이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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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0일생 소설NEW 1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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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모임 때문에 고향인 J시를 찾은 현재는 한때 불륜관계였던 혜린과 우연히 만납니다. 그런데 1주일 후 혜린이 살해당하고, 현재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가까스로 혐의를 벗지만 현재는 연고도 없는 J시에서의 혜린의 행적이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살해당하기 직전 혜린이 만났던 한 여인을 시작으로 현재는 혜린의 동선을 하나씩 되밟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혜린이 J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윤조는 J시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내를 방치한 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희대의 바람둥이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혜린이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지난 60여 년간 봉인되어 온 비밀들을 하나둘씩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혜린의 죽음이 그 비밀들을 푸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230일이라는,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펼쳐놓은 서사의 폭은 60여 년이라는 시간만큼 깊고 방대합니다. 전쟁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추악하지만 절실했던 욕망을 뿌리삼아 작가는 권력, 이기심, 탐욕, 성욕, 살인, 시기, 질투, 치정(癡情) 등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본능들을 민낯 그대로 내보입니다.

 

그 중심에는 정윤조-정태훈-정현재로 이어지는 3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정윤조는 칠순에 이르러서도 남의 여자를 넘보던 희대의 바람둥이였고, 아버지 정태훈은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이력이 있습니다. 아들 정현재는 임신한 아내를 둔 채 함께 일하던 혜린과 몸을 섞었고, 아내는 뱃속의 아기를 지키면서 정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대가 공유한 불륜과 치정의 유전자는 60여 년에 걸친 비극의 이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저 한 쌍의 남녀가 금지된 영역에서 쾌락을 맛보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거나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60여 년에 걸친 현대사의 비극불륜과 치정이라니, 물과 기름 같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이러니한 조합이 아닐 수 없지만, 작가는 생생한 캐릭터, 적절히 배치된 사건, 베일에 싸인 과거사를 정교하게 구성함으로써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이끌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기억과거에 관한 것인데, 혜린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현재는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혜린이 살해된 시점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고, 어쩌면 정말 자신이 혜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동시에 현재는 혜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만난 사람들에게 길게는 60년부터 짧게는 20년 전의 일들을 기억해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라진 자신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기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폭주하는 현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캐릭터들의 이름을 통해 묘사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현재에 충실히 살라는 의미로 현재’, 여동생에게는 항상 앞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어디선가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억과거를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건이나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 작위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 매력적인 설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아주 잘 뽑힌 한 줄의 카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벗길수록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현재의 진실들과 고구마 줄기처럼 아무리 뽑아내도 끝없이 뽑혀 나오는 과거의 진실들, 그리고 그에 발맞춰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역겹거나 안타까운 죽음들이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차 없이 직조된 덕에 하루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김서진의 첫 작품인 선량한 시민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작품인 ‘230일생을 읽고 나니 첫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한 서사를 꼼꼼하고 빈틈없이 요리한 필력으로 미뤄볼 때 그녀의 첫 작품 역시 큰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후기 중 이 작품의 작의를 압축한 부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뻔뻔함과 노골적인 욕망을 지닌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면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을... 동시에 우리 시대의 분위기,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를 통해 현대사 6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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