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올 법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 상주하는 경찰 하나 없지만 세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다툼 한 번 없이 살 것 같은 사람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고, 어딘가 잠복해있던 이웃 간의 갈등과 욕망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피살된 사람은 마을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험담의 대상이 된 적 없는 76세의 싱글녀 제인 닐이기에 소도시 스리 파인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납니다. 어쨌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수사가 이뤄지고, 흉악한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스틸 라이프는 묘하게도 다 읽은 후에 따뜻한 느낌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첫 편인 스틸 라이프는 흔히들 전원 코지 미스터리, 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정서가 느껴지는 고전 후더닛 미스터리라고 칭해집니다. 번역 후기에 따르면 독립된 시골 마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건 관계자, 등장인물간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 외부에서 유입되어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인물, 연극 무대를 옮겨놓은 듯한 사건 무대 같은 고전 미스터리의 클리셰는 이 작품에서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이더라도 이야기를 얼마든지 무겁고 냉랭하게 끌어갈 수 있겠지만, 작가는 살인사건만 아니라면 유쾌하고 따뜻한 시트콤에 제격인 캐릭터와 배경을 활용하여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특히 긴장감과 유쾌함을 동시에 내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애증이 교차하는 화가 부부,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노시인, 불쾌한 시선과 대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게이 커플, 전직 심리치료사이자 스리 파인스의 유일한 흑인인 서점주인 등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나 있을 것 같은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건 발생 이후 스리 파인스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태도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돼주기도 합니다.

 

더불어 퀘벡 경찰청에서 파견된 가마슈 경감 이하 경찰 캐릭터 역시 때론 웃음을, 때론 신중함과 묵직함을 선보이며 보기 드문 매력을 선사합니다. 가마슈 경감은 한마디로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같습니다. 그는 경쟁보다 팀웍을 더 중시하고, 모자란 부하에게는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 누구보다 진정성을 담은 마음으로 사건 수사에 나섭니다. 조직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승진과도 거리가 먼 경찰이 분명하지만, 누구나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그런 모범 경찰입니다.

가마슈의 부하이자 파트너이며 가마슈의 감성을 보완하는 이성의 소유자 보부아르, 신참으로 가마슈 휘하에 들어와 평지풍파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 이베트 니콜, 그 외에 가마슈 주위의 동료들 역시 매력 만점의 캐릭터들입니다.

 

잔혹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 대세인 시대에 사건도, 캐릭터도 독하지도 않고, 딱히 세일즈 포인트라고 꼬집어 말할 특이한 점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 페니의 문장은 독자의 관심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끌어들입니다. 부드러운 것 같지만 어딘가 톡 쏘는 맛을 풍기기도 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묘하게 비틀어 희극적으로 풀어놓은 문장들은 감칠맛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피살된 제인 닐을 묘사한 이 작품의 첫 문장을 보면, “미스 제인 닐은 추수감사절 하루 전인 일요일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자신의 창조주를 만났다.”라고 돼있습니다. 평화롭고 축복받은 호상(好喪)을 연상시키는 이 역설적인 첫 문장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읽는 내내 이런 따뜻한 재치가 느껴지는 문장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번역자의 알뜰한 노력도 일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장르물로서의 품격 역시 결코 모자라지 않았는데, 모두가 용의자로 보이지만 동시에 뚜렷한 동기를 확정할 수 없는 딜레마라든지 피살된 제인 닐의 기이한 행적, 숨겨진 이웃의 과거사, 끝내 밝혀진 기상천외한 트릭 등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구축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조차 짊어져야 했던 상실, 탐욕, 기만, 정체된 삶 등 현실적인 주제들에 대해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깊이의 서사를 풀어놓음으로써 작가는 장르물 외적인 만족감도 함께 전달해줍니다.

 

아쉬움이라면 딱 두 가지인데, 우선은 스리 파인스의 주요 인물들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초반부의 지루함입니다.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르물을 읽고 있는 거 맞아?” 할 정도로 조금은 장황하게 전개되는데, 이 지점만 넘어가면 속도감은 10배는 빨라집니다. 두 번째는 캐릭터는 물론 활약이 기대됐던 신참형사 니콜에 관한 것인데, 나름 세컨드 주인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등장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저기 민폐만 끼치다 보니 무척 아쉬웠습니다.

 

올해(2014)에만 네 편이나 출간된 가마슈 경감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이 평화로운 스리 파인스가 뉴욕을 능가하는 범죄도시라도 된 건가, 하는 생각에 궁금증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물론 정답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도조 겐야 시리즈와는 또다른 미쓰다 신조의 기담을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15년 전 고서점 2층에 머물며 지독히도 가난했던 학생 시절을 보낸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고, 비상근 강사로 일하며 번역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다들 그의 처지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혐오와 무시 속에 투명인간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그에겐 아내 모르는 큰 빚이 있고 여러 소비자금융을 통해 돌려막고 있는 중입니다.

어릴 적, 가족이 파탄나면서 가난의 수렁에 빠진 여자가 있습니다. 멋모르고 쓰기 시작한 대출이 사채에 이르면서 그녀는 고서점 2층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남자를 만난 그녀는 무색무취한 섹스를 나누며 그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그녀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가치는 돈입니다.

이 두 남녀가 한여름에 만나 한겨울에 영원히 결별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돈과 정욕으로 얽힌 만남이었고 토막 살인으로 종결되지만, 씁쓸하고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이어 사쿠라바 카즈키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제목만 보면 끔찍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잔혹 미스터리 같지만 실제 이야기는 돈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사랑’, ‘죽음에서 시작된 기이한 인연을 함께 다루고 있어서 사쿠라바 카즈키답게 여러 장르를 믹스한 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고 의미 없는 섹스로 시작된 요시노 사토루와 시로이 사바쿠의 관계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욕만을 위한 만남도 아닌 기이한 인연입니다. 두 계절에 걸쳐 드문드문 이어지던 관계는 이 끼어들면서 급격히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단순한 화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토루에게 은 영혼을 거둬간 악마이자 굴욕의 대가이며 가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밑바닥 삶을 사는 사바쿠에게 있어 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입니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사쿠라바 카즈키는 그들의 파국을 돈을 놓고 벌이는 치정살인극따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품경제의 후유증을 다루는 고발극처럼 유치하게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도 그랬듯이 사쿠라바 카즈키는 참담한 현실과 예정된 비극을 너무도 담담하고 예쁘게 그립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고단한 삶을 훤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파국이 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통속극처럼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고,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망할 놈의 돈이라는 욕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다가 결국 파국이 다가왔을 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화까지 나게 만듭니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다양한 상징과 대비를 동원하여 독자의 공감을 배가시킵니다. 두 사람은 습하고 기분 나쁜 한여름에 만나 살을 파고드는 한겨울의 혹한 속에 헤어집니다. 사토루의 아내의 집은 흰 요새처럼 웅장하고, 침실은 우주선 조종석을 떠올릴게 할 만큼 넓고 견고하고 청결합니다. 하지만 사토루와 사바쿠가 공유하던 고서점 2층은 누가 계단이라도 밟으면 파도위의 배처럼 흔들리고, 열리지 않는 둥그런 세 개의 창만 있는 너무나 외로운 방입니다. 또 후광이 드리운 여신 같은 아내는 하얗고 고른 치열을 지녔지만, 사바쿠는 누렇고 더럽고 제멋대로인 치열 덕분에 더러운 구멍 같은 입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와 집이 온통 하얀 색이라면, 사바쿠의 모든 것은 불길하고 희망 없는 암적색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징과 대비들 덕분에 현실감은 또렷해지고, 감정은 깊이 이입됩니다.

 

내용과 묘사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사쿠라바 카즈키만의 묘한 매력이 엿보이는데, 일반적인 사용법을 무시한 채 곳곳에 찍어놓은 쉼표들은 독자들의 호흡과 일반적인 눈 운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템포에 맞춰 책을 읽다 보면 문장과 행간에 깔린 작가의 의도를 얼핏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무척 거슬리지만 그 엇박자의 리듬을 타면 쉼표 하나만으로도 문장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꽤 뒤죽박죽인 이상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토막 시체가 된 것을 보니 묘하게도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뭐랄까, 안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그래. 이 사람은 예전부터 토막 나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이었다.”

 

프롤로그에 실린 이 글에서는 누가 토막 난 시체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누가 누구를 토막 냈는가?’가 무척 궁금했는데, 정작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실은 누구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등장인물 모두 살아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들이라는 먹먹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단순히 에 지배당하고, 놀아나다가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치명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 긴 분량의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구절절 긴 서평을 쓰게 만들 정도로 사쿠라바 카즈키는 여러 가지 화두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은 독자의 호불호를 많이 타는 편이고, 특히 그리 말끔한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느낌과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에 취향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이라면 늘 기대감을 갖고 찾아보게 됩니다. 다만 너무 자주, 연이어 읽는 것은 팬인 저로서도 그리 권하고 싶진 않습니다. 몇 달 또는 한 1년 쯤 후에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을 예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농장에서의 은퇴생활을 위해 런던을 떠나 스웨덴으로 간 다니엘의 부모 크리스와 틸데. 하지만 불과 몇 달 후 다니엘은 두 사람 때문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어머니 릴데는 스웨덴의 농장 일대에서 벌어진 범죄에 관한 확실한 물증과 단서를 갖고 있으며 아버지 크리스가 용의자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망상이 도를 넘었고, 그녀의 말은 모두 거짓이며 음모라고 주장합니다.

평생 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완벽한 커플이었던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니엘은 스웨덴에서 벌어진 일은 물론 지금껏 몰랐던 부모의 비밀과 어머니가 유년기에 겪은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스웨덴 농장 일대에서 벌어진 사악한 범죄에 관한 어머니의 진술은 사실일까? 어머니를 극도의 망상증을 앓는 정신병자로 여기는 아버지의 판단은 사실일까? 어머니의 유년기였던 1963년 여름과 올 여름에 벌어진 사건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다니엘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을 종결짓기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립니다.


 

톰 롭 스미스는 “‘차일드 44’ 3부작과 얼음 속의 소녀들모두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것이 공통된 주제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차일드 44’도 그랬듯이 이 작품 속의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데다 잔혹한 비극성을 지니고 있고,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지난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입니다. 완벽해 보이던 부부가 이국에서 보낸 4개월여 만에 목격자 용의자로 갈라서고, 외아들 다니엘은 그 가운데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를 강요받습니다. 더구나 가족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다니엘은 갈수록 더 큰 강도의 비밀과 고통을 만나게 될 뿐입니다.

 

어머니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중반부까지의 스웨덴에서의 사건일지는 조금은 답답하게 읽힐 정도로 장황합니다.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가고, 문장은 평범하거나 만연체의 톤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100여 페이지에서 드러나는 톰 롭 스미스의 진가는 말 그대로 압권입니다. , 이래서 톰 롭 스미스구나, 라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연이은 반전과 비밀의 폭로는 흥분과 속도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다니엘에 의해 밝혀지는 끔찍한 과거사와 진실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초반부에 물음표를 떠올릴 정도로 느껴졌던 동어반복과 지루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왜 그렇게 탄탄한 기초공사가 필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광활하고 차가운 스웨덴의 숲과 호수, 농장지대를 이야기의 주 무대로 설정한 것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내게 한 최고의 레시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소나무와 전나무의 숲, 웬만큼 작은 나라보다 더 크고 맑은 심연의 호수, 거기에서 태어난 신비하면서도 공포감으로 가득 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트롤 신화, 그리고 고즈넉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농장 등을 배경으로 한 진실 대 거짓의 대결, 비밀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독자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배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원제가 왜 ‘The Farm’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톰 롭 스미스의 신작을 기다리면서 당연히 차일드 44’ 2편과 3편이 먼저 나올 것이라 여겼기에 얼음 속의 소녀들의 출간은 조금은 의외였지만, 그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아 반가웠고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차일드44’ 3부작의 나머지 두 편이 2015년에 연달아 출간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고문, 토막, 책형 등 다양하고 끔찍한 수법의 살인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피해자들은 살해되기 전 살인예고장을 받아들었고, 어떤 식으로든 사립탐정 패트릭 켄지와 인연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FBI를 통해 20여 년 전인 1974년에 벌어진 연쇄살인과의 유사점을 알게 된 켄지는 당시 범인으로 체포되어 복역 중인 알렉 하디먼을 만납니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에 하디먼이 결부돼있으며, 하디먼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배후 또는 수하에 있음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동료 탐정인 제나로에게까지 살인예고장이 날아들었고, 켄지와 사랑에 빠진 그레이스와 그녀의 딸 메이마저 위기에 빠집니다.

 


시리즈물의 경우 대체로 어느 작품부터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고들 하지만 켄지&제나로 시리즈(겨우 두 편만 읽은 상태지만) 순서대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둠이여~’는 켄지와 제나로의 삶과 사랑, 그 속에 녹아있는 트라우마와 공포(아버지가 남긴 켄지의 트라우마, 폭력남편 필립으로 인한 제나로의 고통과 공포)가 사건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작인 전쟁 전 한 잔을 읽지 않았다면 사건과 캐릭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이여~’는 잔혹한 연쇄살인마를 쫓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의 활약이 메인 스토리지만 그에 못지않게 등장인물들 간의 우정, 사랑, 증오 등 20년도 넘게 이어져온 악연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세대가 바뀌어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과거사가 사건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단순한 오락 스릴러라기보다는 두 세대에 걸친 방대한 비극적 연대기의 느낌까지 줍니다.

 

특히 주인공 켄지의 고통스러운 삶의 궤적이 이야기의 큰 축을 차지하는데,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물리적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누구보다 폭력을 증오하지만 그 자신 역시 폭력의 유전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저지른 폭력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지자 자책감은 임계점 가까이까지 치솟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남자이면서 동시에 폭력의 유전자로 가득 찬 괴물이기도 한 이중성은 켄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떠나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파트너인 제나로마저 패닉에 가까운 공포에 빠지자 켄지는 이번 사건을 마지막으로 탐정생활을 정리할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켄지의 곁에서 폭력의 절정을 목격한 제나로의 전 남편 필립은 이런 말을 합니다. “패트릭,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거야? 어떻게 네 자신을 용서하고 사는 거냐?” 켄지를 사랑하지만 그를 잠식한 폭력에 질려버린 그레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긴 늘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과 함께 폭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거라고.”

가장 아쉬웠던 점은 조금은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웠던 연쇄살인의 동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20년 전부터 꼼꼼하게 계획된 복수일 수도 있고, 달리 보면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의 무차별 연쇄살인일 수도 있는데, 전자라면 범행 동기가 선명해야 하지만 후자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둠이여~’는 두 가지가 모호하게 섞인 느낌이 있어서 다 읽고도 그럼 왜 그 사람들을 죽인거지?”라는 의문이 깨끗하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해력 부족이거나 지나친 속독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엉킨 채 서평을 쓰려니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고, 할리우드 액션물에 못잖은 속도감 있는 전개 때문에 책장은 휙휙 넘어가지만 켄지와 제나로의 삶을 지켜보는 것이 안쓰럽고 힘들다 보니 진실이 드러나고 악이 처단되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통쾌함과 시원함보다는 씁쓸함과 불편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켄지와 제나로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한때 사무실을 폐쇄하고 치유의 날들을 보내던 두 사람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떤 모습들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됩니다.

 

사족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전쟁 전 한잔에서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라고 느껴졌던 부바는 수다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말이 많아진 것은 물론 단순히 폭력적인 성격을 넘어 소름이 돋을 만큼 뼛속까지 폭력의 DNA로 가득 찬 캐릭터로 변신했습니다. 어떤 독자는 부바의 활약이 켄지와 제나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었다고 평했는데, 저 역시 동감하면서도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라는 부바만의 독특한 면모가 휘발된 점은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