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비탈의 식인나무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김소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대로 괴담에 가까운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미타라이 기요시의 데뷔작인 점성술 살인사건에 버금가는 끔찍하고 괴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조사과정에서 40여 년 전 스코틀랜드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소녀 납치살해 사건과 패전 전후 일본의 어둠 비탈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살인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는 광대한 시공간을 오고가며 전개됩니다.

 

어둠 비탈은 가나가와 현 도베 역 인근의 비탈길로 이름 그대로 낮에도 어둑어둑한 기분 나쁜 곳입니다. 낮까지 지배한 그 어둠은 비탈길 위에 자리 잡은 수령 2천년의 거대한 녹나무가 드리운 그림자 때문인데, 이 녹나무는 오래 전부터 저주받은 식인나무라는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줄기 위의 구멍을 통해 사람을 잡아먹고, 그곳을 통해 온갖 비명 소리를 내뿜는다고 합니다. 거대한 혹이 수없이 겹친 듯한 흉한 모습에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괴수(怪樹)인 녹나무는 그 일대가 에도 시절 유명한 처형장이었던 탓에 사람들로부터 피를 빨아먹고 자란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녹나무 일대 빌라와 서양관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온 후지나미 일가에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연이은 죽음이 찾아들면서 미타라이가 개입하게 되고,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후지나미 가문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거대 녹나무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던 미타라이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번 사건은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하긴 하지만 몇 퍼센트는 아무래도 신비적 요소가 남아. 그건 그 녹나무와 어둠 비탈이라는 그 지역의 성격 탓이겠지.”

 

미타라이의 말 그대로 어둠 비탈~’은 광기가 몰고 온 참혹한 비극과 함께 우연이나 전설 등 신비한 요소들을 함께 다룬 작품입니다. 녹나무 일대에서 기이한 형태로 발견되는 사체는 물론 40년 전의 살인자와 현재의 살인자의 범행동기와 수법, 그리고 그 과정에 끼어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우연 등 후지나미 일가를 덮친 비극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나 뿌리 깊은 사연 모두 논리와 상식만으로는 입증하기 어려운 괴담의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우선 거대 녹나무에 얽힌 오래되고 끔찍한 식인 전설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녹나무 일대에 살고 있는 후지나미 일가의 비극적인 가족사입니다. 시마다 소지는 안 그래도 섬뜩한 이 두 개의 이야기를 심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한 묘사와 문장들을 동원해 풀어갑니다. 중간에 삽화처럼 끼어드는 40년 전의 참극과 식인 나무의 희생자들에 대한 묘사에서는 꽤나 소화력이 뛰어난 저도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잘 읽힙니다. 6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분량이지만 페이지는 무서운 속도로 넘어갑니다. 거대 녹나무의 괴담과 양념처럼 가미된 잔혹한 이야기들은 흡인력이 강하고 미타라이 특유의 냉소와 뻔뻔함, 전광석화 같은 추리는 무척 재미있게 읽힙니다.

미타라이는 사건의 실체는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채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경찰에 대해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혐오감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에 따르면 경찰이란 사고 능력은 모기나 개미 수준이고, 어깨에 힘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유치원 골목대장입니다. 경찰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탐정물에서 이런 장면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설정인데다 미타라이의 독설이 워낙 시니컬한 돌직구라 재미있게 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시마다 소지는 동서양의 갖가지 사형 방법에 대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사형 방법들을 최대한 리얼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라고 단단히 작정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몰입도도 좋고, 속도감도 좋고,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김소영의 번역도 깔끔했고,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사건은 제 취향에 딱 맞았지만, 결정적으로 어둠 비탈~’에서 아쉬움을 느낀 부분은 상식을 뛰어넘는 미타라이의 천재적인 재능과 조금은 무리한 트릭들이었습니다. 전에 읽은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에서도 그런 느낌이 강했는데, 미타라이의 추리는 비약이 과한 나머지 나중에 설명을 들어도 왜 그런 결과가 도출됐는지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고, ‘, 그랬나보다하고 슬쩍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밝혀낸 트릭들도 독자를 감탄하게 만들기보다는 만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비현실성 때문에 맥이 빠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이런저런 장점과 미덕이 있음에도 어둠 비탈~’은 꽤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타라이의 매력에 빠진 독자라면 어둠 비탈~’의 장점과 미덕이 훨씬 더 커 보이겠지만, 리얼리티에 더 비중을 두는 독자라면 후반부의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굳이 점수를 나눠서 준다면, 식인 나무와 관련된 잔혹한 괴담에 대해서는 100, 미스터리와 트릭에 대해서는 60, 그래서 평균 80점에 별 세 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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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0 링컨 라임 시리즈 10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 콤비의 10번째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4번째 만난 작품입니다.

4~5년 전쯤 코핀 댄서아니면 곤충 소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그때만 해도 링컨 라임의 신체적 핸디캡이 적잖이 당황스럽게 여겨졌습니다.

물론 파트너이자 연인인 아멜리아 색스가 나머지 부분을 꽉 채워주고 있긴 했지만,

주인공 링컨 라임이 현장에서 활약할 수 없다는 점은 치명적인 한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작품씩 읽어나갈수록 그의 뛰어난 추론과 판단력에 감탄하게 됐고,

그동안 좋아했던 현장을 뛰는 주인공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복잡하고 거대한 사건일수록 미량 증거물을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내는 지점에선

그야말로 화려한 액션에 못잖은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킬 룸은 링컨과 색스의 콤비플레이가 최대치로 발휘된 작품입니다. (신간이다 보니^^)

다만, 작품의 시작과 동시에 링컨은 왼손과 왼팔을 위한 대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고,

색스는 고질적인 관절염이 악화되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묘사되어,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부터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의 액션 장면만 나오면 괜히 제 무릎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불편함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 ● ●

 

뉴욕 평검사 낸스 로렐은 연방기관인 국가정보활동국의 국장 슈리브 메츠거를 체포하기 위해

링컨과 색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녀가 내부 고발자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메츠거는 잘못된 정보와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바하마에서 무고한 반미주의자를 살해한 셈인데,

링컨은 사건에 구미가 당기지만, 색스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듯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링컨과 색스는 바하마의 저격수와 내부 고발자를 찾는데 주력합니다.

내부 고발자를 찾는 과정에서 색스는 수사를 방해할 의도가 명백한 연쇄살인과 맞닥뜨리고,

사건 현장을 찾아 바하마로 과감한 외출을 감행한 링컨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검사 낸스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폭주하듯 자신의 의도대로 수사를 몰아가려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링컨과 색스가 현장에서 찾아낸 증거물은 그야말로 미량에 불과하지만,

그를 바탕으로 바하마의 저격수와 의문의 살인자, 내부 고발자의 단서를 포착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단서들 덕분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모호해지고,

킬 룸이라는 암호의 의미는 물론 당초 추정했던 사건의 동기나 목적도 불분명해집니다.

 

● ● ●

 

여느 작품들보다 킬 룸은 방대한 스케일을 펼쳐놓습니다.

9.11 테러 이후 반미주의나 테러리즘을 상대하던 연방기관의 월권행위는 물론

워싱턴 정가와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연루된 다분히 정치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목격자와 증인에 대한 잔혹한 연쇄살인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링컨과 색스는 미량증거물공감능력이라는 자신들만의 재능을 통해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를 천천히, 순서대로 풀어나갑니다.

사소한 현장 증거, 흐릿한 사진 한 장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는가 하면,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사건일지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파악해냅니다.

 

링컨과 색스의 활약도 매력적이지만,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검사 낸스 로렐과

정체불명의 살인자 제이컵 스완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숨겨진 의도를 갖고 수사에 임하는 태도 덕분에 낸스는 번번이 색스와 충돌합니다.

자신이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려는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는 물론

위험한 반미주의자를 척결하려는 자국의 연방기관 수장을 체포하려는 목적도 의심스럽습니다.

정체불명의 살인자 제이컵 스완은 초반부터 뛰어난 요리 실력과 잔혹한 고문법을 선보이는데

링컨과 색스, 낸스를 노리는 그의 행보는 마지막까지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의 압권은 후반부에 연이어 터지는 반전에 있습니다.

역자의 말을 보면, 제프리 디버는 이야기를 뒤집는 것을 제외하고도

결말에만 반전을 최소한 3개 만들어 놓는다고 하는데,

킬 룸의 반전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연타로 터집니다.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들어놓곤 여지없이 뒤집어버리는 제프리 디버의 반전은

그 어느 것도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마음 깊이 각인시켜줍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후반부의 화려하고 정신없는 반전에 비해

중반부까지의 전개가 조금은 나이브하게 진행된 점인데,

초기의 작품들에 비해 자연스러움 흐름으로 인해 편해진 감이 있습니다.”라는

어느 분의 서평에 100% 공감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 사건들, 조금은 장황한 설명들, 자연스럽고 편하게 보이는 전개 덕분에

중반부까지는 책을 손에서 뗄 수 없는긴장감은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링컨은 대수술을 앞두고 있고, 색스의 관절염은 위험수준에 이른 상태인데,

제프리 디버는 이들의 엔딩조차 반전을 선사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곧 출간될 스킨 컬렉터에서 두 사람이 어떤 컨디션으로 활약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아직 링컨 시리즈의 첫 작품인 본 컬렉터를 읽지 못했는데,

그 쌍둥이 제목의 신간이 나온다고 하니, 그 전에 얼른 마스터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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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탐정과 일곱 개의 살인
우타노 쇼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읽은 작품의 수도 그렇고 호감의 정도도 그렇고 어느 면에서나 저는 우타노 쇼고의 열렬한 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 20편 중 고작 6편 밖에 읽지 못한데다, 이 작품의 주인공 시나노 조지가 등장했다는 집 시리즈는 아직 한 편도 못 읽었고, 그의 대표작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서술트릭의 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전 꽤 큰 실망만 느끼다가 중도에 포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리면 이번엔 뭘까?”라는 호기심이 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영역과 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작가이니만큼 계속 관심권 안에 둘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랑탐정~’의 경우 부담 없는 단편집인데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 우타노 쇼고 특유의 단편의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든 게 사실입니다.

방랑탐정~’1990년대 후반에 쓰인 작품이지만 주로 198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한 8편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실린 마구무시가 개정판에 추가되어 제목과는 달리 8편이 수록됐다고 합니다.


 

시나노 조지의 외모는 표지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1년 내내 노란 탱크탑 한 벌에 머리는 산발인 채 돌아다닙니다. 표지엔 안 그려졌지만 신발 역시 비치샌들 하나만 고집합니다. 음악에 미쳐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록밴드에서 드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중퇴와 신입을 반복하면서 만년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가 묵는 기숙사나 하숙집 또는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는 마치 운명처럼 살인사건이 벌어지곤 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은 에피소드에서 시나노는 경찰을 무능하고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집 시리즈에서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독 경찰이 끼어들 때마다 그는 경찰을 무시하거나 반드시 이겨야할 상대로 여깁니다. 자신이 먼저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유력한 증거나 단서를 감추곤 합니다. 경찰에 대한 그의 반감 또는 불신이 어떤 연유에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그렇다고 밉상처럼 보일 정도의 잘난 척은 아니기에 소소한 재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시나노 조지의 미스터리 해결 패턴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독자와 함께 사건을 조사한다기보다는 현장을 한번 스윽 훑어보곤 진상이 보이는군. 이제부터 설명해주지.” 식이라서(물론 안 그런 작품도 있습니다) 뛰어난 천재의 해법 쇼를 즐기는 독자라면 그 패턴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탐정과 함께 사건을 풀어가고 싶은 독자라면 심히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록된 8편은 각각 독특한 트릭과 장치들을 사용하는데, 하숙집이나 폐쇄된 병원, 기숙사 등 건물이나 공간을 이용한 트릭이 있는가 하면, 과학과 논리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들도 있고, 정통 미스터리의 과정을 충실히 따르는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우타노 쇼고의 다양한 매력을 한 방에 맛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단편집입니다.

묵직하고 복잡하고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겐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재치 있고 경쾌한 트릭을 무겁지 않은 문장 속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타노 쇼고만의 미덕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또 그런 류의 작품을 찾고 있던 독자라면 짧은 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외모에서도 능력에서도 시크한 천재의 기운을 발산하는 괴짜탐정 시나노 조지는 집 시리즈이후 그를 오랜만에 만난 독자들 뿐 아니라 저처럼 처음 만난 독자들에게도 무척 흥미롭고 기억에 남을 캐릭터가 돼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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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190cm가 넘는 키에 110kg의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소심한데다 타인과의 소통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것이 타고난 인성이라기보다는 일부러 뭔가를 감추기 위한 방편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때 위험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그저 고독한 삶을 만끽하고 있을 뿐인 괴짜 바텐더 밥 사이노스키를 둘러싼 보스턴 뒷골목의 하드보일드 느와르입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에 익숙한 데니스 루헤인의 팬에게는 조금은 낯설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밥의 캐릭터는 슈퍼맨도 아니고 유쾌한 한량이나 꽃미남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슨 이유에선지 스스로 진창에 처박혀 침묵의 삶을 살아가는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그는 가난한 할머니에게 공짜 술을 몰래 따라주는가 하면, 경찰의 심문에는 어설프게 대응하고 바(bar)를 장악한 체첸 폭력단에게는 조용히 순종합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많아 보이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요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이물질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급변합니다. 특히 유기견 로코와 미지의 여인 나디아는 단색뿐이던 밥의 삶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무뚝뚝한 거구의 밥이 왜소한 강아지 로코와 낯선 여인 나디아에게 쩔쩔 매는 모습은 겉으론 무척 언밸런스해 보이지만 왠지 묘하게도 따뜻하고 밝은 미래를 예지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로코와 나디아를 지켜주고 싶은 밥의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의지가 그동안 감춰온 그의 비밀스런 과거와 충돌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 삐딱하기 짝이 없는 탐욕스런 캐릭터들까지 연이어 등장하여 밥의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밥의 사촌으로 한때 주먹깨나 휘둘렀지만 이젠 바의 바지사장일 뿐인 커즌 마브, 보스턴 뒷골목을 지배하는 체첸 폭력단, 밥과 그의 바에서 벌어진 사건을 발판삼아 경찰조직에서의 거듭된 추락을 만회하려는 토레스,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하며 악인으로 진화해왔고 사악한 의도로 밥에게 접근하는 에릭, 밥이 일하는 바에 겁 없이 들이닥친 ‘2인조 강도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오만과 탐욕은 엄청난 판돈이 걸린 슈퍼볼의 밤에 밥의 바에서 대참사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감춰져온 밥의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납니다.


 

막판에 이르러 밥이 풍겼던 위화감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를 괴롭히던 악당들이 응징되는 순간 짜릿한 쾌감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쾌감의 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묘하게 변해갔습니다. 뭐랄까, 첫맛은 괜찮았는데 씹을수록 뒷맛이 개운치 않아지는 느낌이랄까요? 그 이유는 밥이 맞이한 엔딩이 상식과 도덕의 기준으로 볼 때 용납 가능한 일인지, 또 그의 미래가 밝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느와르가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장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밥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기억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문 가운데 저의 이 찜찜함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답변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어서 인용해보면,

 

결국 살아남기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어느 정도 야망을 이루지 못하면 끔찍한 비극이 된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를 감출 수 있지만, 낙오자는 바로 그 과거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여생을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다.”

 

이 찜찜함을 해소하고 싶어서 번역 후기를 꼼꼼하게 읽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본편만 있고 작가나 역자의 후기가 없어서 결국 저만의 숙제로 남게 됐습니다. 당초 단편이었지만 영화 시나리오 작업 이후 살을 붙여 중편 분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100% 추정이지만) 데니스 루헤인이 대중성 강한 장편에서는 펼치지 못했던 작가주의적 본색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 캐릭터, 사건 모두 전형적인 오락용 블록버스터보다는 개성 강한 독립영화의 뉘앙스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팬 입장에서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 작품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한 번 찬찬히 숙독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스피디한 전개의 오락물을 대하듯 빠르게 읽은 탓에 압축된 듯 또는 정제된 듯한 문장과 그 행간 속에 숨은 진정한 매력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건너뛴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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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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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맛이 물씬 풍기는 루이즈 페니의 문장도 좋았고,
훈훈한 옆집 아저씨 같지만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가마슈 경감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가마슈 경감의 나머지 작품도 기대하게 만드는 만족스러운 시리즈 첫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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