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양이 1 - 팥알이와 콩알이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양이와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을 심플한 연필 드로잉으로 그려낸 만화 에세이입니다. 순둥이인데다 소심하기까지 한 콩알()과 말괄량이 팥알()이 입양되는 프롤로그부터 독특한 일가족과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며 벌어지는 24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습니다.

 

1시간도 안 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후루룩 넘어갈 정도로 이야기는 소소하고, 그림은 많은 여백을 갖고 있습니다. 딱히 어떤 스토리를 기대할 작품도 아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을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쁘고 여유 없는 일상 속에서 만난 잠시의 휴식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 역시 곧 만 5살이 되는 강아지 시추를 키우고 있다 보니 콩알과 팥알의 횡포(?)나 식탐, 사람과 함께 살면서 생기는 해프닝들이 남달리 느껴졌지만, 특히 고양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콩알과 팥알의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양이 주인의 할아버지인 내복씨와 두 고양이가 인연을 맺어가는 모습은 왜 애완동물이란 호칭 대신 반려동물이란 표현이 등장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해줄 뿐 아니라 누구나 나도 고양이를 입양해볼까?’라는 욕심을 갖게 만들 정도로 따뜻하고 정겨워 보입니다.

가끔 소파에 늘어져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또는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로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한 번씩 꺼내 읽다보면 피로와 분노, 상처와 상심이 저절로 달래질 것 같기도 합니다.

 

마네키 네코(복고양이)를 비롯하여 문화와 일상 곳곳에 고양이가 스며들어있는 일본에서 이 작품이 꽤 화제를 모은 것은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2, 3권이 연이어 출간됐다고 하니 국내에도 곧 소개가 될 것 같습니다. 연말연시, 애묘가들에게 선물하기에 딱 좋은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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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시력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글래스 키 상(Glass Key Award, 스칸디나비아 추리작가협회에서 북유럽 작가의 최우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과 인격 장애를 겪는 사이코패스가 벌이는 살인사건이라는 내용만 놓고 보면 분명 스릴러로 분류되는 것이 맞는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독특한 심리물 한 편을 읽은 듯한 복잡다단한 심경이었습니다. 화려한 표현이나 속도감을 앞세우지도 않은데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미스터리보다는 내게 여자가 있다면...”을 끊임없이 되뇌며 사랑을 갈구하는 고독한 사이코패스 릭토르의 불안정한 심리와 기이한 행동들을 느린 속도로 파고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릭토르는 뢰카 요양원에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돌보는 간호사입니다. 동료인 안나를 흠모하며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순정남이기도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약을 변기에 버리고 무력한 그들을 고문하는 사이코패스이기도 합니다. 또 쉬는 시간엔 공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한없는 고독에 빠지는 고독남이기도 합니다.

그런 릭토르가 세 건의 죽음에 휘말립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지만 직접 돕지도, 경찰에 연락하지도 않습니다. 우발적이긴 해도 직접 사람을 살해하고 매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 입원해있던 한 노인의 죽음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살인범으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미스터리는 릭토르의 살인-매장이 어떻게 밝혀질 것인가요양원의 노인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등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 두 개의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은 그리 크게 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건의 죽음을 대하는 릭토르의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심리 상태가 독자의 눈길을 훨씬 더 강하게 잡아당깁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을 고문하고 시신 앞에서 광기어린 춤을 추는 등 죽음에 이끌리는 일그러진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극한의 고독을 택했으며, 특별한 트라우마도 없이 악의와 선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가슴 설레는 모순된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백히 악마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기를, 그래서 그가 꿈꾸는 사랑이 이뤄지기를 응원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좀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릭토르의 모순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기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악의와 선의를 조금씩은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고, 폭력을 통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서 자라난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고 싶어 합니다.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한순간 이성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없이 강한 척 허세를 부려보지만 돌아서선 이내 겁에 질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누구나 다 조금씩은 릭토르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릭토르는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로 분류된 것이고,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제재당한 것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 후기의 마지막 문장에 특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

 

릭토르가 몰랐던 것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어둠이 얇은 얼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발을 내딛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고독을 알지만 그 안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다 읽고도 이 작품의 원제 나는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 (I can see in the dark)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그 의미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순 없지만, 번역 후기의 이 마지막 문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작가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을 지닌 북유럽의 스산한 심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의외로 매력적인 캐릭터나 줄거리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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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섬 -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
나혁진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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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강력범죄자를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필리핀으로부터 임대한 일명 교도섬입니다. 전기 철조망 외엔 제대로 된 수감시설도, 교도관도 없는 탓에 10년 만에 악당들의 섬으로 변질됐습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섬을 장악했고, 권력과 부의 서열이 만들어졌으며 매춘과 마약이 횡행합니다. 이곳에 엘리트 경찰 출신의 연쇄살인범 장은준이 수감됩니다. ‘악마를 잡기위해 지옥의 섬으로 들어가다라는 부제대로 장은준은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사이코패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수감돼있는 교도섬에 스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장은준은 교도섬 선배인 추웅과 이강생의 도움으로 섬에서 벌어진 여러 미스터리를 풀어내며 불가능해 보이던 복수극 미션에 매진합니다.

 

교도섬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긴장감 넘치는 액션이 잘 조합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입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되어 교도섬에 수감되기를 자청한 장은준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장은준을 돕는 전설의 암살자 추웅이나 꾀돌이 이강생도 주연 못잖은 역할을 해냅니다.

이야기는 장은준의 복수극 외에도 교도섬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건드리는데, 필리핀 창녀살인사건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시퀀스나 추웅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음모를 파헤치는 대목에선 전직 엘리트 경찰로서의 장은준의 뛰어난 능력이 십분 발휘됩니다.

 

홍보카피만 봤을 땐 배틀 로열이나 헝거 게임과 유사한 고립된 곳에서의 추격 액션물이라고 예상했는데 악당들이 세운 그들만의 천국이라는 설정은 이야기를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들어냈습니다. 악당들의 영구 격리를 위해 만들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감시의 손길은커녕 활기찬(?) 자본주의의 천국으로 변질된 교도섬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마다 작가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습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의 산물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교도섬에는 추리, 무협, 액션, 모험 등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있고, 필리핀 해안의 절경이나 거칠고 위험한 밀림은 물론 식민지 시대의 건물 등 시각적인 재미를 주는 공간들도 다수 등장해서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도 충분해보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을 꼽아보자면, 가족을 붕괴시킨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장은준이 한때 본연의 임무를 잊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는 시퀀스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강생과 처음 만난 이후 약 100여 페이지에 걸쳐 장은준은 스스로 즐거운 날들이라고 표현할 만큼 교도섬에 들어온 목적을 망각한 채 추웅, 이강생과 함께 야생의 삶을 만끽합니다. 복수를 펼칠 방법을 찾지 못해 낙심한 채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볼 땐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야?”라는 반문이 저절로 나올 법한 이상한 장면들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조연들에 관한 것인데, 우선 추웅은 뒤로 갈수록 주인공이 뒤바뀐 건가, 할 정도로 그 역할이 장은준을 넘어섭니다. 장은준이 지능과 액션을 겸비한 슈퍼맨이 아닌 것은 사실적인 설정이었지만, 처음부터 추웅의 도움을 기대라도 한 듯한 모습이나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의존하는 모습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또한 가족을 잃은 장은준 입장에서 볼 때 연쇄강간을 저질러 교도섬에 수감된 이강생은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쓰레기 중의 쓰레기가 분명한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와 인연을 맺는 모습은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은준의 복수의 대상인 악마의 존재감이 너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포악한 본능이 하늘을 찌르든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든 엄청난 폭력재능을 지니고 있든 뭐 하나라도 장은준을 위협할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든 기대에 한참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또한 악마에 대한 묘사 역시 분량도, 표현의 수위도 너무 미미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옥의 섬에 들어온 장은준의 의지까지 맥없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384페이지라는 적당한 분량에 재미와 몰입감을 갖춘 흥미로운 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아쉬움은 있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 탄생시킨 교도섬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복수를 위해 그곳에 잠입한 매력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된 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권총 한 번 쏘기 어려운 척박한 대한민국 스릴러의 토양 위에서 신선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필력 역시 후속작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나혁진의 데뷔작 브라더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보니 그가 만들어낸 암흑가에 몰아치는 피비린내가 어떤 모양일지 급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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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가족을 위한 아주 특별한 여행담’, ‘일일연속극보다 시끌벅적하고 막장드라마보다 꼬인 가족 8인의 88마일이 펼쳐진다!’ 등 이 작품의 소개글을 보면 언뜻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유쾌한 가족 블랙코미디가 연상되지만, 이 가운데 실제 이 작품을 적확하게 묘사한 건 막장드라마보다 꼬인이라는 표현뿐입니다.

무능한데다 불륜에 빠져있으면서도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남편,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린 아내,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중인 소년, 술과 대마초를 즐기는 도발적인 소녀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가족, 8명의 구성원은 죄다 비밀과 상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인해 인생 자체가 꼬일대로 꼬인 인물들입니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남녀노소가 웨일스 국경지대에 홀로 뚝 떨어져있는 별장 빨간 집에서 무려 일주일동안 위험천만한 동거에 들어갑니다.

 

안젤라와 리처드는 친남매지만 20년 가까이 연락조차 끊은 채 지내왔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동생 리처드는 누나 안젤라에게 가족여행을 제안했고,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던 안젤라는 남편 도미니크와 세 아이들과 함께 빨간 집으로 향합니다. 리처드와 재혼한 루이자와 의붓딸 멜리사는 불편한 심정으로 여행에 동참합니다.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두 가족의 동거는 예상대로 지뢰밭 그 자체입니다. 안젤라와 리처드의 충돌은 물론, 이미 위험수위에 있던 각 집안 내부의 갈등까지 폭발하여 빨간 집은 24시간 초긴장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비밀과 상처, 욕망과 고백의 퍼레이드가 이어지는가 하면,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펀치가 오고가며 8명 사이의 갈등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습니다.

하지만 끝장을 볼 것 같던 갈등들은 뜻밖에도 여기저기서 화해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무능했던 사람은 각오를 새롭게 하고, 거만했던 사람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화해는 또 다른 대폭발의 전조일 뿐입니다.


 

인물 소개만 봐도 알겠지만 바람직하고 도덕적이며 모두를 아우르는 주인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간 집8명 모두가 주인공이며 골고루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안젤라의 막내인 8살 벤지조차 분량은 좀 적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크게 보면 안젤라-리처드 남매의 갈등을 메인으로 두 가족 간의 미묘한 대립을 그리고 있고, 격랑의 복판에 놓인 3명의 10대와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4명의 40대가 때론 세대 간의 갈등을, 때론 같은 또래 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 내부의 갈등과 가족 간의 충돌을 그리기 위한 모든 진용이 갖춰진 셈입니다.

 

하나같이 유별나고 독특한 인물들이지만 작가는 이들 모두에게 잊고 싶은 과거, 혼란스러운 현재, 갖고 싶은 미래라는 특징을 꼼꼼하게 부여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유무형의 폭력과 간섭은 물론 몰이해, 무관심, 이기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무척 많습니다.

17살 알렉스는 무능한 아버지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고, 16살 데이지는 자신의 고민을 전혀 이해 못하는 엄마에게 등을 돌립니다. 극강의 문제아 16살 멜리사는 알고 보면 소박한 희망사항을 갖고 있는데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7살의 안젤라는 그저 오롯이 모든 걸 혼자 즐길 수 있는 자유를 꿈꾸고, 그녀의 남편 도미니크는 타고난 게으름과 소통 부족으로 여기저기서 맹공을 당하고 있으며, 안젤라의 남동생 리처드는 재혼 가족인 루이자와 멜리사를 끌어안으려 애쓰고 있고, 루이자는 부모와 오빠와 전 남편에게 받은 학대를 잊고 리처드에게서 안식을 찾으려 합니다. 과연 스치기만 해도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8명에게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너무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이야기인 것처럼 서평을 적었는데, 실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불쾌하거나 찜찜함이 남는 작품은 결코 아닙니다. 중년의 부모들도, 10대 아이들도 빨간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은 변화와 성장을 겪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전통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는 삶의 태도나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일주일전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화해를 나눈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만간 더 큰 전쟁을 예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탓에 제각각의 엔딩을 품은 채 빨간 집을 떠나는 8명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와 씁쓸함이라는 묘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대한민국 막장드라마가 남의 불행을 지켜보며 고소해하는 시청자의 심리를 자극한다면 웨일스 국경의 빨간 집에서 벌어지는 두 가족의 막장드라마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변화와 성장을 겪은 8명의 삶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이어지길 바라게 만들고, 또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담담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또는 이미 보냈거나 아직은 행복하다고 자평하는 모든 가족들에게 빨간 집은 위안과 격려, 그리고 충고와 경고를 동시에 전하는 작품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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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의 불가사의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어릴 적 청소년용으로 번역된 ‘X의 비극’, ‘Y의 비극’,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등을 읽은 후론 엘러리 퀸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만난 현대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빠져들다 보니 홈즈, 뤼팽, 푸아로 등 한때 열광했던 고전의 주인공들도 엘러리 퀸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만난 엘러리 퀸은 낯설지만 반가운, 또 새로운 느낌을 전해줬습니다. ‘열흘간의 불가사의라이츠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엘러리 퀸이 가상의 소도시 라이츠빌에서 펼친 세 번째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엘러리 퀸은 10년 전 파리에서 인연을 맺었던 하워드 밴혼의 초대를 받아들여 라이츠빌에 있는 밴혼 가의 대저택을 방문합니다. 하워드의 아버지인 디드릭은 라이츠빌의 산업계를 대표하는 거물이며 60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30년 연하의 샐리와 재혼했습니다.

밴혼 가에서의 첫날밤을 보내며 퀸은 밴혼 가족에게서 까닭모를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더구나 방문 이틀째 만에 퀸은 밴혼 가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 연이어 벌어지는 절도와 협박 사건에 말려들어 곤혹스러운 처지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의 불길한 느낌대로 밴혼 가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퀸은 흩어져있던 단서들과 밴혼 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해프닝들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가족과 경찰 앞에서 일련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 과정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괴이하고 정교한 패턴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자리에 있던 관계자들은 물론 미국 전역을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이야기를 좌지우지하는 큰 설정이 비교적 초반에 노출되긴 하지만 그 부분을 서평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일부러 피했고, 사건의 패턴역시 단어 하나만으로도 너무 많은 암시를 줄 수 있어서 제외시키고 보니 써놓은 줄거리가 참 애매하고 모호할 따름입니다.

 

퀸이 첫날부터 불길한 느낌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밴혼 가의 독특한 인물들 때문입니다. 산업계의 거물이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는 아버지 디드릭, 빈민가 출신이지만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으며 30년 연상의 디드릭과 결혼한 샐리, 아버지 디드릭을 숭배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또 벗어나고 싶기도 한 하워드, 밴혼 가의 말썽꾸러기이자 트러블메이커로 하워드의 경멸을 받는 숙부 울퍼트, 그리고 밤이 되면 저택을 돌아다니는 100살에 가까운 기괴한 노파 등 하나같이 어딘가 비틀려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들입니다. 결국 밴흔 가의 비극은 이 비틀린 관계에서 출발했고, 그 종착역은 수많은 인물들의 참혹하거나 안타까운 죽음으로 장식됩니다.

 

퀸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과 패턴은 약간 작위적이긴 해도 놀랄 만큼 빈틈없이 짜여있고, 마지막 반전은 왜 엘러리 퀸인가?”라는 우문에 대한 현답을 보여줍니다. 서사의 무게는 단지 오래 전에 출간된 고전이라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단출한 무대와 소규모의 등장인물만으로도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갈등을 다채롭고 깊이 있게 다룬 엘러리 퀸의 필력에 기인합니다. 좀 현학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출판사의 소개글 일부를 편집해서 인용하자면,

 

욕망과 애증, 집착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몸부림치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작중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한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쉬운 점들도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띈 점은 퀸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까지의 조금은 지루한 전개입니다. 인물간의 비밀스러운 관계나 연이어 발생한 절도와 협박사건은 이야기의 도입부로서는 그리 큰 긴장감을 주진 못하는 설정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비극적인 사건을 야기하는 단초나 진실을 입증하는 단서로 활용되긴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왠지 장르물이 아닌 애증물을 읽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라이츠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보니 앞선 두 작품(‘재앙의 거리’, ‘폭스가의 살인’)에 관한 언급이 종종 등장하곤 하는데, 딱히 큰 문제는 없지만 퀸의 심리나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고, 그 분량도 꽤 많이 할애된 탓에 두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한 점입니다.

세 번째는 엘러리 퀸이 한방에 모든 것을 끝장내는 신의 경지를 선보인 점입니다. 실제 내용 중에도 엘러리 퀸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에 빗대고 있는데, 이는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란 뜻으로 그리스극에서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등장시켜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야기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 또는 그 존재를 뜻합니다. ‘번뜩이는 이미지처럼 그냥 떠오른 영감덕분에 퀸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합니다. 물론 이런저런 복선도 깔아놓았고 단서도 흘려놓았기에 논리적인 추론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한방에 사건을 해결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퀸의 역할은 분명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엘러리 퀸의 고전미와 만난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현미경을 통해 보듯 풍경이나 인물에 관해 꼼꼼히 설명한 문장들이나 당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요즘의 장르물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고전이라고 하면 올드함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올드함을 기본에 충실하고 꾀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이라고 해석하고 싶고, 그런 면에서 Oldies but Goodies로서 퀸의 매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열흘간의 불가사의를 좀더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면 라이츠빌 시리즈의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을 것과 아주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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