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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가족을 위한 아주 특별한 여행담’, ‘일일연속극보다 시끌벅적하고 막장드라마보다 꼬인 가족 8인의 88마일이 펼쳐진다!’ 등 이 작품의 소개글을 보면 언뜻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유쾌한 가족 블랙코미디가 연상되지만, 이 가운데 실제 이 작품을 적확하게 묘사한 건 ‘막장드라마보다 꼬인’이라는 표현뿐입니다.
무능한데다 불륜에 빠져있으면서도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남편,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린 아내,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중인 소년, 술과 대마초를 즐기는 도발적인 소녀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가족, 8명의 구성원은 죄다 비밀과 상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인해 인생 자체가 꼬일대로 꼬인 인물들입니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남녀노소가 웨일스 국경지대에 홀로 뚝 떨어져있는 별장 ‘빨간 집’에서 무려 일주일동안 위험천만한 동거에 들어갑니다.
안젤라와 리처드는 친남매지만 20년 가까이 연락조차 끊은 채 지내왔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동생 리처드는 누나 안젤라에게 가족여행을 제안했고,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던 안젤라는 남편 도미니크와 세 아이들과 함께 빨간 집으로 향합니다. 리처드와 재혼한 루이자와 의붓딸 멜리사는 불편한 심정으로 여행에 동참합니다.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두 가족의 동거는 예상대로 지뢰밭 그 자체입니다. 안젤라와 리처드의 충돌은 물론, 이미 위험수위에 있던 각 집안 내부의 갈등까지 폭발하여 빨간 집은 24시간 초긴장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루가 멀다 하고 비밀과 상처, 욕망과 고백의 퍼레이드가 이어지는가 하면,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펀치가 오고가며 8명 사이의 갈등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습니다.
하지만 끝장을 볼 것 같던 갈등들은 뜻밖에도 여기저기서 화해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무능했던 사람은 각오를 새롭게 하고, 거만했던 사람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화해는 또 다른 대폭발의 전조일 뿐입니다.

인물 소개만 봐도 알겠지만 바람직하고 도덕적이며 모두를 아우르는 주인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간 집’은 8명 모두가 주인공이며 골고루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안젤라의 막내인 8살 벤지조차 분량은 좀 적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크게 보면 안젤라-리처드 남매의 갈등을 메인으로 두 가족 간의 미묘한 대립을 그리고 있고, 격랑의 복판에 놓인 3명의 10대와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4명의 40대가 때론 세대 간의 갈등을, 때론 같은 또래 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 내부의 갈등과 가족 간의 충돌을 그리기 위한 모든 진용이 갖춰진 셈입니다.
하나같이 유별나고 독특한 인물들이지만 작가는 이들 모두에게 ‘잊고 싶은 과거, 혼란스러운 현재, 갖고 싶은 미래’라는 특징을 꼼꼼하게 부여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유무형의 폭력과 간섭은 물론 몰이해, 무관심, 이기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무척 많습니다.
17살 알렉스는 무능한 아버지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고, 16살 데이지는 자신의 고민을 전혀 이해 못하는 엄마에게 등을 돌립니다. 극강의 문제아 16살 멜리사는 알고 보면 소박한 희망사항을 갖고 있는데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7살의 안젤라는 그저 오롯이 모든 걸 혼자 즐길 수 있는 자유를 꿈꾸고, 그녀의 남편 도미니크는 타고난 게으름과 소통 부족으로 여기저기서 맹공을 당하고 있으며, 안젤라의 남동생 리처드는 재혼 가족인 루이자와 멜리사를 끌어안으려 애쓰고 있고, 루이자는 부모와 오빠와 전 남편에게 받은 학대를 잊고 리처드에게서 안식을 찾으려 합니다. 과연 스치기만 해도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은 8명에게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너무 어두침침하고 암울한 이야기인 것처럼 서평을 적었는데, 실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불쾌하거나 찜찜함이 남는 작품은 결코 아닙니다. 중년의 부모들도, 10대 아이들도 ‘빨간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은 변화와 성장을 겪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전통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는 삶의 태도나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일주일전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화해를 나눈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만간 더 큰 전쟁을 예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탓에 제각각의 엔딩을 품은 채 빨간 집을 떠나는 8명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와 씁쓸함이라는 묘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대한민국 막장드라마가 남의 불행을 지켜보며 고소해하는 시청자의 심리를 자극한다면 웨일스 국경의 빨간 집에서 벌어지는 두 가족의 막장드라마는 훨씬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변화와 성장을 겪은 8명의 삶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이어지길 바라게 만들고, 또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담담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긍정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또는 이미 보냈거나 아직은 행복하다고 자평하는 모든 가족들에게 ‘빨간 집’은 위안과 격려, 그리고 충고와 경고를 동시에 전하는 작품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