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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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관한 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고, 그 작품에 등장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피아노 소곡집은 주인공 쓰쿠루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거의 소설의 일부나 마찬가지여서 책을 읽던 도중 기어이 음원을 찾아내선 반복해서 들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음악이 친숙한 관계라는 것은 그의 작품을 두세 편만 읽어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클래식이라곤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는 문외한이다 보니 오자와 세이지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위상조차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그에 대한 전기나 인물론이 아닌 그와의 대화록 모음집이란 형식으로 꾸며진 점은 더욱 파격적이었습니다.


 

여러 작품에서 클래식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녹여낸 것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편력은 가공할 연륜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지만, 거장 오자와 세이지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스스로 문외한임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도가 지나친 겸손이라는 약간의 삐딱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오자와 세이지와 나누는 대화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면 겸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우고자 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기술적인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고 있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교향곡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언어가 외계어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행간에 녹아있는 두 거장의 열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에 관한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자 역시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들을 미리 듣거나 혹은 들으면서 읽어야겠지만, ‘DVD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독자에게 그런 수고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자는 식의 편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로 했고, 그러다 보니 왜 이런 독특한 형식의 책을 낼 생각을 했는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작품이 오자와 세이지의 인물론이 아님을 거듭 밝혔지만, 실은 지휘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 유럽과 미국에서 겪은 굴곡과 환희로 채워진 다채로운 경험들, 그리고 음악을 대하는 그만의 개성 있는 태도 등에 좀더 공을 들여 묘사하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거장의 삶의 향기와 발자취를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간을 들여야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경우 벼락치기하듯 하루아침에 내공과 연륜을 쌓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클래식을 공부하겠다고 하루 종일 교향곡을 듣고, 작곡가와 곡명과 음악의 사조를 외워봤자 오랜 시간 사심 없이 편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겨온 사람 앞에서는 한낱 치졸한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60년 넘게 야유와 찬사 속에 지휘자의 삶을 살아온 오자와 세이지나 오랜 시간 음악을 통해 행복감을 만끽해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에 관한 애정과 정열은 왜 그들이 거장으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대화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도전할 수 없었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말러에 관한 이야기며, 동 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와의 관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과 풍경 등은 두 거장의 묘사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고 말러의 음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오자와 세이지가 밀라노에서 오페라 지휘를 하며 야유를 받은 일, 시카고 언론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지만 단원들에게 샤워를 통해 응원 받은 일, 오직 뛰어난 음악가를 키우기 위해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힘쓰는 그의 노력 등도 흥미로운 에피소드였습니다.

 

제겐 미지의 영역인 클래식에 관한, 그것도 낯설고 특이한 대화록 형식의 작품이었지만, 다 읽고 난 후 , 이런 책읽기도 나름 재미있네.”라는 느낌이 절로 든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아마도 대화체에서도 묻어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매력 있는 문장들과 자신들의 열정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 두 거장의 진정성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오자와 세이지를 좋아하는 수준 높은 클래식 애호가나 클래식에 관심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에겐 더욱 반가운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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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1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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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 L.A 할리우드에서 두 동강 난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거칠기 짝이 없는 형사 리 블랜처드와 버키 블라이처트가 언론에서 블랙 달리아라고 별명 붙인 이 사건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수사는 미궁에 빠지고, 검찰과 경찰의 고위직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뿐이며, 언론과 일부 경찰들마저 훼방꾼 노릇을 하면서 리와 버키의 수사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런데 납치-실종된 여동생을 쇼트와 동일시하기 시작한 리는 광적으로 수사에 몰입하고, 버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쇼트에게 도를 넘어선 집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수사 도중 갑자기 사라져버린 리 때문에 홀로 분투하던 버키는 간과했던 단서들을 통해 쇼트의 행적을 찾아내고 범인을 특정하지만, 그의 직감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입니다.


 

1940년대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한 영화의 흐름을 필름 누아르라고 불렀고, 거기에서 파생된 추리소설을 로망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번역자에 따르면, ‘블랙 달리아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어둡고 운명주의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로망 누아르로 분류됩니다.

실제로 제임스 엘로이는 인종문제, 알코올 중독, 정신병, 범죄가 만연하던 1940년대를 한껏 일그러진 인물들을 통해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은행을 털거나 섹스의 대가로 증거를 은닉하는 경찰, 부잣집 딸이지만 창녀처럼 살기를 원하는 여자, 승진과 명예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사법부의 고위직, 시체 해부와 장기(臟器)에 집착하는 남자, 허영심에 빠져 한탕을 노리는 배우 지망생과 그녀를 성적 노예로 삼는 영화제작자 등 등장인물 대부분 부정과 부패, 비리와 뒷거래로 얼룩진 당시의 사회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어둡고, 성적으로 집착하고, 정서적으로 복잡하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또 다른 작품인 ‘L.A 컨피덴셜못잖게 블랙 달리아는 이런 고백에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특히 살해된 쇼트의 캐릭터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드레스를 즐겨 입어 어둠 그 자체를 상징하듯 불온해 보였던 쇼트는 살아서는 거짓말쟁이 창녀의 기질을 독처럼 사방에 뿜어댔고, 죽어서는 자신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남자를 집착에 빠뜨리게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삶을 망가뜨렸으며, 충격적인 토막 시신으로 발견된 탓에 탐욕스러운 언론과 정치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나쁜 여자를 꿈꾸는 평범한 여자들에겐 두려움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쁜 여자를 장난감처럼 농락하고 싶은 남자들에겐 시커먼 정복욕의 대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블랙 달리아엘리자베스 쇼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희롱하면서 이 작품의 타이틀 롤에 걸맞는 판타지 같은 매력을 발산합니다.

 

블랙 달리아는 별개의 두 이야기로 나눠도 될 만큼 복잡한 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형사인 리와 버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평범하지 않은 우정과 사랑, 갈등과 파국의 이야기입니다. 버키는 여러 여자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물론 성관계 도중 살해된 쇼트를 떠올려야 흥분이 되는 기이한 상황에 빠집니다. 여동생이 납치-실종된 트라우마를 쇼트에게 투사한 리 역시 정서적 불안을 견디지 못한 끝에 결국 파국을 불러오고 맙니다. 또 하나는 리와 버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인데, 작가는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붕괴된 두 인물의 심리묘사를 접착제 삼아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 속에 질감이 다른 두 이야기를 절묘하게 믹스했습니다.

 

‘L.A 컨피덴셜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엔딩은 충격적이긴 해도 깔끔하고 시원한 맛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은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희미해지고, 번역자가 언급한 선악과 도덕의 불명료성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즉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고 누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불분명해지다 보니 사건이 해결되고 수렁에 빠졌던 주인공이 희망의 끈을 잡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결코 해피하고 명료한 엔딩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들이 이런 철학적인(?) 엔딩에 비호감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자로 잰 듯한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픈된 엔딩보다는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메인 스토리 외에 조금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곁가지 에피소드들이 끼어들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인물들 역시 복잡하고 방대하게 설정됐는데, 에피소드와 인물을 축소하고 500페이지 안쪽에서 마무리됐더라면 임팩트가 훨씬 더 강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오탈자가 거의 없는 번역은 그 자체로는 만족스러웠지만, 너무 점잖게번역된 일부 비속어는 눈에 거슬렸습니다. 번역자도 스스로 그런 부분을 후기 말미에 언급했는데,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좀더 리얼한 번역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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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밥 - 제133회 나오키상 수상작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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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쯤 구판으로 읽은 꽃밥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 따뜻한 단편집이라는 막연한 잔상이 전부였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때라 수록작의 내용을 온전히 기억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는데 8년 만에 나온 개정판을 운 좋게 손에 넣은 덕분에 슈카와 미나토가 그려낸 6편의 주옥같은 단편들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단편집 오늘은 서비스 데이처럼 꽃밥역시 죽음, 환생, 영혼을 다루고 있는데, ‘오늘은 서비스 데이가 소동극 또는 라이트한 호러물의 느낌이 강했다면, ‘꽃밥은 지금은 중년이 된 주인공들이 오래 전에 겪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회상하며 그 안에서 마주쳤던 죽음이나 영혼의 문제를 고백하는 따뜻한 서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환생과 가족애를 다룬 표제작 꽃밥’, 재일한국인과의 우정과 귀신 해프닝을 그린 도까비의 밤’, 소녀의 성장기와 가족의 붕괴를 성()과 결부시킨 요정 생물’, 요절한 삼촌의 장례식에 등장한 세 여자의 소동극 참 묘한 세상’, 산 자의 목숨을 거두는 언령(言靈)에 관한 이야기 오쿠린바’, 따돌림 당한 소년이 만난 신기루 같은 여자 이야기 얼음 나비등 대부분의 작품이 죽음이라는 무겁고 원초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한두 편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읽는 동안 한번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순간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 자체는 본인은 물론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힘든 여정이지만, ‘꽃밥속의 죽음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숙명처럼 공평하게, 그리고 때론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마치 축복처럼 그려집니다. 오사카 변두리의 연립주택단지에서 많은 인물들이 맺은 인연은 대부분 죽음을 계기로 끊어지거나 깨지곤 하지만, 왠지 그 죽음들은 내세에 다시 만날 것을 보장받은 휴식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죽음으로 인해 헤어졌던 전생의 가족과 고향을 찾아가는 아이(꽃밥), 차별과 병치레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유쾌한 귀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도까비의 밤), 죽어서도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해 영구차를 멈추게 만든 백수 삼촌(참 묘한 세상), 고통 대신 안락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제공하는 괴짜 할머니(오쿠린바) 등 죽음과 결부된 인물들 모두 실은 죽었지만 죽은 것 같지 않은,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만날 것 같은, 그래서 슬프고 아쉬워도 충분히 그()의 부재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들입니다. 온통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끝이라는 비극성보다 웃으면서 그()를 보내주는 듯한 훈훈함이 남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판타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서사들로 가득 차있고, 빈곤의 그늘이 훨씬 더 컸던 1960~70년대 오사카의 변두리라는 낯선 공간이 주 무대인데다 곳곳에 일본식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화감을 못 느꼈던 것은 꽃밥에 담긴 이야기들이 문화와 세대를 건너뛰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작품 해설과 번역자의 후기에서도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정 시대나 세대,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그리움”(작품 해설)이라든가, “세월이 흘러 다시금 펼쳐 본 꽃밥이 이리도 애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것은 각 단편이 보편성이라는 힘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번역자 후기)라는 설명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독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치유와 위로를 받고 싶은 독자라면, 혹은 온 세상이 아날로그였던 그 시대의 끄트머리라도 잠시 살아봤던 독자라면, 또 아사다 지로의 단편에 마음이 움직였던 독자라면 주말의 하루쯤 슈카와 미나토의 꽃밥과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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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의 저주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8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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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 즉 죽음의 그림자나 증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쓰루야 슌이치로는 무녀인 외조모의 도움으로 탐정사무소를 열고 첫 의뢰인인 나이토 사야카를 맞이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약혼자 아키라의 죽음 이후 이리야 가()에서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사지가 마비되거나 미각을 잃는 인물이 속출하는가 하면 멀쩡하던 조각상이 넘어지고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는 등 온 가족에게 괴현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덧붙여, 13개의 막대가 그려진 괴편지까지 가족 개개인에게 날아든 바 있습니다.

이리야 가를 방문한 슌이치로는 사야카를 비롯한 이리야 가 사람들의 사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한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괴현상들 곳곳에 ‘13’이라는 숫자가 연관됐다는 점을 파악한 것 말곤 슌이치로는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채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냈고, 결국 이리야 가의 참혹한 비극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 그리고 최근 출간된 노조키메등을 통해 공포와 괴담의 진수를 선보인 미쓰다 신조의 사상학 탐정 시리즈첫 편입니다.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단편집 붉은 눈에 실린 죽음이 으뜸이다를 통해 데뷔했는데, 나름 캐릭터가 호응을 얻었기 때문인지 장편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승격됐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슌이치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타인의 죽음을 알아보는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된 유치원 시절에 겪은 사건이나 그 이후 귀신 들린 아이로 손가락질 받으며 은둔형 외톨이가 된 그의 성장기, 그리고 그를 보살피고 키워준 뛰어난 무녀인 외할머니의 사연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배치돼있습니다. 타인과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아 삐딱하고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 사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던 슌이치로가 첫 사건인 이리야 가 연쇄변사에 뛰어든 후 여러 사람과 맞부딪히며 겪는 성장통은 그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 못잖게 깨알 같은 재미를 던져줍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가 문명과 동떨어진 자연이나 외진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이 작품은 도쿄 한복판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현대의 도시괴담이라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괴현상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이리야 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분명 주술의 결과는 아닌 듯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일으킨 현상이라기엔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누가 범인인가?”보다 괴현상은 범인의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의 힘에 의한 것인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으며,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쓰다 신조는 곳곳에 제법 많은 힌트를 깔아놓습니다. 아예 대놓고 ‘13의 저주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데서 알 수 있듯 작품 속에는 숫자 13과 관련된 많은 정황들이 등장하는데, 그 정황들은 독자를 위한 힌트이자 동시에 뒤통수를 때리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신경 쓰기보다 비현실적인 능력을 가진 슌이치로가 더욱 비현실적인 사건을 어떻게 다루고 풀어가는지를 음미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힌트나 함정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미쓰다 신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여유 있는 책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명백한 단서와 증거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현상들이 등장하고,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과학적 추리보다는 직관이나 느낌에 좀더 의존하는 내용이다 보니 본격 미스터리나 리얼리티를 선호하는 독자에겐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을 수도 있고, 공포나 괴담을 좋아하는 독자는 물론 미쓰다 신조의 팬 중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신화와 전설을 동반한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좀더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일단 시리즈 첫 편으로서 주인공 슌이치로의 매력을 잘 이끌어낸 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무수한 떡밥을 사방에 깔아놓은 점, 특히 언젠가 조우할 것이 분명한 엄청난 힘을 지닌 적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점 등은 앞으로 이어질 사상학 탐정 시리즈를 여러 면에서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직은 탐정으로서도 어설프고, 인간관계도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미숙아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호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상학 탐정 쓰루야 슌이치로가 두 번째 편에서는 어떤 사건을 통해 인간과 탐정으로서 쑥쑥 성장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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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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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자매편이며 소매치기가 주인공인 쓰리는 비교적 쉽고 편하게 읽혔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왕국은 인물들을 훨씬 더 사악하거나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달의 광기, 매춘과 욕망의 신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장악한 절대 악 등 수많은 상징들이 때론 묵직하게, 때론 은유적으로 작품 곳곳에 배치돼있어서 자매편인 쓰리와 달리 결코 쉽고 편한 책읽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내용은 심플합니다. 유리카는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추정되는 야다의 지시를 받아 기업이나 정부 고위직 남자들의 추잡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고급 콜걸 출신의 위장 창녀입니다. 하지만 야다의 적대 세력인 기자키에게 신분이 들통 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유리카는 본의 아니게 위험천만한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리카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지만 그로 인해 야다와 기자키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파이물의 공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왕국의 구성에서 이런 통속적인 줄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작 몸통이 되는 이야기는 운명을 거부한 한 여자와 남의 인생을 멋대로 설계하려는 한 남자의 대결입니다.


 

쓰리의 주인공 니시무라가 천재적인 소매치기지만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조금은 과할 정도로 철학적인 태도를 견지한 남자였다면, ‘왕국의 유리카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이 세계의 온갖 힘과 맞서겠다는 자기애, 참혹하게 죽긴 싫지만 그렇다고 딱히 삶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채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여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밤마다 뜨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달()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때론 환멸하고, 때론 자조하고, 때론 사무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쓰리의 니시무라보다 훨씬 더 심연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리에서 니시무라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기자키는 왕국에서 유리카를 상대로 또다시 신에 버금가는 절대 악을 행사합니다. 그는 타인의 인생 경로는 물론 감정, 희망, 절망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을 꿈꾸는데, 그 인생을 멋대로 희롱하다가 배신하고 망가뜨리고 싶은 대상으로 유리카를 점찍은 기자키는 그녀를 야다와의 권력 투쟁에 이용함과 동시에 삶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계획을 품습니다.

 

유리카와 기자키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있으면서도 배신이라는 코드에 있어서만큼은 동류항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기자키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를 한순간에 배신하면서 살해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면, 유리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탐내는 잘난 남자들을 배신함으로써 그들이 성취해온 것과 인생 자체를 박살내는데서 열기와 자유를 느낍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정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데, ‘왕국에서는 유리카와 기자키 외에도 이런 비범한(?) 인물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 절망에 빠진 여자를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선량함으로 남을 도와주다가 정작 상대가 구원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끼곤 어째서 계속 불행하지 않은 것이냐?”며 너덜너덜하게 파멸시켜버리는 인물도 있습니다. ‘왕국의 등장인물 중 인간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밀조직에 복무하며 유리카를 이용해 추잡한 정보를 모으는 야다 정도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의 첫 느낌은 솔직히 말하자면 “So what?”이었습니다. 범인을 잡아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장한 새드 엔딩이나 유쾌한 해피엔딩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물이든 분노든 감정의 폭발을 끌어내는 마무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도 많고 여운이 강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의미한 삶, 고통스러운 기억, 타인에 대한 지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등등...

추정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정서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또 공통된 여운을 느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절대 악과 운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인류 최초의 직업인 창녀와 소매치기를 통해 내보였고, 공감과 반감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유리카와 기자키의 삶의 방식이나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느낌은 글로 표현해봤자 지독히 주관적인 궤변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서평에 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팬이더라도 왕국에 관한 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매편인 쓰리왕국을 모두 안 읽은 독자라면, ‘쓰리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고, 혹시 왕국을 읽고 실망한 독자라면 꼭 쓰리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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