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사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9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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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도 못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서, 한 번 사슬을 끊어도 다른 곳에서 연결되어 있나 봐요.”

 

꽃 사슬의 세 주인공 중 한 명인 사쓰키가 남긴 말입니다. 인연이란 단어로 대신해도 문맥이 통하는 문장이지만, 사슬이라는 단어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인연과는 달리 안타깝거나 후회되거나 잊고 싶거나 지워지지 않는 화인 같은, 그런 어두운 면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사슬의 마디마디가 꽃으로 되어 있다고 하니, 중의적이고 역설적인 제목만으로도 작품 속 인물들의 평탄하지 못한 인생경로를 예감할 수 있습니다.

 

꽃 사슬에는 세 명의 여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미유키(美雪), 사쓰키(紗月), 리카(梨花)가 그들인데,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1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각각의 이름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한자(, , )가 들어가 있지만, 정작 세 여자의 삶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은 이리저리 엮인 꽃의 사슬로 인해 제대로 음미해볼 틈도 없이 그저 순간에 불과한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남편과 함께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누리다가 한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 여자, 기막힌 사슬 덕분에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또 다른 기막힌 사슬로 인해 비극에 빠진 여자, 자신을 둘러싼 사슬의 미스터리를 캐기 위해 그 열쇠를 쥔 미지의 남자를 찾아 나선 여자 등 사슬 또는 인연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간 세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야기들은 서로 무관한 듯 전개되다가 천천히 베일이 벗겨지면서 퍼즐 조각처럼 모여들고, 끝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사실 꽃 사슬은 줄거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단 한 개의 단어만으로도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절대 보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매력을 소개하고픈 욕심에 스포일러 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 뒷면의 홍보카피를 인용하면,

 

비밀을 그러안은 세 여자. 한 여자는 돈이 필요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실을 원하며, 또 한 여자는 과거를 지우려 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TV드라마에서 많이 본 우연과 막장이 난무하는 스토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각각의 개인사는 딱히 신선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녀들이 꽃의 사슬을 통해 만나는 인물이나 겪게 되는 비극 역시 낯선 장면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녀만의 소리 없이 강한문장과 비극마저 꽃보다 아름답게 그려내는 뛰어난 표현을 통해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묵직한 서사를 구축했고, ‘고백이나 왕복서간등을 통해 보여준 섬뜩한 형식미를 통해 상투적인 개인들의 비극을 긴장감 없이는 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단서는 수두룩하지만 서로를 연결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흐릿한 형태로만 보일 뿐인 꽃의 사슬의 실체는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과 조바심을 일으킵니다. 특히 세 여자의 이야기의 접점이 눈에 들어올 무렵부터는 비밀, 거짓말, 미스터리 등의 코드가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그 순간 엄청난 힘으로 폭주했던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가 떠오른 것은 단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고백이후 연이어 아쉬움을 느껴야했던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작가인생 제2막이 시작된 듯합니다.”라는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나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가 양치기 소년의 습관적인 외침(?)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꽃 사슬은 미나토 가나에가 오랜만에 자신의 진면목을 발휘한, 그래서 그녀의 이름과 고백의 여운을 기억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교적 소프트한 서사 때문에 독자에 따라 기대만큼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꽃을 이야기하며 그 안의 향기와 가시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게 한 꽃 사슬이야말로 어지간히 독한 이야기보다 더 강렬한 인상과 더 짙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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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언덕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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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꽃 아래 봄에 죽기를벚꽃 흩날리는 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가나리야 시리즈입니다.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제목과 풍경화 같은 표지 덕분에 읽기 전부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반딧불 언덕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16년 전 자신의 꿈을 위해 연인을 떠났던 한 남자가 뒤늦게 비밀을 알게 되는 반딧불 언덕’, 검은 고양이 곤타 이야기와 선술집 단골들의 음모(?)를 그린 고양이에게 보은을’, 오래된 화방을 지키며 파리로 떠난 연인을 기다려온 한 여인의 이야기 눈을 기다리는 사람’, 미스터리의 늪에 빠진 가나리야 단골들의 이야기를 그린 두 얼굴’, 연인 같았던 삼촌과의 추억이 담긴 환상의 소주(燒酒)에 관한 이야기 고켄등입니다.


 

어두운 산겐자야 골목 한 편에 두둥실 떠있는 사람 크기만 한 초롱, 그 한가운데에 새카맣고 느긋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가나리야’, 그리고 마치 현실과 격리된 낯선 세상으로의 통로처럼 보이는 검게 그을린 삼나무 문 등은 시리즈 작품들에서 매번 다른 문장들로 묘사되긴 했지만, 이젠 머릿속에 그 그림이 구체적으로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며,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요리사이자 사소한 단서 하나로 추측에 추측을 거듭한 끝에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안락탐정 구도 데쓰야도 이젠 반가운 이웃집 남자처럼 여겨집니다. 더불어,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정도로 미각의 진수를 담고 있고, 도수 높은 맥주를 절로 생각나게 하는 구도 데쓰야만의 아기자기하고 특별한 레시피 역시 언제나처럼 책을 읽는 내내 침샘을 자극합니다. (다만 반딧불 언덕에선 요리 장면에 살짝 과한 분량이 할애돼서 아쉬웠습니다)

 

수록작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주인공 중 가나리야를 처음 찾은 인물은 세 명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처음 들른 가나리야에서 안락함과 오래된 단골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부지불식간에 구도나 다른 단골들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신에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수수께끼나 의문에 대해 실은 이런 게 아닐까요?”라며 해답 또는 진실을 넌지시 건네는 구도를 보곤 더욱 크게 놀랍니다. 거듭된 놀람 끝에 가나리야 초보자들이 대체 그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라고 물으면 누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나리야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그 말을 입에 담아요.”

 

따뜻하든 가슴 아프든 하나 같이 잊히지 않는 추억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들은 가나리야에서 보낸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고, 오해했던 진실을 깨닫고, 혐오했던 자신 또는 타인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왠지 지금까지보다는 맑고 따뜻한 날들이 자신을 기다릴 것 같다는 안도감을 찾습니다. 세상을 떠난 연인의 비밀과 상처를 구도 덕분에 알게 된 반딧불 언덕의 주인공 아리사카는 뒤늦게 자책과 회한에 빠지지만 동시에 이제라도 그녀에게 사죄할 수 있음을, 또 그녀를 잊지 않고 영원히 추억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죄하는 일은 분명 괴롭지만, 동시에 달곰쌉쌀하다고 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제 가나리야 시리즈는 한 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 앞선 시리즈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 - ‘가나리야를 아십니까?’이며, 단골들이 총출동하여 가나리야에 얽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베일 속에 감춰진 구도 본인의 이야기인데, ‘반딧불 언덕에 수록된 눈을 기다리는 사람에서 구도의 친구이자 바텐더인 가즈키가 구도에 관해 남긴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 다뤄질 구도의 비밀과 추억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라는 제멋대로지만 조심스런 추측을 하게 만듭니다.

 

그 녀석(구도)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주 옛날부터.”

 

그럭저럭 10년이 넘은 가나리야에서 구도가 기다려온 사람은 누구일지, 구도와 그()가 공유했던 추억과 상처는 무엇일지, 가나리야의 단골들은 구도를 위해 어떤 세리머니와 선물을 준비할지, 그리하여 구도는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지, 벌써부터 궁금증과 기대감, 그리고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듭니다. 마지막 작품이라 손에 넣고도 아까운 마음에 쉽게 읽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한없이 이기적인 독자의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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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짓하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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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작품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사건 용의자를 상대로 면담과 검사를 진행하던 경찰청 프로파일러 김성호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타의에 의해 수사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후 상부의 권유로 삼보섬(진도) 연쇄 부녀자 실종사건을 맡아 보름 가까이 섬에 머물며 프로파일링은 물론 현지 경찰과의 공조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네티즌에게 마녀사냥을 당하던 한 여성이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 아무런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던 삼보섬의 세 여성이 연이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사건, 그리고 프로파일러 김성호의 10대 시절의 트라우마와 고통스러운 기억 등 세 갈래의 이야기가 제각각 진행되다가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연결고리를 드러내며 무서운 진실을 드러냅니다.

 

크리미널 마인드등 미드를 통해 익숙해진 프로파일러의 활약상을 한국 미스터리 소설로 만나볼 수 있게 돼서 기대감이 꽤 컸습니다. ‘, 짓하다는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프로파일러의 활약만이 아니라 주인공 김성호의 끔찍한 개인사까지 포함하는 제법 큰 서사를 펼쳐놓습니다. 또한 엘리트 프로파일러부터 다혈질의 현장 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찰 캐릭터는 물론 사건에 연루된 수많은 조연들 하나하나에게까지 공을 들인 점도 그렇고,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이 돋보이는 촘촘한 밑그림이나 예상을 넘어선 반전 등은 처음 만나본 김재희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증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프로파일러가 주인공인 미스터리가 미드를 통해 한껏 높아진 한국 독자들의 눈높이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실제로 작품을 읽는 도중 적잖은 곳에서 이런저런 아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프로파일링 자체와 관련된 아쉬움이 제일 컸는데, 좀 매크로하게 얘기하자면, 프로파일링에 관한 지식들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돌면서 독자에게 강의 내용처럼 주입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성호가 설명하는 프로파일링 결과는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하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프로파일링 자체가 확정이 불가능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김성호는 담당 형사에게 그는 범인이 아닙니다.”라는 단정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현장 형사와의 불가피한 충돌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데, 김성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 형사의 답답함에 더 공감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작가는 김성호의 능력과 경험과 다양한 프로파일링 기법을 보여줄 의도였겠지만, 조금은 단정적이거나 외워서 발표하는 교과서 속의 지식처럼 묘사돼서 그런지, 그 의도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적잖은 양을 할애하여 김성호의 과거와 현재, 외모와 캐릭터를 설명했지만, 정작 작품을 다 읽은 뒤에도 김성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떠오르지 않은 점도 아쉬웠습니다. 대인 기피증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트라우마에 갇힌 지독히 내성적인 성격 같기도 하고, 소심한 학자인가 싶으면 간혹 다혈질을 발휘하여 전혀 다른 인격처럼 보이기도 하고, 툭하면 상대를 날카롭게 노려보는덕분에 하드보일드 캐릭터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한때 여자들한테 꽤 인기 있었던 멋진 남자 같기도 하고... 뭐랄까, 그를 설명한 퍼즐 조각들은 무수한데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어쩌면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캐릭터를 집어넣으려다 발생한 부작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별 세 개밖에 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작위적이거나 어설퍼 보이는 디테일들 때문입니다. 김성호가 활약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 일부러 부실하게 이뤄지는 것만 같은 경찰의 초동수사, 범행 관련 장소마다 넉 달도 지난 CCTV 영상들이 빠짐없이 고스란히 보관돼있는 점, 국과수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필적감정을 위해 굳이 국립민속박물관 소속 학예사가 사건에 개입하는 점, 지도만 봐도 짐작 가능한 범행의 지리적 특징을 굳이 컴퓨터로 돌려보는 점, 경력 20년이라곤 믿을 수 없는 충동적이고 초보 티가 역력한 베테랑 형사의 태도, 수상한 인물을 여러 번 마주치고도 특별한 이유 없이 일부러 방치하는 듯한 모습 등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사소한 부분들이지만 오히려 그런 사소함때문에 읽는 내내 잔가시들이 목에 잔뜩 걸려있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맥이 빠졌던 것은 마치 빅 브라더처럼 모든 것을 설계했던 초인적인 범인의 능력인데, 비유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랜덤한 상황들을 모조리 예측해내는 대단한 예지력의 소유자라고 할까요? 작가의 의도는 범인의 인상을 강렬하게 만들고 그가 지닌 뿌리 깊은 증오심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론 막판에 이야기의 현실감만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라는 부제를 보면 앞으로 후속작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일개 독자의 의견에 불과하지만 후속작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 가지 당부하자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프로파일링, 자연스럽고 선명한 캐릭터 설정, ‘막판 뒤집기에 너무 비중을 두지 않는 이야기 구성, 매크로한 서사보다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디테일 등에 좀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 장르물을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서 도진기의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못잖은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성공을 기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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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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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 짓하다라는 작품을 보면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좀 생소한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어 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그러죠. 심지어 사회복지사, 은행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담한 성격에 양심의 가책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없고 집중력이 높다는 것도 그들의 특징이죠.”

 

종이달의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김재희가 설명한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99% 가까운 인물입니다. 41살의 계약직 은행원으로 예금증서를 위조하여 고객 예금 1억 엔을 횡령했고, 그 돈으로 12살 연하의 연인과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횡령이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태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액면만 보면 리카는 가공할 금융 사기꾼이자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동창, 친구, 옛 연인 등이 기억하는 리카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의 리카는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과 정의감을 지닌 소녀, 욕심 없고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자,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애초부터 금융 사기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녀를 사기꾼으로 전락시킨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거나 한 순간의 실수로 삶을 망쳐버린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쿠타 미츠요는 순도 99%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우메자와 리카보다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시간제 은행원이 된 평범한 여성우메자와 리카의 남은 1%를 묘사하는데 주력합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에 감사하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검소한 외식에 기뻐하던 그녀가 왜, 어떻게 파국의 길에 접어들게 됐는지를 담담하지만 지독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그려나갑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리카가 횡령한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과 불륜에 빠지는 중반 이후보다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미세한 균열로 가득한 평범한 여성 리카의 일상이 묘사된 초반부입니다. 단편집 죽이러 갑니다에서도 경험했던 가쿠타 미츠요의 담담하지만 얼음장 같은 문장들은 불임과 우울로 인한 자괴감, 단절된 소통과 공공연한 무시 속에 위화감만 남은 부부관계, 어제와 똑같은 날을 답습하듯 사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 등 시한폭탄 같은 리카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포착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에 불과한 리카가 어느 날 갑자기 파국의 첫 걸음을 떼는 장면이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게 보이는 것은 이런 탄탄한 기초공사덕분입니다.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치스러운 삶에 빠져들면서 리카는 고객의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횡령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개를 보이지만, 파국의 끝을 향해 폭주하듯 달리는 리카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 덕분에 독자는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즉 눈앞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현실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리카로 변신하려는 욕망,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만능감(萬能感)을 죄책감 없이 만끽하게 되는 심리,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좀 알아차려줘라는 소리를 이명처럼 듣게 되는 불안감 등 두 개의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리카의 심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리카와 인연을 맺었던 주요 조연들은 그녀의 과거를 설명하는 역할뿐 아니라 돈에 지배당하는 불행이 어떤 건지 몸소 보여주는 역할도 함께 맡습니다. 절약과 저축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강박관념처럼 돈의 노예가 된 사람, 과거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현실의 곤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쇼핑중독에 빠져 이혼당했지만 끝내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등 돈에 끌려 다니며 불행의 늪에 빠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돈을 소재로 삼은 사쿠라바 카즈키의 토막 난 시체의 밤이 극단적인 캐릭터와 사건을 동원하여 폭주하듯 이야기를 전개시킨 반면, ‘종이달은 현실적인 캐릭터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상황들을 차분하고도 냉정한 톤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선지 작가의 의도가 더 강렬하고 생동감 있게 전달된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인 한 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이 소설은 마치 꿈틀거리는 장어를 맨손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무섭도록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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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8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남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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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에 소개된 대낮의 사각을 비롯 파계재판’, ‘유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1950~60년대의 주요 출간작들보다 앞선 다카기 아키미쓰의 1948년 데뷔작입니다.

패전 이후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던 도쿄의 사회상과 함께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문신의 향연이 상세히 묘사돼있고, 당대 최고의 문신을 새긴 여자, 광적으로 최고의 문신을 수집하는 의대 교수, 문신이 있어야 성욕을 느끼는 재력가, 문신 자체를 정신병으로 여기는 남자 등 괴담에 어울릴 법한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은 토막 나거나 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되고, 밀실을 포함한 고전적이지만 중의적인 트릭들이 복잡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외연만 놓고 보면 언뜻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떠오릅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에도 시대가 끝나고 통제와 금지령 속에 몰락해간 문신사들의 비극, 세 자식들의 몸에 금기시 된 동물 문신을 새긴 전설적인 문신사, 도쿄대 의학부 표본실에 소장된 문신이 새겨진 100여 장의 인피(人皮), 뛰어난 문신을 찾아 매일 목욕탕을 찾아다니며 사후 문신 양도계약에 혈안이 된 수집가들, 그리고 전설과 신화, 탐욕과 증오가 혼재된 비극적인 가족사 등 독자를 요괴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도조 겐야 시리즈스타일의 설정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막판에 이르러 그동안 드러난 단서들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구성이나, 한계에 부딪힌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초슈퍼 울트라급 천재 해결사를 등장시킨 점 등은 다분히 아날로그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의 트릭으로 이중 삼중의 효과를 노렸던 범인의 치밀한 계획이나 연이어 독자의 뒤통수를 치며 반전을 이끌어내는 해결사의 활약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일찌감치 범인을 눈치 챌 수도 있지만, 다카기 아키미쓰가 곳곳에 숨겨놓은 트릭만큼은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천재 해결사의 입을 빌려 표현한대로, “모든 단서와 정보를 뒤집어 생각하고, 평행선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면의외로 빨리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20152분기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으로 개정판이 나온다고 합니다. 동서문화사에서 2005년에 처음 출간됐으니 꼭 10년만입니다. 편집이나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세련된 문신 살인사건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어느 작품의 표지보다 파격적이고 독창적이긴 하지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구판의 표지 - 작품을 읽고 나면 나름 이해할 수 있지만 만큼은 작품의 내용과 2015년이라는 시대에 걸맞게 페이스오프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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