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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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인이었던 메린이 살해당한지 꼭 1년이 되는 날,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이하 이그)는 머리에 작은 뿔이 자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내 뿔이 가진 초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과거사를 꿰뚫어보게 되는 사이코메트리로서의 능력은 물론, 타인으로 하여금 감추고 싶은 속내를 모두 털어놓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까지 갖춥니다. 그 능력을 통해 이그는 메린의 죽음의 진상을 조금씩 알아내게 됩니다. 한때 메린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받기도 했던 이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살해당하기 직전 메린이 겪었던 모든 일은 물론 진범의 정체까지 파악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악마의 삶을 택한 이그는 복수를 위해 그만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영화(제목 혼스’)로 만든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폭로이자 마음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라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오랜 사랑과 갈등, 증오와 분노, 그리고 파국에 이르는 여정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소감입니다. 여기에 어느 날 갑자기 뿔이 튀어나오면서 악마가 된 남자라는 판타지를 설정함으로써 조 힐은 다양한 코드들 - 사랑, 증오, 살인, 복수, 그리고 실존하는 악마 - 이 뒤섞인 독특하고도 거대한 서사를 완성시킵니다.

 

뿔 달린 초인적 악마라는 설정을 걷어낸다면 이 작품은 연인을 살해한 진범을 찾는 한 남자의 목숨을 건 복수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할리우드의 복수극을 연상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아버지(스티븐 킹)에게 물려받은 우수한 유전자를 나름의 방식대로 확장하고 변형시킨 조 힐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사랑, 악마, 신화, 스릴러가 혼재된 훨씬 더 중층적인 이야기를 창조해냈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은 탓에 첫 페이지부터 관자놀이에 뿔이 난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조 힐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그의 캐릭터를 다져나갔고, 다분히 풍자적인 재미를 동반한 뿔의 위력에 관한 설명과 함께 1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 15년 전에 시작된 사랑과 우정에 관한 묘사를 꼭 필요한 만큼씩 독자에게 전달하면서 첫 페이지의 당혹스러움을 지워나갔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커져가는 악마적 능력보다도 이그 본인의 선택, 즉 신에 대한 저주와 악마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진화 과정입니다. 메린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이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인 악마성에 관한 그의 설명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을 법한 공감 가는 내용들입니다.

 

신은 아주 멀쩡히 살아있지만 구원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아. 범죄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저주받을 처지지. 보호를 제공하기 전에 충성의 맹세와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깡패들이나 할 거래지. 반면 악마는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아. 악마는 항상 죄악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도우러 이 자리에 있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부터 언뜻 봐서는 금세 눈치 채기 힘든 꽤 의미 깊은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품이나 의상, 물과 불, 색과 빛이 등장하는데 이런 점들을 눈여겨보면서 읽다보면 작가가 공들여 세운 서사의 무게와 깊이를 좀더 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메린을 살해한 범인은 초반에 공개되고, 적잖은 분량을 통해 이그와 메린, 주변 인물들의 인연과 악연을 설명하다 보니 독자에 따라서는 5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고 사건과 상황을 알맞게 배분한 조 힐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 덕분에 휴일 하루면 충분히 마지막까지 달리며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로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소설에서 표현된 다양한 상징들이 얼마나 관객에게 어필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특정 매체를 통해 재미있게 본 작품은 다른 매체로는 잘 안 보게 되는데, ‘의 비주얼이 구현된 결과가 궁금한 나머지 영화로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왠지 올드한 느낌이 나는 제목이라 언뜻 손이 안 갔던 ‘20세기 고스트가 조 힐의 작품이란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매력적인 중단편이 실렸다는 서평들을 보니 기회가 되는 대로 얼른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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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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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스위스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극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추리소설은 단 네 편뿐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에 따르면 극작가로 대성하는 시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때 밥벌이를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그 이후로는 다시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그 중 두 편 - 표제작인 중편 약속과 단편 사고’ - 을 수록한 작품집으로, 1950년대에 집필된 두 편 모두 일반적인 추리소설 서사와는 거리가 먼 무척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표제작인 약속에는 '추리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 그대로 추리소설의 주류 경향에 대한 명백한 도전 또는 비꼼을 품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추리소설 안에서 엉뚱한 사기극이 연출된다는 점입니다. 무릇 사건이란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순전히 직업상 운이나 우연이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흔하지요.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이 우연이라는 것이 아무 역할도 못하지요.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그렇게 세워진 세계는 아마도 완전한 세계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 세계입니다.”

 

약속에 등장하는 전직 경찰국장이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를 향해 내뱉은 일갈입니다. 추리소설의 비현실성과 동화적인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전직 경찰국장은 현실에서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의 사례를 9년 전에 벌어진 소녀 연쇄살인사건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례의 내용이 약속의 주된 스토리입니다. 완벽한 스펙을 지닌 한 경찰이 장밋빛 미래를 포기하고 범인을 쫓지만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다가 참담하게 실패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진상은 우연의 도움을 받아 엉뚱한 곳에서 밝혀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르긴 해도 추리소설 속 비현실적인 명탐정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겪어본 현업 경찰과 형사라면 대환호를 보낼 듯 싶습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야!”라며 말입니다. 아마 명망 있는 추리소설가가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완벽한 스펙을 지닌 경찰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치밀하게 설계된 연쇄살인을 멋들어지게 해결했을 겁니다.

 

하지만 약속은 단순히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도식적인 주장을 넘어 기존 추리소설의 인습을 깨고 미묘한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추리소설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깔끔한 주인공 대신 잔인한 우연에 조롱당하며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건 이면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가 하면, 진부하고 뻔한 권선징악의 공식 대신 인생의 아이러니라든가 씁쓸한 운명의 장난을 지켜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수록작 사고재판 놀이를 소재삼아 인생의 급반전을 겪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서스펜스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퇴직한 판사, 검사, 변호사가 별장 숙박객을 피고인으로 세워놓고 하룻밤의 유쾌한 재판 놀이를 벌이는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주객이 전도되는가 하면, 재미삼아 즐기던 놀이가 한순간 서늘한 현실처럼 급변하면서 결국엔 아무도 예상 못한 비극적인 엔딩에 이르고 맙니다.

캐릭터와 스토리 모두 다분히 연극적인 설정이라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작가는 신이나 운명 같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인 존재보다 사소한 사고하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인간의 나약함이나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고전의 올드함이 역력하지만 약속은 장르물 애호가들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를 뒤집는 미스터리라는 보기 드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연민과 동정심 등 마음 한쪽이 먹먹해지는 색다른 여운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통쾌하고 속 시원한 엔딩을 장르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독자들에겐 다소 거북하게 읽힐 이야기겠지만 분량도 300페이지 내외로 한나절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고, 스위스 출신 독일어권 작가로는 적잖은 명성을 날린 작가의 작품인 만큼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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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냉정한 리더 게스케, 철부지 나오토, 개구쟁이 준이치, 말괄량이 마키코는 초등학생 시절이던 23년 전, 똘똘 뭉쳐 다니던 4총사였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와 불행 탓에 그들은 각자 모양새가 다른 공포와 트라우마를 끌어안게 됐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약 없는 타임캡슐 안에 그날의 흔적들을 담고 봉인했지만, 결국 4총사는 차례로 마을을 떠나면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잔인한 운명은 뜻밖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4총사를 23년 만에 다시 재회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열쇠가 23년 전 4총사가 겪은 사건과 연관됐다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날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경찰의 수사는 결국 봉인됐던 4총사의 23년 전 기억을 무자비하게 열어젖힙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이나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처럼 오랫동안 봉인해온 비밀이 어느 날 갑자기 해제되면서 과거의 아픈 상처현재의 사건이 교차되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8수 끝에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은 요코제키 다이의 재회는 그런 맥락에서 무척 기대가 됐던 작품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상의 만족과 여운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굉장한 트릭이 숨어 있지도 않고 유혈이 낭자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4총사의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물음 때문입니다.

 

“23년 전,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과 동시에 네 명의 인물이 번갈아 화자 역할을 맡아 전개됩니다. 두 개의 시제, 네 개의 시선 등 복잡한 서술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방으로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한 곳을 향해 모여들다가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4총사는 완성된 큰 그림을 보는 순간 충격에 빠집니다. 같은 그림이었지만 4총사는 제각각 다른 형태와 색깔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은 불행이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엔 전혀 다른 트라우마가 뿌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4총사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내내 착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들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운명이란 것이 그들에게 조금만 덜 가혹했더라면, 이라는 부질없는 회한이 4총사 못잖게 독자의 마음에 피어오릅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드러난 후에도 결코 착잡함과 부질없는 회한은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상해줄 수 없는 그들의 지난 시간들, 기억들, 상처들이 안쓰럽고 애틋할 뿐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적절한 수의 인물과 에피소드를 배치한 덕분에 속도 빠른 독자들은 한나절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웬만하면 수상작을 결정한 심사위원, 즉 기성 작가들의 과찬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재회에 관한 한은 히가시노 게이고, 덴도 아라타, 온다 리쿠의 칭찬 릴레이가 결코 과장되거나 작위적인 홍보용 멘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에도가와 란포 상 결선에 올랐던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조만간 새로운 작품의 출간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퍼즐을 모으고 끼워 맞추는 역할은 가나가와 현경에서 파견된 특별한 형사 나라가 맡았는데, 팀플레이 대신 독립군노릇을 허락받을 정도로 뛰어난 추리를 자랑하는 캐릭터입니다. 그 역시 마지막 반전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는데, 요코제키 다이가 수상작가의 입지를 넘어 두드러진 활약을 하게 될 날이 온다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도 있을 만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요코제키 다이의 나라 시리즈를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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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그래닛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8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연쇄 강간살인범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경을 헤맬 정도로 중상을 입었던 로건 맥레이는 1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면서 부활한 성경 속의 인물 라자루스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부활한 로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연쇄 소아성애 살인사건입니다. 젤리와 캔디를 끼고 사는 인치 경위의 지휘 하에 과격한 여순경 왓슨과 팀을 이룬 로건은 강둑, 쓰레기장, 동물의 사체더미 등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어린 희생자에 충격을 받습니다. 더구나 항구에서 발견된 변사체 사건까지 떠맡은 로건은 겨울비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와중에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사체 훼손 방법이나 발견된 지역 등 어디에도 공통점은 보이지 않고, 사건을 수사하는 도중에도 연이어 어린 소년과 소녀가 실종되는가 하면, 유력한 용의자라 확신했던 자들은 부족한 단서로 인해 유유히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원제인 ‘Cold Granite’차가운 화강암이란 뜻인데, 이 작품의 주 무대인 스코틀랜드의 3대 도시 애버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름이 채 안 되는 사건 기간 내내 겨울비와 눈이 쉴 새 없이 퍼붓는 것으로 설정돼있어서 서늘한 회색 돌덩어리 화강암으로 가득 찬 애버딘의 풍경을 더욱 차갑게만듭니다. 광풍과 눈비가 몰아치는 북해와 마주한 애버딘을 배경으로 한 로건 맥레이 시리즈의 첫 편의 제목으론 더없이 잘 어울리는 두 단어의 조합입니다.

 

원작 출간은 2005년이지만 읽다보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잭 더 리퍼가 날뛰고 셜록 홈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느낌이랄까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휴대폰 등 21세기의 소품과 몇몇 현대적 설정을 제외하면 그 무렵에 출간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로건 맥레이의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캐릭터와 수사 방법에 있습니다. 그는 부활한 영웅 라자루스로 불리지만 책임감이 뛰어나다는 장점 외엔 물리적인 힘이나 사건을 추리하는 지능에 있어서는 오히려 평범한 쪽에 가깝습니다. 수사 방법 역시 안락의자 탐정이나 천재적인 추리와는 거리가 먼, 반복적인 탐문과 단서 찾기에 몰두하는 전통적인 경찰의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뛰어난 지능을 겸비한 슈퍼맨 주인공들에 비하면 로건의 캐릭터는 가끔은 답답해 보일 정도로 아날로그적이고 우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시리즈를 8편까지(2013년 현재) 이어지게 만든 그만의 매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독특한 영국식 유머 역시 아날로그 감성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데, 참혹한 소아성애 살인사건의 와중에도 독자들에게 쉬어가는 여유를 제공하는가 하면 주인공 3인방 - 로건 형사, 인치 경위, 왓슨 순경 - 의 캐릭터를 유쾌하고 개성 있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마치 영드 화이트 채플의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읽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습니다. 다만, 읽는 도중에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또는 곁가지가 너무 많다는 인상을 종종 받았는데, 결국엔 그 모든 설정이 작가의 의도라는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메인 스토리와는 조금은 거리가 먼 파생 사건들에게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바람에 굳이 600페이지라는 분량이 필요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다잉 라이트가 출간됐는데, 타고난 재능 대신 매사에 열심인 영웅 로건 맥레이의 활약은 물론 임시 상관이었던 인치 경위, 로맨스가 닿을까 말까 했던 왓슨 순경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분량도 500페이지로 많이 슬림해져서 곁가지 없는 알찬 이야기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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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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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 처음 만났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는 여느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잔인하고 섬뜩한 묘사로 가득 찬 수록작들을 읽으면서 인간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표지 자체부터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남의 일유니버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수록작마다 피와 살점이 튀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를 다룹니다. 특히 유니버설~’이 비현실적이거나 SF적인 설정을 종종 활용한 반면, ‘남의 일15편의 수록작 가운데 위안 로봇의 반란을 다룬 크레이지 하니를 제외하곤 하나 같이 일상 속에서,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엽기적인 상황들을 다루고 있어서 읽는 내내 놀라움과 역겨움, 불편함과 호기심이 번갈아 진동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쇠톱으로 자신의 다리를 자르고 칼과 전동톱으로 가족을 살해하는가 하면, 상처가 썩어 팔다리가 뽑힌 채 죽거나 하찮은 이유로 죽을 때까지 몰매를 맞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인육, 납치, 토막살인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함을 목격할 수 있는데, 독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런 끔찍한 소재들이 너무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스토리 속에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증오심과 공포만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남의 일’, ‘자식해체’, ‘딱 한 입에’, ‘어머니와 톱니바퀴’), 오로지 재미를 위한 살인과 폭력(‘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 ‘정년 기일’, ‘인간실격’) 둥 이즈음 들어 심심찮게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되는 엽기적인 현상들이 현미경 속 확대 영상처럼 생생하고 집요하게 묘사되다 보니 말 그대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느껴지는 공포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딱히 엔딩이라 할 만한 대목 없이 그저 툭, 하고 끝나곤 합니다. 독자는 아직도 긴장감과 흥분에 사로잡혀 한껏 고조돼있는데 작가는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막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둘 중 한가지입니다. 가라앉지 않은 흥분과 공포심이 전해주는 여운이거나 마치 씻기지 않을 그 무엇이 몸에 묻기라도 한 것 같은 불쾌감이거나...

사실 히라야마 유메아키 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을 쾌감을 느끼며 읽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통해 불쾌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욕망은 관음증과도 비슷해서 본능처럼 자꾸만 기웃거리거나 찾아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이건 아무리 무서워도 픽션이야라는 심리적 안전판을 부수고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상의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독자들의 불온한 본능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서평 때문에 히라야마 유메아키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독자가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독자도 꽤 되지 않을까 추정해봅니다)

 

국내에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남의 일두 권만 출간됐지만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맛볼 수 있는 단편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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