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구 나와 23인의 노예 1 - 소설
오카다 신이치 지음, 이승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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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르물에서 맛볼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은 정말 넓고 다양합니다. 애니메이션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발한 설정을 이끌어내는 창작력이 만들어낸 독특한 서사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한편 부러운 느낌까지 들곤 합니다.

 

치아교정기를 닮은 SCM(Slave Control Method)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끼리 게임을 벌여 이긴 사람, 즉 주인이 패자를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장치입니다. 주인끼리 게임을 할 경우 승자는 상대방의 노예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으며, 감정까지 통제하진 못하지만 대부분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시리즈 1편에서는 모두 11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치열하게 노예 만들기 게임에 뛰어듭니다. 단순히 금전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예를 확보하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유린한 남자들에게 복수하려는 여자, 오로지 성적 착취를 위해 여자 노예를 구하려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여자, 스릴감과 정복감을 누리기 위해 게임 자체를 즐기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SCM 게임을 벌입니다.

 


자칫 엇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연작 단편들이지만, 작가는 다양한 게임 룰과 얽히고설킨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를 활용하여 매 에피소드마다 놀라운 이야기를 이끌어냅니다.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가 하면, 주종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고, GPS를 통해 SCM 착용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스릴러의 묘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앞서 등장한 인물이 새로운 인물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가 파벌로 발전하면서 점점 거대한 대결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게임을 통한 노예 확보라는 말초적 재미를 넘어 통제 가능한 인간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은 이 작품을 평범한 엔터테인먼트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듭니다. 딱히 어떤 철학적 주제나 도덕적 함의를 지닌 작품은 아니지만, ‘겉으론 욕하면서도 실은 한번쯤 쥐어보고 싶은 무한한 권력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노예로 전락한 삶에 대한 공포와 전율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 고유한 미덕과 주제 의식을 갖췄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좀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2편에서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당초 SCM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실체와 목적이 무엇인지, 또 이미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 아니면 모의 삶을 강요받은 등장인물들이 자신 앞에 놓인 예정된 비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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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기억들 Medusa Collection 4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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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범죄자의 손에 죽어가는 누나 그웬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폴 그레이브스는 무력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평생을 그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의 화신인 케슬러와 그를 쫓는 형사 슬로백을 등장시킨 스릴러 시리즈를 통해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아이러니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16살의 나이에 사망한 소녀 페이예의 친구이자 리버우드 대저택의 여주인 앨리슨 데이비스는 폴에게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쳐줄 것을 의뢰합니다. 경찰마저 포기했던 소녀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폴은 같은 또래에 죽은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은 물론 살인자의 목소리를 수시로 떠올립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토머스 H. 쿡의 작품입니다. 단 한 편이긴 해도 나름 쿡 맛보기를 한 상태라 결코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였습니다.

밤의 기억들은 세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전개시킵니다. 메인 스토리는 폴이 앨리슨의 의뢰를 받아 50년 전 리버우드에서 발생한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 누나의 참혹한 죽음에 관한 폴의 악몽, 그리고 소설가로서 그가 창조한 악마 케슬러에 관한 묘사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며 메인 스토리와 함께 나란히 진행됩니다.

 

밤의 기억들은 다른 장르물에 비해 비교적 집중력이 필요한 작품인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별개의 서사가 아니라 한 몸통처럼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리버우드 저택은 누나 그웬이 살해당한 농장처럼 고립된 곳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첫인상은 소설 속 악마 케슬러의 저택 말버나처럼 음습하고 어두컴컴할 뿐입니다. 16살에 죽은 페이예는 누나 그웬을 계속 연상시키는데, 그로 인해 폴의 조사는 중반부까지도 제대로 된 진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페이예의 죽음을 조사할수록 누나 그웬의 마지막 모습과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페이예 살해 용의자들과 누나 그웬을 죽인 살인자와 자신의 소설 속 악마인 케슬러가 마치 한 몸에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처럼 번갈아 폴의 뇌리에 떠올라 그를 희롱하거나 정신을 갉아먹는데, 그러다보니 끊임없는 악몽 속에서 폴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은 번번이 범인을 놓치는 소설 속 형사 슬로백의 분신인 것 같고, 악의 화신 케슬러와 그의 앞잡이 사이크스는 현실 속으로 뛰쳐나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실체를 지닌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행을 저질렀던 폴의 소설 속 악마 케슬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거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조종하는 힘을 갖췄던 존재입니다. 실제로 그런 존재에게 누나를 잃은 남자가 소설가가 되어 지상 최고의 악마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은 누나의 죽음에 관한 악몽을 지워내고 누나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그만의 의식이며 통과의례입니다. 또한 그런 그에게 5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션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세 갈래의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진행되는 밤의 기억들은 설정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그 무게감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에도 기억과 마음에 남는 여운의 대부분은 리버우드 저택의 비극의 진상보다도 폴의 삶의 궤적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할 필요도 없고,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도 없어서 45살이 되도록 결혼도, 연애도, 아이도 없이 홀로 된 삶을 영위해왔고, 조용하거나 외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에 둥지를 틀곤 끝없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자신을 숨겼으며, 어디선가 덫이 튀어 오르거나 그물이 떨어지거나 익명의 손아귀에 붙잡히는 공포 때문에 잠시라도 멈춰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마음이 놓이는 남자.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축복일 수 있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숨 막히듯 고통스러운 일상을 견뎌야 하는 폴의 캐릭터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리버우드 대저택에 머물며 50년 전 페이예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은 단서와 탐문을 통해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면서 긴장감 있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대과거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반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폴의 캐릭터가 워낙 인상적인 탓에 정작 사건과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행위가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이 가는 이유는 뭔가 진짜배기를 읽은 것 같은, 날것 같지만 진정성으로 가득 찬 서사를 접한 듯한 묘한 만족감 때문입니다. ‘채텀 스쿨 어페어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떠올려보면 아직 읽지 못한 토머스 H. 쿡의 심문이나 붉은 낙엽역시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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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당 - 괴담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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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출간된 사관장이 햐쿠미(百巳)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와 신당 백사당(百蛇堂)에서 겪은 다쓰미 미노부라는 남자의 기이한 공포 경험담이라면, ‘백사당은 주인공 미쓰다 신조와 그의 동료들이 다쓰미 미노부의 기록, 사관장을 읽은 후에 겪게 되는 끔찍하고 기괴한 현상들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쓰미 미노부의 사관장을 읽은 미쓰다 신조는 괴담 편집자로서 호기심을 갖곤 신이치로, 고스케 등 괴담 전문가인 친구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햐쿠미 가가 위치한 나라 현 다우 군에서 수년 전부터 연이어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에 주목한 미쓰다 신조는 다쓰미의 기록과 햐쿠미 가의 신당 백사당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사관장을 읽은 동료에게 사고가 벌어지는가 하면, 다쓰미는 책의 출간을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다 신조는 햐쿠미 가의 신당 백사당에 가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백사당에 다가갈수록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가 하면, 햐쿠미 가를 둘러싼 사악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맙니다.

 

사관장이 괴이한 현상들을 열거한 호러 기록물이라면, ‘백사당은 그 현상들의 이면과 사연을 찾아가는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미쓰다 신조가 백사당에 호기심을 가진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괴담 편집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낄 만한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백사당에서 벌어졌던 두 번의 밀실 미스터리와 아이들의 실종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괴담과 미스터리라는 두 가지 테마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교묘히 섞어놓으면서 동시에 독자의 공포심이 극대화되도록 풀어놓습니다.

 

“(괴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를 따져봤자 부질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진짜로 그런 무서운 현상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단순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괴담을 즐기는 올바른 자세 아닐까. 허나 이 원고(‘사관장’)처럼 진한 맛을 내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그 이야기의 진상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고개를 쑥 쳐든다.”

 

작가 시리즈두 번째 작품인 작자 미상에선 미궁초자라는 단편 괴담집을 읽은 미쓰다 신조와 동료들이 괴담 속의 기이한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가도 괴담 속 수수께끼를 풀어내면 가까스로 그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탈출구가 있었던 셈인데, ‘백사당은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고, 풀려고 하는 자에게는 끔찍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느껴지는가 하면, 다쓰미가 기록한 사관장속의 장면들이 밤마다 악몽으로 떠오릅니다. 오히려 도망치려 할수록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마물의 존재,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산과 숲, 뱀을 뜻하는 한자를 품은 수많은 지명들, 피부에 와 닿는 듯한 끈적이는 어둠 등 명백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에 다름 아닌 괴담 코드들로 가득 차 있지만, ‘백사당은 밀실 미스터리, 실종 사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 등을 빈틈없이 버무림으로써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읽는 듯한 사실적인 느낌까지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담과 전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성적인 엔딩을 끌어냈고, ‘노조키메사관장이 괴담 그 자체를 서술해놓은 작품이라면, ‘백사당은 모든 것이 믹스된, 그러면서도 결코 친절하거나 깔끔한 엔딩이 아닌, 말 그대로 괴담의 여운을 진하게 남겨놓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중반의 전개 부분이나 후반부에 밝혀지는 여러 가지 진상 가운데 일부는 , 이게 뭐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술 자체가 모호하게 돼있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일반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빠른 속도로 읽은 탓에 앞서 등장한 상황이나 대화에서 제시된 결정적인 단서들을 놓쳤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사관장백사당을 안 읽은 분이라면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고, (저 역시 그럴 계획이지만) 이미 읽은 분이라면 기회가 될 때 재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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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장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햐쿠미(百巳) 집안의 장손이지만 밖에서 태어난 첩의 자식다쓰미 미노부는 5살이 된 해 여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햐쿠미 가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햐쿠미 가의 독특한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를 거듭 겪으면서 생생한 공포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이 대해주는 다미 할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신당 백사당(百蛇堂)과 도도야마() 산을 찾은 는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한 그것과 마주치곤 혼절에 혼절을 거듭합니다.

쫓겨나듯 햐쿠미 가를 떠나 30대가 된 는 또다시 죽음의 의례를 치르기 위해 백사당을 찾습니다. 구경꾼에 불과했던 유년기와 달리 의례를 주관하는 장손의 자격으로 백사당에 들어간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녹아있던 생생한 그것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잊은 줄 알았지만 실은 억눌려 있을 뿐이던 유년의 끔직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출간 소식만 들었을 때는 제목의 을 당연히 특정 건물을 가리키는 으로 생각했습니다. 사관장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추측했지만, 정작 표지에 인쇄된 장례를 의미하는 을 보곤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2014년에 출간된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에서 비교적 상세히 묘사됐던 저주받은 사야오토시 가문의 특이하고 기분 나쁜 장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곳곳에서 노조키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장례 장면은 물론 공포의 기운을 내뿜는 인근의 산,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가문의 묘지, 범접해선 안 되는 건물과 그 안에 모셔진 기이한 그것등 유사한 설정과 코드들이 사관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조키메가 호러와 미스터리를 융합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면, ‘사관장은 애초에 미스터리라는 포장을 배제한 채 죽음과 관련된 설명 불가능한 수많은 현상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햐쿠미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에 깃든 공포담이랄까요? 작품 제목에 이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후속편인 백사당작가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괴담 속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인물 미쓰다 신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사당엔 미스터리 코드가 어느 정도 녹아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보지만, 어쨌든 사관장호러 그 자체라는 말 외엔 달리 어울리는 수식어가 없는, 미쓰다 신조 식 괴담 서사의 진수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밀의 폭로, 연이은 반전, 트릭의 해체 등 깔끔한 미스터리 엔딩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묘사들로 가득 찬 사관장읽기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의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간 본연의 공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편의상 사관장작가 시리즈’ 3편의 상권이고, ‘백사당은 하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관장이 프리퀄을, ‘백사당이 본편을 담당한 셈입니다. 그래선지 백사당에선 약간이나마 미쓰다 신조 식 미스터리 설정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햐쿠미 가문의 과거사, 장송백의례와 백사당의 유래 또는 비밀, 다미 할멈의 정체, 또 애너그램 같은 두 작품의 화자의 이름(‘사관장’=다쓰미 미노부, ‘백사당’=미쓰다 신조) 등 작가가 사관장곳곳에 흘려놓은 떡밥들을 보면 궁금증을 자아냈던 수많은 정황들이 백사당에서는 그 정체를 드러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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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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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킹을 찾아라한 편밖에 읽어보지 못한 노리즈키 린타로지만, ‘녹스머신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간극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딱히 SF물을 멀리 하는 편은 아니지만 과학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가까이 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녹스머신에 수록된 단편들은 말 그대로 Scientific Fiction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들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체감 독서시간은 꽤 길었습니다.

 

평행이론과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표제작 녹스머신과 후속편 격인 논리 증발은 양자역학 같은 먼 나라(?)의 개념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해서 정말 많이 난감했지만, 그래도 바탕에 깔린 메인 스토리나 정서 자체는 충분히 공감 가능해서 재미와 호기심을 갖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을 테마로 한 바벨의 감옥은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 서술 미스터리라 그런지 다 읽고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친절한 서평을 보니 , 그런 거였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피해, 왜 탈출하려는지 결국엔 이해불가의 영역에 남아버렸습니다.

그나마 편하게 읽힌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너무나 유명한 고전 탐정들의 조수들이 등장하여 공공의 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와의 한판을 놓고 논리와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인데 기획의 신선함에 비해 마무리가 아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한 인터넷 카페에서 이 작품의 서평단을 모집한 적이 있는데, 대략의 소개글을 보곤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응모 자체를 포기했었고, 시간이 지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보곤 역시 응모 안 하기를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신인도 아니고 작품 역시 SF물로서의 미덕을 갖췄는데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독자가 어설픈 서평을 올리는 건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이 일본의 주간문춘 미스터리’, ‘본격미스터리’,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에서 나름 의미 있는 순위를 기록한 걸 봐도 그렇고, 한국 인터넷서점에서 평균 4개 이상의 평점을 받은 걸 봐도 그렇고, 환호하며 즐길 독자층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학창 시절 내내 과학 수업이 든 날이면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받던 저 같은 독자에겐 그 진가를 발견하기도 전에 답답함과 자기연민이 먼저 찾아올 것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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