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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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만큼 몽환적인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30여 년간 수련연작을 그리며 칩거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를 무대로 세 여인의 사랑, 운명, 절망,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싼 광기와 집착을 그려낸 검은 수련은 모호하면서도 궁금증을 일으키는,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불온함을 담은 프롤로그로 시작됩니다.

 

한 마을에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첫 번째는 심술쟁이, 두 번째는 거짓말쟁이, 세 번째는 이기주의자. 세 명은 완전히 달랐지만 남몰래 같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건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은 잔혹했다.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다른 둘은 죽어야 했다.”

 

천재적인 그림 재능을 가진 11살의 파네트 모렐은 미술 콩쿠르에 입선함으로써 지베르니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36살의 나이에도 상대를 압도하는 매력을 지닌 여교사 스테파니 뒤팽은 단 한 번 찾아온 불같은 사랑을 통해 감옥이나 다름없는 지베르니를 떠나려 합니다. 80대에 접어든 는 마을 일대를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는 방앗간의 5층 망루에서 지베르니를 떠나려는 두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들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합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어딘가 생명감을 잃은 듯한 지베르니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베르농 경찰서의 로랑스 서장과 보좌관 실비오가 수사에 뛰어듭니다. 바람둥이이자 모네의 그림을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됐던 피살자 주변을 조사하는 한편, 현장에서 발견된 11살 아이의 생일 축하엽서를 단서 삼아 수사를 진행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유력한 용의자마저 풀어줘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미셸 뷔시의 그림자 소녀가 치밀한 구성과 리얼한 서사를 내세웠다면 검은 수련은 미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바탕에 깐 채 사랑과 욕망, 광기와 집착 등 인간 본연의 감정을 상징적이고 몽환적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독자는 경찰 콤비 로랑스와 실비오의 수사에 몰두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사건보다는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욕망에 집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아름다운 그림 같은 지베르니에 대한 묘사에 빠져있다가도 어느 순간 감옥처럼 답답하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지베르니의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연상시키는 두 경찰 콤비의 대화에 빙긋 웃다가도 세 여인의 내면 묘사를 위해 동원된 상징으로 가득 찬 시구(詩句)를 보고 있으면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몇 번씩 되읽으며 그 의미를 여러 번 곱씹게 됩니다.

 

독자에 따라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서술들을 어렵거나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검은 수련을 통해 미셸 뷔시를 처음 만나는 독자들은 자칫 전형적인 난해함으로 중무장한 프랑스 작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소녀의 대중적 성공 이후 재조명되면서 평단의 호평과 다양한 수상 이력을 쌓은 것을 보면 검은 수련이 결코 편하고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검은 수련의 진가는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여드는 중반부터 긴장감과 속도감을 높이면서 빛나기 시작하는데, 살인사건의 진상과 지베르니를 벗어나려는 세 여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엔딩에 이르면 놀라운 반전과 충격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독자는 미셸 뷔시가 왜 이토록 복잡 미묘한 서술예술적 서사를 고집했는지, 앞서 동원된 수많은 상징과 표현들이 왜 필요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검은 수련은 미스터리와 트릭, 비밀과 거짓말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세밀하게 설정돼있어서 자칫 한 줄 소개만으로도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상세한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보다는 애매모호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서평 밖에 쓸 수 없었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능하면 소개글이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백지 상태에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혹시 검은 수련이 어렵게 느껴졌더라도 미셸 뷔시를 포기하지 말고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그의 그림자 소녀만큼은 꼭 한번 만나볼 것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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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 - 새벽의 주검
디온 메이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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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의 액션스릴러라는 타이틀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먹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 보는 음식 같은 낯설음을 더 강하게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디온 메이어가 풀어낸 이야기는 의외로 흥미와 만족을 선사했고, 후속작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제도)가 악명을 떨치고, 독립운동이 불붙었던 70년대 아프리카 상황과 여전히 흑백 갈등이 상존한 채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90년대 후반의 남아공을 배경으로 디온 메이어는 수많은 목숨을 거둬갔던 참혹한 사건들의 진상 추적과 한 개인의 상처투성이 성장사 및 연애담 등 다양한 서사를 적잖은 분량 속에 녹여냈습니다.

 

장래가 보장된 프로파일러와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현장 경찰의 길을 택한 판 헤이르던은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경찰을 그만뒀고, 지금은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초보 사립탐정으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를 통해 앤티크 가구상 얀 스미트 살해사건을 맡은 판 헤이르던은 대형 금고 속의 물건과 함께 사라진 피살자의 유언장 찾기에 나섭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주일. 하지만 실타래를 풀수록 사건의 규모는 커져가고, 군 정보국에 미국 정보기관까지 가세하면서 판 헤이르던은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판 헤이르던이 맡은 유언장 찾기이고, 또 하나는 유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판 헤이르던의 성장사와 로맨스입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의 성장사 중 경찰이 되고자 마음먹은 지점부터 서서히 교집합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뒤틀리게 한 경찰 시절의 끔찍한 비극의 전말이 공개되는 순간 독자는 작가가 두 갈래의 전개를 선택한 이유와 노림수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건은 사건대로 눈덩이처럼 확장되다가 예상외의 결말을 맞이하고, 개인사는 개인사대로 한 인간의 굴곡진 인생경로를 보여주다가 뜻밖의 반전에 도착하는데, 두 가지 서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어놓은 작가의 필력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고, 두 서사의 마무리 역시 재미와 여운을 겸비한 매력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유언장 찾기에서 시작되어 오래 전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정치적, 역사적 비극이 낳은 참혹한 사건의 실체에 이르는 장대한 스토리도 재미있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됐던 엘리트 경찰이 만신창이의 삶에 이르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유독 눈길이 갔던 부분은 판 헤이르던의 삶에 개입했던 8명의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에 눈 뜨던 청소년기의 판 헤이르던을 헤집어놓았던 세 명의 여인들, 그의 풍요롭고 안정된 미래에 올라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벤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판 헤이르던이 모든 것을 걸었던 비련의 여인 노니, 유언장 사건에 개입한 판 헤이르던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올곧은 여성 변호사 호프 베네커, 판 헤이르던에게 끝없는 추파를 던지는 부유하고 파괴적인 마조히스트 카라 안, 그리고 판 헤이르던의 지붕이자 족쇄이며 동시에 멘토이자 존경의 대상인 어머니 조안 등 그를 둘러싼 8명의 여인들은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 못잖게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 도덕적 기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 미래에 대한 기대 등 현재의 판 헤이르던의 인격은 이 8명에 의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연애조차 냉정함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로봇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보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또 주변의 여자들로 인해 숱하게 삶이 흔들렸던 판 헤이르던이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무래도 스릴러의 변방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보니 적잖은 작품이 영상화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도 처음엔 그다지 호기심이 일지 않았는데, ‘오리온을 읽은 뒤엔 후속작에 대한 관심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 작가임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여 판 헤이르던을 도와줬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가 후속작 프로테우스의 주인공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들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는 네 편의 베니 그리설 시리즈역시 머잖아 한국에서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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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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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통성 없는 옹고집에 질서정연함을 좋아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던 안조 세이지는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경관의 길에 들어섭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 덕분에 호감을 샀지만, 그가 주재소 경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깊숙이 개입했던 두 건의 살인사건은 그 자신은 물론 손자에 이르기까지 깊고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아버지 세이지의 영향으로 경관의 길을 택한 안조 다미오는 우수한 재능 덕분에 스파이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애초 아버지처럼 주재소 경관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자신과 남을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 스파이 역할은 엄청난 후유증을 남깁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조사하던 두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으면서 헤어나기 힘든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애증을 품었던 안조 가즈야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관의 길을 택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쫓던 가즈야는 오래된 단서들과 증인, 목격자들을 통해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할아버지가 쫓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과 할아버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물론 스파이였던 아버지의 삶과 비밀까지 전부 알게 된 것입니다.

 


4~5년 전쯤 분권 상태로 읽을 때는 몰랐지만, 700페이지에 이르는 합본을 손에 쥐고 보니 만만찮은 부담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흐릿하긴 해도 대하(大河)급의 묵직한 서사를 만끽했던 일이 기억나면서 역시 이만한 분량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60년에 이르는 경관 3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관의 피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1957년 안조 세이지의 의문사와 그가 수사하던 두 살인사건의 진상을 아들 안조 다미오와 손자 안조 가즈야가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추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이지-다미오-가즈야 등 3대가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입니다. 더불어 아버지나 남편, 혹은 형이나 오빠를 경관으로 둔 가족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이 700페이지를 관통하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라면, 두 번째 축은 세 명의 안조가 짊어져야 했던 경관으로서의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을 시대의 변화상과 함께 느리지만 묵직하게, 소박하지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다보니 경찰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시대소설이자 사회소설, 또 한편으로는 3대에 걸친 가족소설이라는 복합적인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대와 사회에게 구속받는 개인의 삶과 저항은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시대와 사회가 너무 강조되면 픽션의 매력이 떨어지고, 개인에게만 집착하면 서사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뿐입니다. ‘경관의 피는 패전 직후, 고도성장기, 거품경제 등 일본의 굴곡진 현대사와 그 안에서 경관으로서 구속과 저항을 반복했던 세 명의 안조를 잘 버무린 덕분에 시대와 사회와 개인이 모두 살아있는 제대로 된 대하급 서사를 완성한 작품입니다. “주인공들의 꿈이나 희망만이 아니라, 기쁨도 고뇌도 편견도 시대의 규정 속에 있다.”라는 작가 사사키 조의 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잡하고 대단한 반전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대하 또는 고전의 향기가 더 짙게 느껴지는 경관의 피가 조금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60년에 걸쳐 세 명의 안조가 쫓은 살인사건과 그 진상은 잔혹하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그들이 각각 겪은 개별 사건 역시 흥미보다는 진정성에 더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경관의 피의 매력과 존재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는 단선적인 경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택한 경관의 길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세 명의 인생행로는 험난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농도의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손에 잡히는 두툼한 분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일본 경찰소설에 입문하거나 그 기초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또 금세 잊힐 가벼운 이야기에 질려 감동과 여운이 담긴 묵직한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조금은 넉넉한 여유를 갖고 경관의 피를 완독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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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의 살인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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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묘사와 막판 반전으로 유명한 살육에 이르는 병부터 코믹 청춘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인형 탐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들을 선보였던 아비코 다케마루의 신작입니다. 일본 출간 시기로 따지면 살육에 이르는 병이전의 작품이며 거의 데뷔작이나 마찬가지라서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성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밝고 즐거운 소설을 쓰려고 유의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살인사건이 주류이고, 살인 동기는 쓰면 쓸수록 어두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만 이 작품을 읽으실 때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작품은 모 탄산 음료수처럼 개운하고 상쾌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야미 3남매 시리즈중 한 편인 ‘0의 살인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B급 코믹 코드가 버무려진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무엇보다 3남매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경시청 수사1과 경위 하야미 교조는 거구의 무술 유단자지만 35살 미혼에 애인 하나 없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어디 멋진 여자 없을까? 운명적인 만남이 굴러들어오지는 않을까?” 자문하기도 하고, 한번 꽂힌 여자 앞에선 수시로 얼굴이 빨개지는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제법 터울이 지는 남동생이자 카페 점주인 신지는 예리한 추리력을 지닌 반면, 여동생 이치오는 천방지축에 막무가내 식 추리로 교조의 수사에 혼선을 가중시키곤 합니다.

 


유머러스한 3남매 캐릭터에 비해 이들이 마주한 살인사건은 무척 기이하고 풀기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부호 노파인 후지타 가쓰의 일가족에게 닥친 독살, 추락사, 사고사 등 다양한 죽음은 어느 것 하나 앞뒤 맥락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괴짜 후배 기노시타와 함께 정열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었던 하야미 교조는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수사본부가 축소되고 미제로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겨울 밤, 3남매는 경찰이 포기한 사건을 놓고 안락탐정들의 난상토론을 연상시키는 추리 대결을 펼칩니다.

 

재미있는 점은 첫 장에 등장하는 작가의 도전장입니다. 우선 아비코 다케마루는 독자가 지켜봐야 할 용의자 4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나머지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밝힙니다. 압권은 다분히 도발적인 냄새를 풍기는 마지막 멘트입니다.

 

간단한 문제이니만큼 대부분의 독자는 종막 전에 진상을 간파하겠지만, 백 명 중 한 명쯤은 모르는 분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도 그 한 명이기를 바랍니다.”

 

고백하자면 작가의 예상대로(?) ‘진상을 파악 못한 백 명 중 한 명이 돼버렸지만, 그만큼 아비코 다케마루가 짜놓은 촘촘한 본격 미스터리의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는 뜻이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들은 엄청난 반전은 아니더라도 나름 오호~”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머 코드가 섞인 미스터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0의 살인은 적절한 선에서 유머와 미스터리를 믹스한 덕분에 읽으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위화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분량도 가벼워서 몇 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미륵의 손바닥처럼 잔혹한 서사에 더 꽂힌 탓에 그런 방면의 신작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자뻑 만발한 하야미 3남매 시리즈역시 후속작의 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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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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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사전 서평단 가제본'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전설의 밤털이(빈집털이와 달리 밤에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자) 마카베 슈이치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1년 여간 겪은 다양한 일상들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꾸민 연작 단편집입니다.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비밀을 캐는 것은 당연히 주인공 마카베의 몫인데, 형사나 탐정 등 제도권속 인물이 아니라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밤털이로 먹고사는 도둑이 탐문과 수사를 벌이다 보니 의외의 재미나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마카베는 자신이 검거되기 직전 목격했던 살인음모를 은밀히 파헤치는가 하면, 자신을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으로 여겼던 한 형사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하기도 하고, 동종업자들을 향한 야쿠자의 무차별 다구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증거 수집 차 남의 건물에 잠입하는가 하면,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기 위해 밤털이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들 속에서 마카베는 웬만한 형사나 탐정 이상의 추리력을 발휘하는데, 완력에 기대어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는 재미있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처음엔 사소한 단서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어!”라는 식의 마카베 식 추리가 좀 어색했지만. 이어지는 부연설명을 보면 논리와 직관을 겸비한 뛰어난 추리였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카베의 밤털이 캐릭터나 미스터리 스타일도 눈길을 끌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카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쌍둥이 동생 게이지입니다. 게이지는 15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지만, 지금은 형 마카베의 귓속뼈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채 끊임없이 형과 소통하는 일종의 고스트(ghost)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공유했고, 한 여인을 사랑한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카베는 한때 게이지의 존재를 저주하기도 했지만, 가족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 이후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에 휩싸인 그만의 고유한 동생 사랑법이었습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쌍둥이였다가)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게이지가 마카베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카베가 불러들인 것이다. 동생을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자가 없는 어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래서 게이지의 영혼을 불러들여 자기 안에 붙잡아둔 것이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빈틈없이 완벽한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판타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점은 의외였습니다. 극단적인 설정 속에서도 묵직한 사실감과 따뜻한 감동을 맛깔나게 버무리는 필력 덕분에 그의 팬이 된 입장에서 게이지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는 급하지 않게, 억지스럽지 않게 독자를 설득합니다. 왜 마카베가 게이지를 자신의 곁에 머물게 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걱정하고 존중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게이지에게 갖고 있는 마치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을 일곱 편의 에피소드를 진행시키면서 조금씩 조금씩 독자들에게 털어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게이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더 이상 큰 거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리기에 ‘64’클라이머즈 하이처럼 분량과 내용 모두 묵직한 대작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림자밟기역시 얼굴이나 종신검시관에서 맛봤던 요코먀아 히데오 단편집 특유의 감동과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밤털이 마카베의 어딘가 시니컬한 캐릭터 덕분에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다음엔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진짜 대작을 만나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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