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럼 다이어리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이정지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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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는 것 같아.”

 

반려동물과 함께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에 따라 반응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안 보이는 데서 흉이라도 보고 있으면 느릿느릿 다가와 원망어린 표정을 짓기도 하고, 예쁘다며 칭찬하고 있으면 얼른 와서 꼬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더구나 눈빛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배가 고플 때나 산책 가고 싶을 때,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마냥 늘어지고 싶을 때 등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금세 눈치 챌 수 있는 자신만의 소통법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잭 러셀과 푸들이 섞인 휘핏의 잡종인 후셀이라는 복잡한 족보를 가진 플럼은 에마와 루퍼트 부부와 함께 런던에 사는 사랑스러운 반려견입니다. 유독 물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하고, 막대기 잡기 놀이를 좋아하는가 하면 여우 똥냄새를 좋아하는 특별한 기호도 갖고 있습니다. 나름 터프한 이미지를 좋아해서 에마가 기껏 미용실에 데려갔다 온 다음날이면 어떻게든 헤어스타일을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반골기질도 지니고 있습니다.

 

플럼 본인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1년간의 일기에는 반려견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물론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여행한 유람기도 담겨있고, 사람이나 친구들과 나눈 우정, 사랑, 질투 등 다양한 에피소드도 들어있습니다. 플럼의 능청스런 수다와 따스한 느낌의 그림으로 채워진 페이지들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플럼과 진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도중 괜히 베란다에서 볕을 쬐던 반려견 아지(시추, 43개월)를 불러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희죽희죽 웃다가 식구들의 눈길을 사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우리의 반려견 문화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작품이 출판된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고, 아무리 픽션이고 만화라 하더라도 플럼을 한 식구처럼 대하는, 말 그대로 반려견으로 아끼고 챙겨주는 에마 부부의 애정이 작고 귀여운 애완견에 집착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지난주쯤, MBC에서 방송된 유기견 관련 프로그램에서 작고 귀여워서 분양받았다가 덩치가 커지자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리포트를 봤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왠지 우리의 반려견 문화는 이기심의 산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맞춰 읽은 플럼 다이어리는 늘 함께 살면서도 가족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애완견처럼 대했던 귀여운 아지를 새삼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줬습니다. 얼마 전 읽은 일본 작가의 콩고양이를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지만, ‘플럼 다이어리같은 작품이 한국시장에서 선전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운 좋게 읽은 이 작품이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입소문이 나서 반려견과 함께 사는 분들에게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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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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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기 전에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잠시나마 주저했던 게 사실인데, 하나는 일본 미스터리 작품치곤 꽤 방대한 분량(688페이지)이란 점입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몇 년 전에 읽은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656페이지였습니다. 또 하나는 제목을 보는 순간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이 황금가지에서 다시 나온 건가, 오해했던 점입니다. 물론 그 오해는 금세 풀렸지만, 초반에 여주인공 고바야시 료코가 사라지는 대목을 읽다보니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환상의 여자역시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옛 연인 고바야시 료코가 다음날 무참히 살해되자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친인척을 찾기 위해 그녀의 고향까지 찾아갔던 스모토는 뜻밖의 상황에 처하면서 그가 알고 있던 료코가 진짜 료코인가?”라는 당혹감에 빠집니다. 또한 그녀가 살해된 현장을 조사하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는가 하면,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폭력단이 연루된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흥신소장 기요노, 호스티스 사요코와 함께 갖은 위험을 무릅쓴 스모토의 조사는 결국 10여 년 전 그녀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에 닿게 되고, 거기에서 스모토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야차처럼 날뛰었던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스모토 일행은 오히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단지 그녀를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스모토가 손에 쥔 진실은 참담하고 가슴 아픈 료코의 과거사일 뿐입니다.

 


심플한 구조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캐면 캘수록 끝없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 줄기처럼 고바야시 료코의 과거를 복잡다단하게 설정함으로써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채웠습니다. 그래선지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인물과 지역과 사건을 메모하면서 읽게 됐는데, 30여 년 동안 일본 전역을 전전했던 료코의 삶을 촘촘하고 빈틈없이 구성한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사건에만 집중했다면 아마 4~500페이지 내외에서 마무리 될 수 있었겠지만, 작가는 스모토와 료코 두 남녀의 고통스런 가족사와 심리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단순한 사건해결 미스터리를 넘어 한 편의 묵직한 비극을 완성했습니다.

 

변호사 스모토의 인생은 한시도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오직(汚職)으로 공무원에서 퇴출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정의란 그저 비즈니스라는 원칙으로 살아온 삐딱이 같은 변호사로서의 삶, 권력형 로펌의 수장을 장인으로 뒀지만 불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결혼 생활 등... 그런 스모토 앞에 나타난 작은 스낵바의 종업원 료코는 한줄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내보일 수 있었고,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는 안락한 도피처였으며,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는 파트너였습니다.

 

료코의 가족사와 과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지 않겠지만, “기구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모토에게 있어 료코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해방구 같은 존재였다면, 료코에게 있어 스모토는 과거를 잊게 해줄 마지막 남자이길 바랐던 상대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를 스모토의 곁에서 떼어낸 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캐릭터는 단단하고, 서사는 빈틈없으며, 사건은 반전을 거듭하며 진실을 토해냅니다.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역시 그만큼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두 가지만 얘기하자면, 하나는 분량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미스터리의 해법입니다.

다 읽고 돌아보면 그리 많은 분량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던 에피소드가 여럿 생각나는데, 그런 부분들을 정리했다면 500페이지 내외에서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사건의 규모나 막판에 밝혀진 진실의 실상을 감안하면 역시 688페이지는 좀 과해 보였습니다.

 

미스터리의 해법이 아쉬웠던 이유는 후반에 이르러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홀로 앞서갑니다. 특히 결정적인 반전에 관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런 폭주 추리는 엔딩에서 만끽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상당 부분 감소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좀더 슬림했으면, 좀더 친절한 엔딩이었으면, 하는 두 가지 아쉬움 외에는 제물의 야회이후 대체로 만족스러운 가노 료이치와의 재회였습니다. 한국에는 이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 다양한 작풍의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넓히고 있다.”는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그의 주 무기인 하드보일드 풍의 작품이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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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스 웨이브 제5침공 The Fifth Wave 시리즈
릭 얀시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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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네 달 만에 전자기 충격파(EMP), 쓰나미, 전염병 등 세 차례의 파동으로 인류의 99%를 말살한 외계인은 우주모함을 띄어놓은 채 네 번째 파동을 일으킵니다. 외계인의 공격으로 부모를 잃은 16세 소녀 캐시는 납치된 남동생 샘을 찾기 위해 아버지가 남겨준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기약 없는 싸움을 벌입니다. 캐시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구해준 또래 소년 에번 워커에게 의지하며 남동생 샘을 끌고 간 자들의 근거지를 향해 위험천만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섯 번째 파동의 정체를 목격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할리우드에서도 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라지만, 처음 만나는 것은 물론 이름도 낯선 릭 얀시입니다. SF, 그것도 외계인의 지구침공이라는 소재는 아무래도 영화에 적합해 보이는데, 가장 큰 이유는 미지의 외계인의 모습과 침공 장면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는 특수효과 및 스펙터클한 영상이 주는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피프스 웨이브는 기존의 유사한 소재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외계인의 우주모함은 등장하지만, 정작 외계인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전 세계를 정전시킨 첫 파동을 시작으로 네 차례의 파동(wave)을 통해 인류의 99%를 제거한 외부인들이 다섯 번째 파동으로 남은 인류를 말살하려고 하는데, 정작 이 끔찍한 파동을 일으킨 주인공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목격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적인지도 구분할 수 없고,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공포는 살아남은 인류를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인류 전멸의 위기 속에서 이 험난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것이 이제 겨우 16살이 된 소녀와 소년, 그리고 그 또래의 10대들이라는 점입니다. 심지어 7살이 된 전사(戰士)도 등장하는데 이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할 분들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어지간한 어른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SF물보다 더 긴장감 넘치고, 생존과 구원을 위한 불가피한 폭력과 액션 역시 ‘10대에 어울리는 수준 아닐까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충분히 독합니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외계인이 안 보이는 지구침공과 10대들의 생존전쟁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또 큰 고비를 넘긴 주인공들이 곧 출간될 후속편에서는 어떤 위기에 처할지, 그래서 인류의 99%가 사라진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도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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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드타이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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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이맘 때 구판인 아들의 방으로 이 작품을 읽고 서평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할런 코벤과는 용서할 수 없는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꽤 근사했던 첫 만남 덕분에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인지 제법 실망을 느꼈고, 고백하자면, 당시에는 별 3개와 함께 거의 혹평에 가까운 서평을 남겼습니다.

 

한편에선 연이어 여성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진 10대 아들의 행방을 찾는 부부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 이야기는 중후반부에 가서 어렵게 접점을 찾고,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합니다.

 


당시의 혹평은 상관없어 보이던 두 사건이 접점을 이루는 과정에 대해서도, 또 메인 사건인 소년의 실종 계기와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한 탓이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글은 제 블로그에 남아있었습니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그 서평을 삭제했기 때문이고, 삭제한 이유는 홀드 타이트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두 번째 읽은 뒤 그 서평을 찾아보니 제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홀드 타이트를 읽기 전에는 어차피 처음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2년 전과는 반대로 큰 기대 없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때는 발견 못한 이 작품만의 미덕, 할런 코벤의 필력이 새삼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숙명처럼 주고받아야 했던 애정과 증오심,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강요하거나 강요받아야 했던 불편한 관계, 다른 가족의 불행과 내 가족의 불행의 무게를 재보는 어쩔 수 없는 이기심 등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홀드 타이트는 과장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리는 듯 보였던 연쇄살인사건 역시 뿌리를 찾아가보면 가족이라는 이름의 불편한 과거와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 연쇄살인사건의 뿌리를 억지로 주제의식에 맞춰 해석할 필요는 없고, 작품 전체의 재미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병행 서사로만 봐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할런 코벤은 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수렴시키면서 10대 소년의 실종 외에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내기 위한 맛깔난 서사를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2년 전의 혹평의 이유를 새삼 추정하자면, 아마도 결과에만 너무 집착했던 속전속결 식 책읽기 탓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즉 연쇄살인범의 정체는 무엇이고, 10대 소년은 왜 사라졌으며, 두 사건은 어디서, 어떤 모양새로 만날 것인가, 라는 지엽적인 부분에만 신경 쓴 나머지 이야기 전반을 흐르는 큰 서사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홀드 타이트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다면,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제겐 별 3개 수준의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그 다음에 읽은 이나 영원히 사라지다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비판에 가까운 서평을 남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기를 기대하며(?) 조만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연이어 세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남겼던 걸 보면, 분명 할런 코벤은 제 코드와는 잘 안 맞는 작가로 보이긴 합니다.)

 

아무튼...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읽었을 때 상반된 느낌을 얻는 일이 장르물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낯설지만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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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 1 밀리언셀러 클럽 60
스콧 터로 지음, 한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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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들 군()의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던 검사 러스티는 동료 여검사 캐롤린이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오히려 용의자로 몰리고 맙니다.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때문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러스티는 한때 자신과 대결을 벌였던 변호사 스턴의 도움을 받아 무고함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러스티와 라이벌 관계였던 검사 니코와 몰토는 물증, 정황 증거, 목격자 등을 총동원하여 러스티를 강하게 압박합니다. ‘유부남인 에이스 검사의 불륜녀 살해라는 타이틀 덕분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지만 공판은 검사나 변호사는 물론 배심원들도 전혀 예상 못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캐롤린의 죽음에 관한 진짜 비밀이 차츰 그 진상을 드러냅니다.

 

한때 푹 빠질 정도로 법정 스릴러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무죄추정(1~2권을 합쳐) 660여 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이 페이지가 넘어간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의 걸출한 작품들을 연상시킬 만큼 정교한 짜임새, 적절한 선정성과 폭력성,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긴장감 등 완성도 높은 법정물의 미덕을 골고루 갖춘 덕분입니다.

 

스콧 터로의 문장은 거침없이 흐르는 거대한 강물처럼 느껴집니다. 사건의 배경과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소()에서는 묵직하고 도도하게 흐르다가,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법정, 즉 여울에 이르면 그야말로 잔혹한 전쟁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급하고 격하게 흐릅니다. 속도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독자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물론 주제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표현과 묘사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합니다. 특히 적당히 비틀고, 적당히 웃기고, 적절하게 비유를 끌어내면서 불필요한 사족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대단한 필력을 곳곳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는 번역 덕분이었습니다.

 

무죄추정의 재미를 배가시켜준 것은 거미줄처럼 얽힌 등장인물 간의 관계입니다. 우선, 배신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킨들의 정치판에 대한 묘사는 지독할 정도로 리얼합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정치적 갈등이 용서할 수 없는 혐오감으로 진화하는가 하면 추악한 욕망에다 이긴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로 똘똘 뭉친 악당들의 악의는 진실 같은 건 개나 주라는 식의 비정하고 살벌한 면모를 거듭 발산합니다. 그런 믿을 놈 하나 없는 개판의 한가운데 던져진 러스티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의심과 충돌, 타협과 화해 등 끔찍한 정치적 결정을 강요받습니다.

 

정치판보다 더 적나라한 묘사가 넘쳐나는 곳은 살해된 캐롤린과 주인공 러스티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불륜일지(?)와 그로 인해 해체 직전에 이른 러스티 부부의 갈등 장면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캐롤린을 향한 러스티의 금지된 욕망은 10대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과격하고 통제 불능한 상태로 묘사되고, 불륜이 폭로된 후 러스티가 아내 바바라와 갈등을 겪은 환란의 시기는 마치 독자가 그 상황을 직접 겪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표현됩니다. 살인범으로 몰린 에이스 검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법정물이지만, 중년 부부의 권태와 일탈에 대한 욕망, 그로 인한 치명적인 위기에 관해서도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덕분에 불륜 소설의 한 챕터를 읽는 재미도 함께 만끽할 수 있습니다.

 

법정물의 교과서 같은 미덕과 불륜 소설의 끈적끈적한 매력이 합쳐진 듯한 무죄추정은 진범을 찾고 누명을 벗는 본연의 서사 외에 사랑, 증오, 배신, 탐욕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노골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묘사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자가발전한 게 아닐까 의심됐던 과도한 감정묘사나 재판과정과 불륜관계 설명에 있어 거듭된 동어반복이 옥의 티처럼 느껴졌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 작품 전체의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후속작인 이노센트20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합니다. 주인공 러스티가 거의 60세가 다 된 시점이란 뜻인데, 과연 그가 어떤 모습으로 첫 페이지에 등장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더불어 품절된 사형판결은 러스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역시 킨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니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잘 짜인 법정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 읽어도 매력적인 장르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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