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콜렉터 30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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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 갇힌 채 생매장된 여자들의 시신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첫 피해자 잉에의 가족들은 의심받기에 충분한 여지들을 갖고 있지만 동기가 불분명합니다. 수시로 기억이 사라지는 증상을 겪는 에바는 관에 갇힌 채 생매장되는 악몽을 연이어 꾸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의 다음 희생자가 자신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듯한 빈민가의 여인 브리타는 개자식이라는 욕만 내뱉을 뿐 그저 범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 범인으로 보이는 익명의 남자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채 다음 사냥감인 파렴치한 년을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사이코패스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과 이혼의 상처를 지닌 형사 베른트가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띠 동갑 이상의 차이가 나는 여형사 유타와 분투합니다.

 


사건의 외양은 끔찍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베른트를 비롯한 쾰른 경찰서 강력계의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역시 딱히 누가 범인일까,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끝까지 불안감과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데, 그것은 심리 스릴러로 분류되는 이 작품만의 고유한 특징 때문입니다. 베른트 형사를 제외하고 모두 3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이끄는데, 작가는 사건 자체보다 이들이 겪는 극단적인 감정들, 즉 공포, 분노, 불안, 긴장을 묘사하는데 훨씬 더 많은 분량과 공을 들입니다.

 

뉴스 속 희생자들처럼 관에 갇혀 생매장되는 악몽에 시달리던 에바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 두려움의 날들을 보냅니다. 집안 곳곳에서 감지되는 낯선 기운은 그녀를 살얼음 같은 공포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빈민가 아파트에 사는 거리의 여자 브리타는 뉴스를 보자마자 범인을 눈치챕니다. 그 사건 탓에 어릴 적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된 브리타는 범인을 증오하면서도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전율합니다.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익명의 남자는 고통을 통해 파렴치함과 더러움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이코패스로, 궁극의 사냥감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쉴 새 없이 자가발전 시킵니다.

 

세 인물이 내뿜는 극단적인 감정들은 정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독자의 불안감을 증식시키고,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감정들을 갖게 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단서는 랜덤하게 던져지고,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는 쉽사리 접점을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런 심리 스릴러는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에 천착한 나머지 서사의 맥을 놓치거나 뜬구름 잡는 만연체의 지루함만 남길 수도 있지만, 작가는 사건과 심리를 정교하게 직조함으로써 제법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듭니다.

 

거의 후반부가 다 되도록 ?”라는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않던 작가는 느닷없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며 모든 비밀을 폭로합니다. 독자의 반응은 대체로 잠시 말문이 막히거나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 분명한데, 사실 작가의 한 방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작가가 날린 마지막 결정타는 끝내주는 반전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보다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참혹한 진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플래시처럼 터지면서 온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동시에, 어딘가 정말 그들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들이 겪은 오랜 고통은 누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걸까?, 라는 공허한 질문들이 입가에 맴도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 장을 덮게 됩니다. 그리고 맨 앞으로 돌아가 처음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었던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를 다시 한 번 읽으며 작가의 의도에 공감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소름 끼치는 광기의 싹이 잠자고 있다. 자신이 가진 가장 밝은 힘을 모두 쏟아 그것이 깨어나지 않게 노력하라!”

 

일부 아쉬움이 남는 대목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주인공인 형사 베른트의 캐릭터에 관한 것입니다. 아헨에서 쾰른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 그의 어두운 과거가 무척 궁금했는데, 일부 단서만 보였을 뿐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고, 전처와 사는 딸에 대한 애정이라든지 사이코패스를 상대하면서 느끼는 중압감에 대한 묘사는 조금은 뜬금없거나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서사와 문장 모두 가볍거나 깊이가 얕아 보이기도 했는데, ‘보다 먼저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 스크립트를 읽어보면 그것이 작가의 고유한 특징인지 이 작품의 스토리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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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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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지만 그의 주특기인 서술 트릭이 아니라 학교 폭력의 잔인함과 공포, 그리고 20년이 지나 벌어지는 무자비한 복수를 다룬 본격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양념처럼 기괴한 호러 분위기가 살짝 가미되어 있습니다.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이야기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20년 전인 1973,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3학년 A반에서 벌어진 잔혹한 집단 따돌림, 20년이 지나 당시 반장과 부반장에 의해 추진되는 불길한 예감의 동창회, 그리고 동창회를 통해 20년 동안 간직해온 고통을 고스란히 갚아주려는 한 인물의 계획 등 출판사 소개대로 현기증 나는 다중 플롯과 다중 해결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독자가 찾아야 하는 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20년 전 3학년 A반의 집단 따돌림을 주도했던 수수께끼의 인물을 찾아야합니다. 마치 CCTV처럼 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지켜보던 이 인물에게 낙인찍힌 학생과 교사는 그 즉시 반에서 고립됨과 동시에 얼마 못가 자살, 전학, 사직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둘째, 20년 만에 열리는 모교에서의 동창회를 이용하여 전원 몰살이라는 극단적인 복수극을 꿈꾸는 인물을 찾아야합니다. 오랜 시간 억지로 봉인했던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에서의 고통스런 기억이 해제되면서 이 인물은 평생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남긴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할 철저하고 촘촘한 계획을 세워나갑니다.

셋째,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학급명부와 살인계획서라는 메모를 소지한 채 교통사고를 당한 후 모든 기억을 잃은 탓에 혼란을 겪는 한 남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인물도 많고 사건도 여럿이다 보니 독자가 소화해야 할 정보 역시 그만큼 방대하고 복잡해집니다. 또 찾아야 할 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서 한시도 느슨하게 책장을 넘길 수 없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20년 전 아오바가오카 중학교를 지배하고 있던 다분히 호러적인 분위기는 미쓰다 신조나 오노 후유미 풍의 괴담을 연상시켜 더욱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사실 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쯤에 이르러 엔딩을 예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오리하라 이치가 설치해놓은 트릭 때문에 파격적인 반전과 연타로 폭로되는 진상들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이 방대한 분량을 빈틈없이 짜낸 작가의 필력에 여러 차례 놀라게 됩니다.

물론, 중간중간 조금은 무리한 설정들과 허술해 보이는 트릭도 눈에 띄긴 하지만, 작품 전체의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호러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트릭과 소품들 역시 그 자체의 사실감을 따지기보다는 공포가 지배하던 20년 전의 교실을 묘사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읽히지만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오리하라 이치의 문장들과 함께 학교괴담 + 복수극 + 미스터리라는 3종 세트를 한꺼번에 맛보고 싶다면 침묵의 교실이야말로 딱 맞아 떨어지는 텍스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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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르르르 - 제3-4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8
김민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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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든 문학이든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3~4ZA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크르르르에 실린 다섯 편의 중단편을 읽어보곤 좀비 이야기가 이렇게 확장될 수도 있구나, 라는 감탄과 함께 그동안 갖고 있던 편견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크르르르는 첫 수록작 엘리베이터 액션에서 좀비들의 신음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 좀비 이야기 다섯 편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독특한 제목입니다.

 

좀비가 점령한 대형마트에 잠입했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엘리베이터 액션), 비를 두려워하는 좀비와 대결하면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장마), 세상이 뒤바뀌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사냥꾼의 타깃이 된 좀비와 고가의 변종 좀비를 사냥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남자들의 치열한 대결(여름 좀비), 좀비의 습격으로 놀이공원 대관람차에 갇힌 일가족이 그간 쌓여온 갈등을 폭발시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 같은 비극(해피랜드), 좀비가 되어 가족까지 해쳤던 남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며 좀비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좀비, 눈뜨다) 등 다섯 편의 작품 모두 기발하고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좀비 이야기에 취향이 아닌 독자들도 쉽게 빠져들 만한 소재와 스토리,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구성과 전개, 정말 좀비의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실감 있는 캐릭터 등 웰메이드 장르물의 미덕을 모두 갖춘 작품들이라 좀비를 소재로 한 영상물이 득세하고 있는 미국에서라면 원작으로 탐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여름 좀비좀비, 눈뜨다는 그런 면에서 강점을 가진 작품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장 많은 분량의 중편 장마가 비슷한 상황들의 반복과 조금은 헐거워 보이는 미스터리 구조 때문에 지루하게 읽혔다는 점 정도입니다.

 

외국 괴물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니아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좀비지만 이만한 개성과 상상력, 그리고 확장성을 이어갈 수 있다면 언젠가는 주류 장르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약간의 불편함과 거북함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좀비 장르에 대한 편견을 지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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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진구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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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현호의 유산을 놓고 세 자매가 말 그대로 콩가루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상속자 중 하나인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산상속전은 장녀+차녀+맏사위 막내 사위 젊은 새어머니3파전의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아내를 잃은 막내 사위가 진구를 영입하며 선전포고를 날리자 장녀 팀은 고진 변호사를 끌어들여 맞불을 놓았고, 급기야는 서로에게 막내를 살해한 혐의를 씌워 상속권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 와중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젊은 새어머니에 대한 협공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고진과 진구는 경쟁하는 듯, 협조하는 듯 남씨 집안의 비밀을 캐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불륜, 간통, 출생의 비밀, 낙태, 살인 등 갖가지 추악한 막장들을 발견합니다.

 


유산상속전과 살인사건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도진기의 명품 캐릭터인 고진과 진구가 맞대결을 벌인다는 점 때문에 그들이 등장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실제 법정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어두운 뒷골목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변호사 고진과 포커페이스에 냉정함까지 갖췄지만 어딘가 우수 어린 느낌을 주는 탐정 진구. 각자가 주인공을 맡은 시리즈를 통해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두 인물의 정면대결은 도진기의 팬들에겐 더없이 흥분을 자아내는 선물임에 분명합니다.

 

유산상속전에 뛰어든 남씨 가족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만 있다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 있어?”라는 극단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먼 돈을 위해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탐욕으로 치장한 거짓말쟁이들 같아서 유산상속전에서 누가 이겨도 독자 입장에선 찜찜한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안 그래도 인간 말종 같은 의뢰인들에게 고용된 것도 당혹스러운데 고진과 진구를 승자와 패자로 갈라야 한다는 것도 왠지 불편해 보입니다. 독자는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결론이 날지 너무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상속전의 승패를 결정할 막내의 죽음의 진상 역시 만만찮은 트릭으로 포장돼있습니다. 정말 사고인지, 계획된 살인인지 작가는 끝까지 독자의 판단을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마치 유쾌한 쇼를 연출하듯 고진과 진구의 추리 대결을 풀어놓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러니 또는 역설입니다. 우선 콩가루 집안의 유산상속전을 다루면서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점이 그렇고, 승부는 결정됐지만 누구도 이겼거나 졌다고 할 수 없는,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서 악()이 응징되는 엔딩 역시 역설 그 자체입니다. 결국 누가 이겨도 찜찜할 것 같던 유산상속전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해결되고, 고진과 진구의 대결 역시 제대로 된 맞수란 이런 것을 보여주며 유쾌하게 마무리됩니다. 동시에 이들의 다음 승부를 예고하는 작가의 대형 떡밥도 투척됩니다.

 

출판사에서는 진구 시리즈(‘순서의 문제’ - ‘나를 아는 남자’ - ‘가족의 탄생’)를 순서에 무관하게 읽어도 괜찮다고 설명했고 실제로도 큰 무리 없이 읽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곳곳에 달린 (앞선 작품들을 참조하라는 의미의) 각주를 보면 아무래도 가족의 탄생의 참맛은 전작들을 읽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이 작품이 지난 해(2014) 여름에 출간된 유다의 별이후 집필됐다는 사실인데, 물론 미리 준비는 했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작품을 탈고했다는 점이나 진구의 과거를 다룬 작품이 이미 집필이 끝났다는 작가 후기를 읽어 보니 도진기의 왕성한 집필력에 그야말로 입이 벌어질 따름입니다.

다만, 너무 집필에 속도를 낸 탓인지, 아니면 출판사가 출간을 서두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탄생에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타가 많습니다. 심지어 인물의 이름을 뒤바꿔 쓴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내용만 놓고 보면 별 5개 이상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오타의 문제는 옥의 티라고 하기엔 무척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번역서도 아니고, 초짜 출판사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족의 탄생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이 작품의 메인 줄거리와는 무관한 내용인데, 말하자면 고진과 진구가 또 다시 얽히게 될 작품에 관한 예고편입니다. 특히 그 상대가 정신자살이후 고진의 평생의 숙적으로 설정된 이탁오 박사이고, 그와의 대결에 진구가 연루됐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독자의 기대감을 도발합니다. 다음에 출간될 도진기의 작품이 진구의 과거사 이야기가 될지, ‘고진-진구 연합군 이탁오 박사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든 출간이 기다려지고 그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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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 아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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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이블 아이를 포함하여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수십 년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네 번째 아내가 됐지만, 악마처럼 변해버린 남자에게 예속된 채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사는 여자(‘이블 아이’) 외에, 스토킹, 존속살해, 소아성추행을 소재삼아 부부, 연인, 부모-자식, 친족 등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공포와 비극을 묘사한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장르로 따지면 공포나 호러로 분류되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공포나 호러와는 조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인데, 대놓고 무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에 가까운, 그런 독특한 느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잘못된 사랑이 이끌어내는 공포”, “트라우마를 안은 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애정으로 얽힌 관계가 상처를 주고 공포를 자아내는 관계로 변질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남긴다는 서사는 네 편의 수록작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이며, 독자에겐 뒤늦게 천천히 젖어드는 무서움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표지 뒷면의 사랑과 관계의 왜곡, 그것이 불러오는 파멸에 대한 이야기라는 카피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린 사랑은 단순히 엇나가는 게 아니라 폭발하고 독을 옮기고 고문하고 죽인다.”는 외국의 한줄 평은 이 작품이 그린 가까운 관계에서 파생된 비극을 잘 요약한 문장들입니다.

 

작가는 네 수록작 모두 공포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여자로 설정했는데, 소위 가까운 관계라는 것이 대부분 권위적인 남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의도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글은 네 수록작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공통점을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여자들은 '이블 아이(악마의 눈)' 같은 존재의 남자에게 위로를 찾고 영혼을 기댄다. 그러나 강한 남자들은 약한 여자들을 지배하고 위협하고, 이내 여자들은 겁먹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예속을 원한다.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일까, 아니면 악의 공범자일까.”

 

사실, 설정이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새롭거나 파격적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소재나 이야기도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반전보다는 묵직하되 정직한 전개가 눈에 띄는데, 그래서인지 브람스토커 상을 2(1996좀비’, 2011악몽’)나 수상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욕심만큼 충족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쉽고 평이한 문장에 담긴 현실적인 공포와 인간 내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덕분에 처음 만난 대작가의 필력을 미량이나마 맛볼 수 있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제대로 된 공포를 기대한 독자에겐 좀 심심한 여운을 남길 수 있고, 저처럼 작가의 명성을 기대하며 첫 만남을 가진 독자에겐 물음표와 함께 어중간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들로부터 극단적인 평을 받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좀비를 먼저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블 아이로 맛보기를 끝냈으니, 머잖아 메인 요리인 좀비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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