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족의 탄생 ㅣ 진구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5년 3월
평점 :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현호의 유산을 놓고 세 자매가 말 그대로 콩가루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상속자 중 하나인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산상속전은 ‘장녀+차녀+맏사위 對 막내 사위 對 젊은 새어머니’의 3파전의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아내를 잃은 막내 사위가 진구를 영입하며 선전포고를 날리자 장녀 팀은 고진 변호사를 끌어들여 맞불을 놓았고, 급기야는 서로에게 막내를 살해한 혐의를 씌워 상속권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 와중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젊은 새어머니에 대한 협공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고진과 진구는 경쟁하는 듯, 협조하는 듯 남씨 집안의 비밀을 캐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불륜, 간통, 출생의 비밀, 낙태, 살인 등 갖가지 추악한 막장들을 발견합니다.

유산상속전과 살인사건 미스터리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도진기의 명품 캐릭터인 고진과 진구가 맞대결을 벌인다는 점 때문에 그들이 등장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실제 법정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어두운 뒷골목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변호사 고진과 포커페이스에 냉정함까지 갖췄지만 어딘가 우수 어린 느낌을 주는 탐정 진구. 각자가 주인공을 맡은 시리즈를 통해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두 인물의 정면대결은 도진기의 팬들에겐 더없이 흥분을 자아내는 선물임에 분명합니다.
유산상속전에 뛰어든 남씨 가족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만 있다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 있어?”라는 극단적인 가치관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먼 돈을 위해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탐욕으로 치장한 거짓말쟁이들 같아서 유산상속전에서 누가 이겨도 독자 입장에선 찜찜한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안 그래도 인간 말종 같은 의뢰인들에게 고용된 것도 당혹스러운데 고진과 진구를 승자와 패자로 갈라야 한다는 것도 왠지 불편해 보입니다. 독자는 이런 난감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결론이 날지 너무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상속전의 승패를 결정할 막내의 죽음의 진상 역시 만만찮은 트릭으로 포장돼있습니다. 정말 사고인지, 계획된 살인인지 작가는 끝까지 독자의 판단을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마치 유쾌한 쇼를 연출하듯 고진과 진구의 추리 대결을 풀어놓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러니 또는 역설입니다. 우선 ‘콩가루 집안의 유산상속전’을 다루면서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붙인 점이 그렇고, 승부는 결정됐지만 누구도 이겼거나 졌다고 할 수 없는,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서 악(惡)이 응징되는 엔딩 역시 역설 그 자체입니다. 결국 누가 이겨도 찜찜할 것 같던 유산상속전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해결되고, 고진과 진구의 대결 역시 ‘제대로 된 맞수란 이런 것’을 보여주며 유쾌하게 마무리됩니다. 동시에 이들의 다음 승부를 예고하는 작가의 대형 떡밥도 투척됩니다.
출판사에서는 진구 시리즈(‘순서의 문제’ - ‘나를 아는 남자’ - ‘가족의 탄생’)를 순서에 무관하게 읽어도 괜찮다고 설명했고 실제로도 큰 무리 없이 읽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곳곳에 달린 (앞선 작품들을 참조하라는 의미의) 각주를 보면 아무래도 ‘가족의 탄생’의 참맛은 전작들을 읽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이 작품이 지난 해(2014년) 여름에 출간된 ‘유다의 별’ 이후 집필됐다는 사실인데, 물론 미리 준비는 했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작품을 탈고했다는 점이나 진구의 과거를 다룬 작품이 이미 집필이 끝났다는 작가 후기를 읽어 보니 도진기의 왕성한 집필력에 그야말로 입이 벌어질 따름입니다.
다만, 너무 집필에 속도를 낸 탓인지, 아니면 출판사가 출간을 서두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탄생’에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타가 많습니다. 심지어 인물의 이름을 뒤바꿔 쓴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내용만 놓고 보면 별 5개 이상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오타의 문제는 옥의 티라고 하기엔 무척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번역서도 아니고, 초짜 출판사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족의 탄생’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이 작품의 메인 줄거리와는 무관한 내용인데, 말하자면 고진과 진구가 또 다시 얽히게 될 작품에 관한 예고편입니다. 특히 그 상대가 ‘정신자살’ 이후 고진의 평생의 숙적으로 설정된 이탁오 박사이고, 그와의 대결에 진구가 연루됐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독자의 기대감을 도발합니다. 다음에 출간될 도진기의 작품이 진구의 과거사 이야기가 될지, ‘고진-진구 연합군 對 이탁오 박사’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든 출간이 기다려지고 그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