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명탐정 사건기록부
오카모토 기도.노무라 고도.히사오 주란 지음, 김혜인.고경옥.부윤아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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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당대 명탐정들의 체포록 모음집입니다. 노무라 고도(1882~1963)제니가타 헤이지 체포록’, 오카모토 기도(1872~1939)한시치 체포록’, 그리고 히사오 주란(1902~1957)아고주로 체포록등인데, 이중 작가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고 자극을 받아 썼다는 한시치 체포록은 귀에 익을 정도로 그 명성을 자주 들어봤지만 실제 작품으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00% 아날로그 수사법에 의존해야 했던 시대지만, 범죄의 양상과 흉포함은 현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보니 당시 탐정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탐문과 증거수집 외에는 우연과 기적밖에 바랄 수 없는 열악한 현실에서 세 명의 탐정은 빛나는 추리와 타고난 직감으로 난해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엽전 날리기의 명수이자 쇼군의 신임을 얻은 제니가타 헤이지는 주술의 제물이 되는 여인들, 사이코패스에게 살해당하는 여인들, 인신매매의 희생자 등 모두 여자를 대상으로 한 참혹한 범죄를 수사합니다.

노년에 이른 한시치가 누군가에게 과거의 무용담을 들려주는 형식을 가진 한시치 체포록은 그 시작은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의 오프닝 같지만, 거기에 담긴 사건의 내용은 치정에 얽힌 비극, 괴담에 가까운 불가해한 사건 등 복잡하고 끔찍할 뿐입니다.

거대한 턱을 지닌 외모로 유명한 아고주로는 게으른 4차원 캐릭터처럼 보이다가도 정작 사건에 뛰어들면 날카로운 추리와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현대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당시 명탐정들의 아날로그식 수사가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도 있고, 특히 직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대목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묻지마 직감 수사가 등장하는데, 한두 군데 외엔 크게 거북하진 않습니다) 또 워낙 짧은 단편 9편으로 구성돼있어서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재미있어질 만하면 끝나버리는 분량의 아쉬움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 탐정의 활약은 결코 촌스럽지도 않고, 요행수를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집요함과 추리에 있어서는 현대의 명탐정에 못잖은 기량을 선보입니다. 짧은 분량의 문제는 어쩔 수 없지만, 대신 작가 한 명당 세 편의 작품을 맛볼 수 있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으면 될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의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나 셜록 홈즈와 동시대를 살아간 에도 시대 명탐정의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들에겐 짧지만 흥미 있는 책읽기의 시간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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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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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룻밤 사이 수많은 꿈을 동시에 꾼, 그것도 서로 뒤엉켜 원형을 잃어버린 꿈들을 한꺼번에 꾼 느낌입니다. 아직 국내에 출간된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절반도 채 못 읽었지만, 지금까지 읽을 작품 중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작품입니다.

() 시리즈 단편집이라는 별칭처럼 장르와 소재는 제각각이고, 어떤 일관성 있는 테마로 엮이지도 않았습니다. 3페이지 남짓한 엽편부터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연작 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수록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의 주특기인 현실과 판타지의 기묘한 버무림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현실감 있게 흐르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판타지로 넘어가는가 하면, 판타지려니 하고 읽다 보면 어느새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는 몇몇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수록된 작품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볼 수 있는데, 추억의 도시가 배경인 친구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타이베이 소야곡’, ‘화성의 운하’), 기존 작품에 실렸던 에피소드의 뒷이야기를 다룬 작품(‘변심’, ‘변명’), 미니멈급 미스터리의 알싸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변심’, ‘오해’), 개와 고양이가 주조연을 맡은 판타지(‘충고’, ‘협력’, ‘이유’), 오래 전의 인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그린 이야기(‘나와 춤을’, ‘둘이서 차를’) 등입니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온다 리쿠 본인이 일상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특별한 향수를 남겨준 여행이나 단골 카페에서 본 소소한 일상들, 또는 존경하거나 좋아했던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도 있고, 심지어 꿈속에서 들은 대화를 기록해놓았다가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든 첫 느낌은, 어쩌면 판타지는 늘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우리를 지켜보거나 우리가 찾아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 변화하는 날씨와 계절, 내 책상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 따위는 교육과 상식을 통해 획일화된 눈을 가진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하찮은 풍경에 불과하지만, 온다 리쿠는 어딘가 비뚤어지거나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눈을 통해 그 안에서 판타지를 엮어낸 것이 아닐까요?

 

모든 단편집이 그렇듯, 독자마다 제대로 꽂히는 작품은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수록된 19편 모두에게 만족감과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변심’, ‘소녀계 만다라’, ‘화성의 운하’, ‘둘이서 차를’, ‘나와 춤을이 온다 리쿠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게 해준 작품들이었습니다.

 

온다 리쿠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입니다. 나름 온다 리쿠 팬이라고 자처하는 저도 일부 작품에선 뭐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그녀가 창조해낸 몇몇 이야기에는 전혀 녹아들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작품이라고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아마 이 작품으로 온다 리쿠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약간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편 모두 조금씩은 온다 리쿠만의 개성이 투영됐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녀의 세계로 들어서는 관문으론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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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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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해 놓았지만, ‘허즈번드 시크릿은 마크 해던의 빨간 집이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처럼 가족에게 닥친 불행, 가족으로부터 가해진 상처, 가족을 향한 분노를 다룬 비() 장르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제목대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축은 남편의 비밀이고 미스터리 코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장르물의 훌륭한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소중한 딸이 살해당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절망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력한 용의자 코너를 눈앞에서 매일 마주해야 하는 레이첼 크롤리, 우연히 발견한 남편 존 폴의 편지 한 통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이 잿더미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세실리아 피츠패트릭, 쌍둥이나 다름없는 펠리시티와 남편 윌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불륜 고백을 듣곤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게 된 테스 올리리 등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편이 7일 동안 겪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입니다.

 

딸을 앞서 보내고 이제 아들과 손자까지 멀리 떠나보내야 될 노인의 구원(舊怨)과 상심,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덕분에 남편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아내의 갈등, 남편의 불륜에 증오심으로 맞대응하면서도 어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아내의 혼란, 그리고 고부간, 형제간, 부모자식간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쏟아내는 관심, 애정, 의심, 증오, 시기, 질투 등 그야말로 가족을 둘러싸고 품을 수 있는 모든 극단적인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이 작품이 추리/미스터리로 분류된 것은 세실리아가 연 판도라의 상자 속 남편의 비밀 때문인데, 이 비밀이 초반부에 일찌감치 폭로되면서 이야기는 알게 된 비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어떻게 해도 가족의 붕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세실리아의 고뇌와 이미 붕괴된 가족을 30년 가까이 겨우겨우 지탱해 온 레이첼의 상처는 뛰어난 장르물 못잖은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엔딩에 대한 궁금함과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훨씬 더 강력해집니다. 또한 남편의 불륜에 항거하는 테스의 이야기는 보조축이면서도 불륜뿐 아니라 중년부부가 맞이할 수 있는 정서적 위기를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어서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세 가족을 몰아넣은 작가가 어떤 엔딩을 택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작위적인 비극으로 끝나도 실망스러울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작가는 한편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엔딩을, 한편으론 전혀 예상 못 한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위기의 날들을 보낸 세 가족에게 어김없이 새날이 밝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독자는 이라고 인쇄된 페이지 너머에서 새롭게 시작될,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행복과 불행, 믿음과 불신이 불안하게 공존할 그들의 남은 삶을 그저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첫 페이지의 제사(題詞)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비로소 확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상황을 다룬 작품이든 중심 테마에 가족의~’ 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선입관이 떠오르게 되는데, 하나는 좀 뻔하고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이고, 묵직하고, 그래서 후유증이 길게 남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허즈번드 시크릿은 첫 선입관 때문에 잠시 선택을 미뤘다가 결국 읽고 나서 두 번째 선입관이 맞아든 것을 경험한 특별한 작품입니다. 가족에게 가해진 온갖 끔찍한 상처들을 들여다본 탓에 마음은 무겁지만, 농밀한 묘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재미있게 읽은 것도 사실입니다.

 

리안 모리아티가 자주 만나기 힘든 호주 작가이기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가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역시 판타지적 재미를 넘어 가족의 소중함, 결혼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작품이라는 걸 보면 아마도 허즈번드 시크릿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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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박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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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세 번째 장편입니다. 작년에 읽은 그녀의 첫 장편 퍼펙트 블루와 마찬가지로 신인 시절의 풋풋함과 초기작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은 참혹하고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사이즈로 보면 큰 규모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연쇄토막살인, 소년범의 양형 문제, 개인의 복수 등 다양한 코드들이 녹아있고, 보조축이긴 하지만 1945년 도쿄 대공습의 트라우마도 바탕에 깔려있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읽을거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도 이 작품을 초기 대표작이자,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고 언급했는데, 독자에 따라 초기 대표작이라는 표현에는 찬반이 갈릴 수도 있지만, 미미 여사의 팬이라면 미야베 월드의 원형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관한 소개글을 인용해보면...

 

“(이야기의 주 무대인 도쿄 시타마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얼간이와 같은 시대소설의 무대이자 이유솔로몬의 위증의 사건 현장이다. 또한 중학생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솔로몬의 위증을 떠올리게 만들며, 토막 살인을 저지르며 경찰을 농락하는 범인들의 행각에서는 모방범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모우 저택 사건에서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1945년 도쿄 대공습은 형사의 아이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도쿄 시타마치의 경우 미미 여사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면서 동시에 도쿄의 두 얼굴 - 현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여러 작품 속에 주 무대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좀더 맛깔나고 색다른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미미 여사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 덕분에 형사의 아이는 참혹한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편의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엄하면서도 믿음과 애정을 감추지 않는 형사 아버지 미치오와 손자를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13세 소년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가정부 하나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가족이자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가는 어른으로서 13세 소년 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인물들입니다.

 

다만, 거장이 된 미미 여사의 대표작들을 떠올리며 큰 기대를 가진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심심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이어 발견되는 토막 난 사체들의 미스터리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요소지만, 사건의 계기와 진상, 그리고 그것들이 밝혀지는 과정은 나이브하면서도 비약에 의존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형사의 아이, 즉 형사를 아버지로 둔 13살 소년이 이야기를 이끄는데다, 결정적인 단서들이 획득되는 과정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행운과 우연에 기댄 경우가 많고, 막판에 설명되는 사건의 전모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들 때문인지, “여기서 미유베 미유키의 모든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소개글은 조금은 과장된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형사의 아이는 여러 면에서 미미 여사 본인의 프리퀄 같은 작품인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의미에서 거장의 초기작을 뒤늦게 읽으면서 그녀의 작품 세계가 구축되어 온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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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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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에 이은 오슬로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엘렌 3부작, 또는 프린스 3부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해리의 동료였던 엘렌의 피살 사건과 무자비한 살인범 프린스를 쫓는 이야기가

주축 스토리 - 악마의 별을 닮은 붉은 다이아몬드가 개입된 연쇄살인사건 에 못잖게

중요하고 무게감 있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엘렌 사건으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된 해리의 참담한 모습과

그로 인해 파국에 이른 연인 라켈과의 관계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서사는 언뜻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몸통처럼 엮여 있는데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경찰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는 엉망진창의 해리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난제들입니다.

 

● ● ●

 

알코올중독, 무단결근, 명령 불복종 등 무수한 사유로 해고 직전에 이른 해리 홀레는

차세대 경찰 리더인 톰 볼레르와 함께 기이한 여성 연쇄살인사건에 투입됩니다.

깨끗한 한 발의 총상, 잘린 손가락, 현장에 남겨진 붉은 다이아몬드,

그리고 연쇄살인의 특징인 성폭행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사체 등

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동기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해리와 볼레르를 비롯한 경찰에게 미궁만 산더미처럼 남겨놓습니다.

 

가까스로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는데 성공하지만,

사건은 해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오히려 해리는 경찰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해리는 이번 연쇄살인사건의 큰 그림 속에

엘렌 살해범 프린스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것을 알아내게 됩니다.

 

● ● ●

 

그동안 읽은 해리 홀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데빌스 스타입니다.

분명 사건이 있고, 그것을 파헤치는 스릴러의 기본 서사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요 네스뵈 스스로도 해리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언급했듯이

알코올에 찌들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할 정도로 폐인이 된

해리의 삶의 밑바닥을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눈앞의 범인은 잡지 못하고, 조직과 연인에게 버림받은 채

과도한 알코올과 치사량의 수면제에 의존하는 해리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마치 그의 고통이 전염돼오는 듯한 느낌까지 전해줍니다.

 

그래서인지 해리가 정면으로 마주친 연쇄살인사건은

두툼한 분량이나 난해한 해결과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입니다.

물론 사랑과 질투,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이 바탕에 깔려있고,

신비한 악마의 기운, 파헤칠수록 꼬일 뿐인 복잡한 암호가 개입돼있으며,

동기와 단서는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기이한 연쇄살인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한치 앞도 예상 못할 정도로 긴장감 있게 전개됩니다.

의외의 범인, 의외의 동기,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데,

요 네스뵈는 거기에 덧붙여 이 사건의 진상 속에 해리의 절실한 숙제,

즉 엘렌 살해사건의 실마리를 얹어놓음으로써 후반부의 폭발적인 전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데빌스 스타의 아쉬운 점을 한 가지만 꼽자면 과다하게 제공되는 정보입니다.

요 네스뵈는 단역부터 조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

인구사회학적(?) 정보와 과거사를 꼼꼼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간혹 없어도 무방하거나 이야기의 핵심에서 벗어난 과다한 정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비교설명이라든가, 암호해독에 관한 설명,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붉은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악령의 상징에 관한 설명 등도

적절한 분량 이상으로 할애되고 있어 약간은 지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요 네스뵈 스스로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고 공언했던 네메시스

빈틈없는 구성과 속도감, 긴장감으로 중무장한 진짜 스릴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데빌스 스타가 받는 불이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렌 살해사건을 마무리 짓고 조직과 연인의 품으로 돌아간 해리 홀레의 다음 행보는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리디머(The Redeemer)’를 거쳐 스노우맨에 이릅니다.

그 이후 다시 망가진 해리가 경찰을 떠났다가 복귀하여 겪는 사건이 레오파드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해리 홀레 같은 진폭이 큰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불행이나 저주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드브레스트부터 시작되어 해리 홀레의 어깨를 짓누르던 짐들은 사라졌지만,

스노우맨과 마주치기 전 그가 리디머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어떤 색깔, 어떤 모양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레드브레스트이전 작품인 바퀴벌레(Cockroaches)’도 아직 미출간 상태지만,

개인적으로는 리디머가 빠른 시일 안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바로 데빌스 스타를 읽어도 맥락 따라잡기엔 큰 문제가 없지만,

아직 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해리의 사연이나 감정, 엘렌 사건의 전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데빌스 스타전에 두 작품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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